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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 ⑦ 주몽·온조·박혁거세 삼국시조 아니다?

환단스토리 | 2012.07.08 21:21 | 조회 9222

중 후한서에 고구려 대무신왕·모본왕 나옴에도 유령 취급

한겨레 2009.06.24

광개토대왕 비문. 김부식과 이규보는 이 비문의 존재를 몰랐으나 비문에 등장하는 시조 이야기를 자신들의 저서에 실었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이 창작이나 중국 기록을 보고 베낀 것이 아니라는 증거다.

후한서 ‘모본왕, 중국내륙 침략’ 기록
태조왕 이전부터 강국이었음을 입증
주류학계는 “태조왕때 사실상 건국”
식민사학따라 온조·혁거세 존재도 불신






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
⑦ 주몽·온조·박혁거세 삼국시조 아니다?

현행 <국사 교과서>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에 따라서 삼국의 건국 시조를 누락시켰다. 대신 고구려는 제6대 태조왕(재위 53~146) 때 사실상 건국되었고 백제는 제8대 고이왕(234~286), 신라는 제17대 내물왕(356~402) 때 건국되었다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 이전의 국왕들은 후대의 조작이거나 부락 단위의 지배자에 지나지 않았다고 낮춰보는 것인데 이것이 이른바 학계의 정설이다. 주류 사학자들이 이렇게 보는 근거는 무엇일까?

먼저 고구려 태조대왕은 중국 기록에 등장한다. <삼국지> <후한서> 등의 중국 사료에는 궁(宮: 태조대왕)이 중국을 공격하는 기사가 여러 차례 실려 있다. 그러나 중국 기록에 나온다고 모두 인정하는 것도 아니다. 고구려 3대 대무신왕(18~44)과 5대 모본왕(48~53)은 중국 사료에 나옴에도 유령으로 취급받고 있다.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조는 “건무 8년(서기 32) (고구려 대무신왕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자 (후한) 광무제가 왕호(王號)를 회복시켜주었다”고 전하고 있다. 또 <후한서> ‘광무제 본기’ 25년(서기 49: 모본왕 2년)조는 “요동 변방의 맥인이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을 침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조는 이때의 ‘맥인’을 ‘구려’(句麗)라고 적어 고구려가 공격했다고 전해주고 있다. <삼국사기>는 모본왕 2년(49)조에서 “장수를 보내 한나라의 북평·어양·상곡·태원을 습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북평·어양·상곡은 현재의 베이징(북경) 부근이고 태원은 산시(산서)성 타이위안(태원)시이다. 모본왕 때 중국 내륙 깊숙한 곳까지 진출했다면 고구려가 초기부터 강력한 고대국가였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에 믿지 않겠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머릿속에서 만든 역사상과 다른 사료가 나오면 무시하거나 부인하는 것이 주류 사학계의 이른바 실증주의 역사관인 셈이다.

김부식·이규보 ‘시조’ 기록 동일해


태조왕 이전의 국왕들이 중국 기록에 등장함에도 무시하고 태조왕 때 건국되었다고 강변한 최초의 인물이 일제 식민사학자인 쓰다 소우키치다. 쓰다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비판(三國史記 高句麗紀の批判: 1913)’에서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의) 궁(宮: 6대 태조대왕)과 수성(遂成: 7대 차대왕)이 같은 것은 틀림없이 지나(支那: 중국)의 사적(史籍)에 기초해서 추가된 것이다…. 역사적 사실로서는 궁(宮) 이전의 국왕의 세계는 전혀 알 수 없다”라고 썼다. 태조왕부터만 실존 인물로 인정할 수 있다는 뜻이다. 중국 사료에 등장하는 그 이전의 국왕들은 왜 인정할 수 없는지는 설명하지 못했다. 그러나 주류 사학계는 쓰다의 이 글이 교주의 교시라도 되는 양 현재도 태조왕부터 실제 인물로 인정하고 있다. 김부식(1075~1151)이나 그보다 한 세기 뒤의 인물인 이규보(1168~1241)는 모두 ‘광개토대왕 비문’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김부식의 <삼국사기>나 이규보의 ‘동명왕편’은 모두 ‘광개토대왕 비문’의 시조(始祖) 사적에 대해서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규보는 지금은 전하지 않는 <구삼국사>(舊三國史)에서 봤다고 전하고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의 초기 기록들이 김부식의 창작도 아니고 중국 기록을 베낀 것도 아닌, 고구려인들이 남긴 기록을 보고 작성했음을 말해주는 증거이다.

경주 나정 유적. 박혁거세가 나타났다는 나정으로 추정된다.

<국사 교과서>는 백제는 ‘3세기 중엽 고이왕 때 중앙집권 국가의 토대를 형성하였다’면서 이때 건국되었다고 쓰고 있다. 온조가 아니라 고이왕이 백제의 건국 시조라는 이런 주장의 근거는 무엇일까? 쓰다 소우키치의 제자 이병도는 1948년에 간행한 <조선사대관>에서 “온조가 과연 주몽의 아들이냐 아니냐 함은 별문제로 삼고 그가 남래(南來: 남쪽으로 옴) 즉시에 건국하였다는 것은 도저히 믿기 어렵다. 다만 후일 건국의 기초인 부락을 건설하였다는 것은 생각할 수 있다”고 온조 건국설을 부인했다. 그는 “나의 연구한 바로는 엄밀한 의미의 백제의 건국은 온조로부터 제8대 되는 고이왕 때에 되었다고 믿는 바이다”라고 서술했는데 이것이 주류 사학계의 정설이 된 것이다. 그 역시 온조의 건국을 부인하는 근거는 제시하지 못했다. 그는 <삼국사기>에 고이왕 27년(260) 6좌평 및 16관등제를 완비했다고 나온다는 점과 중국의 주서(周書)에 ‘백제의 수도에 시조 구태(仇台) 묘가 있어서 매년 네 번씩 제사 지낸다’는 구절의 구태를 고이왕으로 보고 고이왕이 백제의 건국자라고 주장했다. 이병도는 “구태(仇台)의 태(台)자는 원음이 ‘이’음인즉 구태는 ‘구이’로 발음할 수 있는 동시에 이와 근사음인 백제의 고이왕을 연상치 않을 수 없다”면서 구태의 음이 구이와 비슷하다는 것을 근거로 들었다. 구태와 고이가 같은 음이 아니라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지만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250년 이상의 편년 기록을 부인하는 근거치고는 치졸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병도는 “고이왕 이전의 세계(世系)는 추존(追尊)일 것”이라면서 그 이전의 국왕들을 모두 유령으로 둔갑시켰다. 그러나 <삼국사기>가 허위라는 일제 식민사학자들과 그 후예들의 주장과는 달리 <삼국사기>의 정확성은 세월이 흐를수록 계속 높아지고 있다. 1971년 우연히 발견된 충남 공주의 백제 무령왕릉 지석에서도 이는 여실히 입증되었다. 지석은 무덤의 주인공을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斯麻王)’이라고 전하고 있었는데, <삼국사기> 무령왕조는 “왕의 휘(諱)는 사마(斯摩)”라고 적었다. <삼국사기>는 무령왕이 ‘재위 23년(523) 5월 훙(薨)했다’고 기록했는데 이는 ‘계묘년(523) 5월 7일 붕(崩)했다’는 무덤의 지석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광주광역시 신창동 수레 유물. 주류 사학자들이 경전처럼 여기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이 마한 사람들은 ‘소나 말을 탈 줄 모른다’고 쓴 것이 오류임을 말해주고 있다. 기마민족 부여족의 후예인 백제인들이 말을 탈 줄 모른다는 발상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쓰다, 임나일본부설 위해 억지 주장

<국사 교과서>는 ‘신라는 4세기 내물왕 때 낙동강 동쪽의 진한 지역을 거의 차지하고 중앙집권 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했다’면서 신라는 가장 늦은 4세기 후반 건국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신라가 가장 늦게 건국되었다고 주장한 최초의 인물 역시 쓰다 소우키치다. 그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대하여’(1919)에서 “(신라는) 당시 문화의 중심지였던 낙랑, 대방에서 가장 먼 동남쪽 구석인 지금의 경주 지역에 있어서 그 문화의 정도가 낮았을 것으로 상상된다”라고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한사군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문화 정도가 낮았다는 착상은 기발하지만 그가 이렇게 주장했던 근본 이유는 신라 남부에 고대판 조선총독부인 임나일본부가 존재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병도는 이런 쓰다의 설을 대폭 수용해 <조선사대관>에서 “원시국가로서 지지(遲遲: 아주 늦음)한 걸음을 걸어온 신라가 부근의 제(諸) 소국을 병합하여 중앙집권의 정치로 진전하기는 제17대 내물왕 때로부터”라고 주장했다. 졸지에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400년 이상의 기록은 허위가 되어 버렸다. <국사 교과서>는 이병도의 주장에 따라 내물왕 때 낙동강 동쪽의 진한을 점령했다고 적고 있다. <삼국사기>는 3대 유리왕(24~57) 때부터 주변 국가 정복에 나서 12대 첨해왕(247~261) 때쯤이면 진한 전 영역을 모두 정복했다고 전하고 있지만 못 본 체한 것이다. 이병도나 <국사 교과서>는 내물왕을 위대한 정복군주로 그리고 있지만 <삼국사기> <삼국유사> ‘광개토대왕 비문’에 기록된 내물왕의 모습은 정복군주와는 거리가 멀다. <삼국사기>는 내물왕이 수성(守城) 군주라고 적고 있으며 <삼국유사> 내물왕과 김(박)제상조는 아들 미해와 아우 보해를 각각 왜국과 고구려에 인질로 보내놓고 나서 괴로워하는 나약한 군주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광개토대왕 비문’은 내물왕이 자신을 ‘노객’(奴客)이라 부르면서 고구려에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고 적고 있다. 주류 사학계에서 신라를 사실상 건국했다고 주장하는 정복군주 내물왕은 현존 사료에는 초라하기 그지없는 국왕으로 그려져 있다. 이병도는 내물왕 때 마립간(麻立干)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을 강력한 군주의 증거로 삼고 있으나 <삼국사기>는 내물‘이사금’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 중국 기록에는 내물왕의 이름을 루한(樓寒)이라고 적고 있는데, 이병도는 이를 마립간의 중국식 표기라고 주장했다. 루(樓)를 ‘마루’로 읽으면 ‘마립’(麻立)과 같이 볼 수 있고, 한(寒)은 간(干)처럼 취음(取音)한 글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루’가 ‘마루’이고 ‘마립’으로 연결된다는 발상은 논리적 비약에 불과하고 ‘寒’의 음은 ‘한’(han)이고 ‘干’은 ‘간’(gan)으로서 글자도 발음도 전혀 다르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에 기초해 ‘태조왕·고이왕·내물왕’이 삼국의 시조라는 주장은 사료상의 뒷받침이 전혀 없는 억지에 지나지 않는다. 일제 식민사학은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부인하고 임나일본부를 살려야 할 식민통치상의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주류 사학자들의 학문권력 유지 목적 외에 무슨 필요가 있기에 지금까지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부인해야 하는가? 과연 대한민국 역사는 일제로부터 해방되었는가?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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