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金泳三 전 대통령의 역사 바로 세우기 업적

신상구 | 2015.11.24 02:51 | 조회 2167

                                                     金泳三 전 대통령의 역사 바로 세우기 업적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칼럼니스트) 신상구(辛相龜)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이 22일 새벽 88년간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뒤로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서거(逝去)로  1970년대 이후 한국 정치를 30년 가까이 주도한 양김(兩金·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시대도 완전히 저물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마지막 남은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 떠났다"고 했다. 한때 정적(政敵)이었으나 말년엔 서로 의지했던 김종필 전 총리는 "신념의 지도자로 국민 가슴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다.
   1927년생인 그는 인생과 정치 역정 전체를 우리 현대사와 함께했다. 일제의 식민 지배 시기에 성장했고 6·25전쟁을 겪었으며 어머니를 간첩의 총탄에 잃었다. 정치에 투신한 이후엔 꺾이지 않는 집념과 투지로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다. 온갖 고통을 감내한 그가 없었더라면 산업화·민주화의 동시 성취로 상징되는 대한민국 기적의 역사도 '절반의 성공'에 그쳤을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최연소(26세) 의원과 최다선(9선) 의원이란 기록을 갖고 있다. 우리 의회민주주의의 산증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김 전 대통령은 1963년 군정 연장 반대 집회로 수감된 이후 일관되게 민주화 투쟁의 선두에 섰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3선개헌 반대 투쟁 중엔 초산 테러를 당했고 1979년엔 의원직 강제 제명을 당했다. 이 사건은 부산·마산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져 유신 정권이 끝나는 계기가 됐다. 1983년엔 광주민주화운동 3주기를 맞아 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23일간의 단식 농성으로 정국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강고하던 군부 정권은 김 전 대통령의 결기에 손을 들었고 정치 통제를 완화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꼬가 트인 민주화의 거센 흐름은 결국 1987년 6·29 선언을 만들어 내게 된다. 암울했던 시절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동트기 직전이 가장 어둡다"며 투쟁의 선두에 섰던 김 전 대통령을 보며 많은 국민이 희망을 잃지 않았다.
   이 민주화 투쟁의 기나긴 여정에서 김 전 대통령은 한 번도 과격한 수단을 사용하지 않았다. 투쟁했지만 출구 없는 대결이 아니라 절충과 타협으로 새로운 국면을 만들어냈다. 점진적 개혁주의자로서의 그의 면모는 군인 정권의 중심이었던 민정당과 1990년 3당 합당이라는 놀라운 변화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야당 진영에 함께 몸담았던 이들로부터 비난도 받았으나 이 3당 합당이 결국 군정(軍政) 종식과 '문민정부 탄생'이라는 역사적 결과를 만들어냈다는 사실 또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우리나라 민주화는 1987년 6·29 선언과 대통령 직선으로 획기적 전환점을 이룩했지만 민간 출신이자 오랜 야당 지도자였던 김 전 대통령 당선으로 사실상 완결됐다. 군정에서 민정으로 넘어가면서 동남아·남미·아프리카 등 다른 나라에선 수도 없이 벌어진 헌정(憲政) 중단, 쿠데타 같은 혼란 없이 연착륙할 수 있었던 것도 온건 의회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이런 정치인들에 힘입은 바 크다.
   김 전 대통령이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선언한 '부패와의 전쟁' 역시 우리 역사를 바꾼 획기적 조치였다. 지금은 일반화된 고위 공직자 재산 공개는 당시 그가 자신과 가족의 재산을 가장 먼저 공개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이 안팎의 많은 반대와 우려 속에 강행한 금융실명제는 이제 우리 경제의 건강과 질서를 지켜주는 튼튼한 버팀목이 돼 있다.
   김 전 대통령은 평생을 승부사로 살았다. 유신 정권과의 정면 대결, 목숨을 건 단식, 3당 합당 등 모두가 결정적 시기에 모든 것을 던진 승부였다. 그는 3당 합당으로 기득권 세력과 손을 잡았으나 마음속에선 이들과 결별할 수도 있는 개혁의 결심을 하고 있었다. 그 하나가 부패와의 전쟁이었고, 다른 하나가 군부 정치 사조직 하나회에 대한 전광석화 같은 해체 조치였다. 아직 군정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고 있던 그때 김 전 대통령 특유의 승부사 기질이 아니었다면 우리 군 전체를 휘어잡고 있던 하나회를 없애는 일대 단안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결단 하나로 우리나라는 군부 정권이 다시 들어설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비로소 해방될 수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이 떠난 11월 22일은 우연히도 그의 재임 중 우리나라가 IMF 구제금융 신청을 발표한 바로 그날이다. 김 전 대통령은 취임 후 금리를 자유화하고 공기업 민영화를 밀어붙였다. 관치(官治) 경제 시대에서 탈출하려는 몸부림이었다. 재임 초에 '세계화'를 내걸었고 1996년엔 선진국 클럽이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도 가입했다. 하지만 국제수지 적자가 8년 연속 계속되는 가운데 이뤄진 규제 완화와 금융시장 개방은 큰 부작용을 낳았다. 동남아 외환위기가 터지자 우리나라의 무분별한 외화 차입이 경제 전반에 직격탄이 되고 말았다. 이 사건은 김 전 대통령 정치 인생에 가장 큰 오점이 됐고 본인도 마지막까지 이 일을 괴로워했다 한다. 그러나 이제 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 좀 더 긴 시각에서 보면 그가 주도한 세계화, 민간 자율과 개방 위주 경제정책이 결국 우리 사회와 경제가 가야 했던 길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김 전 대통령은 병석에 누운 시기에 붓글씨로 '통합'과 '화합'을 쓰곤 했다 한다. 이것이 그가 국민에게 마지막 남긴 유언이라 할 수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일평생 이룩한  업적을 요약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군정종식하고 민정시대 개막, 2. 하나회 청산,  3. 금융실명제,  4,공직자 재산공개, 5. 역사 바로 세우기, 6. 세계화 추진, 7. 5.31 교육개혁(초등학교 3년부터 영어교육 도입, 방과후학교 활성화, 수준별 수업, 학교생활기록부 도입), 8. 정보통신부 설립-IT강국 실현, 9. 선거공영제 확대, 10. 쓰레기종량제 실시  
   김영삼(1927-2015) 전 대통령의 업적 중에서 나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끄는 것은 역사 바로 세우기이다. 문민정부(1993-1998) 내내 들을 수 있었던 말은 ‘역사 바로 세우기’였다. 그는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1996년 12월 조선총독부건물을 해체 철거했다.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바꾸었다, 5.18특별법을 제정해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 수감했다. 4.19의거를 4.19혁명으로 격상시켰다. 5.16군혁명은 32년만에 군사정변, 쿠데타라는 본명을 되찾았다. 광주사태는 광주 민주화운동으로 복원됐다. 12.12사태를 하극상에 의한 군사쿠데타로 규정했다. 성공한 쿠데타도 철벌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김영삼 대통령은 1994년 호주 시드니 APEC 정상회의 최초로 ‘세계화 구상’을 천명하고, 1995년 1월 대통령 직속 세계화추진위원회를 출범시키는가 하면, 1996년에 한국을 선진국 모임인 OECD에 가입시키는 등으로 세계화를 추진하여 많은 성과를 거둠으로써 나의 관심을 많이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YS의 3당 합당 선택이 결과적으로 야권 분열과 지역주의 고착을 가져오고, 대통령 임기 말년에 측근 비리를 사전에 막지 못해 아들 김현철이 비리 혐의와 관련해 최초로 구속되었는가 하면, 1997년 외환위기를 잘 넘기지 못해 국민들에게 많은 고통을 안겨주는 바람에, 국민들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실제 역대 대통령에 대한 평가에서 YS는 최하위권이었다. 지난 8월 한국갤럽의 광복 70주년 여론조사 중 ‘우리나라를 가장 잘 이끈 대통령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YS를 꼽은 응답자는 1%에 불과했다. 이승만(3%) 전두환(3%) 전 대통령보다 후순위였다.
   하지만 2015년 11월 21일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를 계기로 YS 생애를 한 부분만으로 평가하는 게 합당치 않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배종찬 리서치앤리서치 본부장은 2015년 11월 24일 “더 나은 업적을 남긴 대통령을 우선 선택한 탓도 있겠지만 YS에 대한 모든 평가를 임기 막바지에 터진 IMF 외환위기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IMF 사태 역시 YS의 책임만으로 돌리긴 애매하다고 말한다. 군사정권부터 누적된 대기업 내부 부실이 한꺼번에 터진 게 IMF 사태의 주원인이었다는 것이다. 새누리당 서청원 최고위원은 이날 발표한 YS 추도사에서 “1996년 말 야당과 노동계의 반발로 노동법이 백지화됐다”며 “노동법이 백지화되지 않았다면 IMF는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그동안 과소평가됐던 개혁 업적은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하나회’ 척결, 역사바로세우기, 정경유착과 금권선거를 뿌리 뽑기 위한 금융실명제 도입 및 선거공영제 확대 등에 대해 대한민국이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됐다는 전문가들의 평가가 잇따르고 있다. 
                                                                               <참고문헌>
   1.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우리시대 巨人을 떠나 보내며”, 조선일보, 2015.11.23일자. A35면.
   2. 박승철·이상덕, “역사 바로세우기, 하나회 해체...뚝삼으로 일군 개혁”, 매일경제신문, 2015.11.23일자. A 3면.
   3. 정한모․유신모, “5.16 32년만에 쿠데타 규정...20여 년 지나 국정화 퇴행”, 경향신문, 2015.11.24일자. 4면.
   4. 한창희, “과거에 묻힌 功...YS 재평가 움직임 활발”, 국민일보, 2015.11.25일자. 6면.
   5. 우제윤, “돈안쓰는 선거, 초등학교 명칭 변경, 선거, 교육, 환경...곳곳에 족적 남겨”, 매일경제신문, 2015.11.25일자. A4면.  
                                                                               <필자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아우내 단오축제』,『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1997) 등 4권.  
   .주요 논문 : “천안시 토지이용계획 고찰”, “천안 연극의 역사적 고찰”, “천안시 문화예술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 “민속학자 남강 김태곤 선생의 생애와 업적”, “태안지역 무속문화의 현장조사 연구”, “태안승언리상여 소고”,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천안지역 상여제조업체의 현황과 과제”, “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 등 65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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