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한국 최고의 한학자 임창순 선생 이야기

신상구 | 2015.12.09 14:55 | 조회 2561

                                                         한국 최고의 한학자 임창순 선생 이야기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칼럼니스트) 신상구

   청명(靑溟) 임창순(任昌淳, 1914-1999)은 대한민국 각 지역에 남아 있는 옛 비석에 새긴 글을 해석하고 역사적 의미를 밝히는 금석학의 대가로 한학에 능통했고, 서예와 미술에도 조예가 깊었다. 내가 향토사학자로서 임창순 선생을 주목하게 된 이유는 중원고구려비나 단양적성비 등을 해석해 삼국시대에 신라, 고구려, 백제가 어떻게 빼앗고 빼앗기는 싸움을 전개하였는지 풀어준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임창순은 1914년 청산면 법화리 복우실 마을에서 아버지 임원재 선생과 어머니 김영례 여사 사이에서 삼남매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4살 때부터 할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웠다. 학교는 사람을 짐승으로 만드는 곳이라며 할아버지가 반대해 다닐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가세가 점점 기울어 월사금을 내고 학교 다닐 형편이 되지 못한 것도 한 이유였다. 대신 그는 14세 때인 1927년부터 6년간 보은군 장안면 개안리에 있는 ‘관선정’이라는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다. 임창순은 서당을 연지 1년 후인 1927년 서당에 들어가는데 이때부터 6년 동안 여기서 홍치유 선생에게서 한문 공부를 했다.
  그는 해방 후 경북중학교를 시작으로 대구사대와 동양한의과대학, 성균관대학 등에서 교사와 교수로 재직하면서 많은 제자를 길러내었다. 정식으로 받은 교육이 한문 밖에는 없지만 그는 서당에 다니면서도 신문을 보며 틈틈이 사회 인식을 넓혔다. 이렇게 서당을 다니면서도 국어와 국사에 대해 틈틈이 익혀두었던 지식은 해방 후 교원시험에 합격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국어과 차석과 국사과 수석으로 교원시험을 통과해 경북중학교에 첫 발령을 받았다.
  임창순은 5·16 쿠데타가 난 이듬해 성균관대 사학과에서 쫓겨나자, 선생의 학문을 흠모하던 강만길·성대경 교수 등의 채근으로 태동고전연구소(泰東古典硏究所)를 설립하고 강습소를 열었다. 교실이 따로 있었던 게 아니었다. 수표동, 당주동 등 독지가가 내주는 공간을 따라 전전하다가 한국고등교육재단의 지원으로 1976년 전문가 과정의 기숙학당(지곡서당)으로 전환했다. 이 시기 지곡서당을 거쳐 간 강만길(국사), 성대경(한문학) 교수 이외에 김정배 전 고려대 총장(국사), 조동일 서울대 교수(국문학), 정옥자 서울대 교수(조선사상사), 변영섭 고려대 교수(고고미술사학), 은정희 서울교대 교수(불교철학) 등은 훗날 국학의 기초를 놓았다. 979년 9월 경기도 남양주시 수동면 지둔리 11-1번지 축령산(祝靈山) 자락 수동계곡으로 태동고전연구소(泰東古典硏究所)를 이전하고 우리나라 한문교육의 산실로 불리는 지곡서당(芝谷書堂)을 설립하고 한문강좌를 개설했다. 어느날 고려대 졸업생들이 찾아와 한문을 더 배우고 싶다고 요청을 했고, 하루 한 시간씩 장소를 빌려 강의를 시작한 것이 연구소 설립의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몇 해를 했는데 제대로 된 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대학 졸업한 사람을 뽑아서 장학금도 주고 일정한 연한을 정해서 집중적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침 선경그룹 최종현 회장이 교육법인 한국고등교육재단을 통해 장학금을 지원 해주었고, 1976년 처음으로 5명을 선발해 예정한 교육을 했다. 그런데 1981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뒤 지원은 끊겼다. 4·19 때 교수단 시위를 주동했고,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 활동으로 구금을 당했고, 인혁당 사건에 연루돼 구속까지 됐던 선생이었으니, 지원이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지원이 끊긴 뒤에도 전통은 바뀌지 않았다. 이후 한림대학교가 1985년 8월 연구소를 운영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왔다. 임창순은 그동안 마련했던 토지, 가옥 및 서적 일체를 그대로 한림대 측에 무상기증하고 연구소를 대학 부설로 하여 소장직책을 갖고 연구소 운영에만 전념하였다.
   태동고전연구소에서 임창순 선생에게 한문을 배운 제자 230여 명 가운데 100여 명이 대학에서 역사, 문학, 미술사, 사상사, 경제사 등 각 분야에서 후학들을 가르친다. 30여명은 연구소나 박물관에서 근무하며, 70여명은 석·박사 과정에서 공부를 계속하고 있다.
  태동고전연구소는 1985년부터 해마다 학술지인『태동고전연구(泰東古典硏究)』를 발간하고 있는데, 2014년 말 현재로 제33집을 간행해 한국 인문학 발전에 많이 기여하고 있다. 임창순은 태동고전연구소가 남북한의 젊은 학도가 한 자리에 모여 조국의 장래를 함께 의논하는 전당이 되기를 바랬다.
  임창순은 1984년에 전국 각지의 비석에 새겨진 비문 등 금석문을 해석해 판독한『한국 금석집성』을 펴냈다. 특히 단양적성비 판독은 학계에 큰 공헌을 한 업적으로 평가를 받는다. 뿐만 아니라, 광개토왕비문은 1890년 이전 것을 소장하고 있으면서 학계에 많은 공헌을 하였으며, 중원고구려비와 같은 비문을 해석, 판독하여 발표하기도 했다.
  한국정부는 한학과 금석문 해석 등으로 최고의 경지에 오른 임창순을 1971년부터 문화재위원으로 위촉하고 문화재 연구를 하도록 했다. 1985년, 1989년, 1991에도 문화재위원장을 연임하며 지냈고, 82세 때인 1995년에도 역시 문화재위원장을 맡아 우리나라 문화재를 지정하고 관리하는 직책을 소화했다. 1998년에는 경복궁 흥례문 상량문을 직접 쓰기도 했다.
  청명 임창순은 젊은 시절 일제 침략의 역경 속에서 민족적 자긍심을 지키며 고전 연구에 힘을 쏟었고, 그 이후 태동고전연구소와 청명문화재단을 설립하고 평생토록 민족문화의 창달적 계승과 민족 재통일에의 학문적 기여를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역사학자로서 금석학과 서지학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고 서예를 학문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임창순은 노쇠하여 1999년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2007년에는 경기도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됐고,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주년이 되는 해인 2009년 4월 16일부터 5월 10일까지 예술의 전당에서는 ‘연기와 구름같이 거슬림 없이 사는 삶’을 주제로 임창순의 유묵전을 개최했다.
  그런데 한림대학이 2014년에 갑자기 태동고전연구소에 지원을 포기하고 신입생도 뽑지 않았다. 올해 졸업생을 끝으로 지곡서당은 적막강산이다. 이제 태동고전연구소 지곡서당이 자립하지 않으면 안 되는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다행히도 태동고전연구소 지곡서당 동문들이 십시일반으로 성금을 모아 2015년에는 마석에 있는 지곡서당이 아니라 종로의 한 오피스텔에서 한학교육을 한다고 한다. 지곡서당의 이런 변화는 한국 고전학, 인문학 분야의 큰 손실로 남을 것이다. 국가 정책적 차원에서 지원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인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참고문헌>
  1. 옥천문화원과 태동고전연구소 홈페이지 참조.
  2. 조현찬, “태동고전연구소 지곡서당을 찾아서”, 남기고 싶은 이야기“, 2014.4.2일.
  3. 곽병찬, “이제는 끊긴, 지곡서당 글 읽는 소리”, 한겨레신문, 2015.3.10일자.
                                                                              <필자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1994),『아우내 단오축제』(1998),『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997) 등 4권
   .주요 논문 : “천안시 토지이용계획 고찰”, “천안 연극의 역사적 고찰”, “천안시 문화예술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 “민속학자 남강 김태곤 선생의 생애와 업적”, “태안지역 무속문화의 현장조사 연구”, “태안승언리상여 소고”,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지역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천안지역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한국선도의 맥을 이은 일십당 이맥의 괴산 유배지 추적과 활용방안” 등 65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  

twitter facebook kakaotalk kakaostory 네이버 밴드 구글+
공유(greatcorea)
도움말
사이트를 드러내지 않고, 컨텐츠만 SNS에 붙여넣을수 있습니다.
500개(11/25페이지)
환단고기-자유게시판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역사관련 사이트 링크 모음 환단스토리 7921 2020.11.06
299 종교사상가 다석 유영모 선생 이야기 신상구 2106 2016.01.07
298 증산도 안경전 종도사의『환단고기』이야기 신상구 2827 2016.01.05
297 미륵정토사 시설 단군성전 신상구 2004 2016.01.05
296 천재 궁정기술자 장영실 이야기 신상구 2622 2016.01.02
295 판소리 덜렁제를 창시한 국창 권삼득 이야기 신상구 2560 2015.12.31
294 대전 시민 60%가 지역의 역사와 문화유산에 대해 잘 모른다. 신상구 1988 2015.12.30
293 한일간 위안부 문제 타결에 대한 여야와 시민단체의 상반된 입장 신상구 2324 2015.12.30
292 해방 직후 대전의 이모저모 신상구 2421 2015.12.28
291 금년도 안에 위안부문제라도 해결되기를 기원하며 사진 신상구 2320 2015.12.27
290 천부경 성자 고 박동호 선생 이야기 신상구 2039 2015.12.26
289 월북작가 안회남 이야기 사진 신상구 2287 2015.12.25
288 조국의 자주독립과 국권회복을 위해 소설을 창작한 안국선 선생 신상구 2528 2015.12.25
287 국혼문화원장 강우중의 천부경 이야기 신상구 1780 2015.12.25
286 대전 중구 뿌리공원 대강당에서 제3회 세계 천부경의 날 대축제 개최 사진 신상구 2211 2015.12.24
285 한국상고사의 쟁점 학술회의 소개 신상구 2136 2015.12.23
284 김두봉의 단군에 대한 역사인식 신상구 2192 2015.12.22
283 민족종교 보천교 연혁 신상구 2333 2015.12.22
282 매국역사학자를 우대하고 민족사학자를 홀대하는 한국 정부 신상구 2025 2015.12.20
281 윤봉길의사 기념관 개보수를 경축하며 신상구 1918 2015.12.20
280 미국 금리 인상이 한국경제에 미치는 영향 신상구 2470 2015.12.20
 
모바일 사이트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