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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수암 박동호 선생 이야기

신상구 | 2015.12.13 16:19 | 조회 2098

                                                                  일수암 박동호 선생 이야기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칼럼니스트) 신상구

   일수암(一修庵) 박동호(朴東浩(1897~1991) 선생은 故 최재충 선생, 고 계연수 선생에 이어 2015년 12월 21일 오후 대전 중구 뿌리공원 대강당에서 개최되는 제3회 천부경의 날 대축제에서 공로상을 수여받을 예정이다. 그러나 일수암 선생은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필자가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과 박사과정에서 천부경에 대한 강좌를 신청해 듣고, 그 후 천부경을 계속 조사연구해 왔지만, 故 최재충 선생과 고 박동호 선생에 대한 사료는 단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을 정도로 생소한 인물들이다. 이번 제3회 천부경의 날 대축제를 안내하는 과정에서  故 박동호 선생에 대한 자료를 천부경협회 홈페이지에서 처음 접해보고 그대로 전재하오니, 강호제현께서 한 번 읽어보시고, 우리 한민족의 최고경전인 천부경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많이 받고, 천부경을 널리 홍보하는 데에 일익을 담당해 주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박동호朴東浩 선생님은 본관은 충주박씨이며 천부경 성자 또는 천부경 할아버지로 불린다.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나 민족경전 천부경의 발굴과 연구와 보급에 힘쓰면서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홍익민족혼을 구현해 우리 민족 근현대사에 있어 천부경 성자聖子로 평가받고 있다.
  26세에 한말의 거유巨儒 전우田愚의 문인이 된다. 35세에 이상규선생의 천부경주해天符經註解란 책을 접하면서 한민족 고유문화의 위대성을 깨달아 민족역사에 심취하여 민족학 연구에 몰입하게 된다. 1975년 38세에 한의사의 길을 걷게 되며 의학교재로 사용되던 동서의학의 결합을 통한 민족의학 발전을 주창한 동서의학요의東西醫學要義를 간행하였고 서울시한의사회 이사, 한의사자격시험 출제위원, 한의원을 차려 후진 양성과 어려운 이웃에게 인술을 베풀었다.
  광복 직후에는 소외된 땅 함경도 청진에 관북대학 설립을 발기, 개교에까지 이르게 하여 후진 양성에도 힘썼다. 50세에 대전에 있는 종중 재산을 정리하러 내려왔다가 6.25동란으로 38선이 막히는 바람에 북의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고 이산離散의 아픔 속에서 생활을 하였다.
  선생은 돌아가시기 1년 전인 1990년 7월 11일에 작성한 유언공증서에 자신의 시신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해부실습용(Cadaver)으로 기증하고 골격 일체는 학생들의 학습용 표본으로 사용하도록 직접 서울대학을 찾아가 이와 같은 뜻을 전했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이며 장기 기증과 해부용으로 의대에 기증한 최초의 역사이다. 기증하고 남은 장기와 골격까지도 후학들의 학습에 사용해달라는 유언에 따라 서울의대 교수회의 결정으로 학습표본으로 영구보존하게 하였다.
  의학발전에 기여한 그의 살신 실천은 120여 년 전 대한제국때 의과대학이 생긴 후 처음이었고, 이에 감화를 받은 서울의대와 전국의 의대 교수들이 뒤를 따랐으며 당시 전국적인 장기기증운동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따라 서울대 병원측은 기증받은 선생의 각막을 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 실명환자 2인에게 각각 이식하여 광명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해부 후 골격은 유리관에 안치되어 지금도 의대 실습실에 골격표본으로 보존되어 있다.  
  월남후에도 큰아들로 하여금 한양대학교 설립에 큰 기여를 하게 했으며, 타개하는 순간에 당시 10억원에 이르는 전 재산을 자신이 설립한 민족재단 단수일도학회에 내놓는 등 모든 재산, 뼈 한마디, 살 한점도 온전히 세상에 바치고 떠남으로써 인간 박동호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인간사랑과 민족사랑을 철저히 구현한 단군의 후예로 추앙받고 있다. 항상 허름하고 검소한 차림새에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형형한 눈빛에 기가 넘치는 풍모, 그리고 해박한 고전지식과 놀라운 기억력, 겸손하면서도 바위 같은 신념으로 후진교육과 인술, 그리고 천부경 연구로 평생을 바쳤다.
  단군성전 건립으로 시비가 한창 열을 올리던 1985년 단군문화의 선양과 발전을 위해 서울 사직동에 있는 단군성전 설계비용으로 3천만원을 내놓았다. 이는 금액의 많고 적음을 떠나 정신적으로 사람들에게 큰 받침이 되어주었다. 선생은 단체행사 때 천부경을 반드시 봉독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천부경에 대한 선생의 집념은 특별하여 매일 여섯 번씩 염송念誦했다고 한다. 그에게는 천부경이야말로 절대적 대상이었던 것이다.
  한편 선생은 우리 전통예술에도 조예가 깊어‘도덕과 예술’을 저술하고 그 속에서‘12단금 도인술’이라는 한국판 건강체조의 보급을 제창하기도 했다. 또한 우리 가락에도 조예가 깊어 풍물(속칭 농악)에도 큰 관심을 보여서 우리 민족정서를 이어 내려온 구성진 가락을 통해 민족자존의 긍지를 일깨워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풍물을 협동정신의 밑바탕으로 여겨 축제에는 반드시 풍물을 올려야 격에 맞는다는 주장이었다.
  선생은 계연수 선생님 다음으로 <묘향산妙香山에서 천부경>을 만져 보았다고 한다. 1948년 6월에 묘향산을 답사하여 천부경 암각을 직접 확인했다는 증거물로 그 당시의 묘향산 안내지도를 타계하실 때까지 40여년을 간직하고 계셨다. 묘향산 단군굴 석벽에 조각되어 있는 천부경 원문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며 실제로 만져보았다고 증언했다. 이 사실을 비석에 새겨 묘향산 석벽에 천부경이 새겨져 있음을 확실히 했다. 그는 천부경 81자 속에 담긴 진리가 4성四聖(공자?노자?석가?예수)이 설說한 가르침을 모두 아우르고 있다고 했다. 이는 유불선儒彿仙 3교를 포용한 옛 풍류도風流道와 맥을 같이한다.
  선생은 세계평화를 종국의 목표로 삼고 있다는 천부경사상을 널리 선양하기 위해서 경주 월성, 경기 퇴계원과 교문리에 3개의 제단을 모아‘단군 한왕검 천부경 홍익인간일체비’라는 석조물을 조성했다. 이 비에는 단군 천진天眞과 천부경 원문을 음각해 놓았다.
  선생은 철저히 돈을 아껴 민족의 통일과 민족문화의 창달을 위하여 사용하도록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피나는 근검절약을 실천하셨다. 월 3~4만원의 비용으로 생활을 하고, 하루 세끼를 순 현미밥으로 지어 자시는 것 외에는 돈을 쓰지 않으셨다. 어쩌다 밖에 나오는 날은 점심을 거르는 것이 보통이었고, 일반버스를 타고 다녔다. 종이를 아끼기 위해 담배갑이나 그 속의 은박지, 달력 뒷면을 이용해 메모를 하고 허드렛물 한 방울도 함부로 버리지 않는 근검절약을 몸소 실천했으며 그 유품들이 남아있다. 특히 1990년 6월 우리 민족사상 우수성의 연구와 전파만이 우리 겨레가 사는 길이라는 신념으로 민족 최고의 경전인 천부경의 연구와 전파를 위해‘단수일도학회檀水一道學會’재단 설립을 추진하다 95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단수일도학회檀水一道學會’는 단군과 수운水雲 최제우선생의 뜻을 잇는다는 의미의‘단수檀水’이다. 선생의 삶은 천부경 그 자체 이므로 오늘날 천부경할아버지, 천부경성자로 불리고 있다."

   이상 소개한 바와 같이  일수암(一修庵) 박동호(朴東浩(1897~1991) 선생은 천부경의 발굴과 연구와 보급에 힘쓰면서 천부의학을 개척하고 단군전을 건립하는 데에 많은 업적을 남긴 대단한 인물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번 천부경 공로상 수상을 계기로 하여 그분의 놀랄만한 업적이 세상에 널리 알려져 앞으로는 국학에서 그분에 대한 조사연구와 교육이 활발하게 전개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필자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1994),『아우내 단오축제』(1998),『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997) 등 4권
   .주요 논문 : “천안시 토지이용계획 고찰”, “천안 연극의 역사적 고찰”, “천안시 문화예술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 “민속학자 남강 김태곤 선생의 생애와 업적”, “태안지역 무속문화의 현장조사 연구”, “태안승언리상여 소고”,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지역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천안지역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한국선도의 맥을 이은 일십당 이맥의 괴산 유배지 추적과 활용방안” 등 65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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