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유천동 산신제

신상구 | 2015.06.11 02:12 | 조회 2288
유천동 산신제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칼럼니스트) 신상구(辛相龜)
1. 한국 산신제의 시원과 목적과 역사
우리나라 국토 70%가 산이다. 최고봉인 백두산(2,744m)을 위시하여 수없이 많은 산이 국토를 빽빽하게 메우고 있다. 이러한 산악 지형적 여건과 환경은 한국인의 삶에 직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여 왔다. 이로 인해 한국 역사와 문화는 자연스럽게 산으로부터 시작된다. 환인의 아들 환웅이 하늘로부터 수많은 무리를 거느리고 하강한 곳이 산(태백산)이요, 나라를 세워 백성을 다스린 단군왕검이 산신이 되었다는『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이 이를 역사적 사실로 뒷받침하고 있다.
집에 집 지킴이가 있듯이 산에도 주인이 있다. 그가 바로 산신령(山神靈)이다. 산신령은 초능력적 영험력을 발휘하여 인간세상을 지배하여 왔다. 이런 이유로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산을 숭배하여 온 것이다.『삼국유사』처용랑 망해사조에 헌강왕이 오악신(五嶽神)에게 제사를 올렸다는 사실은 한민족이 오래전부터 산을 숭배한 풍습을 잘 알려 주고있는 좋은 대목이다.
신라 때에는 삼신산(三神山)으로 여긴 금강산·지리산·한라산을 숭배하였고, 오악산으로 불린 토함산·계룡산·태백산·부악·지리산에 제사를 지내기도하였다. 고려 때에도 지리산, 삼각산, 송악산, 비백산의 사악신(四嶽神)에게 제사를 지냈다. 조선시대에도 금강산, 묘향산, 백두산, 지리산, 삼각산을 오악산으로 숭배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전국의 500여 고을에서도 주산(主山)이나 진산(鎭山)을 설정하고 정기적인 산신제를 봉행하여 산악신앙의 맥을 이었다.
산악신앙의 맥은 오늘날 산신제라고 하는 민간제의로 자리 잡게 되었다. 산신제는 지역민의 평화와 안녕을 도모하고 국가의 시화연풍(時華年豊)을 염원하는 것이다. 이것은 산신제를 통해 인간 세상의 일들을 하늘세계에 알리면서 신과 소통하면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달성하기 위함이다. 즉 인간들이 산을 매개체로 하여 하늘과 연결 통로를 만들어 신과 교감대를 형성하면서 기원을 이루려는 것이다. 이러한 산신제는 고대사회에서부터 있어 온 대규모적 제천의례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신인합일사상(神人合一思想)에 근거하고 있다. 산신제의 전통이 오늘날에 와 지역 또는 마을 단위의 소규모 행사로 축소되면서 본래 의미보다는 지역민 보호와 안녕 추구로 목적이 바뀌게 된 것이다.
산신제의 전통을 잇게 하는 산의 주인인 산신령은 산신, 산신할아버지, 산할아버지, 할아버지, 산신령님, 신령님, 산왕, 산왕산신, 산군, 산령, 산귀신 등으로 불린다. 또한 산명을 붙여 태백산 산신령, 지리산 산신령 등으로 부른다. 이러한 산신들은 나라를 다스리던 통치자가 사후에 산의 주인으로 신격화된 경우가 많다. 그러면서 넓게는 국가, 좁게는 부락을 수호하는 신으로 추대된다.
한편 산신령 모습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은 산신도이다. 그림에 보면 호랑이의 변화신인 신선이 호랑이 등 위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신선은 인적이 드문 깊은산 속에서 근엄하게 백발노인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간혹 선녀나 동자를 데리고 다닌다. 산 중의 왕으로 불리는 호랑이는 영험력을 소유한 신격이나 인간으로 변화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로서 변화성, 개혁성, 기술성, 생산성 등을 상징한다. 산신령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소나무는 음양오행의 목성(木性)에 해당된다. 이는 곧 아침 해가 뜨는 동방(東方)을 상징하면서 시작과 솟음을 뜻한다.
서낭당에 소나무가 신목(神木)으로 모셔지고, 신 내림굿의 일월(日月)대를 동쪽으로 뻗어 자란 소나무 가지로 삼는 데서도 그 뜻을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소나무는 음(陰)의 나무로서 맑고 깨끗한 깊은 산중에서 사시사철 푸른 색채를 지니며 자란다. 여기서의 푸른색은 영원한 생명의 상징이다. 산신령 두상 후광의 빛은 곧 산신령이 늘 신비스러움과 영험스러움을 나타내는 존재임을 암시한다. 산신령이 들고 다니는 죽순은 남성 성기를 상징한다. 이는 자손 점지를 암시하는 동시에 권력을 뜻한다.
산신령은 영초(靈草)인 산삼과 조롱박 안의 불사약(不死藥)인 영약(靈藥)을 소지함으로써 죽음에 다다른 사람도 회생시킬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로 묘사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산신령 옆에 있는 동자의 오른손과 왼손에도 산삼과 영지가 들려 있기도 한다. 애기씨(선녀) 오른손에는 사후세계를 상징하는 영적인 꽃이 들려 있다. 또한 왼손에는 인간 세상을 내려다볼 때 사용되거나 바람을 일으켜 인간사회를 오갈 수 있도록 돕는 부채가 들려 있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산신령 그림에 나타나는 영지는 여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는 곧 아기를 생산함을 상징한다.
2. 유천동 산신제의 의미와 유래
유천동 산신제는 대전광역시 중구 유천동에서 행해지는 보문산 산신을 모시는 제의이다. 1997년 1월에 대전광역시 무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었다. 매년 음력 동짓달 초사흘에 지내는 유천동산신제(柳川洞山神祭)는 본래 버드내산신제라 하였다. 버드내는 유천(柳川)의 한글 표기로 버들내에서 변화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곧 천변에 버드나무가 늘어서 있는 데에서 천변을 끼고 있는 마을 이름이 버들내가 되었고, 버들내가 음운변화를 거쳐 발음하기 쉬운 버드내가 된 것이다. 요컨대 이러한 지명에 근거하여 유천동산신제를 버드내산신제라 하였다. 그러다가 1970년대 이후 급격한 도시화에 의해 마을이 확장되면서 버드내보다 유천동이란 지명 사용이 일반화되었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서 이곳의 제의 명칭이 버드내산신제에서 유천동산신제로 변화하였다.
유천동은 도마동과 하천 사이에 위치한 마을이다. 이 하천은 천변에 늘어서 있는 버드나무로 인해 유등천으로 불린다. 이 유등천의 북쪽 일대가 바로 유천동이다. 이곳은 1960년대만 하더라도 농촌 마을로 유천동은 보문산 산자락에 위치한 정도에 따라 상평, 중평, 하평으로 나뉘었다. 과거의 산신제는 마을이 연합하여 지냈다.
유천동산신제는 그 역사가 아주 오래되었다. 구전에 따르면 16세기 중반, 460여 년 전부터 호환을 피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시작되었으며, 당시에는 산제당이 보문산 산기슭에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구전에 의한 것으로 입증할만한 증거는 없다. 다만 나이 많은 제보자에 따르면 1930년대에도 산신제가 있었으며, 선대로부터 지속해온 것이라고 들었다고 한다. 이로 볼 때 유천동의 산신제는 적어도 100여 년 이상의 내력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3. 유천동 산신제의 목적
유천동산신제의 주된 목적은 마을 주민들의 평안과 풍년을 기원하기 위함이다. 질병의 화를 면하게 해주고, 물과 불의 피해를 면케 하여주며, 교통사고 등을 면하게 해 달라는 내용이 산신제의 주된 목적이다. 물론 이 외에도 소지를 올리는 과정에서 농사의 풍년이나 가축의 번성을 기원한다.
4. 유천동 산신제의 시기와 주체
유천동산신제는 매년 음력 11월 중 길일을 골라 시행하였다. 그러다가 1970년대 초에 동짓달 초삼일로 제의 일자를 확정하여 매년 같은 날에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유천동산신제는 유향계(柳鄕契)가 중심이 되어 시행된다. 유향계원은 대부분 이곳 유천동의 토착민들이다. 제관은 유천동 유향계원들이 회의를 통하여 선정한다. 선정된 제관은 제주와 축관, 유사 각 1인이다. 이들 세 사람이 중심이 되어 산신제를 지낸다. 제관으로 선정된 사람은 제 지내기 사흘 전부터 근신생활을 한다. 각자의 집 대문 앞에 황토를 놓고, 대문에 금줄을 걸어 외부인의 출입을 막는다. 금줄은 산제가 끝난 뒤에도 일주일 정도 걸어두었다가 뗀다. 또 대문 밖 출입을 삼가며 목욕재계를 하여 몸을 청결히 유지한다. 부부간의 잠자리를 피하고 먹는 것에서도 생선이나 고기를 먹지 않는다. 제주와 그 일행은 제 지내기 사흘 전에 제장을 깨끗이 청소한다.
5. 유천동 산제당의 위치와 규모
현재 유천동산제당은 도심에 위치하여 있다. 이는 시가가 확장되면서 산제당이 자연스럽게 민가에 둘러싸인 것이다.
유천동산제당은 유천동 동네 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있어 위치가 높았다는 감을 지금은 전혀 느낄 수 없지만 그래도 엣날엔 벌판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했었다고 한다. 당집이 있는 이 곳은 예전에는 논밭으로 둘러싸인 비교적 높은 둔덕으로, 옆에는 늪이 있어 물이 항상 솟아 올랐으며 이웃해 있는 상평과 중평마을을 굽어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대전광역시 중구 유천 1동 256-1번지에 위치한 산제당은 30평의 대지에 세워져 있다. 건평은 3.5평이고 단칸 기와집이다.
6. 유천동 산제당에 봉안된 산신도와 주변 환경
당의 내부에는 보문산 산신령을 모시고 있다. 당의 내부 전면 벽에 호랑이와 산신령이 함께 있는 산신도가 있다. 이 산신도는 이전의 것이 낡고 퇴색하여 1970년대 말에 다시 제작한 것이다. 건물 또한 2001년 대전광역시의 지원으로 보수하였다. 현재 유천동의 산신제는 대전광역시 무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어 내려오고 있다.
제장의 한쪽에 샘이 있다. 이 샘은 제의 때에 음식을 조리하는데 사용되는 샘이다. 또 산제당의 전면 오른쪽엔 수령이 100여 년 된 소나무가 있다. 본래 산제당 주변에는 여러 그루의 소나무가 있었다. 보문산에서 캐어다 심은 것들인데 주변이 주택가가 되면서 베어지고 지금의 산제당 옆에 선 소나무 한 그루만 남게 되었다. 신성시하는 금줄이 쳐져있는 당(堂)과 소나무를 제외하면 거의 남아 있는 공간이 없다. 2평 남짓한 당(堂)의 크기 때문인지 아니면 요즘 시세에 대한 땅값이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둘러보기에도 협소하기만한 작은 공간이었다. 당(堂)집은 문에 자물쇠가 걸려있기는 했지만 이 또한 형식적인 걸로 보였다.
7. 유천동 산신제의 제물과 순서
산신제의 제물은 돼지머리, 시루떡, 탕, 명태포, 대추, 밤, 배, 나물, 술 등이다. 제물은 유사가 당일 아침 시장에 가서 구입해 온다. 유사는 제수를 구입할 때 값을 흥정해서는 안 된다. 또 가고 오는 과정에서 부정한 것을 보지 않도록 조심한다. 그런데 1997년 유천동의 산신제가 대전광역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제의 자체가 이전보다 확장되었다. 이를테면 돼지머리 대신 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올리고, 그 밖의 제수 역시 이전보다 푸짐하게 준비하여 올린다.
산신제는 당일 저녁 10시 무렵에 준비하여 11시 무렵에 지낸다. 제주 일행은 제주의 집에 모여 있다가 10시 무렵에 산제당으로 이동한다. 그리고는 미리 준비해간 제물을 당의 전면 상에 진설한다. 이어 11시가 되면 제를 지낸다. 제의 순서는 분향- 강신- 배례- 초헌- 독축- 아헌- 종헌- 첨작- 소지의 순이다. 이러한 과정은 각 가정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기제사와 유사한 것으로, 소지올림 과정만 제외한다면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소지올림의 과정에서 대동소지를 올린 뒤 제의에 참여하거나 관계된 각각의 상인, 공사단체, 영업장의 소지를 올린다.
산신제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 이전만 하더라도 제가 끝나면 제주 일행이 유사의 집에 모였다. 제주 일행과 유향계원이 유사의 집으로 가서 음복하며 밤이 늦도록 환담을 나누었다. 그러다가 무형문화재 지정 이후부터는 제주 일행과 관공서 참여자, 상인들이 두루 모여 음복하고 있다.
8. 유천동 산신제의 의의
유천동산신제는 도심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특징이 있다. 대부분의 공동체 신앙이 도시화와 맞물려 소멸되고 있는 시점에서 유천동산신제는 주목할 만한 것이다. 이처럼 도심 속에서 산신제의 존립이 가능한 것은 무엇보다 토착민들이 중심이 된 유향계가 산신제를 주도해 왔기 때문이다. 또한 제의 주체가 공동체 신앙의 기능에 관심을 두고 변화하는 주민들의 욕구를 제의에 담으려고 노력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상업이나 사업장의 번창, 교통사고로부터의 안전, 유능한 인물 배출, 군대에 간 자녀의 안전 같은 변화한 거주민의 소망을 담아내려 노력하였다. 바로 이 점이 유천동산신제의 생명을 유지케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1. 대전직할시 향토사료관 편,『한밭의 마을신앙』, 영창당인쇄사, 1993.
2. 한 대수, 유천동 산신제, 대전광역시, 2005.
3. “유천동산신제”, 국립민속박물관민속연구과,『한국세시풍속사전』, 국립민속박물관,
2008.11.27.
4. “산신제(山神祭)”, 국립민속박물관.『한국민속신앙사전 : 마을신앙 편』, 2009. 11. 12.
5. 청송, “대전 중구 유천동 산신제”, 충청투데이, 2015.6.9일자. 제11면.
<필자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아우내 단오축제』,『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997) 등 4권.
.주요 논문 : “천안시 토지이용계획 고찰”, “천안 연극의 역사적 고찰”, “천안시 문화예술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 “민속학자 남강 김태곤 선생의 생애와 업적”, “태안지역 무속문화의 현장조사 연구”, “태안승언리상여 소고”,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천안지역 상여제조업체의 현황과 과제” 등 61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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