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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당 장일순의 생애와 업적

신상구 | 2015.12.18 14:17 | 조회 1970

                                                                무위당 장일순의 생애와 업적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칼럼니스트) 신상구(辛相龜)

   무위당(无爲堂) 장일순(張壹淳)은 1928년 10월 16일 강원도 원주시 평원동에서 부친 장복흥(張福興)과 모친 김복희(金福姬)사이에 6남매 중 차남으로 출생했다. 호(號)는 호암(湖岩)이었으나, 60년대에는 청강(靑江)으로, 70년대에는 무위당(无爲堂)으로, 80년대에는 일속자(一粟子)로 바꾸어 썼다.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 여운(旅雲) 장경호(張慶浩) 밑에서 한학을 익히는 한편 생명공경의 자세를 배웠다. 묵객으로 할아버지와 절친하던 우국지사 차강(此江) 박기정(朴基正)에게서 서화를 익혔다.
   원주초등학교와 배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성공업전문학교(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전신)에 입학했다. 1945년 미군 대령의 총장 취임을 핵심으로 하는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이른바 국대안)에 대한 반대 투쟁의 주요 참여자로 지목되어 제적되었다. 1946년에 서울대학교 미학과(1회)에 입학했으나 6.25 동란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원주로 돌아와 줄곧 생활했다.
   고등공민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학교 살림이 어렵게 되자 아예 인수해 1954년  도산 안창호 선생이 평양에 설립한 대성학원의 맥을 계승한다는 뜻에서 대성중고등학교를 설립하고 이사장으로 봉직했다.
   1955년 봉산동에 손수 토담집을 지어서 살기 시작했다. 1956년 무소속 국회의원에 입후보하였으나 낙선했다. 1960년에 사회대중당 후보로 다시 국회의원에 출마하였으나 극심한 정치적 탄압으로 낙선했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평소 주창하던 중립화 평화통일론이 빌미가 되어 서대문 형무소와 춘천 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63년 출소 후 다시 대성학원 이사장에 취임하였으나, 한일 굴욕외교 반대운동에 연루되어 이사장직을 박탈당했다. 정치활동 정화법과 사회안전법 등에 묶여 모든 활동에 철저한 감시를 받기 시작했다.
   1964년부터 몇 해 동안 포도농사에 전념했다. 1968년 피폐해진 농촌과 광산촌을 살리고자 강원도 일대에서 신용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1971년 10월에 지학순 주교 등과 함께 박정희 정권의 부정부패를 폭로하고 사회정의를 촉구하는 가두시위를 주도했다. 이 시위는 70년대의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촉발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1972년 남한강 지역을 휩쓴 대홍수 때 독일의 가톨릭 구호단체에서 가톨릭 원주교구에 거금 187억원을 보내왔다. 선생은 지 주교를 설득해 그 돈을 좀더 근본적인 사회 개혁에 쓰기로 하고, 기금은 각 지역의 농민회, 노동자회, 어민회, 영세시민회 등 풀뿌리 조직의 싹을 틔우는 데 썼다.
   1973년 전 해 여름에 닥친 큰 홍수로 수해를 입은 지역을 복구하기 위해 지학순 주교와 함께 재해대책사업위원회를 발족했다. 민청학련사건에 연루된 구속자들의 석방을 위해 당시 로마에서 주교회의를 마치고 일본을 경유해 귀국을 준비하던 지학순 주교와 함께 국제사회에 관심과 연대를 호소했다.
   1977년 "종래의 방향만으로는 안 되겠다고 깨닫고" 지금까지 해오던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을 공생의 논리에 입각한 생명운동으로 전환할 것을 결심했다.
   1983년 민주세력을 결집시켜 통일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민주통일 국민연합>을 발족하는데 일조했다. 1988년 한살림 운동의 기금조성을 위해 <그림마당 민>에서 서화전을 개최했다. 다섯 번에 걸쳐 전시회를 가졌다.
   1989년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선생의 뜻을 기리고자 원주시 호저면 송곡(松谷)에 비문을 쓰고 기념비를 세웠다.
   1991년 지방자치제 선거를 앞두고 <참여와 자치를 위한 시민연대회의>를 발족하는데 고문으로 참여했다.
   1993년 노자의 도덕경을 생명사상의 관점에서 풀이한『장일순의 노자이야기』(다산글방)를 이현주 목사의 도움으로 펴냈다. 그런데. 1993년 9월에 병세가 악화되어 재입원했다. 1993년 11월 13일 민청학련 운동승계 사업회로부터 투옥인사들의 인권보호와 석방을 위해 애쓴 공로로 감사패를 받았다. 평생의 동지였던 지학순 주교의 정신을 잇기 위해 <지학순 주교 기념사업회>의 결성을 병상에서 독려했다.
    저서로는 장일순 저․이아무개 역,『무위당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삼인, 2003.11.25.)와 장일순 저,『나락 한알 속의 우주』(평론사, 2009.6.30)가 있다.  
     무위당(无爲堂) 장일순(張壹淳)은 1994년 5월 22일 위암으로 봉산동 자택에서 67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추모사업으로 1998년에는 상지대학교 전시관에서 장일순 유작전이 열흘간 열렸다. 그리고 2001년 7주기를 맞이하여 원주 시립박물관 주최 무위당 선생 기획전시회를 두 달 동안 열고, 2004년 10주기를 맞이하여 토지문화관과 원주가톨릭센터, 원주시립박물관 일원에서 추모행사가 열렸다. 또한 2007년 9월 6일에는 무위당 선생의 사상적 유산인 원주밝음신협 건물 4층에 <무위당 기념관>이 개관되었다.
    1957년 서울대 출신의 이인숙(李仁淑)과 결혼하여 슬하에 3남을 두었다. 
                                                                                <참고문헌>
    1. “무위당 장일순”, 네이버 위키백과, 2015.12.18.
    2. 곽병찬, “원주 봉천, 무위당의 길”, 한겨레신문, 2015.12.16일자. 29면.
                                                                                <필자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아우내 단오축제』,『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1997) 등 4권.  
   .주요 논문 : “천안시 토지이용계획 고찰”, “천안 연극의 역사적 고찰”, “천안시 문화예술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 “민속학자 남강 김태곤 선생의 생애와 업적”, “태안지역 무속문화의 현장조사 연구”, “태안승언리상여 소고”,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천안지역 상여제조업체의 현황과 과제”, “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 등 62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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