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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성태 교수) 아메리카 인디언은 우리 민족이다(上)

환단스토리 | 2014.05.09 12:03 | 조회 11347

한 中南美연구자의 이색 주장 - 아메리카 인디언은 우리 민족이다(上)

멕시코는 ‘맥이족의 땅’이라는 뜻


글 : 孫成泰 배재대 스페인어과 교수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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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 정복자들의 기록에 아스텍 원주민들은 820년경 아스땅(아사달)에서 온 것으로 되어 있어
⊙ 아기를 업어 키우며 젖 줄 때는 ‘찌찌’라고 해
⊙ 상투·갓, 가체·쪽진 머리, 사주와 점, 정한수 등 풍속 유사

孫成泰
⊙ 53세. 한국외국어대 졸업, 스페인 국립마드리드대 언어학 박사.
⊙ 배재대 스페인어·중남미학과 교수, 同 외국어교실 실장, 한국외국어교육학회 부회장.
⊙ 논문 : <아스테카인의 탄생, 육아 및 장례 문화> <아스텍의 역사, 제도, 풍습 및 지명에 나타나는
우리말 연구> <아스텍제국에 나타난 우리 민족의 풍습> 등.
<그림1> 벽화 속에 나타난 아스텍인들. 이들은 5~10세기 만주에서 사라진 고리족과 맥이족의 후예로 보인다.
우리 민족은 일찍이 만주(滿洲)와 요동(遼東) 지역에 부여(扶餘)와 고구려(高句麗)를 건국하고, 이 지역을 호령했던 동북아(東北亞)의 강자(强者)였다. 하지만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이 지역의 강자였던 우리 민족은 소수(少數)로 전락하고, 고구려와 부여에 복속했던 숙신(肅愼)족의 후예인 말갈족(후의 여진족)이 만주의 주인이 되었다. 만주를 호령하던 우리 민족은 과연 어디로 사라졌을까? 그 흔적을 멀리 중남미(中南美)의 멕시코에서 발견할 수 있다.


사라져 버린 우리 민족

3세기 후반에 쓰인 《삼국지》 〈위지동이전(魏誌東夷傳)〉은 우리 민족의 고대(古代) 역사와 풍습을 알 수 있는 매우 귀중한 문헌이다. 비록 중국의 관점에서 부족한 자료를 바탕으로 하긴 했지만, 그 시대 우리 선조의 모습을 알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사료다.

우리 민족은 동북아 역사가 시작된 이래 만주와 요동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 왔다. 만주 북쪽의 길림, 장춘 일대는 부여가 있었고, 만주 남쪽의 집안 일대에는 고구려가 있었다. 오랫동안 고조선(古朝鮮)이 존재했던 요동 일대는, 비록 중국 한(漢)나라 후예인 공손(公孫)씨의 지배를 받기는 했지만, 고조선의 후예가 살았다. 그 당시 만주 일대에 살던 우리 선조들의 숫자는 얼마였을까? 《삼국지》 위지동이전에는 부여가 8만호(戶), 고구려가 3만호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요동의 공손씨 치하에 있던 선조들도 대략 3만호쯤으로 추정할 수 있다.


부여와 숙신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3세기 만주에는 우리 민족이 아닌 다른 민족이 한 그룹 있었다. 그들은 숙신(肅愼)족이었다. 그들은 두만강 북쪽 연해주(沿海州)의 작은 지역에 살던, 근원을 알 수 없는 종족이었다. 그들은 부여-고구려를 건국한 우리 선조 고리족과 언어와 풍습에서 완전히 달랐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은 그들의 숫자가 매우 적었고, 3세기 초에는 당시 만주 일대에서 가장 강국이었던 부여에 찾아와서 스스로 신하가 되었으며, 매년 무거운 공물을 바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魏略曰 其國殷富 自先世以來 未嘗破壤(위략왈 기국은부 자선세이래 미상파양)

“위략왈, 그 나라(부여)는 매우 부강하여 선대로부터 일찍이 적에게 파괴된 적이 없었다.”>

이 기록에 의하면, 가구 수 8만호를 거느린 부여는 매우 부강하여 다른 민족으로부터 파괴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동쪽의 숙신족은 스스로 부여를 찾아와서 굴복했다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自漢己來, 臣屬夫餘 夫餘責其租賦重, 以黃初中叛之 夫餘數伐之, 其人衆雖少 (자한기래 신속부여 부여책기조부중 이황초중반지 부여수벌지 기인중수소)

“(숙신은) 한나라 때에 자연스럽게 부여의 신하가 되었다. 부여는 그들을 꾸짖고 조세를 무겁게 부과했다. 그래서 황초년 중에 그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부여는 그들을 여러 차례 정벌하였다. 그 사람의 수는 적었다.”>

삼국(三國) 시대의 국력은 인구 수에 좌우되었다. 인구가 적은 숙신은 약소국(弱小國)으로 8만호의 부여에 굴복했다. 부여는 그들을 맞이해 후하게 대접한 후에 돌려보낸 것이 아니라 그들을 혼내고 무거운 공물을 바치도록 명령했으며, 그들이 반란을 일으킨 황초(黃初·삼국시대 위나라의 연호. 220~226년) 연간에 여러 차례 정벌했다.

그렇다면 이 시대 숙신의 인구 수는 얼마였을까? 숙신의 인구 수는 3만호 미만이었을 것이다. 당시 고구려가 3만호였다. 그렇지만 고구려는 부여에 강력하게 대응하던 국가였다. 이 사실과 숙신이 스스로 찾아와 굴복하고 부여가 엄하게 혼냈다는 사실을 함께 고려해 보면, 숙신의 당시 인구 수는 고구려에도 한참 못 미쳤을 것이다. 아무리 많이 추정해도 2만호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3세기 초 만주와 요동 일대 우리 민족의 숫자는 대략 14만호, 숙신은 2만호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은 숙신보다 7배나 많은 북방의 강자였고, 최대 집단이었던 것이다.


발해의 少數민족이 된 고구려인들

고구려 문자왕이 아버지 장수왕을 이어서 왕위에 오른 지 3년째 되는 해(494년), 음력 2월에 북만주의 추운 겨울바람 속에서 부여의 마지막 왕은 800년을 이어 오던 왕조의 문을 스스로 닫고, 오직 가족들만 거느리고 참담한 심정으로 남쪽 고구려로 내려와서 스스로 신하가 되었다. 몇 달만 더 기다리면 따뜻한 봄이련만, 무슨 이유로 그는 추운 북방의 겨울바람 속에서 왕조의 문을 서둘러 닫아야 했을까?

역사는 그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후세(後世)에 전하지 않았다. 다만 왕은 가족들만 데리고 남쪽으로 떠났고, 백성들은 집단적으로 난하를 건넌 후에 북쪽 아무르강 쪽으로 떠났다고만 전하고 있다. 북쪽으로 떠난 그들은 잠시 두막루국(豆莫婁國)을 건설하여 살다가 다시 사라져 버렸다. 당시의 ‘사라졌다’는 의미는 중국 역사가들의 시야가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떠났음을 의미한다.

삼국시대의 우리 민족에게는 숙명의 라이벌이 있었다. 만주 서쪽 대흥안령(大興安嶺) 일대에서 거주하던 선비(鮮卑)족이었다. 그들은 3세기경 중원(中原)으로 내려가서 눈부신 발전을 거듭, 만주 일대에 거주하던 우리 민족의 최대 위협이 되었다.

부여와 고구려를 건국했던 고리족은 선비족과 수많은 전쟁을 치렀다. 결국 고구려는 668년 선비족의 후예가 세운 당(唐)나라에 패망(敗亡)했다. 698년 고구려의 후예 대조영(大祚榮)은 북만주 일대를 중심으로 발해를 건국했다. 당나라는 서쪽에서 쳐들어오는 토번족을 막아야 했고, 안으로는 각지의 반란으로 점차 혼란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이 틈을 타서 발해는 빠른 속도로 남쪽으로 진격하여, 마침내 옛 고구려 전성기의 영토를 능가하는 지역을 장악했다.

그런데 역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발해는 소수의 고구려인 지배층과 대다수인 말갈족 백성으로 구성된 나라이다.”

중국의 《신당서(新唐書)》와 《구당서(舊唐書)》에도, 일본의 《유취국사(類聚國史)》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796년 영충(永忠)이라는 일본 승려는 당나라에 불교를 공부하러 가던 길에 만주를 지나갔다. 그는 만주 곳곳을 둘러보고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마을마다 백성들은 말갈족(숙신의 후예)이었고, 고구려인은 소수였다.”

여기서 고구려인이란 고구려 전성기의 백성들, 즉 3세기의 부여, 고구려, 요동에 살던 우리 선조들을 총칭한 호칭이었다. 3세기에는 우리 선조들이 7배나 많았다. 7분의 1에 불과했던 숙신족이 8세기에는 만주의 최대 집단이 되었고, 우리 민족은 소수집단으로 바뀌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을까?

발해가 멸망한 10세기 이후에, 두 번 다시 우리 민족의 왕조가 그 땅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 민족이 만주를 떠났던 것이다.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멕시코에서 발견된 우리 민족

1492년 스페인의 콜럼버스는 지구를 한 바퀴 돌아서 인도로 가려다가 뜻밖에 신대륙을 발견했다. 그는 처음에는 그곳이 인도라고 착각했다. 때문에 아메리카 원주민을 영어로는 ‘인디언’, 스페인으로는 ‘인디오’라고 부르게 되었다.

스페인인들은 지금의 멕시코 수도인 멕시코시티 지역을 중심으로 멕시코와 유카탄 반도에 매우 발달된 문명을 이루고 사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특히 멕시코시티 지역에 있던 도시는 30만평의 규모에 20여만명이 살고 있었는데, 도시 중심에는 큰 신전을 세우고, 그 주변은 동서남북의 네 구역으로 나누어, 씨족별로 모여 살고 있었다.

그들은 흰 옷을 주로 입고, 흰색을 숭상하여 거의 모든 건물을 흰 흙으로 칠했고, 처음 찾아온 스페인인들에게 매우 친절하고 융숭한 대접을 했다. “이 사람들은 매우 친절하고 예의가 바르며, 노인을 공경하는 것은 타고난 듯하다”고 스페인인들은 기록했다.

그들은 미개한 원주민이 아니었다. 왕과 큰무당을 중심으로 매우 체계적인 국가조직을 갖추고 있었고, 왕과 큰무당, 귀족과 무당, 평민, 노예로 구별되는 사회조직도 갖추고 있었다. 정복한 땅에는 왕족을 통치자로 파견하고, 각 지역에서 매년 두 차례 공물(貢物)을 받았으며, 그것을 그림 문자로 책에 기록까지 하고 있었다. 그들도 나무껍질을 으깨어 하얀 종이까지 만들어 사용하고 있었다.


고리족과 맥이족의 후예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은 흥분했다. 유럽인들은 이들이 구약(舊約)성경에서 사라진 단 지파(支派)의 후예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의 사람 야곱은 12명의 아들을 낳았고, 그들이 각 지역으로 퍼져서 인류가 번성했다고 한다. 그런데 12명의 아들 중 11명의 후손들 이야기는 구약성경에 계속 나오지만, 단의 후손들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신대륙이 발견되고 아스텍제국이 발견되었을 때 유럽 국가들은, 드디어 사라져 버린 단의 후예를 찾았다고 생각했다. 곧 단 지파가 아님을 알았지만, 영국의 킹스버그 남작 같은 사람은 19세기까지도 이들이 단 지파일 가능성을 연구했다.

스페인 왕실은 1521년 아스텍제국을 정복한 직후부터 가톨릭 신부(神父)인 학자들을 멕시코에 파견하여, 그 원주민들이 어디서 왔으며, 어떤 사람들이며, 무슨 언어를 말하며, 풍속은 어떠한지 등을 조사하고 기록하도록 했다.

그들은 먼저, “너희들은 어떤 민족이냐”고 물었다. 원주민들은 “우리들은 고리족과 맥이족”이라고 대답했다. 고리족이 먼저 그곳에 왔고, 맥이족은 나중에 왔다고 했다.

만주와 아무르강 유역에 살던 우리 선조들은 고리족이었고, 요동에 살던 우리 선조들은 맥족(貊族)이었다. 맥족은 5세기 이후부터는 맥이(貊耳)족이라고 불렸다.

“너희들은 어디서 왔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원주민들은 “조상들은 원래 아스땅에서 살았고, 그곳이 어딘지는 모르지만 위가 평평한 피라미드가 있는 곳”이라고 대답했다. 또 “고리족은 원래 태양신을 믿던 고리족 땅에서 왔다”고 대답했다. 아스땅은 단군신화에 나오는 아사달이다. 땅과 달은 같은 말이다. 아사달(阿斯達)의 원래 발음은 ‘아스다’이다. 만주에는 우리 선조들이 건축한 수만 기의 피라미드가 있다. 모든 피라미드는 위가 평평하다.


“맥이족은 820년 경 이곳에 왔다”

“너희들은 무슨 언어를 말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그 질문의 의미를 몰랐던 원주민들은 그저 “나와 다들이(‘모두가’라는 의미) 이렇게 말한다”고 대답했다. 원주민 언어를 거의 알아듣지 못했던 스페인인들은 ‘나와 다들이’를 언어 명칭으로 착각했다. 그래서 오늘날 멕시코 원주민 언어를 ‘나와다들이어’라고 하고, 줄여서 ‘나와들어’ 또는 ‘나와어’라고 한다.

“너희들은 언제 이곳으로 왔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원주민들은 “맥이족은 820년경 아스땅을 떠나서 이곳으로 왔고, 고리족은 그보다 수백 년 먼저 왔다”고 대답했다. 여기 나오는 연도는 나중에 스페인인들이 원주민의 달력을 서양력으로 해석한 것이다.

스페인인들이 이렇게 원주민의 기원을 조사해 기록한 것은 현명한 일이었다. 그 후에 아메리카에 온 프랑스와 포르투갈, 영국은 원주민의 역사, 풍습, 언어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 결과 미국과 캐나다의 인디언에 대한 기록은, 그들이 이미 유럽의 언어와 풍습에 상당히 깊게 영향을 받아서, 그들 고유의 언어와 풍습이 상당히 변질되어 버린 18세기 말 또는 19세기 초부터 시작되었다. 오늘날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뿌리 깊은 연구는 주로 멕시코와 페루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이러한 역사적 배경 때문이다.

아스텍제국을 정복한 스페인인들은 아스텍인들이 보관하고 있던 수많은 책들을 불태워 버렸고, 여러 가지 풍습도 금지했다. 그들은 그림으로 가득 찬 그 책들과 그들의 고유 풍습이 이교도적 풍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들이 보고 들은 원주민들의 말과 풍습을 기록하여 오늘날까지 남겨 두었고, 극히 적은 숫자이지만 원주민들의 그림 문자로 된 책도 남았다. 바로 이러한 자료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멕시코에 나타난 우리 민족의 모습

멕시코의 원래 국명은 ‘맥이고(Mexico)’이다. 이 명칭은 스페인인들이 처음 멕시코에 왔을 때, 아스텍제국을 건설하고 살던 사람들이 자기들이 사는 곳을 ‘맥이곳’이라고 불렀고, ‘맥이가 사는 곳’이라는 뜻이었다. 그 후에 1821년 멕시코가 스페인 지배로부터 독립했을 때, 아스텍인들의 옛 명칭을 국명으로 채택했다. 오늘날 ‘멕시코’라고 함은 영어 발음으로 인한 것이고, 실제로 멕시코인들은 아직도 ‘맥이고’라고 말한다.


남자들의 모습

▲상투

<그림2> 그림 속의 아스텍인들은 한국인과 흡사한 상투를 하고 있다.
신대륙을 발견했을 때 멕시코 원주민들은 상투를 하고 있었다. 상투는 붉은 천으로 묶어서 만들었고, 조선시대 우리가 사용하던 망건 같은 것이 없어서, 묶은 천이 헐거워지면 뒷머리는 밑으로 처지곤 했다.

<그림2>는 1325년 맥이족이 아스텍제국을 건설하던 때의 역사를 그린 그림이다. 9명의 큰 부족의 족장들이 모두 상투를 하고 있다. 머리 위 양쪽으로 삐죽 나온 것은 상투를 묶은 천 자락이다.

가운데 머리를 풀고 귀 위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사람은 무당이다. 신(神)에게 나라 건설을 알리는 제사를 올리기 위해서 먼저 스스로 피를 흘리고 있다. 보통은 새의 피를 뿌렸지만, 중요한 제사에서는 무당이 스스로 피를 흘렸다. 그 제사를 그들도 ‘굿(cu)’이라고 했다. 우리나라 무속인들은 아직도 굿을 할 때 닭이나 돼지의 피를 먼저 주변에 뿌린다.

▲갓과 두루마기

<그림3> 17세기 멕시코 원주민 족장의 외출 모습(왼쪽)과 20세기 초 우리나라 사람의 복장(오른쪽).
<그림3>은 아스텍제국의 노인들이 외출을 할 때의 모습이다. 검은 갓을 쓰고 흰 두루마기를 입었다. 우리 민족의 외출복인 흰 두루마기의 특징은 아래로 내려올수록 폭이 넓어진다. 오른쪽의 20세기 초 우리 모습과 비교해도, 손에 지팡이를 짚고 있는 모습까지 같다.


여자들의 모습

▲한복과 加髢

<그림4>의 아스텍제국 여인들은 한복을 입었고, 머리는 가체(加髢)를 했다. <그림5>는 신분이 높은 여인들이 머리는 가체를 하고, 화려한 한복을 입은 모습이다. 이 그림은 특히 스페인과 아스텍제국이 전쟁을 시작한 후, 몇 달 후에 제국이 멸망당할 운명을 전혀 예측하지 못한 부인들이 높은 건물 옥상에올라가 멀리 해안가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구경하는 장면이다.

한복은 우리 민족의 고유 의상이고 가체도 이미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 말까지 이어져 왔던 우리 민족의 풍습이었다.

가체를 만들기 위하여 빠지거나 자른 머리를 버리지 않고 모아 땋아서 머리에 덧대었다. 아스텍제국 여인들도 그렇게 머리카락을 모았다. 또 가체를 머리에 붙이기 위해 천 조각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림5>에서는 아스텍제국 여인들이 붉은 천으로 가체를 덧댔다. 다음 18세기 신윤복의 그림에도 천으로 가체를 묶은 모습이 나온다<그림6>.

▲비녀와 쪽진 머리

<그림7>은 우리 민족 여인의 머리 모습이고, <그림8>은 1521년경의 아스텍 여인들이 통곡하는 모습이다. 모두 머리 뒤의 목 부분에 머리를 뭉쳐서 쪽을 짓고 비녀를 꽂았다.

아스텍 여인들의 모습을 담은 그림 가운데 원 안의 여인의 소매를 보면, 우리 한복의 소매의 특징이 그대로 보인다. 한복 소매는 어깨에서 팔꿈치까지 부드러운 곡선으로 통이 넓어지다가 손목 부분에서 좁아진다.

머리 부분에서 특이한 점은 이마 윗부분에 머리를 뭉쳐서 두 개의 뿔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모습도 삼국시대부터 조선 초까지 우리 민족에게 있었다. 이런 모습은 고구려 고분 벽화에도 나온다.

▲머리꽂이와 봉잠


명성황후 초상화<그림9>와 20세기 중반 멕시코 여인의 모습<그림10>.
우리 민족의 여인들은 머리를 아름답게 하기 위하여 가체뿐 아니라 다양한 머리꽂이를 머리에 꽂아서 장식했다. <그림9>는 19세기 말의 머리꽂이와 명성황후 초상화이고, <그림10>은 20세기 중반의 멕시코의 머리꽂이와 여인이 전통 머리꽂이를 한 사진이다.

머리꽂이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봉잠(鳳簪)이다. 봉잠은 봉황새 모양으로 만든 비녀를 말한다. <그림11>은 조선왕조 말 영왕비의 소립봉잠(小立鳳簪)과 멕시코 유물로 발견된 봉잠이다. 새가 하늘을 향해 머리를 들고 있고, 꽁지는 뒤로 들고 있으며, 발을 길게 내려서 꽂는 부분으로 만든 모습이 모두 같다.

<그림11>영왕비의 소립봉잠(왼쪽)과 멕시코의 봉잠(오른쪽).
▲붉은 볼연지

우리 민족 여인들이 볼에 붉은 연지를 찍는 풍습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있었다. 아래는 고구려 쌍영총의 세 여인의 그림이다. 모두 붉은 볼연지를 찍은 모습이고, 머리엔 천을 두른 모습이 가체를 덧댄 것으로 보인다.

<그림12>는 멕시코의 태오티와칸 문명(기원전 1세기~기원후 8세기)의 벽화에 나온 여인의 모습, <그림13>은 미국 남부 애리조나주의 인디언들 그림과 도자기, 그리고 <그림14>는 19세기 미국 수(Soiux)족 인디언 추장 부부의 초상화이다. 수족은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인디언 집단으로서, 그들도 우리 민족의 후예라는 증거가 있다. 수족 남자들도 원래는 상투를 했었다.

필자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남자의 상투와 함께 여인들의 붉은 볼연지 풍습은 우리 민족의 이동루트인 알류산열도(列島)와 캐나다 서해안 지역, 그리고 우리 민족의 후예가 퍼진 아메리카 전 지역에서 있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남자의 상투와 여자의 볼연지 풍습은 아메리카 거의 모든 인디언들 사이에 19세기까지 남아 있었다.

<그림12> 멕시코 태오티와칸 벽화 속 여인은 붉은 볼연지를 하고 있다.
<그림13> 애리조나 인디언의 모습을 형상화한 도자기.
<그림14> 미국 수족 추장 부부도 볼연지를 하고 있다.

멕시코에 나타난 우리 민족의 풍습

창포에 머리 감고

<그림15> 아스텍 벽화에 나오는 지게를 진 장사꾼의 모습.
<그림16> 반란 용의자를 고문하는 모습. 가운데에 지게를 세워 놓은 것이 보인다.
우리 민족 여인들은 옛날부터 머리를 아름답게 꾸미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여성의 아름다움은 곧 풍성하고 아름다운 머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체를 하거나 각종 장식을 머리에 꽂기도 했고, 머릿결을 촉촉하게 빛나게 하기 위해서 창포(菖蒲)라는 풀을 물에 으깨어, 그 물로 머리를 감아 윤이 나게 했다. 멕시코의 여인들도 히어끼리들이라는 푸른 풀을 창포처럼 사용했다.

아메리카 여인들도 물건을 머리에 이고 다녔고, 무거운 것을 일 때는 따배(똬리)를 사용했다.

<그림15>는 1540년대 그려진 아스텍제국의 그림 역사서에 나오는 장면이다. 물건을 지게에 얹어서 진 모습과 지게를 지게막대기로 세워 놓은 모습이다. <그림16>은 아직 상투를 틀지 않은 젊은이 두 명이 상투를 튼 어른 두 명을 창으로 고문하는 장면이다.

아스텍제국에서는 상품을 지고 먼 지방으로 무역(물물거래)을 하러 다녔던 장사꾼들이 있었다. 이들은 제국이 정복한 속국(屬國)이나 마을의 감시자 역할도 했다. 반란의 기미가 보이면 중앙 정부에 보고도 하고, 그림에서 보듯이 직접 반란 용의자를 심문하기도 했다.

그림상의 심문 대상자도 상투를 한 모습이다. 신대륙 발견 이전에 멕시코 전역에 퍼져 살았던 사람들은 부여-고구려를 건국했던 고리족이었고, 이 사람들은 씨족별로 혹은 원래 만주에서 살 때부터 조상들이 이웃하여 살던 사람들과 같은 곳에 정착하여 수많은 마을과 도시국가를 건설하고 살았다. 그리고 지금의 멕시코시티 지역에 뒤늦게 도착한 맥이족(아스텍족)이 그곳에 살던 고리족과 힘을 합하여 아스텍제국을 세우고, 그 당시의 전국 각지에 산재한 씨족별 도시국가들을 정복하여 속국으로 삼았다.

지게의 특징이 오늘날 우리나라의 지게와 약간 다르다. 우선 지게끈을 어깨에 메지 않았고, 지겟가지가 없다. 그런데 우리 민족의 고대 풍습을 기록한 《삼국지》 <위지동이전>에는 우리 민족의 초기 지게 모양이 바로 이런 모양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관가에서 성곽을 쌓는데, 젊은이들이 등에 1장 길이의 나무를 대고 짐을 나르는데, 온 종일 일하면서도 힘든 줄을 모르더라”는 내용이다. 그림상의 아스텍제국 지게와 같다.


금줄과 정한수

<그림17> 산파가 점쟁이를 찾아가 점을 치는 모습.
<그림18> 금줄을 친 신령한 나무 아래서 연주하는 무당들.
옛날부터 우리 민족은 아이를 낳으면 집 앞에 금줄을 쳐서 잡인의 방문을 금했다. 이는 그 아이의 운명에 나쁜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소위 ‘액(厄), 즉 나쁜 기운’이 방문객을 통하여 묻어 들어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금줄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걷혔고, 이것은 다른 사람들의 방문을 허용한다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했다.

금줄은 아이를 낳은 경우에만 친 것이 아니고, 성황당이나 산신제를 지내는, 소위 신성한 곳에도 쳤다. 금줄에는 원형 금줄과 줄형 금줄이 있었다. 멕시코에도 이와 똑같은 풍습이 있었다. 스페인 출신 가톨릭 신부인 사하군(Sahagun)의 책에 남겨진 기록과 그림에 따르면, 멕시코 원주민들도 원형 금줄과 줄형 금줄을 쳤다.

<그림17>은 아기가 태어나자, 산파가 점쟁이에게 찾아가서 집 앞에 칠 원형 금줄을 받고, 아기의 운명을 물어보는 장면이다. 점쟁이를 ‘다마틴이(tlamatini)’라고 불렀다. 우리말 ‘다 마친 이(다 맞히는 이)’의 고어(古語)이다.

<그림18>은 산위에 있는 산신제를 올리는 곳이다. 줄형 금줄을 치고, 신령한 나무 아래서 무당들이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줄형 금줄에 대한 설명에는 “새끼줄을 꼬아서 만들었고, 같은 풀로 만든 술이 일정한 간격으로 매달려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멕시코 원주민들은 태어난 아이에게 복을 빌어 주기 위하여, 집 동쪽에 깨끗한 물 한 그릇을 떠 놓고, 아이를 안고 머리를 동쪽으로 향한 후에, 복을 빌어 주었다는 기록도 있다. 바로 우리 민족의 정한수를 떠놓고 빌던 풍습이다.

멕시코 원주민들이 사용했던 악기들도 우리 민족의 것과 같은 것이 많다. 그중에 하나만 공개하면, 징이다. 그들은 징을 ‘태질라가틀(신성한 질라가틀)’이라고 불렀다.


四柱와 占

<그림19> 가운데 사람 얼굴을 한 태양은 태양신을 상징한다. 점쟁이가 들고 있는 것이 《토날보왈리(신성한 날을 보아서)》라는 책임을 나타낸다. 점쟁이 얼굴 앞에 있는 짧은 지팡이 같은 그림은 ‘굽어진 혀’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말한다’는 기호이다. 즉 점쟁이가 사주풀이를 이야기해 주고 있다. ‘말한다’는 이 기호는 경주의 신라시대 고분인 천마총의 천마 입 앞에도 그려져 있다.
멕시코 원주민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의 운명을 알기 위하여 사주(四柱)를 봤다. 멕시코 원주민들이 사용했던 달력은 두 종류로서, 각각 히의보왈리(Hiuhpohualli)와 토날보왈리(Tonalpohualli)이다. 각각 ‘해를 보아서’와 ‘신성한 날을 보아서’라는 우리말이다. 달력 명칭에 사용된 ‘히’와 ‘날’은 오늘날의 우리말 ‘해’와 ‘날’이다.

멕시코 원주민들이 사주풀이와 점치는 데 사용한 달력은 토날보왈리였다. 이 달력은 우리 민족이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음력 달력과 기본 체제가 같다. 우리 민족도 사주풀이나 점을 칠 때에는 음력 달력을 아직도 사용한다.

<그림19>는 멕시코 원주민이 아이를 데리고 점쟁이를 찾아가서 아이의 운명을 물어보는 장면이다. 그림 설명에 따르면, 점쟁이는 먼저 아이의 태어난 생년월일시(生年月日時)를 물어보고, 자기가 가지고 있던 토날보왈리를 펼쳐서, 그날과 그 시각에 해당하는 각종 그림 기호를 보고서, 아이의 평생의 운명을 이야기해 주었다고 한다. 또 사주를 바탕으로 운이 좋은 남녀가 결혼했는데, 이것도 우리 민족의 옛 풍습과 같다.

이 달력을 이용하여, 멕시코 원주민들은 점을 매우 많이 쳤다. 그들은 일상생활에서 중요한 일을 할 때에는 항상 먼저 점을 치고 날을 받았다. 장사하기 위하여 먼 길을 갈 때도 점을 쳐서 날을 받았고, 이사하거나 새로운 집을 지을 때도, 결혼을 할 때에도 역시 점을 치고 길일(吉日)을 받아서 행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모두 아기를 업고 다녔다. 아스텍제국이 정복된 지 20여년 후에 스페인 신부 고마라(Gomara)가 쓴 문헌에는 멕시코 원주민들의 육아(育兒) 풍습이 자세히 나와 있다.


아기를 업고 다니며 젖을 줄 때는 ‘찌찌(tzitzi)’라고 말해

<그림20> 멕시코 여인의 아이 업은 모습(왼쪽)과 20세기 중엽의 우리나라 여인이 아기를 업은 채로 젖을 먹이는 모습.
고마라에 의하면, “원주민들은 아기를 등에 업고 포대기로 둘렀는데, 포대기 양쪽 끝을 젖가슴 위에서 동여매었고, 등에 업힌 아기의 머리는 엄마의 목까지 왔다”고 한다. 그는 또 “등에 업은 아기에게 젖을 줄 때에는 머리를 겨드랑이 밑으로 돌려서, 젖을 물렸으며, 그때 ‘찌찌(tzitzi)’라고 자주 말했다”면서 “‘찌찌’는 아마도 ‘젖’이나 ‘젖주다’를 뜻하는 말인 것 같다”는 해석까지 덧붙였다.

<그림20>은 멕시코 원주민의 아이를 업은 모습과 우리 민족 여인들이 등에 업힌 아이에게 젖을 줄 때의 사진이다. 겨드랑이 밑으로 머리를 돌린 모습이 고마라의 설명과 일치한다. 또 아이의 나이를 말할 때, 태어난 해를 한 살로 치고, 그 다음해에는 두 살로 말했는데, 이런 나이 계산법은 서양의 나이 계산법과 비교하면 심지어 두 살까지도 차이가 난다고 했다. 멕시코 원주민의 나이 계산법은 우리민족의 것과 같았다.⊙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_contentA.asp?nNewsNumb=201211100049&ctcd=F&c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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