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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의 한국 관련 역사 왜곡 내용

환단스토리 | 2013.02.06 16:16 | 조회 15562

일본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의 한국 관련 역사 왜곡 내용

-우리 역사를 왜곡한 일본 역사 교과서의 대표적 사례들-

글쓴이: 강영래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일본어과 졸업,일문학 석사)



일본의 우익 세력들이 후소오샤(扶桑社:ふそうしゃ)에서

출판한 “새 역사 교과서(新しい歷史敎科書)”와 토꾸마쇼뗀

(徳間書店)에서 출판된 “새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新しい教科書つくる会)<약칭:新歷會:새역모>의 주장”. 이

책들은 일본 역사를 가장 날조(捏造)하고, 왜곡(歪曲)하고

또 미화(美化)시킨 일본 극우파(極右派)의 역사 교과서

이다.출판사 '후소오샤'는 일본의 우익(右翼) 신문사

'산께이(産経:サンケイ)'의 계열사로, 정관계(政官界)로

부터 많은 지원을 받고 있다. 다행히 한국, 중국의 노력과

일본 양심 세력들의 '새 역사교과서 거부 운동'으로 이

책은 거의 채택되지 못하고 있다. 2001년 첫 발행 시에는

0.039%의 채택율을 기록하여 일본의 양심을 보여 주었고,

2005년도에는 시마네현(島根県)의 독도 영유권 선포 등의

영향으로 약간 많아져서 0.4% 정도가 채택했다.


I. 서론

지금 일본의 극우파 세력들은 최근 들어 기세를 합하여 일제 군국주의의 부활을 꾀하고 있다. 일본 자위대가 이제 일본 국군으로 변신하여 이라크 등 해외 파견으로 실전의 경험을 쌓아가고 있으며, 코이즈미 �이찌로오(小泉純一郎:こいずみ じゅんいちろう) 일본 총리는 중국과 일본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2005년 10월 18일에도 10명의 정부 고관들을 이끌고 야스꾸니신사(靖国神社:やすくにじんじゃ)에 참배했고, 19일에는 그를 따르는 101명의 중의원(衆議院) 의원들이 단체로 야스꾸니신사를 참배했다. 그 배후에는 일본의 극우파의 망령(亡靈)들이 도사리고 있다.

일본의 경제 성장과 발언권이 강화됨에 따라 다시 교만해진 일본의 극우파 세력들은 다른 때보다 한층 더 ‘역사 되돌리기’ 책동을 벌이고 있다. 그 동안 세계의 이목(耳目)을 꺼리고 일본 국민들이 호응해 주지 않아서 한 동안 주저앉아 있던 강경 극우파의 총공세가 재점화(再點火)된 것이다.


일본 극우파 보수 귀족 정치인의 원류(源流)는 키시 노부스께(岸信介:きし のぶすけ)라는 태평양 전쟁의 A급 전범(戰犯) 출신의 총리에서부터 시작된다. 그의 비서실장으로 있다가 그의 정치 사상을 이은 사람이 후꾸다 타께오(福田赳夫:ふくだ たけお) 전 총리이다. 그 다음이 키시 노부스께의 사위인 아베 신따로오(安部晋太郎:あべ しんたろう) 전 외상(外相)이다.

코이즈미 �이찌로오 현 총리는 후꾸다 타께오 전 총리의 비서였고, 코이즈미 총리의 현재의 비서실장이 그의 아들 후꾸다 야스오(福田康夫:ふくだ やすお)이다. 또한 현재 자민당 간사장인 아베 신조오(安部晋三:あべ しんぞう)의 아버지가 아베 신따로오 전 외상이고, 외할아버지가 키시 노부스께 전 총리이다.

코이즈미 �이찌로오 현 총리는 자신이 모시던 후꾸다 타께오 전 총리의 아들을 비서실장으로, 자신의 사상적 지도자인 아베 신따로오 전 외상의 아들을 비서실 부실장으로 쓰다가 지금은 자민당(自民黨) 간사장(幹事長:사무총장)으로 기용하고 있는 것이다.

야스꾸니신사에 참배하는 코이즈미 �이찌로오 극우파 총리

일본의 극우파 정치인들

좌로부터 이시바 시게루 국무대신 겸 방위청 장관, 후꾸다 야스오 관방장관, 아베 신조오 자민당 간사장

바로 이들이 현재의 일본 극우파 보수 정치 3인방이다. 다시 설명하자면, 극우파 정치인들의 최고의 핵심(核心)은 코이즈미 �이찌로오 총리이다. 코이즈미 총리는, 협객(俠客) 출신으로 우정상(郵政相)을 지낸 코이즈미 마따지로오(小泉又二郎)가 그의 할아버지이고, 할아버지의 후광으로 방위청(防衛廳) 장관을 지낸 코이즈미 �야(小泉純也)가 그의 아버지이고, 그들의 후광을 입어 키시 정권을 물려받아 총리의 자리에까지 이른 인물이다. 그가 케이오오기쥬꾸대학(慶応義塾大学) 경제학부를 다닐 때 교내에서 여학생을 성폭행하여 징계를 받을 뻔했지만, 당시 방위청 장관으로 있던 아버지의 후광으로 몰래 아들을 빼돌려 영국 런던대학교에 유학하고 돌아와 정치계에 입문하여 현재 제87대 일본 총리가 되어 있다. 1)이시바 시게루(石破茂:いしば しげる) 국무대신 겸 방위청 장관은 코이즈미와 같은 케이오오기쥬꾸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코이즈미와 함께 모리 요시로오(森喜朗) 전 총리파로 들어가 실권을 잡았고, 후꾸다 타께오 전 총리의 아들 2)후꾸다 야스오 관방장관(官房長官:비서실장)과 귀족 보수의 본류를 자인하는 기시 노부스께 전 총리의 외손자이며 아베 신따로 전 외상의 아들 3)아베 신조오 자민당 간사장이 극우파의 핵심과 3인방들이다.

이렇게 자민당의 키시(岸) 파벌을 이어받은 모리(森)파의 코이즈미 �이치로오 내각이 일본 극우파 정치의 선두에 섰고, 후꾸다 야스오 관방장관과 키시의 외손자 아베 신조오 자민당 간사장은 전방위 공격수로 활약 중이다. 국제 사회에서 불리할 때에만 입으로만 반성과 사죄를 되뇌면서 침략주의의 상징이고 그의 최고의 정치적 기반인 키시 전 수상과 그 일본 파쇼(fascio) 군국주의 동료 전범들의 유골함(遺骨函)이 모셔져 있는 야스꾸니신사를 참배하는 것은 그들의 하수인(下手人)인 코이즈미로서는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어찌 그의 보스들의 무덤을 참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중국과 한국에서 아무리 반대한다고 해도 그와 그 3인방과 그 계파 정치인들이 어찌 야스꾸니신사 참배를 거절할 수 있겠는가? 코이즈미는 일본 군국주의의 망령이 총리로 되살아난 화신(化身)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들이 정권을 잡고 있는 것이다. 금년에는 또 그를 반대하던 국회까지 해산하고 다시 실시한 선거에서 2/3가 넘는 절대 의석을 획득한 지금 그들에게 부딪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들은 자신의 지지 세력인 산께이의 계열사인 후소오샤를 통하여 ‘새 역사 교과서’를 만들고, 자라는 후세대들에게 자신들의 범죄와 잘못을 은폐하고 자신들의 침략 야욕을 합리화시키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야스꾸니신사 참배를 통하여 2차대전을 일으키고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을 건너 미국까지 평화를 위협했던 천벌을 받아 마땅한 일본의 군국주의 전범들을 이제 다시 전쟁 영웅으로 우상화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역사와 공민 교과서를 왜곡하는 것을 일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지금의 일본 강경 극우파의 허구성을 국제사회에 입증하고 단순한 시위를 넘어 그들의 망령(妄靈)되고 파렴치(破廉恥)한 역사의 추태(醜態)를 전 세계에 알려서 국제사회에 홍보·설득하는 전략을 필요로 하고 있는 시점에 와 있다.

 아무리 은폐하려 해도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국제사회는 일본이 국제평화에 대한 기여를 외치기에 앞서 주변국의 신뢰부터 얻을 것을 일본에 주문하면서 일본의 역사인식에 의구심을 높이고 있는데도 날이 갈수록 더 극심해져 가는 일본 극우파들의 준동(蠢動)을 차마 볼 수 없는 실정이다.

일찍이 손자병법에도 지피지기면 백전백승(知彼知己百戰百勝)이라고 했으니 우리 나라 국민과 교육계에서도 일본의 이러한 사실을 잘 알아야 거기에 올바른 대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필자는 일본 역사 교과서 왜곡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고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 것인지를 밝혀서 잘 알게 하는 데 작은 도움이라도 될까 하여 이 글을 쓴다.

II. 본론

1. 한국 강제 병합(韓國强制倂合)

일본 후소오샤에서 출판한 일본 극우파의 ‘새 역사 교과서’에서는 한국 병합 과정에서의 침략 행위와 강제성을 은폐하고,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는 것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것처럼 기술하고 있으며, 한국 내에서 병합을 강력히 반발하고 무력으로 저항했던 한국의 의병 투쟁과 안중근 의거 등을 축소하여 기술하고, 극소수 친일파의 목소리를 고의로 부각시켜서 마치 한국이 병합을 원해서 병합한 것처럼 사실(史實)을 왜곡하여 기술해 놓고 있다.

이하 << >> 속은 일본 역사 교과서 기술(記述) 내용을

번역한 것임.

*후소오샤(扶桑社:ふそうしゃ)에서 출판한 ‘새 역사

교과서’ 242쪽(위 그림의 네모 부분)

<<한국 병합

한반도는 전략적으로 중요했지만, 군사적으로는 불안정하였다. 영국, 미국, 러시아 3국 모두가 지배를 원했으나 실제로 통치를 유지하기는 곤란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이 직접 지배하고 싶지는 않지만 또 다른 나라가 차지하는 것도 달갑게 여기지 않는 지역에 대하여 통치자로서 신흥국 일본의 등장은 3국에 있어 좋은 상황이었다.

일ㆍ러 전쟁 후 일본은 한국에 한국통감부를 두고 지배권을 강화하고 있었다. 1910년 일본은 한국을 병합하였다(한국병합). 이것은 동아시아를 안정시키는 정책으로서 구미 열강으로부터 지지를 받은 것이었다. 한국병합은 일본의 안전과 만주의 권익을 방위하는 데 필요하였으나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반드시 일본에 이익을 가져다 준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것이 실행된 당시로서는 국제 관계의 원칙에 따라 합법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한국 국내에는 당연히 병합에 대한 찬반양론이 있었고, 반대파의 일부로부터는 심한 저항도 일어났다.>>

이에 비하여 현재 사용 중인 동경출판의 교과서에는 그래도 한국 내의 병합 반대의 소리를 조금이라도 반영해 놓고 있다.

 *현재 사용 중인 ‘동경출판(東京出版)’ 역사 교과서

217쪽

<<일ㆍ러 전쟁 후 일본은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한국통감부라는 관청을 두어 경찰과 내정권을 장악하고 이어서 한국의 군대를 해산시켰다. 이와 같은 일본의 침략에 대하여 한국의 민중은 무기를 들고 각지에서 봉기하여 의병운동 등을 일으키고 강력하게 저항하였으나, 일본은 군대로 이를 진압하였다. 1909년 초대 한국통감이었던 이또오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만주 하얼빈에서 조선의 독립운동가 안중근(安重根)에게 사살된 사건이 일어났다.

1910년에는 일본의 군대와 경찰이 서울을 경계하는 가운데 한국의 황제가 국가를 통치하는 권한을 일본에 위임하는 조약에 조인토록 함으로써 한국을 일본의 영토로 병합하였다. 이를 한국병합이라고 한다.>>

후소오샤 교과서는 또한 다음과 같이 한반도 위협설을 강조하여 일본 방위를 위해서는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여 지배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합리화해 놓고 있다. 또, 청ㆍ일 전쟁 및 러ㆍ일 전쟁도 일본을 방위하기 위해 일으킨 자위(自衛) 전쟁이라고 합리화해 놓고 있다.

 *후소오샤 교과서 218쪽

<<한반도와 일본의 안전보장

동아시아의 지도를 보기로 하자. 일본은 유라시아 대륙에서 조금 떨어져 바다에 떠 있는 섬나라이다. 이 일본을 향하여 대륙에서 한 개의 위협적인 팔뚝이 돌출되어 있다. 그것이 한반도이다. 한반도가 일본에 적대적인 대국의 지배 하에 들어가면 일본을 공격하는 절호의 기지가 되어 배후지가 없는 섬나라 일본은 자국의 방위가 곤란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한반도는 일본을 향해 항상 들이밀고 있는 흉기가 될 수밖에 없는 위치 관계에 있었다.>>

2.삼국의 조공설(三國朝貢說)

일본의 ‘새 역사 교과서’에서는 우리나라의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이 일본에 조공했다고 기술해 놓고 있는데, 이 설은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만을 근거로 한 것으로서 한국과 중국의 사서(史書)에는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이다. 이들의 주장과는 달리 6세기 이후의 상황은 오히려 우리나라의 3국이 당시의 일본보다 정치, 문화적 우위에 있었다는 것이 한・일 학계의 통설인데도 그들은 3국이 일본에 조공을 바쳤다고 주장하고 있다.

 *후소오샤 교과서 40쪽

<<조공

야마또(大和) 조정과 백제는 중국의 남조(南朝)에 조공을 하였다. 5세기를 통하여 10회 가까이 “왜국의 5왕(王)”이 송(宋)에 사신을 보냈다. 한편 고구려는 북위(北魏)에 조공을 하였고 동맹관계에 있었다. 야마또 조정과 백제가 굳이 송의 조공국이 된 것은 송의 힘을 빌어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고구려와 북위는 대륙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데 에 비하여 송(宋), 백제(百濟), 왜(倭) 3국은 바다로 갈라져 있었다. 그래서 야마또 조정의 반도정책은 점차 부진에 빠졌으며 벽에 부딪히게 되었다.>>

* 38쪽 위 그림의 네모 부분

<< 570년 이후가 되자 동아시아 일대에 지금까지의 여러 국가의 움직임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새로운 사태가 일어났다. 고구려가 돌연 야마또 조정에 접근해 와 조공을 바친 것이다. 이어서 신라와 백제도 마찬가지로 일본에 조공을 바쳤다. 이것은 삼국이 서로 견제한 결과였다.>>

3.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

(1) 임나일본부설이란?

일본의 야마또 왜국(倭國)이 4세기 후반에 한반도 남부 지역에 진출하여 백제, 신라, 가야를 지배하고, 특히 가야(伽倻;任那)에는 일본부(日本府)라는 일본의 정부 기관을 두어 6세기 중엽까지 200년 동안 한반도를 직접 지배하였다는 설이다.

이 주장은 현재 일본의 역사 교과서에도 이미 수록되어 있으며, 일본인의 한국에 대한 편견과 우월감을 조장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지금 일본인들이 야마또국(大和國)이라고 부르고 있는 나라는 일본서기에는 사마일국(邪馬壹國)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마일국(邪馬壹國)은 일본 발음으로 순리대로 읽으면 쟈마잇꼬꾸(邪馬壹國:じゃまいっこく)라고 읽어야 되지만, 마침 그 지역에 있는 마을 이름 중에 야마또(大和:やまと)라는 마을 이름이 있어서 거기에 맞추기 위하여 억지로 읽으면 야마잇꼬꾸(やまいっこく)라고도 읽을 수가 있다. 쟈마(邪馬:じゃま)라고 읽어야 할 사마(邪馬)라는 글자를 억지로 야마(やま)로 읽고 일(壹)은 아마도 대(臺)자를 잘못 쓴 것일 것이라고 하며 사마일국(邪馬壹國)을 한 자를 고쳐서 억지로 야마대국(倻馬臺國)이라고 고쳐서 야마대국(倻馬臺國)을 일본 한자 발음으로 야마따이국((倻馬臺國:やまたいこく)으로 읽었다. 또 그것을 억지로 야마또국이라고 읽어서 지금은 모든 사람들에게 원전에 쓰여 있던 사마일국(邪馬壹國)을 한자까지 그 동네 이름 한자로 바꾸어서 야마또국(大和國)이라는 이름으로 왜곡해 놓고 그것을 모든 일본 역사서와 역사 교과서에 버젓이 내 놓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이 사마일국(邪馬壹國)은 가야가 일본에 진출하여 세운 가야를 잇는 나라 곧 사마잇국으로 가야에 본국이 있고 일본에 진출한 가야 사람들이 이룩한 나라였다. 임나(任那)나 사마(邪馬)는 모두 가야(伽倻)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사마일국(邪馬壹國)은 일본에 세운 사마(가야)를 잇는 나라라는 뜻으로 사마일국(邪馬壹國)이라고 했던 것이다.

가야는 야철(冶鐵) 기술이 발달해 있었는데 일본 혼슈우(本州:ほんしゅう)의 중부 지방에서 철광석이 많이 난다는 것을 알고 그곳을 탐내어 정복하여 일본에 가야를 세우고 가야(사마)를 잇는 나라 사마잇국(邪馬壹國) 곧 가야를 잇는 나라(伽倻壹國)를 세운 것이었다. 지금도 이 나라가 있던 지역을 찾아가 보면 곳곳의 수많은 신사(神社)의 신 이름 중에 가야(伽倻)나 임나(任那), 사마(邪馬)라는 이름이 들어가는 신명(神名)이 산재해 있다.

이 지역은 확실히 대조영의 발해(渤海)가 고구려의 후속 국가였던 것과 같이, 가야의 일본에서의 후속 국가(가야잇국)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후세에 일본 역사가들이 가야를 잇는 나라 곧 사마잇국이라고 읽어야 할 것을 마침 야마또(大和)라는 작은 마을 이름이 그 지역에 있는 것을 알고 일본서기에는 분명히 일본서기의 원전을 한번이라도 본 사람이면 어린 아이라도 웃을 어이없는 일을 일본의 어용 제국주의 사관 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것은 이마니시 류우(今西竜) 계열의 일본의 어용 학자들이 학자의 양심을 팔고 국가의 위신만 내세우려고 한 군국주의 정치가들에게 바친 어이없는 행태였던 것이다. 이마니시 류우(今西竜)의 제자가 바로 우리나라의 이병도(李炳濤) 씨이고, 그가 지은 초기의 한국의 역사 교과서에는 일본 제국주의 사관을 그대로 이어받아 고조선은 중국 정권이 한국을 침략하여 세운 나라이며 한(漢) 나라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漢四郡)을 세웠는데, 그 위치가 중국의 많은 사서(史書)에도 요동반도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낙랑군을 낙랑공주가 평양에 살았다고 해서 평양으로 그려 놓았고, 역시 요하 유역에 있던 대방군을 서울에 마침 대방동이라는 동 이름이 하나 있다고 해서 서울에까지 한4군이 설치되어 한국은 원래부터 중국의 하나의 속국에 지나지 않다는 주장한 것이 제국주의 사관을 주장한 이마니시 류우와 이병도 씨였던 것이다.

이병도 씨는 일본 토오꾜오의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사학과를 다니며 그 대학의 사학과 교수였던 이마니시 류우의 제자가 되어 졸업하고 귀국하여 중앙불교전문학교,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를 거쳐 1925년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찬위원 등을 지냈고, 1934년 일제의 어용기관인 진단학회(震檀學會)를 창립했다. 이런 자가 광복 후 서울대학교 교수가 되었고, 1952년 서울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54년에는 서울대학교 대학원장, 학술원 회원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국사편찬위원, 1956년 진단학회 이사장, 1960년에는 교육부 장관, 1966년 성균관대학교 교수를 거쳐 1967년 미국 프린스턴대학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문헌적·비판적 합리성을 전제로 한 고증사학 및 실증주의 사관을 도입하여 근대 한국사학의 수립에 공헌하였다고 해서 학술원공로상, 국민훈장 무궁화장 등을 받았다. 이런 어용학자가 있었기 때문에 아직도 많은 한국 사람들이 일제의 조작된 제국주의 사관을 떨치지 못하고 오히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이 역사의 진실을 볼 줄 모르고 그것이 옳은 줄 알고 있는 실정으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고 하겠다.

아무튼 일본 제국주의 역사학자들은 가야의 후신인 사마일국을 엉뚱하게 야마또국이라고 하고 이것이 최초의 일본 국가라고 주장하고 그 정신을 야마또 정신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인데 이것은 명백한 오류가 있는 부당한 학설인 것이다. 그들이 그것을 기어코 내세우는 이유는 일본 내에 있는 한반도의 영향을 다 지워 버리고 일본은 절대 한반도의 도움 없이 일본 자체 내의 자생 국가였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들의 생각으로는 대일본제국이라는 종주국이 식민지 나라 한국으로부터 문화적으로 도움을 받은 나라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임나일본부에 관한 연구는 이미 17세기 초에 시작되어 19세기 말에는 본격적인 문헌 고증에 의해 일본 역사의 정설로 뿌리를 내림과 동시에 각국에 소개되었다.

이를 통해 3세기경에는 외국에 식민지를 건설할 정도로 일본의 고대사회가 발전하였다는 논리로 나아갔고, 한편으로는 일본 제국주의의 한반도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용하였다.

이처럼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의 한국에 대한 제국주의적 침략행위를 과거로의 환원으로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었으며, 일본인과 한국인은 본래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다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과 함께 표리 관계를 이루면서 35년간의 식민 통치를 합리화하는 관념적 버팀대로서 기능했던 것이다.

따라서 일제식민사학의 극복을 논의할 때,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비판과 부정이 빼놓을 수 없는 과제가 됨은 당연하다.

(2) 일본이 말하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

임나일본부는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적힌 내용이라고 주장한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야마또국의 징구우황후(神功皇后:じんぐうこうごう)가 보낸 왜군이 369년 한반도에 건너와 7국과 4읍을 점령하였고, 그 뒤 임나(任那:伽倻)에 일본부라는 일본의 정부 기관을 설치하고 왔으며, 그 임나일본부가 193년간 존재하다가 562년에 신라에 멸망하였다고 한다. 즉 일본은 369년부터 562년까지 약 200년간 한반도 남부 가야 지방을 지배했으며 그 중심 기관이 가야에 두어진 임나일본부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은 고구려의 남하 정책에 의하여 압박을 받은 가야 본국에서 일본에 있는 가야잇국에 군대를 보내 줄 것을 부탁하여 일본에 있는 가야잇국의 왕후인 신공황후가 본국인 가야에 원병을 파견한 것이었다.

그들은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도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거론했다.

비문의 광개토대왕의 전적을 기록한 신묘년(391년) 기사의 글자를 1자 바꾸어서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임나·신라 등을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여, 당시 왜국의 한반도 남부 지배를 알려주는 결정적 증거라고 주장하였다.

종래 비문의 신묘년(辛卯年) 기사는 마치 왜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식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광개토대왕비는 고구려, 특히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록한 것이다. 왜구의 공적비가 아닌 이상 이런 억지 해석은 합리적이지 못하다. 결국 신묘년 기사의 왜를 둘러싼 여러 논쟁들은 고구려 남하 정책의 큰 틀 안에서 합리적으로 이해해야 제 가닥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고구려의 남하 정책은 광개토대왕 당시부터 상당히 치밀하게 준비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백제의 침공을 막기 위해 쌓은 일곱 개의 성이나 평양 주민의 이주정책 그리고 대(對)중국 정책 등이 모두 계기적으로 연결되어 고구려의 남변 정책에 반영되었다고 할 것이다.

고구려의 가야, 백제와 일본열도 사이의 해상 통로의 통제는 A.D 404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 고구려의 대방계를 공격하는 등 초기에는 통제에 실패하였으나, 후에는 대체로 성공하였다. 가야잇국인 야마또 왜(大和倭)는 임나연정 시기에 임나왕(任那王:가야왕)의 요구에 따라 임나(任那;가야)에 신(臣) 또는 장군(將軍)들을 보내었고, 임나(任那)에 파견된 일본부(日本府) 장군들은 임나왕(任那王:가야왕)의 지시를 받았던 것이다.

일본은 광개토왕비문의 신묘년(391년) 기사를 증거로 삼고 역사를 왜곡하여 당시 왜국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고 주장하고, 한편 남조(南朝) 송(宋)·제(齊)·양(梁) 나라의 역사 기록에 나오는 왜왕의 책봉 기사도 증거로 내세우고 있다. 여기에는 왜왕이 “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제군사왜국왕(倭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제군사왜국왕)”이라는 관작을 인정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송에서는 백제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 대한 왜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듯한 칭호를 내린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하여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의 칠지도(七支刀)도 왜국의 군사적 우세와 한반도 남부 지배를 인정한 ‘번국(蕃國)’ 백제의 성왕이 야마또 조정에 공물로 바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임나일본부’란 명칭은 ‘일본서기’의 6세기 전반에 해당하는 기록에는 빈번히 나타나지만 한국의 기록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이 때문에 그 존재 여부조차 의심되었고 이에 대한 많은 반론들이 제기되었다.

한반도 남부에서 활동했던 ‘왜(倭)’의 문제의 총합으로서 제기되는 임나일본부 문제는 한국 고대사의 복원뿐만 아니라 한일관계사 및 동아시아 역사상(歷史像)의 재구축과 올바른 한·일 관계 정립을 위해서도 중요한 문제이다.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은 한국과 일본의 50여년간의 연구 결과 인정 받지 못하고 있는 설이며, 광개토왕비문은 그들의 주장과는 달리 신라의 지원 요청으로 고구려군이 백제와 가야를 돕기 위해 한반도까지 진출한 왜군을 격퇴했다는 내용이었는데, 그것을 교묘히 조작하여 왜군의 상설적인 한반도 주둔 사실을 주장한 내용으로서 명백한 오류가 있는 설이다.

 *후소오샤 교과서 37-38쪽

<<야마또 조정의 외교정책

한반도의 움직임과 일본

고구려는 반도 남부의 신라와 백제를 압박하고 있었다. 백제는 야마또 조정에 구원을 요청했다. 일본 열도 사람들은 전부터 철 자원을 찾아 한반도 남부와 교류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4세기 후반, 야마또 조정은 바다를 건너 조선으로 출병했다. 야마또 조정은 반도 남부의 임나(가라)라는 곳에 세력권을 차지했다. 후일 일본의 역사서에서 여기에 두어졌던 일본의 거점을 임나일본부라 불렀다.>>

 *38쪽

<<고구려는 남하정책을 취하였다. 바다를 건넌 야마또 조정의 군대는 백제와 임나를 도와 고구려와 격렬하게 싸웠다. 414년에 세워진 고구려 광개토왕비문에 4세기 말부터 5세기 초의 사건으로 이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는 백제의 수도 한성을 공략하여 반도 남부를 석권하였다. 그러나 백제와 임나를 기반으로 한 일본군의 저항으로 인해 정복은 이루지 못하였다.>>

 *32-33쪽

<<중국·조선과의 교류가 왕성해지다

중국에서는 4세기경부터 유목 민족이 북부로 침입해 왔기 때문에 한(漢)민족의 지배자들은 남쪽으로 도망을 가 남과 북으로 나뉘어져 국가간의 싸움이 계속되었다(남북조시대). 중국이 분열하자 한반도에서는 고구려가 북부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남부에는 작은 국가들을 통일한 백제·신라 2국이 일어났다.

야마또국은 백제와 소국(小國)이 분립하고 있던 가라(加羅 ; 任那)지방의 국가들과 결탁하여 고구려·신라와 싸웠다.

5세기에는 야마또 국가의 대왕이 왜국의 왕으로서의 지위와 조선 남부를 군사적으로 지휘하는 권리를 중국의 황제에게 인정받기 위하여 중국의 남조에 여러 번 사절단을 보냈다.>>

 *47쪽

<<신라의 조선 통일

고구려ㆍ백제ㆍ신라의 3국이 다투던 조선에서는 6세기 중반 신라가 세력을 강화해 남단의 가야(가라ㆍ임나)에 침입했다. 7세기 중반 경에 당이 고구려ㆍ백제를 정복하고자 군대를 보내자 신라는 당과 결속하여 2국을 멸망시켰다. 이 때 일본도 백제에 구원군을 보냈으나 대패하였다. 얼마 후에 신라는 당의 힘을 물리치고 조선의 전토(全土)를 통일했다. 신라는 율령제도를 정비하고 불교를 보호했다. 수도 금성(현재의 경주)을 중심으로 불교문화가 번성하였다.>>

일본 고대 역사서인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80척의 배를

거느린 일본 신공황후가 삼한을 정벌했다는 전설이 언급돼

있다. 이를 '심상소학국사부도(尋常小學國史附圖)’(1926)에서

삽화로 설명한 부분이다. 일본 황후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진상품을 바치는 왼편 하단의 사람이 신라 왕이다. 임나일본부

설을 강조하기 위해 신라와 백제 사이 회색으로 표시한 지역에

‘임나(任那)’란 지명을 도드라지게 써 놓았다.

일본 신공황후 앞에 무릎 꿇은 신라 왕

4. 임진왜란(壬辰倭亂)

임진왜란에 대해서는 ‘침략’을 ‘출병’으로 기술하여 일방적 침략 사실을 은폐했고, 임진왜란의 원인을 명나라를 정복하려는 토요또미 히데요시의 개인적 망상으로만 기술했으며, 전쟁 기간에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인적ㆍ물적 피해 상황을 축소했다.

 *후소오샤 교과서 123쪽

<<조선 출병

1세기 만에 전국의 통일을 이루자 토요또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의기는 왕성해졌다. 히데요시는 다시 중국의 명(明)을 정복하여 천황과 자신이 거기에 살고 동아시아에서 인도까지 지배하고자 하는 거대한 꿈에 빠져들어 1592년 15만 대군을 조선에 보냈다. 카또오 키요마사(加藤清正)와 코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 등의 무장이 거느린 일본군은 곧바로 수도인 한성(현재의 서울)을 함락하고 조선 북부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조선측의 이순신(李舜臣)이 거느리는 수군의 활동과 민중의 저항이 있고 명나라 장군도 있어서, 전쟁이 일본에 불리해지자 명과 평화 교섭을 하고 병사를 철수했다.

두 번에 걸친 출병의 결과 조선의 국토와 사람들의 생활이 현저히 황폐해졌다. 명도 일본과의 전투로 쇠퇴하였으며 토요또미가(豊臣家)의 지배도 흔들렸다.>>

 *122쪽

<<토요또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자신의 세력을 외국에까지 뻗치고자 생각하고 있던 토요또미 히데요시는 국내 통일을 완수하자 명의 정복을 계획했다. 히데요시는 1592년 그 통로가 되는 조선에 군대 15만명을 침입시켰다. 일본군은 곧 한성(현재의 서울) 등을 점령하였고 명의 국경 가까이까지 공략해 들어갔다. 그러나 조선의 민중이 각지에서 일어나고, 드디어 수군의 힘도 증강되고 명의 원군도 있어 일본은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그래서 히데요시는 휴전하고 강화(講和)에 관한 논의에 들어갔다. 그러나 강화가 성립되지 않았으므로 히데요시는 다시 전쟁을 시작했으나 히데요시가 병사했으므로 전군이 후퇴했다.>>

5.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

토꾸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조선과의 국교 회복 노력에 대한 설명은 없이 그 사실만을 기술했고, 통신사의 파견 목적ㆍ초빙 이유 등을 설명하지 않고, 일본 대장군의 습직(襲職)을 축하하기 위해 왔던 문화 사절단으로만 기술했다.

조선에서 부산왜관을 설치해 준 사실을 은폐하고, 일본이 외국 땅에 마련한 일본 정부의 행정 기관인 듯이 서술했다.

 *후소오샤 교과서 133쪽

<<쇄국 하의 대외관계

막부는 토꾸가와 이에야스 시절 대마도(對馬)의 무네(宗)씨를 통하여 히데요시의 출병으로 단절되어 있던 조선과 국교를 회복하였다. 양국은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조선으로부터는 장군이 바뀔 때마다 통신사라 부르는 사절이 에도(토오꾜오)를 방문하여 각지에서 환영받았다. 또 부산에는 ‘무네(宗)씨의 왜관(倭館)’이 설치되어 약 400-500인의 일본인이 살면서 무역과 정보 수집에 종사하였다.>>

 *131쪽

<<막부의 대외정책-조선과 중국

토꾸가와 이에야스는 대마도의 무사 무네(宗)씨를 중개인으로 조선과 국교 회복에 성공하고, 대마도 사족(士族)은 매년 무역선을 보냈다. 이에미쯔(家光) 시절부터 장군이 바뀔 때마다 400명 정도의 조선 사절단(통신사)이 방문하게 되었다. 이에야스는 명과의 국교도 희망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나 무역을 하려고 오는 중국인의 배는 늘어났고 나가사끼(長崎)에 사는 중국인도 늘었다.>>

6. 정한론(征韓論)

정한론 부분에서는, 조선의 조약 체결 거부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일본 입장에서 편파적으로 기술했고, 일본이 기존의 교린(交隣) 체제를 일방적으로 파기하려 했기 때문임을 설명하지 않았으며, 조선이 사이고오 타까모리(西鄕隆盛)를 살해할 가능성이 있었던 것처럼 가정했다.

 *204-205쪽

<<이와꾸라 사절단과 정한론

일본 국내에서는 1873년 일본의 개국 권유를 거절한 조선의 태도를 무례라고 하여, 사족(士族)들 사이에 무력을 배경으로 조선에 개국을 강요하자는 정한론이 터져 나왔다. 일부 사족들이 정한(征韓)의 전투로 자신들의 존재 의의를 나타내고자 한 일면이 있었다. 그들 중 사이고오 타까모리(西鄕隆盛)는 자신이 사절로 조선에 가겠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자신이 조선에 가서 살해 당하면 그것을 명목으로 일본이 출병하고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게 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 *186쪽

<<새 정부와 세계-중국ㆍ조선과 관계

인근의 중국ㆍ조선과 관계에서는 먼저 1871년 청국과 대등한 조약을 체결했다. 한편 조선은 일본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으므로 사이고오(西鄕)와 이따가끼(板垣)와 같은 사족(士族)들은 군대를 보내 조선을 공격하자고 했다(정한론). 마침 구미(歐美)에서 귀국한 오오꾸보(大久保)는 국내를 정비하는 것이 먼저라고 주장하여 이 움직임을 억제하였기 때문에 정한론을 주장했던 사이고오 타까모리는 정부를 떠나게 되었다.>>

7.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

조선의 발포를 유도한 일본의 계획적인 군사 작전이었다는 사실 등 도발의 주체ㆍ목적ㆍ경위를 은폐했다.

 *후소오샤 교과서 202쪽

<<청ㆍ조선과의 국교 수립

한편 이에 앞서 일본 군함이 조선의 강화도 부근에서 조선군과 교전한 사건(강화도 사건, 1875년)을 계기로 일본은 재차 조선에 국교 수립을 강하게 요구했다. 청조가 조선에 일본과 국교 교섭 개시를 허가한 결과 1876년 일조수호조규(日朝修好條規)가 체결되었다. 이로써 오랜 현안이었던 조선과 국교 문제도 해결되었다.>>

 *186-187쪽

<<중국ㆍ조선과의 관계

1876년 일본은 조선에서 강화도 사건을 일으켰다. 이를 계기로 일본정부는 조선에 압력을 가하여 일조수호조규(日朝修好條規)를 체결하였다. 정부는 일본이 구미 제국에 강요 당했던 것과 같은 불평등 조약을 조선에 강요했다.

이것은 조선의 강화도 부근에서 일본의 군함이 조선측 공격을 유도하는 행동을 취했기 때문에 조선군으로부터 포격을 받고 일본측이 이에 응전한 사건이었다.>>

8. 조선의 근대화와 일본과의 관계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을 불식하려 했던 목적을 숨기고, 군사 원조로 조선의 독립에 기여한 것처럼 서술함으로써 사실을 호도했다.

 *후소오샤 교과서 218-219쪽

<<한반도와 일본의 안전보장

일본은 조선의 개국 후 그 근대화를 돕기 위해 군제 개혁을 원조했다. 조선이 외국의 지배에 굴하지 않는 자위력 있는 근대 국가가 되는 것은 일본의 안전에 있어서도 중요했다. 그런데 1882년 군제 개혁에 소외당한 일부 조선 군인의 폭동이 발생했다(임오사변).>>

 *213쪽

<<동아시아의 정세

메이지(明治) 10년대의 일본에서는 민권론자들이 일본과 함께 아시아 제국에서 민권의 신장과 독립을 기대하면서 아시아 제민족과 연대를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구미열강의 아시아 침략이 예상되는 가운데, 일본 정부는 조선에 진출하지 않으면 일본의 장래도 위험하다며 대외팽창정책을 강화하고 있었다.

조선에서는 일조수호조규를 체결한 일본과, 조선의 지배권을 주장하는 청이 세력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조선 국내에서는 메이지유신을 배워 근대화를 도모하고자 하는 개혁파와, 청과의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보수파의 대립이 격렬해졌으며, 일본은 청에 대항하기 위하여 군비증강을 꾀하고 있었다.>>

9.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

반봉건ㆍ반외세운동을 ‘동학의 난’이나 ‘농민폭동’이라고 표현한 것은 부적절하며, 농민운동을 종교집단운동으로 한정한 것은 오해의 여지가 있다.

전주성을 점령했을 뿐인데 ‘한성에 육박한 것’이라고 쓰고 있으며, 일본이 청ㆍ일전쟁을 유발할 목적으로 계획적으로 파병한 사실을 은폐하고, 청의 파병에 대한 단순 대응조치인 것처럼 서술했다.

 *후소오샤 교과서 220쪽

<<동학농민운동

1894년 조선의 남부에 동학의 난(갑오농민전쟁)이라고 불리는 농민폭동이 일어났다. 동학당은 서양의 기독교(서학)에 반대하는 종교(동학)를 신앙하는 집단이었다. 그들은 외국인과 부패한 관리들의 추방을 목표로 하여 한 때는 수도 한성에 육박하는 기세를 보였다.>>

 *206-207쪽

<<갑오농민전쟁

1894년 조선에서는 일본과 구미제국의 진출과 정부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여 동학을 신앙하는 농민이 중심이 되어 반란을 일으켰다(갑오농민전쟁). 농민군은 화승총이나 창 등을 손에 들고 외국세력의 축출과 정치개혁을 요구하며 각지에서 정부군을 격파하고 수도(서울)에까지 임박하였다. 정부는 청국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청은 조선에 출병하였다. 전부터 청과의 전쟁을 준비하던 일본은 이 소식을 접하자 곧바로 조선으로 출병했다.

동학은 종교의 일종으로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여 침략의 앞잡이가 되어 조선의 풍습을 파괴한다며 기독교(서학)에 반대했다. 이 해의 간지가 갑오에 해당하므로 갑오농민전쟁이라 부르고 있다. 또 동학의 난이라고도 한다.>>

 *218-220쪽

<<일ㆍ청전쟁

청은 최후의 유력한 조공국인 조선만은 잃지 않으려고 하여, 일본을 가상적국으로 삼게 되었다.

일본은 조선의 개국 후 그 근대화를 돕기위해 군제개혁을 원조했다. 조선이 외국의 지배에 굴하지 않는 자위력 있는 근대국가가 되는 것은 일본의 안전에 있어서도 중요했다. 그런데 1882년 군제개혁에 소외당한 일부 조선 군인의 폭동이 발생했다(임오사변).

청은 이에 편승하여 수천의 군대를 파견하여 곧바로 폭동을 진압하여 일본의 영향력을 약화시켰다. 1884년에는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본받아 근대화를 추진하고자 했던 김옥균에 의해 쿠데타가 일어났는데, 이 때도 청의 군대는 친일파를 철저히 탄압했다(갑신사변).

약간의 병력밖에 보유하지 못한 조선은 청에 진압을 위한 출병을 요구했고 일본도 갑신사변후 청과 합의에 따라 군대를 파견하였으며, 일-청 양군이 충돌하여 일-청 전쟁이 시작되었다.>>

 *206-207쪽

<<일ㆍ청전쟁

일ㆍ청 양국이 출병했을 때 농민군은 외국의 간섭을 피하기 위하여 정치개혁을 조건으로 정부와 휴전하고 있었다. 일본은 영국 등이 중립을 지키겠다는 확약을 하자 단독으로 개혁안을 조선 정부에 강요했다. 그리고 일본은 회답이 불만이라며 왕궁을 점령하고 조선 정부에 청군의 철수를 요구하게 했다. 이어 청의 해군을 공격한 후 전쟁을 선포하여 일ㆍ청전쟁을 시작했다.>>

10.러일전쟁

벌목장을 군사기지로 잘못 해석했으며, 일본이 먼저 시작한 전쟁을 러시아가 무력으로 한반도를 장악하여 일본의 안전이 위협 받음으로써 발발된 것으로 기술했다.

만주와 한반도 지배권 확보라는 전쟁의 목적을 은폐하고, ‘인종간의 전쟁’으로 미화했으며, 한국의 지배권을 인정받으면서 억압받는 민족에게는 독립의 희망을 주었다는 식으로 모순되게 기술했다.

 *후소오샤 교과서 224쪽

<<일ㆍ러전쟁과 전쟁의 추이

러시아는 만주의 병력을 증강하여 조선 북부에 군사기지를 건설하고, 츠시마(対馬)의 맞은편 해안에 위치한 조선 남부의 토지를 조차했다. 그대로 묵시하면 러시아의 극동 군사력은 일본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증강되는 것은 명확했다. (일본)정부는 더 늦기 전에 러시아와 전쟁을 시작할 결의를 굳혔다.

 1905년 9월 포츠머드조약에서 일본은 한국(조선)의 지배권을 러시아로부터 인정받았고, 관동주(關東州)의 조차권을 취득하고, 러시아가 건설한 남만주철도의 권익을 양도받았다. 일ㆍ러전쟁은 일본의 생사를 건 장대한 국민전쟁이었다. 일본은 이에 승리하여 자국의 안정보장을 확립했다. 근대국가로 막 태어난 유색인종국 일본이 당시 세계 최대의 육군대국이었던 백인제국 러시아에 승리한 것은 세계의 억압된 민족에게 독립에 대한 무한한 희망을 주었다.>>

 *210-211쪽

<<일ㆍ러전쟁-전쟁시작

일ㆍ영동맹이 체결되자 러시아는 시베리아 철도의 완성을 서둘러 일본과 전쟁에 대비했다. 만주는 러시아에, 조선은 일본의 지배 하에 둔다는 교섭이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있었으나, 결론이 내려지지 않아 전쟁의 위기가 닥쳐왔다. 일본에서는 군비가 증강되고 신문이나 잡지 대다수가 러시아와 개전을 주장했다. 그런 가운데 기독교도나 사회주의자들은 전쟁반대를 외쳤다.

1904년 일본은 조선의 인천항에서 러시아 함대를 공격한 후 전쟁을 선포하여 일ㆍ러전쟁이 시작되었다.>>

11.관동대지진(칸또오다이신사이:関東大震災)

관헌(군경)에 의한 민간인 살해 사실을 은폐했고, 살해 대상도 조선인이 대부분(약 7,000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인, 중국인, 사회주의자 등'으로 병렬하여, 사건의 본질에 해당하는 조선인의 피해를 축소 기술했다.

 *후소오샤 교과서 242쪽

<<관동대지진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이 일어나 토오꾜오, 요꼬하마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은 괴멸상태가 되고 수도권은 혼란에 빠졌다. 이 혼란 속에서 조선인이나 사회주의자가 폭동을 일으킨다는 유언비어가 확산되어 많은 조선인, 중국인, 사회주의자 등이 살해되었다.

자경단: 경찰도 경계를 호소하는 가운데 자경단이 조직되어 많은 조선인이 학살되었다. 희생자는 수천명이라고 한다.

 *240쪽

<<관동대지진

1923년 9월 1일 리히터 규모 7.9라는 대지진이 남부 관동 일대를 덮쳤다. 요꼬하마, 토오꾜오 등에서는 시 전체에 화재가 발생하여 3일간 계속되었다. 이재민은 약 350만명, 사망자와 행방불명자가 14만명을 넘었다. 이를 관동대지진이라고 한다.

이러한 혼란 중에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 ‘사회주의자가 폭동을 일으켰다’는 등의 소문이 경찰 등에 의해 확산되었다. 이 때문에 수천명의 조선인과 수백명의 중국인이 군대, 경찰, 주민 등이 만든 자경단에 의해 학살되었다.>>

이 사건은 사람들이 평소 조선인이나 중국인을 차별했기 때문에 그 보복을 두려워하여 유언비어를 사실로 믿고 일으킨 사건이다.

12. 조선인 강제동원과 황민화정책

황민화(皇民化) 정책의 내용이 불분명하고, 조선에서 수탈상을 기술하지 않았으며, 조선인을 일본국민의 일부로 간주하여 일본 식민정책의 본질을 은폐했으며, 강제동원된 군대위안부 정신대(挺身隊)에 관한 내용은 기술하지 않았다.

 *250쪽

<<강화되는 통제

조선에서는 “황민화”의 이름 하에 일본어 사용과 성명을 일본식으로 고치게 하는 창씨개명을 강력히 추진했다. 나아가 지원병제도를 실시하고 조선 사람들을 전쟁터에 동원했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운동은 계속되었다. 항일조직이 다수 조직되었고, 국외로 탈출한 사람들 중에서도 만주에서 게릴라 부대를 조직하는 등 싸움을 계속한 사람들이 있었다.

「조선신궁」에 참배하는 조선의 학생들 : 일.중 전쟁 이후 “황민화”를 철저히 하기 위해 조선 사람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한 마을에 1개의 신사를 설치하도록 강요하여 신사 수가 급증했다.>>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짓기 위해 일제에 의하여 파헤쳐진

서울 남산(南山)

현재의 남산식물원과 남산서울과학교육원과 안중근의사

기념관 자리에 들어섰던 조선신궁은 일제가, 산신제를 올리던

남산의 국사당(國祀堂)을 헐고 조성한 12만 7900여평 부지에

세운 거대한 일본의 국가신도(國家神道)의 신사(神社)였다.

천황의 조상신이라고 하는 하늘의 해를 들고 있는 천조대어신

(天照大御神:아마떼라스오오미까미:あまてらすおおみかみ)와

그들이 하늘나라라고 하는 타까마가하라(高天原:たかまがは

ら)에서 천황의 조상이 가지고 왔다는 3종의 신기 등을 안치

(安置)해 놓고 일본 지배하에 있던 모든 국민들에게 참배(參拜)

하게 했다. 1945년 광복 이후 바로 해체됐으나 지금도 백범광

장에서 과학교육원으로 오르는 가파른 계단은 당시 조성했던

그대로 남아 있다. 공중에서 촬영된 이 사진을 보면 그들의 신

전 부지 외에도 오른쪽에 도로를 내면서 많은 나무를 잘라내는

등 남산을 마구잡이로 훼손했음을 알 수 있다.

서울 남산 기슭의 지금의 남산식물원 자리에 건립되었던

조선신궁(朝鮮神宮) 전경. 총면적 12만7천9백여평의 어마어마

한 규모로, 정전(正殿), 참배소(參拜所) 등 15개의 건물을 배치

하고 384개의 돌계단을 조성하였다.

 *259쪽

<<모든 것을 전쟁에

식민지 통치 하의 조선인에 대해서도 일본식의 성(姓)을 따르도록 하고(창씨개명), 신사참배가 강요되었으며 일본인에 동화시키려는 황민화 교육이 진행되었다.>>

 *264쪽

<<사치는 적이다

전세가 악화되자 지금까지 징병을 면제받았던 대학생도 군대에 소집되게 되었다. 더욱이 조선으로부터 70만명, 중국으로부터 4만명의 사람들을 강제적으로 연행하여 공장이나 광산ㆍ토목공사 등에 혹독한 조건에서 일하게 하였다. 조선, 대만에도 징병제를 실시하여 많은 조선인, 중국인이 군대에 들어갔다.>>

13.군대위안부 정신대(挺身隊)

일본군에 자행된 가혹행위의 상징인 군대위안부 문제를 고의로 누락시켜 잔혹행위의 실체를 은폐했다.

최근 유엔인권위원회에 보고된 바 있는 쿠마라스와미(Coomaraswamy)의 ‘전시 군 성노예 문제에 관한 특별 보고서’ 및 맥두걸(McDougall)의 ‘전시 조직적 강간, 성노예, 노예적 취급 관행에 관한 특별 보고서’에서도 군대위안부를 반인륜적 전쟁범죄 행위로 규탄했다.

일본 정부도 93년 8월 군대위안부 관련 ‘관방장관 담화’에서 일본군이 위안소 설치 및 운 영에 직ㆍ간접적으로 관여했음과 모집, 이송, 관리가 감언, 강압 등에 의해 총체적으로 본인들의 의사에 반해 이루어졌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후소오샤의 새 교과서 검정 신청본에서는 이 사실을 고의로 누락시켰다.

 *현재 사용 중인 ‘동경출판(東京出版)’ 역사 교과서 263쪽

<<전쟁의 장기화와 중국ㆍ조선

가장 많은 희생을 낸 것은 중국이었다. 전투나 강제연행 등에 의해 많은 인적 피해를 낸 것 외에 많은 경제 피해를 냈다. 또 국내의 노동력 부족을 보충하기 위하여 다수의 조선인과 중국인이 강제적으로 일본에 연행되어 공장 등에서 가혹한 노동에 종사 당했다*. 위안부로서 의사에 반하여 전쟁터에 보내진 어린 여성도 다수 있었다.

1945년에는 재일 조선인의 수는 그 때까지 이주해 온 사람들까지 합하여 조선 총인구의 1할에 해당하는 2백 수십만 명에 달하였다.>>

 *후소오샤 교과서....정신대(挺身隊) 사건을 고의로

누락시키고 있음.

14. 우리 정부의 왜곡 교과서 시정 요구

정부는 2006년도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내용 중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설을 기정사실화하고, 군대위안부 강제동원 사실을 고의로 누락한 부분 등 총 35개 항목에 걸쳐 이를 재수정해 주도록 일본 정부에 요구했다.

김대중 정부 때의 한승수(韓昇洙) 외교통상부장관은 테라다 데루스케(寺田輝介) 주한 일본대사를 정부중앙청사로 불러 A4용지 36쪽 분량의 재수정 요구안과 비망록(Aide―Memoire)을 전달하고 일본 정부가 즉각적이고도 성의 있는 조치를 취해 줄 것을 강력히 촉구했다.

한장관은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은 우리 국민이 가슴깊이 묻어둔 마음의 상처를 자극하는 것이며, 과거를 직시하고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발전시켜 나간다는 한일 우호관계의 기본 전제를 훼손한 것”이라며 “조속한 시일 내에 시정조치를 취하고, 이러한 문제가 재발되지 않도록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해 달라”고 요구했다.

35개 재수정 요구 항목 중 교과서별로는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측의 후소오샤(扶桑社) 교과서가 가장 많은 25개 항목에 걸쳐 재수정을 요구받았으며, 기존 7종의 교과서는 10개 항목에 걸쳐 재수정을 요구받았다.

새역모는 일본 극우단체인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약칭이며, 새역모'는 1997년 1월 동경대학의 후지오까 노부카쓰(藤岡信勝) 교수 등이 자유주의 사관에 입각, 내셔널리즘(민족주의)을 주장하며 결성한 우익단체로, 주변국들로부터 역사왜곡의 주범이라는 비난을 샀다.

후소오샤(扶桑社)의 교과서는 ‘일본을 향하여 대륙에서 한 개의 팔뚝이 돌출했다’며 한반도 위협설을 주장했으며, 임진왜란은 ‘조선 출병’으로, 한중 관계는 ‘중국의 복속국’으로, 한국 강제병합은 ‘조선의 개국 후 근대화를 돕기 위한 일‘이었으며, 일부에서 병합 수용의 목소리가 있었다.”는 식으로 왜곡 기술하고 있다.

오오사까서적(大阪書籍), 시미즈서원(淸水書院)의 교과서는 반봉건, 반외세 운동인 동학농민전쟁을 ‘동학의 난’ ‘폭동’ 등으로, 일본문교출판(日本文敎出版)의 교과서는 “안중근이 이또오(伊藤博文)를 암살했기 때문에 일본은 한국을 병합했다.”고 각각 기술하고 있다.

정부는 재수정 요구에 대해 일본 정부가 성의 있는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각 분야의 한일 협력 중단, 일본 문화 개방 일정 전면 연기, 유엔 등 국제기구에서의 교과서 수정 권고 결의안 채택 등 다양한 외교적 대응책을 단계적으로 취해 나갈 방침이다.

한편 테라다 주한 일본대사는 “한국정부의 입장을 정확하고 신속히 본국 정부에 전달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일본측은 교과서 검정이후 한국여론과 국민감정, 한국정부의 심각한 분위기에 대해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고 말하고 “한일관계를 발전시키려는 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 한국정부관계자들에게 심려를 끼친 데 대해 무겁게 받아들인다”고 덧붙였다.

정부 왜곡대책반은 문화관광부 관계자를 포함한 전체회의를 다시 열고 향후 구체적인 대응방안 등을 협의했다.

일본의 코이즈미 �이찌로오(小泉純一郞) 총리와 주요 각료는 한국의 역사교과서 재수정 요구에 대해 일제히 “재수정에 응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코이즈미 총리는 “재수정은 불가능하다.”며 “다만 장래 어떻게 대처할지를 긍정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장래를 위해 어떤 식으로 협력할 것인가를 역사학자 전문가 등과 함께 보다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예전부터 얘기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는 한일학자들이 공동 참가하는 역사연구 등을 추진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일본 정부대변인인 후꾸다 야스오(福田康夫) 관방장관도 “정부로서는 진지하게 받아들여 음미할 필요가 있다”면서도 “명백한 사실 오류가 없는 한 재수정은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토야마 아쯔꼬(遠山敦子) 문부과학상도 기자회견에서 “검정에 합격한 교과서는 명백한 오류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수정할 수 없다.”고 기존 주장을 되풀이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들이 한국 정부의 재수정 요구 대상이 됐는가?

“일본 역사 교과서는 전근대사회에서 조공이 의례적인 외교 행태에 불과했는데도 조공 체제 아래의 속국과 근대 식민지와의 차이에 대한 설명 없이 조선을 중국의 복속국으로 표현했다. 또 한반도가 대륙에서 돌출해 일본을 위협하고 있다며, 조선조 말 일본 방위를 명목으로 한국에 ‘출병’했다고 서술하고 있는데 이는 일제의 침략 지배를 합리화한 것이다. 왜구(倭寇)가 일본 내의 기근 등으로 인해 발생했는데도 이에 대한 설명을 누락한 채 ”왜구에는 일본인 외에 조선인, 중국인 등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기술한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일본에서는 ‘군대위안부를 학생들이 배우는 역사교과서에서까지 거론해야 하는가?’라는 견해도 있는데, 군대위안부 언급이 한 줄 들어가고 빠지고 하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이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군대위안부 문제는 인륜을 저버린 일본군의 가혹 행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군대위안부 문제가 아직 현재 진행형의 문제로 남아있는 만큼 우리로서는 이것이 한 줄 포함되느냐 아니냐가 매우 중요하다.

처음에는 사관(史觀)을 검토한다는 얘기도 있었는데, 외교부에서 사관 검토에 대해서는 신중하자는 의견을 냈다. 사관의 문제로 흘러갈 경우 불필요한 학문 외적 논쟁이 유발되는 등 본말이 전도되지 않을까 우려했다. 결국 사관을 문제 삼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이것을 이렇게, 저것은 저렇게 수정하라.’는 식으로 자구(字句)만 문제 삼은 것도 아니다. 전체적인 서술 방식을 중시했다.

일본의 대응을 어떻게 전망하는가 하면, 한국 정부에서 지나친 요구는 하지 않았다고 본다. 일본도 받아들일 수 있는 현실적인 것들이다. 일본의 적절한 반응이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일본은 과거에도 검정절차를 거친 교과서를 재수정한 사례가 있다. 일본측이 재수정하지 않는다면 우리 정부 차원의 후속 조치가 있을 것으로 알고 있다. 일본측도 고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장기적으로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겠는가 하면, 일본은 문부과학성 산하 국제교육정보센터에서 자국에 관한 해외 자료의 잘못을 찾아내 수정을 요구하는 일을 계속해 왔다. 우리나라에서는 교육부 산하 한국교육개발원의 한국관(韓國觀) 시정사업팀이 이런 역할을 맡고 있다. 앞으로 한국관 시정사업팀의 역량을 강화하고 지원을 늘려야 한다.

일본의 교과서 재수정 요구로 일본은 우회카드로 '유야

무야'를 노릴 듯하다.

한국 정부가 8일 일본 역사교과서의 재수정을 공식 요구하는 공세를 펼쳤으나 일본은 “재수정은 할 수 없다.”는 기존 방침을 되풀이하는 밋밋한 대응을 하는 데 그쳤다.

일본 정부로서는 한국이 얼마나 열심히 교과서를 분석해서 얼마나 설득력 있게 수정 의견을 제시했느냐 하는 것은 별로 중요치 않다. 문제는 수정을 해 줄 것이냐, 아니냐에 달려 있는데 일본 정부가 재수정에는 응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에 한국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재수정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희박하다.

일본 정부는 일단 검정에 통과한 교과서를 재수정하면 한국의 압력에 굴복했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에 재수정에 응해서는 안 된다는 판단을 굳힌 것으로 보인다.

1982년과 1986년 한국과 중국측의 반발에 따라 교과서를 재수정했다가 지금까지 보수파의 공격 대상이 되고 있는 것도 일본 정부가 재수정에 나서지 못하게 하는 또 다른 이유다.

일본은 당분간 “한국의 처지를 충분히 이해한다.”고 하면서 “현 검정제도에서는 명백한 오류가 없는 한 재수정은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되풀이할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한국측의 수정 요구가 ‘명백한 오류’를 지적한 것인지 여부가 또 다른 쟁점이 될 가능성은 있다. 물론 일본으로서는 한국의 주장에 대해 대부분 ‘시각차’라고 치부할 가능성이 크다.

15. 일본 후소오샤 교과서 채택율 전국 0.4%에 그쳐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시킨 새역모의 교과서 후소오샤 출판 역사교과서가 새역모의 열띤 홍보전략으로 교과서 판매가 높아질 것으로 보였으나, 교과서 채택 작업이 끝난 8월 31일, 교과서 채택율은 전국적으로 약 0.4%밖에 미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 어린이와 교과서 전국 네트워크 21'의 이 타와라 요시후미(俵義文) 사무국장은 1일, 15개의 시민단체들과 함께 잠정 집계한 이 같은 결과를 발표하면서, "후소오샤판 공민 교과서 채택율 역시 약 0.4% 밖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지난 2001년 채택율 0.04%에 비해 10배 가량 늘어나긴 했지만 새역모가 목표로 삼았던 10%에는 크게 못 미쳤다."고 밝혔다.

이들 시민단체의 집계 결과에 따르면, 전국 공립중학교 583 채택 지구에서 후소오샤의 역사교과서를 채택한 곳은 토찌기(栃木)현 오다와라시(小田原市)교육위원회는 후소오샤 발행 새 역사와 공민 교과서를 모두 채택했고, 토오꾜오또 스기나미구(東京都杉並区)교육위원회에서는 새 역사 교과서만 채택했다. 또한 일관(日官)학교, 양호(養護)학교 등 토오꾜오 도립의 나까다까(中高) 4개 학교가 만장일치로 새 역사, 공민 교과서를 채택했다.

채택 부수로 따지자면 후소오샤판 새 역사(歷史) 교과서는 4,800부, 새 공민(公民) 교과서는 2,300부가 된다. 이러한 수치는 시민단체들만이 집계한 것으로 문부과학성의 최종 확정 부수 발표는 나중에 발표될 예정이다.

새역모를 비롯한 극우세력들은 당초 교과서 채택율 10%를 목표로 삼았었다. 또한 집권 자민당 등의 지원을 받으면서 채택에 적극 나서 한중은 번져가는 우경화에 우려를 표시했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의 뜻과는 다르게 낮은 채택율이 나왔다는 보도가 전해지자 대부분 일본 국내 의견은 한국, 중국을 비롯한 네트워크21과 같은 일본 내 시민사회단체의 저지 움직임 때문에 나타난 결과라는 것이 압도적이다.

타와라 사무국장은 "새역모가 정치가들을 이용해 전국 채택 지구에 채택 압력을 가했지만, 이토록 저조하게 나타난 이유는 2001년부터 시민단체와 여러 학부모들이 아이들을 위해 펼쳐온 저지 노력의 결과이다."라고 하면서 "이는 분명 향후 헌법과 교육기본법 개악 반대 운동에 연결될 것이라 본다."고 전했다.

일본 각현의 교육위원회에서는 새 역사 교과서 채택에 관한 회의를 지난 6월에 열렸다. 그래서, 한국의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후소오샤의 왜곡역사교과서를 채택하지 말아 달라고 많은 간곡한 편지를 보냈다. 많은 다른 경로를 통하여 그 채택이 저지되어서 그 결과 2005년 6월에 열린 일본 각 도도부현(都道府県)의 역사교과서 채택 회의에서 논의한 결과 전국의 중고등학교의 0.4% 정도가 후소오샤 교과서를 채택하게 되었다.

역사는 왜곡해서 고치려고 해도 고칠 수 없는 것이므로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있었던 그대로 가르쳐서 역사의 심판을 받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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