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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무궁화 사랑운동을 전개한 남궁억 선생

신상구 | 2015.10.23 11:42 | 조회 2463

                                               일제강점기에 무궁화 사랑운동을 전개한 남궁억 선생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칼럼니스트) 신상구(辛相龜)
                                                              1. 남궁억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서(翰西) 남궁억(南宮檍, 1863-1939)은 대한제국 조선 왕조 말기의 교육자, 계몽운동가이며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가, 사회운동가, 시인, 작사가, 작곡가, 언론인이다.
   그는 1863년(철종 14년) 12월 27일 한성부 종로방 정동 왜송골(倭松洞)에서 중추부도사(都事)를 지낸 남궁영(南宮泳)과 덕수 이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字)는 치만(致萬)이고 호(號)는 한서(翰西)이며 본관은 함열(咸悅)이다.
   유년 시절에는 정식으로 수학하지 못하고 한문 공부를 하다가 1883년(고종 20년) 미국인이 경영하는 영어학교에 다녔다. 1884년(고종 21)에는 영어학교 1학년 재학 중 해관(海關) 묄렌도르프(P.G. Von Möllendorff)의 견습생이 되었고, 1886년 내부주사(內部主事)로 특채되었다. 1887년 초 영어학교를 졸업하고 고종의 어전통역관이 되었다.
   1887년 전권대신 조민희(趙民熙)의 수행서기관으로 상하이에도 갔다. 영국, 러시아, 독일 순방길을 계획하고 홍콩까지 갔으나, 청나라의 간섭과 방해로 2년간 홍콩에서 머물다가 결국 다시 소환되어 돌아왔다. 이후 1889년 궁내부 별군직(宮內府別軍職), 1893년 칠곡부사를 역임하고, 1894년에는 갑오경장으로 내무부 토목국장에 발탁되어 서울 종로와 정동 일대 및 육조 앞과 남대문 사이의 도로를 정비하고 경성부 탑골공원(파고다 공원) 공사의 감독을 맡아 완공시켰다. 이후 흥화학교(興化學校)에서 교사로 영문법과 국사(國史)를 가르치고 독립협회에 가입했다. 1895년에는 주변 조정 관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성부의 민가를 정비, 허물고 도로를 정비하여 길을 닦았다. 그뒤 1896년 2월 관직을 사퇴하였다.
   1895년 12월 서재필이 귀국하자, 이후 귀국한 서재필(徐載弼), 유길준, 윤치호, 이승만 등과 개화 운동을 펼친다. 또한 서재필과 함께 언론사 창립을 추진한다. 1896년 초에는 서재필, 윤치호와 독립신문 창간에 참여하고 독립신문의 기자이자 필진의 한사람으로 활동하며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그해 2월 아관파천이 단행되자 관직을 사퇴하였다.
   그해 별군직으로 임명되었으나 한직이었다. 1896년 7월 2일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李商在) 등과 독립협회의 창립총회에 참여했으며, 이때 남궁억은 독립협회의 중앙위원 겸 수석 총무로서 또 서기가 되었다가 독립협회 평의원, 사법 위원을 겸하였다. 1897년 관직을 사퇴하였다. 한편 독립협회 기관지인 <대조선독립협회회보(大朝鮮獨立協會會報)>의 발행에도 참가하였다. 1898년(광무 1년) 독립협회 관계로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그해 9월 나수연(羅壽淵), 유근(柳瑾) 등과 함께 재정난에 허덕이던 윤치소의 경성신문을 인수하고 다시 황성신문사(皇城新聞社)를 창간하여 사장이 되었다. 이후 황성신문을 일간지로 발행하고 국한문 혼용체를 채택했다. 그밖에 국민 계몽과 독립협회 활동을 지원하는 데 힘을 쏟았다. 대한제국의 정치체제를 전제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 개혁, 의회를 설립하고 대대적 개혁을 단행해야 된다는 주장을 하며 독립협회운동과 만민공동회의 지도자로 활동하다,
   1898년 11월 왕당파로부터 왕정타도와 공화정을 수립하려 한다는 이유로 탄핵당하고 17명의 지도자와 함께 경성부 외곽에 숨었으나 결국 경무청 형사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1899년 12월 독립협회가 강제로 해산당하자 언론 활동에만 전념하였다. 1900년 7월 황성신문에 러시아와 일본의 한국분할설을 주장하고 이를 번역하여 외국 신문에서 옮겨 실어, 러시아와 일본의 한국 침략 야욕을 폭로하는 논평을 게시했다가 경무청에 체포, 구금되었다.
   1902년(광무 5년) 5월에도 황성신문에 일본이 '1894년 동학난 이래 조선을 침략해 들어오면서 러시아와 맺은 조약이라며 러일협정의 성격을 논박한 사설을 실었다. 이 사건으로 황성신문 총무 나수연과 함께 다시 경무청에 체포, 구속되어 고문을 당하다가 4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1902년에는 러시아, 일본의 한국분할설과 러일 협정을 공박하였으며, 1903년 영관(領官)을 지낸 유동근(柳東根)이 '황성신문 사장이던 남궁억과 신문사 총무 나수연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한 박영효(朴泳孝) 등과 공모,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하였다'고 모함하였다. 이 때문에 다시 경무청에 구속되었으나 혐의 없음으로 4개월 뒤에 석방되었다. 출옥한 뒤 황성신문 사장직을 사임하였다.
   1903년 3월 고종의 간곡한 요구로 특별히 성주목사로 부임하였다. 이후 성주목사와 1904년 양양군수를 역임하면서 부패한 토호들과 토색질을 일삼는 향리들을 엄히 단속하여 처벌하였으며 조정 고관들의 비리를 탄핵하기도했다. 강원도 양양군수 재직 중 폐습타파와 단발령, 신식 학교 유치, 도로 정비, 병원 유치 등을 추진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부당함을 간하다가 실패하자 관직을 사퇴하였다. 1906년 2월 다시 양양군수로 복직하여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1907년(광무 10년) 7월 양양의 동헌 뒷산에 양양에 현산학교(峴山學校)를 설립하고 신교육을 실시하였다. 1907년 11월에는 권동진(權東鎭), 여병현(呂炳鉉), 유근, 유길준, 이우영(李宇榮), 오세창(吳世昌), 윤효정(尹孝定), 안국선, 장지연, 정운복(鄭雲復), 홍필주(洪弼周), 윤치호 등과 대한협회를 조직하고 대한협회 회장이 되었다. 이어 기관지로 대한협회월보와 대한민보를 발행하였다. 1907년 7월 일본이 헤이그 특사 파견 사건을 이유로 고종에게 퇴위 압력을 가하여 사퇴시키고 이완용, 박제순 등과 정미칠조약을 체결하자 이를 반대하다가 결국 관직을 사임하고 홍천 모곡으로 낙향하였다.
   1908년(융희 2년) 4월 강원도 지방의 애국계몽운동단체로 관동학회(關東學會)를 창립하였으며 1908년, 교육 계몽 잡지인 교육월보를 간행하였다. 1909년 관동학회의 회장이 되었으며 강원도내 신문물, 신식 학교의 건립과 신식 교육을 보급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1910년(융희 4년) 10월 한일 합방 조약이 체결되자 배화학당(培花學堂) 의 한글, 역사, 가정 교사가 되고 1911년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배화학당 교사로 있으면서『가정교육』, 『신편언문체법(新編諺文體法)』등 교과서를 지었고『우리의 역사』,『언문 체법』,『가정 교육』,『무궁화 지도』,『육아법』등의 책을 집필, 발간하고 시와 노래를 지었다. 1912년부터는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 원장을 겸하면서 독립사상 고취, 애국가사 보급, 한글서체 창안 및 보급에 힘썼다.
   1910년부터 배화학당과 상동청년학원 교사로 재직하다, 1918년 건강이 악화되면서, 친지들의 권고에 따라 울적함을 달래기 위해 강원도 홍천군(洪川) 서면 모곡리 보리울로 낙향하여 1919년 9월 모곡(牟谷)에 교회와 모곡학교를 세웠다.
   낙향 초기에는 교회를 설립한다 하여 주민들의 편견과 비방에 시달리기도 했다. 문맹 개선이 필요하다고 본 그는 20대에서 30,40대의 학생들도 받아서 가르쳤다고 한다. 낮에는 학교 교사로 밤에는 부락의 마을 지도자로 활동하고 주말에는 교회에서 설교를 하였다. 또한 조선이야기 와 동사략 등을 집필, 간행하였다. 후에 모곡학교는 총독부 학제 개편에 의해 한서국민학교와 한서중학교로 분리되었다. 그는 홍천군 모곡리 유리산에 올라 매일 '불의의 일본을 이 땅에서 물리쳐 주소서.', '이 민족에게 불의에 굴하지 않는 힘을 주소서.'하고 매일과 같이 기도하였다 한다. 또한 일하러 가세 일하러 가 로 시작하는 삼천리반도 금수강산을 비롯한 몇몇 노래와 시 등을 직접 작사 작곡하였다. 그는 학교 안에 무궁화 묘포를 만들어 나라꽃인 무궁화를 전국에 보급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노동과 애국심을 주제로 한 찬송가와 시, 가사 등을 지어 전국의 교회와 기독교계 학교들에 보급하였다. 특히 그가 지은 창가(唱歌) 가사 무궁화동산, 기러기 노래, 조선의 노래, 운동가, 조선지리가(朝鮮地理歌) 등은 민간에 널리 유행하였다.
   그 후〈무궁화 묘포>(苗圃)를 만들었으며 1933년에는 무궁화동산이라는 노래를 지어 학생들에게 가르쳤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었다가 8개월만에 풀려났다. 그러나 가석방된 뒤 1933년 9월 기독교 계열 독립운동 비밀결사인 십자당(十字黨)을 조직, 활동하다가, 1933년 12월에 총독부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홍천 모곡리 무궁화 사건(십자당 사건)으로 비화되면서 홍천경찰서로 넘겨졌다가 경성부 서대문형무소로 넘어가 복역한다. 일제가 민족 정신을 말살하기 위하여 일장기와 벚꽃을 보급하고 장려하려는 것에 항거해 당시 모곡리의 감리교 전도사로 일하던 남궁억은 그의 동지들과 더불어 민족정신 고양을 위해 무궁화 묘목을 전국에 배포하였다.
   남궁억은 1918년 자신의 선향인 강원도 홍천군 서면 모곡리에 내려와 모곡 감리교회를 세우고 전도사로 목회하면서 더불어 교회내에 4년제 보통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는 '무궁화 심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치고 무궁화 묘목을 가꾸어 보급하였으나 일제는 무궁화 묘목 8만주를 불태우고, 이들을 구속하였으며, 학교는 공립학교로 강제 편입시켜 버렸다.
   그 후 조선총독부 경무국과 학무국의 회유를 받았으나 모두 거절하고 고문을 당하였다. 1935년, 복역 중 병으로 석방되어 개성의 윤치호 자택에서 얼마간 요양하다가 고향인 홍천으로 낙향하였다.
   저서로는『동사략(東史略)』,『조선이야기』,『가정교육』,『조선어보충(朝鮮語補充)』, 『신편언문예법』,『조선어문법(朝鮮語文法)』등이 있으며 이 중에는 기독교계열 학교의 교과서, 교재로도 활용되었다. 석방된지 4년 만인 1939년 4월 5일에 고문 후유증 등으로 사망하였다.
   1937년 1월 부인 양씨의 장례식을 치룬 뒤 그는 제자들과 친지들에게 "내가 죽거든 무덤을 만들지 말고 과일나무 밑에 묻어 거름이나 되게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사후 제자들에 의해 홍천군 서면 모곡리 모곡 점말 앞산 선영하에 제자들과 지역유지들에 의해 장례식이 거행된 뒤 안장되었으며 묘소 근처에 특별히 신도비가 세워졌다. 해방 후 1966년 강원도 홍천군 서면 모곡리 468-1번지 산 큰말교회 뒤편으로 이장되었으며, 성역화되었다. 1962년 3월 1일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고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그해 강원도 도민들의 성금과 정부의 지원하에 유리봉 근처로 다시 이장하고 성역화하였다. 그 후 홍천군 서면 모곡리 387번지에 한서 남궁억 기념관이 세워졌고, 묘소 앞에 있던 신도비는 2009년 8월 15일 한서 남궁억 기념관 경내 공원으로 이전되었다.
                                                             2. 무궁화 동산의 원조 남궁억 선생
   일제강점기에 애국교육운동에 헌신한 남궁 억의 많은 업적중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업적 으로는 두가지를 들 수 있다. 그 하나는『조선이야기』,『한국위인(전5권)』,『동사략(전4권)』등을 지어 민족사 교육을 통해 조국애를 고취한 일이요, 둘째로는 무궁화를 보급하여 잊혀져 가던 민족의식을 고취한 사실이다.
  남궁 억이 교육계에 입신한 것은 1895년 토목국장 재임시 흥화학교에서 국사 시간을 맡았던 일이 처음이다. 그 후 양양군수 당시 현산학교를 세웠고, 1910년 경술국치 후에 는 배화학당에 재직하면서 한글궁체를 발굴하여 한글서예의 바탕을 만들었고, 꽃핀 무궁화 열세 송이로 조선 13도를 표시한 한반도 지도를 도안하여 여학생들에게 수놓게 함으로써 수실 한 올 한 올마다 민족애와 국화애를 심게 하였다. 이 무궁화 지도는 배화여학교 뿐만 아니라 경향 각지의 여학교에서 수놓아졌고 가정 주부들도 그것을 수놓아서 내실을 장식할 뿐 아니라 은연중에 민족의식을 가슴속에 수놓게 되었 던 것이다.
  그 후 남궁 억이 강원도 홍천군 서면 모곡리에 들어와서 보리울학교를 세워 경영하게 된 것은 1918년 배화학당을 나와 허약해진 몸을 회복하기 위해서 선향인 모곡(보리울) 에 내려온 것이 인연이 되어 사립 모곡학교를 건립하고 조국의 희망을 오직 청소년 교육에 두고자 했기 때문이다.
  남궁 억의 교육 내용은 근대 학교의 체제로 구성하여 체육, 음악과목까지 빼놓지 않았 으며 여학생에게는 가정과목까지 이수토록 하였다.
   그의 교육에서 중심을 이루는 것은 민족사상의 보급으로『동사략』과 알기 쉬운 국사 『조선이야기』를 편찬하여 역사교육에 치중하였다. 또한, 남궁억은 반도 산하에 오직 보리울에서만 볼 수 있는 무궁화 묘포를 가꾸었다.
  묘목을 팔아서 돈을 벌자는 것이 아니었고 위축되어 가는 애국심을 격려시키려는 일환책(一環策)으로 학교 경비 보충을 구실로 하여 무궁화 묘폭을 해마다 수십만 그루 씩 길러서 각 지방의 학교와 교회, 사회단체에 팔기도 하고 기증도 하였다. 묘목작업은 학생들의 실습시간을 이용하고, 김매고 거름을 주게 하여 학생들의 무궁화 에 대한 애착심과 국가관념을 넣어 주었던 것이다. 일제가 무궁화 묘목을 못 팔게 했을 때에는 어린 무궁화 묘목과 유사한 뽕나무 묘목을 겸해서 길러 뽕나무 묘목의 주문이 오면 무궁화를 끼워 줌으로 해서 전국에 무궁화 번식을 위한 갖은 방법을 다 취했다.
   이렇게 역사교육을 하고 무궁화 묘목을 널리 보급하기에 혼신의 노력을 다하던 남궁 억은 1931년〈무궁화 동산〉이란 노래를 보리울학교 학생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만들었다.

    “우리의 웃음은 따뜻한 봄바람 춘풍(春風)을 만난 무궁화 동산 우리의 눈물이 떨어질 때마다 또다시 소생하는 우리 二千萬(이천만) 빛나거라 三千里(삼천리)무궁화 동산 잘살아라 二千萬(이천만)의 高麗族(고려족)”

   『나라사랑(제1집)』〈한서 선생의 시가〉에 보면 "〈무궁화 동산〉은 아이들이 고무줄 넘기를 할 때, 운동 시합을 할 때와 행진을 할 때에 불렀으며 주일 학교에서 성적이 최고인 반에 우승기를 수여할 때 부르는 우승가" 였다고 서술되어 있다.
   〈무궁화 동산〉은 한서 남궁 억의 무궁화 정신이 노래된 것으로 〈무궁화 시〉, 〈조선의 노래〉, 〈시절 잃은 나비〉, 〈조선진리가〉, 〈운동가〉등의 노래에도 무궁화가 뜻해 주는 혼이 짙게 배여 있다.
   이처럼 남궁 억은 민족의 존재 이유를 무궁화의 존재 이유에다 걸었던 것이었고, 그러한 이유와 실천 때문에 일제에게 희생되었던 것으로 동아일보에 크게 보도된 무궁화 동산 사건 곧 십자가당 사건이다.
   무궁화 동산 사건의 전모(全貌)는 다음과 같다. 1933년 11월 2일 홍천경찰서 사법주임인 신현규(申鉉奎)가 시조사원(時兆社員)을 가칭(假稱)하여 남궁 억을 방문하였다. 남궁 억은 시조 잡지를 팔며 무궁화 묘목을 사러 왔다는 신현규를 무궁화 묘포로 데리고 가 무궁화가 우리나라 국화라는 것을 설명하 며 무궁화시(詩)에 대한 이야기까지 하고 사쿠라는 확짝 피었다가 곧 지지만 무궁화는 면연(綿延)히 피어나는 것처럼 한국 역사가 면연할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이를 계기로 일제는 보리울학교를 수색했고 따라서 무궁화 묘목도 발각되었다. 이리하여 남궁 억은 체포되었으며 보리울학교도 폐쇄되었던 것이다.
   당시 동아일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사가 보도되었다. 경성지방법원(京城地方法院) 검사국 사사키 검사의 손에서 취조를 받다가 낙착되어 6명은 기소되고 6명은 면소(免訴)를 보게 되었는데 남궁 억 노인만은 보안법(保安法) 위반이고 다른 5명은 모두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의 죄명으로 기소되었다는데 남궁 억 노인은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된 내용을 듣건대, 모곡학교 교장으로 있으면서 조선 역사와 지리를 가르치고, 무궁화를 학교에 수만 주나 심고, 학생들에게 무궁화 시를 읊어 주고 가르치며, 여교원으로 하여금 무궁화 창가(唱歌)를 가르치게 하여 민족주의 사상을 학생들에게 전할 뿐 아니라 교회에서도 여러 가지 직분을 가진 관계로 종교적 집회나 접촉에서 늘 민족주의 사상을 고취하였다는 것인데, 당국으로부터 재삼 강직한 사상을 완화시키도록 권고받았으나 이를 듣지 않고 묘목 광고(선전문)에 쓴 글 문구가 불온하였다는 것이라고 한다.
   '무궁화 동산 사건'으로 인해 강원도 경찰부에서는 무궁화나무를 전부 없애도록 하라는 긴급 지시를 내려서 남궁 억이 애호하던 70,000주(株)나 되는 무궁화는 일대 수난(一大 受難)을 만나 불살리움을 면(免)치 못하게 되었으며 남궁 억은 1년 복역에 3년 집행 유예로 판결을 받았으나 심한 고문과 옥고(獄苦)로 말미암아 신음하다 1939년 4월에 77세의 나이로 불귀(不歸)의 몸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무궁화 보급을 통해 민족정신을 고취하다 체포된 남궁 억이 종로경찰서 에서 취조를 받던중 한 말은 이 시대에 무궁화가 가지는 의미를 짐작케 한다.
   무궁화 동산은 곧 애국의 동산이며 겨레의 광장으로 우리 민족의 우울증을 대변해 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해소해 줄 수 있다.
   무궁화는 곧 우리의 울분을 대변하고 통행케 할 수 있는 유일한 대화의 광장이다." 김세한의『불굴의 얼』 일제의 무궁화 말살 정책에서도 의연히 견뎌온 무궁화에는 한서 남궁억의 혼이 깃들 어 있다.
   그가 전 생애에 걸쳐 실현하고자 한 것은 무궁화정신이며, 말살되어 가는 무궁 화를 살리는 길이 꺼져가는 민족정신을 되살리는 길이라 생각했기에 남궁억의 항일 정신은 무궁화를 통해 표상(表象)되었던 것이다.
   온갖 시련 속에서도 한 선각자의 헌신적인 사랑으로 가꿔지던 무궁화, 무궁화 정신은 암흑 속에 묻혀 우리 민족 고유의 것을 모두 말살하려는 일제의 강압에 신음했다.
   그래서 해방은 바로 민족의 해방이며 무궁화의 해방, 무궁화로 상징되는 민족정서의 해방이었던 것이다.
   요컨대 한서 남궁억 선생은 일제가 나라꽃인 무궁화를 탄압하자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삼일독립만세운동 직후인 1919년 9월 선향인 모곡(牟谷)에 교회와 모곡학교를 세우고 <무궁화 묘포>(苗圃)를 만들었으며 1933년에는 무궁화동산이라는 노래를 지어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더 나아가서 일제가 민족 정신을 말살하기 위하여 일장기와 벚꽃을 보급하고 장려하려는 것에 항거해 그의 동지들과 더불어 민족정신 고양을 위해 무궁화 묘목을 전국에 배포하였다. 그러자 일제는 무궁화 묘목 8만주를 불태우고, 이들을 구속하였으며, 학교는 공립학교로 강제 편입시켜 버렸다. 남궁억 선생은 항일독립운동을 하다가 옥고를 치르고 그 후유증으로 결국 1939년 4월 5일에 타계하고 말았지만, 무궁화 동산의 원조가 되어 해방 후에도 무궁화 심기와 무궁화 동산 조성사업이 계속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특히 삼림청 산하의 나라꽃무궁화운동중앙회를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무궁화 심기 운동이 전개되고 있어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서울특별시 중구 남산동 2가 22번지 명지빌딩 구관 301호에 위치해 있는 나라꽃무궁화운동중앙회는 한민족의 정신적 상징으로 삼아온 무궁화를 보급․보존․선양함을 기본으로 하고, 무궁화의 5대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한민족 전통문화 계승발전에 새로운 가치관 정립과 정신질서를 통한 애국심을 길러 국가발전에 기여할 목적으로 1999년 10월 15일 설립 허가된 대한민국 산림청 소관의 사단법인이다. 그리고 무궁화사랑운동본부와 한국무궁화사랑국민운동협의회에서도 전국적으로 무궁화 심기 운동을 전개하여 많은 성과를 가두고 있다.
                                                                            <참고문헌>
   1. 전근수,「한서 남궁억의 모곡리 교육활동에 관한 연구」, 강원대 대학원 교육행정학 석사학위논문, 2008.
   2. 강대덕,「한서 남궁억의 무궁화 사랑과 민족교육」, 강원향토문화연구회,『강원문화사연구』 제15집, 2010.
   3. “남궁억”, 네이버 위키백과, 2015.10.22.
   4. “국가문화상징 무궁화”, Kocca 문화콘텐츠닷컴, 2015.10.22.
   5. 김상회, “무궁화 사랑으로 애국심 고취하자”, 스포츠월드, 2015.10.12일자.  
                                                                           <필자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아우내 단오축제』,『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1997) 등 4권.  
    .주요 논문 : “천안시 토지이용계획 고찰”, “천안 연극의 역사적 고찰”, “천안시 문화예술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 “민속학자 남강 김태곤 선생의 생애와 업적”, “태안지역 무속문화의 현장조사 연구”, “태안승언리상여 소고”,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천안지역 상여제조업체의 현황과 과제”, “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 등 62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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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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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역사관련 사이트 링크 모음 환단스토리 7953 2020.11.06
299 종교사상가 다석 유영모 선생 이야기 신상구 2108 2016.01.07
298 증산도 안경전 종도사의『환단고기』이야기 신상구 2831 2016.01.05
297 미륵정토사 시설 단군성전 신상구 2006 2016.01.05
296 천재 궁정기술자 장영실 이야기 신상구 2625 2016.01.02
295 판소리 덜렁제를 창시한 국창 권삼득 이야기 신상구 2563 2015.12.31
294 대전 시민 60%가 지역의 역사와 문화유산에 대해 잘 모른다. 신상구 1990 2015.12.30
293 한일간 위안부 문제 타결에 대한 여야와 시민단체의 상반된 입장 신상구 2326 2015.12.30
292 해방 직후 대전의 이모저모 신상구 2423 2015.12.28
291 금년도 안에 위안부문제라도 해결되기를 기원하며 사진 신상구 2322 2015.12.27
290 천부경 성자 고 박동호 선생 이야기 신상구 2042 2015.12.26
289 월북작가 안회남 이야기 사진 신상구 2291 2015.12.25
288 조국의 자주독립과 국권회복을 위해 소설을 창작한 안국선 선생 신상구 2529 2015.12.25
287 국혼문화원장 강우중의 천부경 이야기 신상구 1783 2015.12.25
286 대전 중구 뿌리공원 대강당에서 제3회 세계 천부경의 날 대축제 개최 사진 신상구 2216 2015.12.24
285 한국상고사의 쟁점 학술회의 소개 신상구 2137 2015.12.23
284 김두봉의 단군에 대한 역사인식 신상구 2196 2015.12.22
283 민족종교 보천교 연혁 신상구 2335 2015.12.22
282 매국역사학자를 우대하고 민족사학자를 홀대하는 한국 정부 신상구 2027 2015.12.20
281 윤봉길의사 기념관 개보수를 경축하며 신상구 1919 2015.12.20
280 미국 금리 인상이 한국경제에 미치는 영향 신상구 2472 2015.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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