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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 교과서 새로 써야 한다 (서희건)

알캥이 | 2012.04.25 11:42 | 조회 6760

국사 교과서 새로 써야 한다


86년 당시 조선일보 편집국 문화부 차장
현 조선일보 논설위원 겸 사사편찬실 위원

서희건(徐熙乾)

(조선일보에서 1986년 8월15일부터 11회 연재한 기사입니다.)


이미 과거가 된 기사를 굳이 이 시점에서 다시 살피는 이유는 지금도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과거의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 후손들에게 역사적 진실을 가르치기 위해서, 우리 모두 가야할 길이 멀다는 것을 느낀다. 민족사학자 단재 신채호는 이렇게 말했다.
"민족이 살고 죽기는 역사에 달려 있다."

1. 日의 '역사 왜곡' 이길 고대사 교육 시급

우리나라 현행 초·중·고교 국사 교과서에는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시조와 건국연대가 없다. 멸망 연대만이 나와 있다. 고구려의 동명성왕, 백제의 온조왕, 신라의 박혁거세가 사라진 것이다. 중·고교 국사 교과서 부록 '역대왕조계보'에는 [고구려 ?~668] [백제 ?~660] [신라 ?~935]로 건국연대 없이 멸망의 연대만 밝히고 있다.

국사 교과서 본문에서 사라진 삼국의 시조들은 이 부록에 흔적만을 남기고 있다. 생존 연대나 재위 연한도 없이 이름만 내보이고 있다. 실존인물이 아닌 전설로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삼국의 시조만 사라진 것이 아니다. 고구려에서는 유리왕·대무신왕·민중왕·모본왕 등 5대왕이 전설로 파묻히고 태조왕(53~146)부터 재위연대가 있는 실존인물로 등장한다. 그리고 2세기초 태조왕이 고구려의 왕국기반을 닦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백제는 고이왕(234~286)부터 실존인물로 나온다. 다루왕·기루왕·개루왕·초고왕·구수왕·사반왕 등 7대 왕이 역사적 존재가 아니다.

신라에서 드러나는 실존 임금은 내물왕(356~402)이다. 현행 중·고교 국사의 부록 왕계에는 왕의 칭호도 붙이지 않았다. 왕의 칭호는 지증왕 (500~514)부터 나온다.

그러나 우리 사서인 <삼국사기>에는 삼국의 건국연대와 왕대가 자세하게 나온다. 고구려의 태조는 6대왕이고 백제의 고이왕은 8대왕이다. 신라의 내물왕은 17대왕, 지증왕은 22대왕이다.

신라에서는 시조와 남해·유리·탈해·파사·지마·일성·아달라·벌휴· 나해·조분·첨해·미추·유례·기림·흘해 등 16대 왕이 전설의 인물이 된 것이다. 가야금 토우를 출토한 미추왕릉이나 <일본서기>에 나오는 아달라왕이 실존인물이 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40대 이상이 배운 54년 발행 국민학교 국정 교과서의 고대사(고조선~ 통일신라) 분량은 본문 170쪽 중 73쪽으로 43%를 차지하고 있다. 반면 현행 국민학교 6-2 사회에 나오는 국사는 176쪽 가운데 고대사가 42쪽으로 불과 23%의 비중이다. 교과서가 여러차례 개정되며 고대사는 축소되고 <삼국사기>,<삼국유사> 등 우리나라 사서에 있는 사실마저 자취를 감춘 것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기준으로 현행 교과서와 비교하면 고구려가 90년, 백제는 2백52년, 신라는 4백13년의 역사가 행방불명 된 셈이다.

2. 당시 학자들 '<삼국사기> 믿을수 없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건국연대와 시조를 비롯한 한국 고대사가사 교과서에서 빠지고 축소된 까닭은 무엇인가. <조선일보>가 입수한 63년도 문교부 자료 '국사교육내용의 통일'에서 그 이유가 드러난다.

63년 5월부터 문교부의 위촉을 받은 28명의 국사학자와 국사담당 교사들은 12차례 회의를 갖고 다음과 같은 세부지침을 세웠다.

  1. 단군 : 단군은 민족신화로 취급한다.
  2. 기자 ·위만조선 : 사실(史實)은 고조선에 포함 취급하되 '기자', '한씨','개아지', '위만', '위씨' 조선 등 용어는 쓰지 않는다. 기자동래(東來) 기자운운은 교과서에 하지 않는다.
    ...(중략)...
  3. 삼국의 건국 및 건국연대 :
    ① 주몽 ·온조 ·박혁거세는 부족사회에서 다루고
    ② 사료에 기록되어 있는 건국연대(BC 57,37,18)는 표시하지 않으며,
    ③ 삼국이 고대국가로서 발전한 것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순으로 하고,
    ④ 삼국이 고대국가로서 발전하기 시작한 때는 태조왕 ·고이왕 ·내물왕때부터
    또는 몇 세기 부터라고 한다.

국사교육내용통일위원들은 '건국연대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것이 믿을 만한 것이 못되며, 고대국가의 성격을 정의한 사학계에서는 BC 57,37,18년설을 부인하고 있다'는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삼국의 시조를 삭제한 데 대해서는 '대부분의 교과서(당시는 검인정 시대였음)에 언급돼 있는데, 학생들에게 우리나라의 건국시조가 여러사람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고 이유를 달았다.

중 ·고교 국사가 검인정 시대이던 당시 국사교육을 통일하기 위해 마련한 이 지침은 지켜지지 않았다. 이전부터 이병도 저 <고등학교 국사> 등 일부는 이 지침대로 삼국의 건국연대 등 고대사가 빠졌으나 김상기 저 <고등국사>는 이 지침을 무시, 삼국초기 역사를 그대로 실었다.

실패한 문교부의 이 지침은 74년 국정 교과서로 개편하면서 일률적으로 적용되었다. 그러나 63년 통일안의 내용이나 74년 개편 교과서가 보여주는 것은 민족사의 뿌리라 할 고대사를 연구하여 보완하기보다 오히려 축소 ·말소하는 결과만 빚고 말았다.

이 같은 입장은 아직도 우리 학계에 남아 있다.

원로 사학자 이기백 교수(한림대)는 '고구려,백제,신라의 건국신화에 역사적 요소가 담긴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신화일뿐 역사가 될수 없다. 따라서 이들 내용을 교과서에 수록하는 것은 학생들에게 역사를 단지 얘깃거리로 착각하게 할 우려가 있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학자, 교사들은 '삼국사기불신론'을 교과서에 반영한 것은 일제 식민사관의 잔재를 무비판적으로 답습한 결과이며, 광복후 고고학적 발굴성과를 도외시한 처사라고 비판하고 있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의 신빙성 문제는 현재 고대 사학계에서 최대쟁점중의 하나가 되고 있다. '학문의 과학성'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여전히 '불신론'을 고집하고 있으며, 젊은 학자들이나 고고학계에서는 많은 수가 '긍정론'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이 '긍정론'쪽으로 기울었고 이에 따라 고대국가 형성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는 것이 최근 경향이다.

3.日총독 "조선인은 조선사 모르게 하라"

한국의 일반인들이 국사를 배운 것은 광복 후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3백여 년 전인 1670년 <동몽선습(童蒙先習)>이 간행되어 서당의 교재로 사용되면서 학동들이 윤리와 함께 국조 단군과 고대사 삼국사를 배웠다. 천자문을 뗀 다음에 배운 기초 교과서였다. 조선말 근대 교육제도가 도입되며 대한제국 학부가 펴낸 최초의 교과서도 역사, 지리를 포함한 <국민소학독본>이었고 두번째 나온 것이 <조선역사(1895년)>였다.

한국을 강제 병탄한 일제가 서당에서의 <동몽선습>강의를 금지한 1915년까지 단군조선으로 시작되는 조선사를 배웠다. 일제가 학교 교육을 통해 일본 역사를 가르쳐 우리 국사 교육은 단절되었지만 광복후 많은 국사 교과서가 나와 국사 교육도 광복되었다. 이 때 단군도 되살아났고 삼국의 시조도 국민들이 배운 것이다.

그런데 현행 교과서에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 한국 고사서의 초기 기록은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는다며 빼버린 것이다.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학문적으로 분석, 비과학적인 증거를 구체적으로 논증한 한국 사학자의 논문은 별로 없다. 거의가 일본 학자들이 일본 고대사를 끌어 올리기 위해 상대적으로 말살한 한국 고대사 왜곡 논문을 비판없이 답습하고 있다는 비판이 최근 학계에서 거세게 일고 있다.

고려대 김정배 교수(한국사)는 '우리의 선배들 중 일부가 일제 사학을 연구 사료로 수용하여 이런 혼란이 일고 있다'고 비판했다. 같은 대학 최재석 교수(사회학)는 '일인 학자들의 왜곡된 주장이 광복 40여년을 넘도록 우리 국사 교과서에 버젓이 실리는 것은 식민사관에 대한 우리 학자들의 비판 연구가 철저하지 못했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일제 식민사학의 정체는 무엇인가.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방대한 <조선사>는 한국인들이 독자적으로 쓴 것이 아니라 일본 식민 학자들이 만든 것이다. 일본의 식민사관은 한국을 침탈하기 이전에 준비됐다. 그 정체를 밝혀주는 자료가 일본인들이 조선사를 편찬하여, 그들끼리 업적을 자랑하기 위해 만든 <조선사편수사업개요>에서 드러난다.

"일·한 합방이 된 이 마당에 조선인에게 그들의 역사를 읽게 한다면 그들로 하여금 옛날을 생각하게 하여 독립국 시대의 舊夢에 빠지게 할 우려가 있다고 하나 조선에는 자고로 사적이 많으며 조선인은 예로부터 독서와 작문력이 있어 결코 문명인에 뒤떨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문화민족을 무지몽매의 영역에까지 억압한다는 것은 오늘날의 문명 세태에서 불가능하다.

그런데 고래의 사서는 현대(합방후)와 관계없는 것이기 때문에 독립시대의 옛꿈에 빠지게 할 폐단이 있고 신작들은 日·淸, 日·露간의 세력 경쟁을 서술하여 조선이 나갈 방향을 제시하는 등 그 사서들이 심히 고혹케 한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그들의 역사를 못 읽도록 절멸하는 것은 오히려 비밀리에 이를 전파하는 역효과가 날 뿐이다.그러니 차라리 이러한 사서들을 대신하여 공명·적확한 새 사서들을 만들어 그들에게 읽게 하는 것이 동화의 효과를 가져오는 첩경이며 여기에 바로 조선반도사의 편찬을 새로이 하는 주된 이유와 취지가 있는 것이다."

일제의 조선사 편수 취지다. 여기서 조선 사료 인멸의 증거가 드러난다. 또한 조선사편찬을 놓고 그들 내부에 이견이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보다 교활한 방법이 채택되어 일본인들이 조선사를 쓰는 비극이 연출된 것이다.

일제는 한국 침탈 전부터 조선사 왜곡 편찬 계획을 가졌었다. 1910년 한국을 강제 침탈한 일제는 2개월도 못 된 11월 조선 전국에서 사료 강탈에 나섰다. 가장 악질적인 기구였던 조선총독부 취조국 지휘로 경찰을 앞세워 전국의 서점과 향교·서원·양반가의 서고를 뒤진다. 이들은 강탈한 한국 사료를 분류, 필요한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불태워 버렸다. 일제가 인멸한 서적이 얼마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광복후 출간된 <제헌국회사>는 20여만권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신채호의 <을지문덕>, 장지연의 <대한新地誌>, 이채병 <애국정신> 등과 엄청난 古書들이 이 때 수난을 당했다.

일제의 한국 사료 압수 작업은 3·1독립선언까지 계속되었다. 3·1독립선언으로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를 표방하고 부임한 조선총독 사이토마코토는 부진한 <조선사>편찬을 독려하여 1922년 "조선에서의 교육 시책의 요결"을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먼저, 조선사람들이 자신의 일.역사,전통을 알지 못하게 하라. 그럼으로써 민족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그들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무능,악행을 들추어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쳐라. 조선인 청소년들이 그들의 부조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라. 그러면 조선인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에 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게 될 것이며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 때 일본의 사적, 일본의 문화, 일본의 위대한 인물들을 소개하면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일본이 조선인을 반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인 것이다."

4. <조선사편수회>의 갖가지 만행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조선인을 반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해 한국사를 재편한 일제의 중추기관이다. 조선사편수회는 3차례 개편됐다. 일제의 조선사료 강탈기간중인 1916년 1월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로 발족한 이 기구는 <조선사편찬위(1922.12)> <조선사편수회(1925.6>로 바뀐다. 중추원 산하에서, 조선총독부, 마지막에는 일황칙령에 의한 독립관청으로 격상된 것이다.

일제는 <조선사> 35권, <조선사료총간> 20종, <조선사료집진> 3질을 간행한 1938년 6월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를 발행, 이 기관의 활동을 자랑스럽게 밝히고 있다. 일제가 본격적으로 <조선사> 편찬에 착수하기 위해 1923년 1월 8일 총독과 정무총감까지 참석한 제1차 위원회 기록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실무진이 제1편 삼국이전, 제2편 삼국시대, 제3편 신라, 제4편 고려, 제5편 조선전기, 제6편 조선중기, 제7편 조선후기로 시대를 구분 제시하자, 조선측과 일본측 위원들의 질의응답이 벌어졌다.

  • 정만조 : '삼국이전'은 단군조선까지 넣는 것이냐.
  • 黑板 : 삼국이전의 명칭을 재검토하겠다.
  • 이능화 : 고대 조선에는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이 있다. 그 명칭은 '고대조선'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
  • 黑板 : 그 당시 조선은 현대의 조선과 지역이 다르므로 '삼국이전'이란 막연한 이름이 좋을까 한다.
  • 이능화 : 건국신화는 민족정신을 발휘하는 것이니 반드시 본문에 수록해야 한다.
  • 栢原昌三 : 단군과 기자는 건국의 주요사항이므로 망라하려 한다.
  • 小田幹治郞 : 今西龍이 참석하지 않았으나, 사무 수행상 토론대로 가결하면 좋을까 한다.
  • 有吉忠一 : 원안대로 가결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조선사>가 7편으로 기획되고 단군조선·기자조선을 포함한 한국의 고대사를 본문에 수록하겠다고 총독앞에서 정무총감이 약속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토론 내용대로 결의하자고 제의한 중추원 서기관장 小田幹治郞이 이 모임후 3개월도 안돼 파면되고, 단군과 기자를 수록하겠다고 답변한 栢原昌三은 8개월만에 사망하고 만다. 또 문제를 제기한 정만조는 편찬실무에서 제외됐다.

1930년 8월 22일 중추원서 열린 제5차 모임에서는 7편으로 계획되었던 당초의 <조선사>가 6편으로 축소되어 있었다. '삼국이전'과 '삼국시대'가 제1편에 합쳐지고 실질적인 편찬은 통일신라 이후부터 조선후기까지였다. 통일 신라 이전의 조선 고대사는 아예 없어진 것이다. 또한 통일신라 이전을 다룰 제1편은 동양 3국의 자료만 정리한다는 것이었다.

<조선사> 제1편 삼국이전과 제2편 통일신라는 위원들의 원고심의도 없이 1932년 3월 31일 출간됐다. 일부출간과 함께 2년여만에 열린 편수회 제6차 회의에서 육당 최남선은 1차회의때의 기록을 증거로 단군조선은 조선의 기원을 밝히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강조, 별편제작을 강력히 촉구했으나 일본측 위원들은 단군을 수록하지 않은것은 기본사료인 <삼국사기>에 없기 때문이며 기자조선은 중국사료에 포함시켰다고 발뺌했다. 이와 함께 今西龍은 단군을 신화로 조작한 논문 <단군고>로 경도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35년까지 9차례 열린 편수 위원회는 단군조선을 비롯한 삼국통일 이전의 고대사 문제로 조선·일본위원간의 격렬한 논쟁을 벌였지만 원고 심의도 없이 편수 실무자들에 의해 <조선사> 35권은 완간됐다.

이 <조선사>는 단군을 제3편 7권 말미 고려편에 나오는 백문보의 상소에 '단군' 2자를 마지못해 넣었을 뿐, 끝내 역사적 사실로 인식돼 온 단군조선을 말살했다. 일제가 펴낸 <조선사>는 결국 고조선도 고구려, 백제, 통일전의 신라도 발해도 싣지 않아 민족과 역사의 뿌리를 잘라 냈다. 통일신라 이후의 조선사도 멋대로 해석, 부정적인 사례와 수난사만을 확대했다.

서울대 신용하 교수(사회사)는 '일제가 남겨 놓은 <조선사>는 이제 식민사관 극복을 위한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밝히고 그러나 번역도 체계적인 비판연구도 아직은 없는 실정이라고 아쉬워했다.

그러나 국내 유수의 <국사대사전> 중의 하나는 '비록 일본의 식민통치 아래 유화정책으로 만든 <조선사>이지만 색인이 없는 사료의 이용에 많은 편리를 준다'고 아직도 어이없는 평가를 하고 있다.

편수회에서 조선시대 집필을 맡았던 신석호씨가 생전에 '일제가 펴낸 <조선사>는 한국 고대사의 많은 분량을 말살 ·왜곡했다.'고 고백하였음에도 '편리한 책'이 라는 평가를 내리는 사학자들이 있는 것이다.

5. 왜 한국 고대사를 말살했나...???

왜 일제는 한국의 고대사 말살과 조선사의 재편에 주력했을까? 조선총독부가 시정 25년을 맞아 1936년 발행한 25장의 "조선사의 길잡이"가 그 일단을 밝혀 준다. 이 책의 서문은 '조선 고금의 역사를 간단히 알아보려는 사람들을 위하여 소책자를 펴낸다'고 밝혔다.

이 책은 한국의 고대를 고조선·낙랑군·삼국시대로 구분, 4백년간에 걸친 낙랑군 시대가 한족(韓族)의 피지배 시대임을 강조하고 고조선에서는 단군을 없애고 기자를 내세워 한국사의 주체성을 부정했다.

또 신라, 백제의 실제 건국을 4세기 이후로 끌어내려, 역사의 후진성을 부각했다. '백제·신라와 임나(任那)'라는 부분을 만들어 '임나는 일본의 직할영역이고 신라·백제도 일본과 신속(臣屬)관계를 맺었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백제·신라가 강성한 후에도 옛 삼한 지역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나라는 일본이라고 강변했다.

<일제 관학자들의 식민사관>이란 논문을 분석한 이만열 교수(숙명여대)에 따르면 일제는 한국의 국조가 단군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고 중국의 식민지에서 시작했으며, 조선고대사의 상한선을 가능한한 끌어내리고, 외세 침략과 퇴치 능력의 부족을 강조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조선사> 편찬에 참여했던 일인 학자 末松保和의 저술로 알려진 이 책은 광복후 유네스코에서 한국사를 소개하는 자료로 번역 배포했다고 한다. 번역 출판이 일본인의 농간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아도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냐고 지적하는 이들이 많다.

일제는 왜 한국 고대사의 상한을 끌어내리려 한 것이가. 국내에 이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는 별로 없다. 재일 사학자 이진희씨 (명치대 강사)의 <광개토왕릉비의 탐구>와 일인학자 旗田?의 <일본인의 조선관>, 故 홍이변씨의 <식민지 사관의 극복>, 김용섭 교수(연세대)의 <일본 한국에 있어서의 한국사 서술>, 최재석 교수(고려대)의 일본인학자들의 조선사 연구를 비판한 논문 등 몇 편이 부분적으로 그 실상을 파헤치고 있다.

이들 논문을 종합해 보면, 일본은 명치시대 일본 역사를 재확립하고 한국 침략사관을 수립했다. 일본 육군 참모 본부가 학자들을 고용하여 일본사를 정리하여 본격적인 대한(對韓) 관계사를 연구토록 했다. 참모본부 촉탁 酒井忠直이 1882년에 내놓은 <임나고(任那考)>가 일제침략사관의 첫 결실이다. 일본 육군참모본부의 조선연구는 밀정으로 만주에 파견한 酒?景信 중위가 집안(輯安)에서 광개토대왕비를 탁본(1883년) 해 오며 활기를 띠었다. <임나고>에 이어 <고구려 고비고(古碑考), (1884년)>, <고구려 제19대 광개토왕묘비 해석>을 나왔다. <일본서기>를 토대로 억지 해석한 일본의 고대 남한경영설이 대두되고 광개토대왕비문이 이를 입증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역사교육을 통해 한국침략을 촉진하고 이것이 한국 침탈(1910년)로 일단 성공하자, 어용학자를 한국에 파견, 조작한 일본역사를 합리화 하기 위해 한국의 사료를 불태우고 삼국이전의 고대사를 말살하려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중국의 기자로부터 피지배국으로 출발한 한국은 일본의 영향하에 있었으며 결국 일본의 한국 점령은 침략이 아니라 옛날의 종속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며 왕권에 시달리는 한국인을 보호하려는 은혜'라고 호도하는 것이다. 喜田貞吉은 일제의 한국침탈 후 펴낸 <조선의 병합과 국사>라는 저서에서 이를 뒷받침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조선병합은 실로 일·조의 관계가 태고로 돌아간 것이다. 조선은 실로 빈약한 분가(分家)이며 우리나라(일본)은 부강한 본가(本家)라고 할수 있다...

일제가 한국 고대사 말살에 이처럼 집요한 노력을 기울인 이유는 물론 한국 침략의 '정당성'을 양국 국민에게 인식시키고 일본 역사의 위대성을 확립하기 위함이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한국 고대사를 공백화(空白化)하고 조작함으로써 일본의 고대 '남한경영론'을 비판할 수 있는 반증들을 말살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엔 또하나의 숨은 이유가 있다는 해석이 최근 나오고 있다. 최재석 교수에 의하면 '한국 고대사가 그대로 살아 있으면 일본 고대사는 한민족이 건설한 역사임이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일본은 한국침략 이전에 이를 먼저 파괴해야만 했다는 것이다.

6. 日은 조작한 '남한지배설' 교육

일제가 한국사를 파괴하여 조작해 낸것은 무엇인가? 이른바 '고대 일본이 남한을 지배했었다'는 <임나경영론>, <임나일본부설>이다. 가야 지방을 비롯, 백제 신라권역을 일본이 다스렸다는 이야기다.

우리 역사에 나타나지 않는 이같은 조작을 우리 학계에서는 '론(論)', '설(說)로 표현하고 있지만 일본에서는 학교의 역사교육을 통해 국민들에게 실제의 역사로 의식화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 현행 국사교과서에는 여기에 대응할 내용이 없다. 우리 국사 교과서에는 가야가 왕국으로 성장하지 못했다는 해석을 붙인 때문인지 얼마 동안이나 실재했으나 그 존속기간도 밝히지 않고 있다. '일본에 진출하여 무역했다.'는 것이 고작이며 가야 지역에서 철이 많이 생산되었다는 사실이 두줄(중학교 국사), 이나마 고교 국사 부록 '국사연표'에는 아예 가야가 빠져 버렸다.

일본고교생들이 배우는 광개토대왕비의 주요 내용도 우리 국사교과서에는 없다. 현행 국민학교 사회에 약간의 설명과 사진이 나오고 중학교 국사에 '5만의 군사를 보내어 신라를 침범한 왜구를 물리치기도 하였다.'는 내용만이 실려 있다.

이와 같은 국사 교육을 받은 한국인이 과연 일본인들과 만나 한·일 고대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올까.

현재 우리나라 초·중·고 국사 교과서나 개설서에 이 문제가 전혀 언급되지 않은데 대해 단국대 차문섭 교수(한국사)는 '거론할 가치조차 없다는 것도 큰 이유이긴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에 대한 학계의 연구성과가 거의 없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국내에는 정통으로 일본 고대사나 한·일 관계사를 전공한 학자가 한 사람도 없다' 고 지적한 차교수는 '일본측이 허구의 "남한지배설"을 그토록 집요하게 교육하고 있는 현실을 더이상 외면할 수는 없으며 우리도 우리 사료를 연구만 한다면 이에 대응하는 역사적 진상을 얼마든지 정립할 수 있을것이라고 말했다.

7. 우리나라 실증사학의 한계

일본의 역사 교과서들은 '남한지배설'이외에도 한·일 관계사를 엄청나게 왜곡하고 있다. 일본 고교 교과서 [신편일본사]는 우리나라 학자들이 분석한 결과, 고대사9개, 중근세사 5개, 근대사 14개, 현대사 7개등 모두 35개 항이나 그릇되게 서술하고 있다.

이들은 고대 일본의 남한지배설에서 보여주듯 각종 사료를 조작, 사실처럼 증거자료를 제시하고 있다. 과학만이 가장 타당한 지식이며 사실만이 지식의 대상이 된다는 실증사학을 표방하며 그들의 역사는 과학적으로 입증된 진실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조선사]를 편찬하며 한국 고대사 부정에 필요한 자료만 남기고 나머지는 소각, 인멸했다. 그리고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신빙성을 부정하는 논문을 써, 우리의 상고사를 파괴했다. 今西龍응 '단군고'를 써 단군의 실체를 부정했고 三品彰英은 신라 지증왕까지 21대왕을 전설로 만든 장본인이다. 三品은 신라역사를 무려 5백37년이나 깎아내렸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과학적인 실증사학을 한다면서도 구체적인 실증자료를 제시한 것이아니라 '기록을 믿을수 없다' , '허위다', '공상이다', '후세의 조작이다', '전설을 역사화한것이다' 라는 무책임한 용어를 나열, 삼국 초기 기록을 파괴했다.

우리나라 도처에서 출토되는 청동거울,칼,곡옥을 일황가의 삼종신기(三種神器)라고 하며, 일본에는 없는 한국산 적송(赤松)으로 만든 반가사유미륵보살상을 국보1호로 보존하고 있는 일본인들은 그들이 원주 토인의 후손임을 부인하면서도 한반도에서 왔다는 명백한 사실만은 시인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런 사실들이 우리 국사 교과서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김해 고령 등에서 나오는 철제갑옷(가야,신라)이나 해남 출토 청동칼을 일본 구주(九州) 출토의 같은 유물과 비교만 해도 한일 고대사의 신비는 풀릴텐데 아무런 대응이 없다.

이들 유물이 나오기 전, 민족사학자들이 고문헌을 증거로 제시한 한민족의 5천년 역사도 우리 교과서에는 부정되고 삼국의 시조도 실증사학으로는 인정하기 어렵다고 빼버렸다. 이것이 과학적인 사학의 방법일까?

이 같은 우리 국사학계의 실정에 대해 고려대 강만길 교수(한국사)는 '현재의 한국사학은 실증주의적 방법론에만 얽매여 이론화가 약한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비판하고 '실증은 역사 연구의 초보적인 출발점일 뿐 그것이 역사학의 전부는 아니다'하고 말했다. 강교수는 '실증 사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역사학과 고고학, 언어학, 사회학, 인류학 등 인접과학과의 협력이 시급하다'고 촉구했다.

8. 불편한 국사학계와 고고학계

현행 국사교과서는 박물관의 유물도 설명하지 못한다. 60년대 이병도 저 [고등학교 국사] 등 삼국 초기역사가 빠져 있는 일부 검인정 교과서를 배운 이들이나 74년 국사교과서 국정화 이후의 졸업생들은 박물관의 유물들이 낯설고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한다고 말한다.
삼국초기 수준높은 유물들이 박물관에는 진열되어 있는데, 우리 교과서에는 이 시기가 국가 성립이전의 원시 전설시대로 나오기 때문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原삼국실이 있다. 고고학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나라의 이름일 것이다. 이 전시실에는 경주 조양동에서 발굴한 청동거울과 철기류,울주 출토의 동물모양 토기, 대구 팔달동과 심양동에서 나온 여러형태의 토기들이 '원삼국'의 유물로 소개 되고 있다. 이중 조양동에서 나온 일광경(청동거울)은 글자해독으로 서기전(BC) 2백~1백년 사이의 유물로, 대구 팔달동 토기는 서기전 1세기, 울주 토기는 서기 2세기 때의 유물로 추정됐다. 방사성 탄소 측정 등 과학적인 방법으로 알아낸 유물연대다.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서기 기원 전후의 청동,철기들이 원삼국의 유물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원삼국은 국사교과서뿐 아니라 국어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일반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낱말이다. 원삼국은 우리나라 고고학자들이 70년대 초 새로 만든 학술용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삼국이 위치하는 역사적 시기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삼국시대 초기와 일치하고 있다.

우리 국사 학계의 주류가 삼국 초기 이전의 기록을 부정하는 바람에 원삼국이라는 생소한 시대가 태어난 것이다. 원삼국이란 고고학 연대를 확정한 서울대 김원룡 교수는 '이 시기는 엄연한 삼국시대로 국사학계가 부족,성읍시대로, 고고학계가 초기 철기시대로 각기 불러 삼국시대에서 제외하는 모순을 보이고 있어 원삼국시대라고 명명했다.'고 설명했다.

국사학계와 고고학계가 한국사 연구에 이견을 보이고 있음이 원삼국시대 구분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고고학계가 이같이 유물로써 실증하는데도 국사학계는 이를 아직도 받아들여 반영하지 않고 있다. 국사학계가 고고학계의 연구성과를 반영한것은 구석기 시대와 청동기시대를 교과서에 수록한 정도다. 74년 개편때 반영된 것이다.

구석기는 1940년 일본인 直良信夫가 함경북도 종성군 동관진에서 발굴했으나 일제가 발굴발표를 금지하고 식민사학자들을 시켜 '조선에는 구석기시대가 없었다'고 호도했다. 일제는 또 '조선에서는 청동기시대가 없었다' 면서 '신석기에서 우물우물하는 사이 철기시대로 넘어갔다'고 조작, 이 시기를 금석병용기(金石倂用期)라고 명명했다. 40대 이상이 배운 '금석병용기'라는 시대는 이같은 한국고대사 를 끌어내리려는 일제의 역사 파괴음모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64년 공주 석장리에서 광복후 처음으로 구석기 유물을 발견한 연세대 손보기 교수(고고학)는 '당시 유물까지 발견했는데도, 한국의 구석기 실존을 믿지 않았다'면서 '교과서에 수록한 것은 국제학회에서 공인을 받은 후인 70년대 초반'이라고 밝히며 씁쓸하게 웃었다.

되풀이 되는 이런 해프닝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다는 것이 학계 일부의 진단이다. 전남 나주의 9호분이나 전북 익산에서 집권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찬란한 금동관이 나와도 국사학계나 고고학계는 정확히 나라도 연대 추정도 못하고 왕족능 정도로 발표하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9. 통곡할 의식없는 역사 교육

국사교과서에서 삼한, 삼국의 초기역사를 빼버린 결과 우리 학생들은 한반도 남부의 고대사를 배우지 못한다. 특히 부산,김해,고령 등 옛 가야 지방인 경상남도와 익산,나주, 해남 등 호남지방의 고대사가 공백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교과서 편찬자들의 본의는 아니더라도 이러한 결과는 일본의 남한지배설을 간접적으로 묵인하는 교육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

광복후부터 국사 국정화 이전까지의 교과서는 마한 54국, 진한50여국, 변한20여국과 그 영토의 대략을 밝히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학생들은 호남은 마한의 옛땅, 낙동강 하류 동부 지역은 진한, 경상도 일부와 낙동강 서부는 변한의 옛땅으로 배웠다.

그러나 현행 국사 교과서는 백제가 고이왕(234~286), 신라가 내물왕(356~402)때 국가의 형태를 갖춘것으로 가르쳐 그 이전의 낙동강 유역이나 호남평야의 주인이 누구였는지 를 분명히 교육시키지 못하고 있다.

국사 교과서 편찬자들은 검인정 교과서마다 삼한 각국의 나라수자가 틀리고 고대사의 판도도 명확히 그 위치를 구획하기 어려워 제외했다고 밝혔다. 부정확하고 불분명하면 연구를 통해 진실을 밝혀내야지 학술 논란의 대상이라고 교과서에서 빼버리고 가르치지 말아야 한다는 발상은 무엇인가!

현행 국사 교과서는 이같이 고대사 이외에도 많은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 현행 국사 교과서에 광복후 실학연구성과가 얼마나 반영돼 있는가를 분석한 鄭모 교수는 " 교과서에는 민족사의 내부에서 주자학을 극복하면서 자생적으로 얻어진 한국적인 근대화논리로서의 실학의 성격이나, 실학자 들이 제시한 개혁의 근본상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 제시돼 있지 않다" 고 분석했다.

서울 어느 고등학교 金모 교사는 "당쟁 발생원인을 양반들의 관직 추구욕으로만 보는 등 아직도 당쟁에 대한 일면적 해석 또는 부정적 시각이 강하게 남아있다." 고 지적했다.

국민대 趙모 교수는 "현행 교과서는 근대사 부분에서 민족의 내적 발전을 강조한다고 하면서도 일제의 침탈상을 지나치게 부각시킨 반면 이에 대한 민족의 항쟁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학자들은 이밖에 "국사교과서가 전체적으로 각 시대의 역사상을 파악하기에 미흡하고 지나치게 나열식이어서 역사의식을 학생들에게 심지 못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10. 학자들 눈치만 보는 문교부

현행 우리나라 국사교과서의 가장 큰 문제점은 민족의 동일한 역사체험을 부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기성 세대와 새세대의 국사 지식이 일치하지 않아 국민들이 민족사 이해에 혼돈을 겪고 있는 것이다. 교과서 집필자도, 관계당국도, 학생들도, 일반국민들도 바라지 않는 이같은 현상이 어떻게 해서 발생했는지 의문이다.

'63년 각종 검인정 국사 교과서의 내용을 통일하면서 내놓은 교육목표가 '민족의 우수성 발굴'과 '민족애의 실천', '민주국가발전의 기여'였고 '74년 국정 국사교과의 목표도 '올바른 국사관확립', '민족적 자부심 육성'에는 변함이 없었다.

정부의 의도는 민족사 교육의 강화에 있었고, 많은 학자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국사 교과서를 국정화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교과서의 내용이나 교육현실은 자주적 민족사관의 정립은 고사하고 민족의 동일한 역사체험을 국민에게 공유토록 하는데도 실패하고 말았다.

이런 사태에 대해 관계부서는 책임만을 전가하고 있다. 국사 교과서 저작권자인 문교부는 편찬자인 국사편찬 위원회로 책임을 밀고 국사편찬위는 형식상 이름만 대여한 상태지 교과서 편찬기능이나 권한이 있느냐고 반문하고 있는 실정이다.

학계와 사회각층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국정 국사교과서 저작권자인 문교부는 개편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책임을 회피하는 인상이다. 교과서 편수 책임자인 문교부 장학편수실장은 '문교부로서는 국사교과서 편찬에 직접 관여하지 않을 방침이다. 지금 교과서의 서술내용이 문제가 되고 있지만 이런 문제는 학계가 세미나를 열든지, 공청회나 학술회의를 열어 합의를 이뤄 주기 바란다.'고 밝혔다.

국사 교과서 편찬자로 되어 있는 국사편찬위 박영석 위원장은 '국사교과서를 국정화한것이 문제다. 워낙 교과서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심리가 크고 학설이 분분하다 보니 대부분의 학자들이 집필을 꺼리고 있다." 고 고충만 털어놓았다.

11. 학계서는 <검인정> 환원 주장

국사교육은 민족의 장래를 결정한다고 한다. 역사 교육이 윤리교육의 하나로 시작되었고 애국심 교육의 핵심이었던 것도 이때문이다. 그러나 강대국의 경우에는 국사 교육이 민족의 우월성을 내세우게 하고 국가이익의 절대성을 앞세워 다른 민족을 침략하거나 내부 모순을 호도하는데 이용되기도 했다. 이같은 경향은 현재에도 사라졌다고 할수 없다. 또한 국사교육은 다른 민족의 침략을 받은 민족에게 민족적 결속을 강화하는 촉진제가 되어 외침에 대항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애국심 고양이나 민족의식의 강화에 치우친 역사학은 과학으로 구체적 위치를 확보하지 못한 까닭이란 반성이 일어났고 애국심 교육이 특정 정치세력의 옹호구실도 하여 비판을 받았다. 고려대 강만길 교수는 "역사교육이 이같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이 사실이지만 오늘날 거의 모든 국가의 국사교육이 아직도 조국애, 민족애의 함양의 강화를 중요한 목적으로 삼고 있음은 부인할수 없다" 지적 했다.

국사교육은 곧 민족교육이라는 이야기다. 따라서 국사교육에서는 지적 훈련만이 아닌 민족과 국토에 대한 애정이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국사교육의 폐해에 대해 대부분의 학자들은 가장 근본적인 이유로 국사 교과서가 국정화돼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학자들이 지적하는 '국정화'의 문제점은 학문연구의 획일화, 역사인식의 경직성 초래, 학자들의 교과서 집필기피, 학문성과의 포괄적 수용 불가능 등으로 요약된다.

실제로 74년부터 국정화된 새 교과서가 선을 보이자 그 내용에 대한 수 많은 학술 논쟁이 줄을 이었다. 이러한 논쟁은 학술적 차원을 넘어 감정대립으로까지 발전하기도 하였고 그 결과 교과서에 수록되는 우리역사의 폭은 자꾸 축소될수 밖에 없었다. 많은 학자들이 논쟁의 도마위에 오를것을 우려, 집필을 기피했고 논쟁의 소지가 있는 부분은 무조건 서술에서 제외하려했다.

한국사 연구회 대표 간사 차문섭 교수(단국대)는 '이러한 국사교육의 부작용을 극복하는 방안은 국사교육의 폭을 넓힐수 있게 교과서를 검인정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차교수는 '국사를 국정화하는 것은 국민을 한가지 사고능력밖에 없는 외곬 인간으로 만들겠다는 것이 아닌가. 국사 교과서를 검인정화함으로써 학생들이 여러사람의 다양한 역사관을 받아들여 응용력, 적응력을 키워 나가게 해야한다.'고 강조했다.

강만길 교수도 '당국이 대학입시 때문에 국사 교과서 내용을 통일하고 국정화했다면 완전히 주객이 전도된 얘기다. 국사가 대학입시를 위해 존재하는가' 라고 반문했다.

문교부에서는 학자들의 이같은 주장에 대해 구체적인 답변을 꺼리고 있다. 최종근 문교부 장학편수실장은 '일반적인 추세에 따라 국사교과서도 검인정화되리라고 본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국정 국사 교과서를 검인정화하는 방안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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