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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을 기념하며

신상구 | 2014.10.01 01:11 | 조회 3690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을 기념하며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신상구(辛相龜)


1. 들어가는 말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3월에 봉건체제의 개혁을 위해 1차로 봉기하고, 같은 해 9월에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고자 2차로 봉기해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농민중심의 혁명이었다. 그로부터 120년의 시간이 흘러 다시 '갑오년'을 맞이했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인내천' 사상을 기반으로 한 동학은 당시 제국주의의 열강과 봉건체제의 폭정 아래 신음 하던 백성들에게 구원의 소리로 다가왔다. 평등사상을 기반으로 한 동학은 신앙대상에 대한 믿음보다는 주체적인 자각과 실천을 강조했다.

그런데 동학농민혁명은 역사적으로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했다. 국사교과서에서조차 동학농민혁명을 동학란으로 폄하해 기록하고, 동학농민혁명 유족들이 핍박을 받아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이 좋지 않았다.

김대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은 출범식 직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동학농민혁명은 우리 역사 최초·최대의 민중 봉기였고 이 땅에서 근대 정신을 몸으로 증명한 사건”이라며 “그러나 역사는 이 혁명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김 이사장은 이어 “여전히 근대의 기점을 갑오경장으로 보는데 그보다 몇 달 전 10만~30만명의 희생자를 내면서 전 국민이 참여한 동학농민혁명보다 왜 갑오경장이 더 평가받는지 알 수 없다”고 지적했다.

다행히도 2004년에 동학농민혁명특별법이 제정되어 동학농민혁명에 희생된 유족의 후손들은 역적의 후손이란 누명을 벗게 되었다.

그런데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연구가 남접 중심으로 이루어져 동학농민혁명하면 의례 전봉준(全琫準)을 연상하게 되고, 또 고부군수 조병갑(古埠郡守趙秉甲)의 학정이 떠오르게 된다.

그리하여 동학농민혁명을 충청도 북접 중심으로 조사연구하여 동학농민혁명의 균형적인 조사연구에 조금이라도 기여하고자 한다.

2. 동학의 의미와 발생 배경

동학(東學)이라는 명칭은 서학(西學)에 대립된 것으로, 최제우는 “나 또한 동쪽에서 태어나 동도(東道)를 받았으니 도(道)는 비록 천도(天道)이나, 학(學)은 동학(東學)이다”(논학문)라고 하였다. 그리고 동학의 창시는 지배층의 착취로 농촌 경제가 파탄에 이르고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에 대한 위기의식이 고조되었던 19세기 후반의 사회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조선은 심각한 사회적 혼란과 위기에 놓여 있었다. 상품화폐경제의 발달로 농민층의 분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고, 오랜 기간 외척(外戚)의 세도정치가 지속되면서 정치 기강이 문란해져 지방관과 토호의 횡포와 착취는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게다가 자연재해와 전염병이 주기적으로 반복되어 농민들의 삶은 매우 피폐해졌다. 도탄에 빠진 백성들이 각지에서 봉기를 일으키면서 사회 불안은 더욱 확산되었고, 서양 열강의 중국 침략 등으로 외세에 대한 위기감과 서학(西學)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있었다. 또한 <정감록(鄭鑑錄)>과 같은 예언서가 널리 유포되며 미륵신앙, 도참사상 등 다양한 형태의 반봉건적 민중사상이 확산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제우는 유(儒)ㆍ불(佛)ㆍ선(仙)과 같은 기존의 사상들로는 현실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고 보았다. 때문에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할 계책”(포덕문)을 내기 위해서도 천명(天命)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사상이 필요하다고 여겨 당시의 여러 사상들을 정리ㆍ융합하여 동학을 창시하였다. 그는 유(儒)ㆍ불(佛)ㆍ선(仙)이 비록 뜻을 달리하고 있으나 그 근원은 모두 하늘에서 비롯된 것으로, 동학은 이 세 가지 도(道)에서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점을 버린 것이라고 밝혔다.

동학은 인본주의(人本主義)를 기반으로 인간 평등과 사회 개혁을 주장하여 사회의 변화를 갈망했던 민중의 호응을 얻었다. 동학은 사람은 본래 하늘의 성품을 가졌으므로 사람이 곧 하늘이요, 하늘이 곧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하늘처럼 존귀하므로 사람 대하기를 하늘을 섬기는 것처럼 경건하고 겸손하게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동학은 민중들에게 새로운 사회의 전망을 제시해 주며, 성리학의 지배이념에 대항하는 민중의 저항 이데올로기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동학은 지배체제를 옹호하고 있던 성리학과는 달리 당시 사회의 구조와 질서를 부정하는 혁명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한편, 동학은 1894년 전봉준(全琫準) 등이 주도한 대규모 농민봉기에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동학과 이 사건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동학이 주체가 되어 농민봉기가 일어났다는 견해에서는 이 사건을 ‘동학혁명’, ‘동학운동’ 등으로 나타낸다. 반대로 동학은 종교적 외피에 지나지 않았으며 봉건사회와 외세의 수탈에 맞선 농민의 항쟁이 주된 측면이었다는 견해에서는 ‘동학’이라는 표현을 넣지 않고 ‘1894년 농민전쟁’, ‘갑오농민전쟁’ 등으로 나타낸다. 그리고 반봉건ㆍ반외세의 농민전쟁이 주된 측면이지만 동학이 조직 동원이나 사상에 미친 영향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견해에서는 ‘동학농민전쟁’, ‘동학농민운동’ 등으로 나타낸다.

3. 동학의 역사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는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재가녀(再嫁女)의 자식이라는 신분 때문에 사회적 차별을 받아야 했다. 그는 오랜 수도(修道) 끝에 1860년 5월 7일(철종 11년 4월 5일) 깨달음을 얻어 동학을 창시했고, 포교(布敎)를 시작한 지 2년 만에 경주ㆍ영덕ㆍ대구ㆍ청도ㆍ울산 등 14곳에 접소(接所)와 접주(接主)를 두고, 전체 교인의 수가 3,000여 명에 이를 정도로 동학의 교세는 매우 빠르게 성장하였다. 그러나 최제우는 1864년 1월 18일 ‘삿된 도로 세상을 어지럽힌 죄(左道亂正之律)’로 경주에서 체포되어, 4월 15일에 대구에서 처형되었다.

최제우에게 도통(道統)을 이어받은 최시형은 동학이 불법화되어 탄압을 받는 상황에서도 교단 조직을 정비하고 최제우의 글을 모아 경전을 편찬하는 등 조직 확대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 결과 1880년대에 동학의 교세는 영남 지방을 벗어나 호남ㆍ충청ㆍ경기 지방까지 확대되었고, 1890년대에는 경상ㆍ전라ㆍ충청의 삼남(三南) 지방을 거의 포괄할 정도로 비약적으로 성장하였다. 동학은 포접제(包接制)로 교도들을 조직했는데, ‘포(包)’와 ‘접(接)’마다 포주(包主)와 접주(接主)를 두었다. 일부에서는 대접주(大接主)를 따로 두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포(包)와 접(接)의 운영에는 육임제(六任制)를 실시했는데, 교장(敎長)ㆍ교수(敎授)ㆍ교집(敎執)ㆍ교강(敎綱)ㆍ대중(大中)ㆍ중정(中正) 등의 여섯 가지 직임(職任)으로 나누어 교화와 조직 관리 등을 나누어 맡게 했다.

한편, 1871년 영해(寧海,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에서 교조신원(敎祖伸寃)을 내세워 동학 교도들을 모아 민란(民亂)을 일으키려 했던 이필제(李弼濟)처럼 당시 동학에는 종교적인 이유에서만이 아니라 동학 조직을 사회 개혁에 이용하기 위해 입교(入敎)하는 사람도 많았다. 특히 1880년대 후반 이후 교세가 급격히 확장된 호남 지역에서는 빈농과 몰락농민의 참여가 많았으며, 전봉준(全琫準)과 서인주(徐仁周)처럼 신앙 경력이 짧은 새로운 지도자들이 교도들을 이끌었다. 이들은 종교 활동보다는 가렴주구(苛斂誅求)의 중단, 탐학한 지방관의 징치(懲治), 외국의 선교사와 상인의 추방 등 농민의 이해에 바탕을 둔 사회 개혁을 지향하였다. 이들은 1890년대에 들어서 최시형, 손병희(孫秉熙) 등의 동학 교단 지도부와는 독자적인 경향과 움직임을 나타냈는데, 충청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동학의 교단 지도부는 북접(北接), 이들은 남접(南接)이라고 불렸다.

북접과 남접의 분화는 1892∼1893년에 전개된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의 과정에서 뚜렷하게 진행되었다. 1892년 10월 최시형은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만류했지만, 남접의 서인주 등은 공주에서 독자적으로 교도들을 모아 집회를 열어 교조인 최제우의 신원(伸寃, 억울함이나 원한을 품)과 가렴주구의 중단 등을 요구했다. 11월에는 북접의 교단 지도부도 참여하여 전라도 삼례에서 집회를 열었으며, 12월에는 충청도 보은 장내리(帳內里)에서 집회를 열었다. 그리고 1893년 2월 11일부터는 광화문 앞에서 복합상소를 하였다. 당시 손병희 등 북접의 교단 지도부는 고종의 전교(傳敎)를 받고는 3일 만에 서둘러 해산했지만, 서인주 등은 미국ㆍ프랑스ㆍ일본 등의 영사관ㆍ학당ㆍ교회당 등에 ‘척왜양(斥倭洋)’의 괘서를 붙이며 정치운동을 벌였다. 또한 3월 10일 즈음에 충청도 보은, 전라도 원평, 경상도 밀양 등 삼남 지방에서 동시에 집회를 열었는데, 이들 집회는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내세워 교조신원을 요구하는 단순한 종교운동의 차원을 넘어서 반봉건ㆍ반외세의 성격이 뚜렷이 나타났다. 정부의 탄압을 두려워한 최시형 등 북접의 교단 지도부는 선무사(宣撫使)로 파견된 어윤중(魚允中)에게 왕의 윤음(綸音)을 전달받고는 집회를 서둘러 해산시키고 잠적해 버렸다. 그리고 전봉준을 위험인물로 지목하고, 법소(法所)와 도소(都所)를 설치해 교단 조직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전봉준은 남접의 주요 인물들과 함께 꾸준히 농민 봉기를 준비하였으며, 1893년 11월에는 고부(高阜, 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에서 봉기 계획을 세워 추진하였다. 당시 고부의 이장(里長)과 집강(執綱)들에게 보낸 격문에 따르면, 전봉준은 고부를 점령하여 백성들에 대한 수탈을 일삼던 군수 조병갑(趙秉甲)을 처형하고, 전주 감영을 함락시킨 뒤 한양까지 진격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조병갑이 익산 군수로 옮겨가게 되자 거사 계획은 중단되었으나, 1월 9일 조병갑의 재임이 결정되자 전봉준 등은 1월 10일 봉기를 일으켜 1월 11일 고부 관아를 점령하였다(고부 봉기). 그리고 조정에서 안핵사(按?使)로 파견된 이용태(李容泰)가 농민군을 탄압하자, 전봉준은 무장(茂長,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에서 손화중(孫化中)과 함께 창의문(倡義文)을 선포하며 각 지역에 통문을 보내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제폭구민(除暴救民)을 위해 봉기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다. 농민군은 3월 20일 무장을 출발하여 3월 23일 고부를 다시 점령했으며, 3월 25일에는 백산(白山)에서 농민군 대회를 열어 조직과 투쟁방향을 점검하였다. 그리고 3월 27일부터 태인ㆍ금구ㆍ부안 등으로 진격하여, 4월 7일에는 황토현(黃土峴)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뒤이어 4월 27일에는 전주성을 점령하였다(1차 봉기).

하지만 전주성에서 농민군과 관군의 공방이 계속되는 동안 조정은 청에 원병을 요청하여 청군이 5월 5일과 7일에 아산만에 도착했다. 그러자 일본도 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출병을 계획하여 나라의 상황이 매우 위급해졌다. 이에 농민군은 5월 7일 관군과 화약을 맺고 전주성에서 철수하였다(전주 화약). 그리고 전라도 53개주에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여 폐정 개혁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일본군이 6월 21일 경복궁을 침범하여 친일 내각을 세우는 등 침략을 본격화하자, 9월 12일 농민군은 다시 봉기를 일으키기 위해 삼례로 집결하였다. 그런데 당시 최시형의 북접 교단은 농민군의 2차 봉기에 반대하여 남접과의 관계 단절을 알리는 고절문(告絶文)을 각 포에 돌리고, 농민군을 토벌하자는 ‘벌남기(伐南旗)’까지 만들었다. 그러나 중도파의 조정으로 북접 교단도 2차 봉기에 참여하기로 결정하여 농민군은 9월 하순에 한양을 향해 북상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11월 8일 공주 우금치(于金峙) 전투에서 일본군과 관군에 대패하여 농민군은 논산, 금구 등지로 후퇴하였고, 태인 전투에서도 패배한 뒤 전봉준이 이끌던 농민군 주력부대는 해산되었다. 그 밖의 지역에서 봉기한 농민군도 12월을 고비로 대부분 진압되었고, 전봉준도 순창(淳昌)에서 일본군에 사로잡혀 이듬해 3월에 처형되었다(2차 봉기).

농민전쟁이 패배로 끝난 뒤에 동학은 더욱 심한 탄압을 받았고, 살아남은 북접 지도부는 도피 생활을 하며 조직의 명맥을 유지하였다. 손병희(孫秉熙)ㆍ손병흠(孫秉欽)ㆍ이용구(李容九) 등의 노력으로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에서 새로 교세를 넓히기도 하였으나, 최시형마저 처형되면서 존립의 어려움을 겪었다. 1897년 최시형에게 도통을 이어받은 손병희는 교단 조직 정비에 나섰으나, 1901년 손천민(孫天民)ㆍ김연국(金演局) 등의 핵심 지도부마저 관군에 사로잡히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에 망명중이던 손병희 등은 일본과 협력하여 국내 활동의 기반을 넓히려 하였다. 이용구를 국내로 보내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했고, 경의선ㆍ경원선 철도를 부설하는 데 동학교도를 동원했다. 진보회도 정부의 탄압을 받았으나, 일본군의 후원을 받던 일진회(一進會)의 압박으로 대한제국 정부는 김연국을 비롯한 동학교도들을 모두 석방하였다. 이로써 동학은 포교의 자유를 얻었으며, 1904년 12월에는 진보회를 일진회에 통합시켰다. 그리고 1905년 12월 1일에는 명칭을 천도교(天道敎)로 바꾸었으며, 1906년 1월 손병희가 일본에서 귀국하여 대도주(大道主)가 되었다. 그러나 1906년 8월 교단 내부의 갈등으로 이용구 등에게 출교 조치를 하여 일진회와 분리했으며, 이용구 등은 김연국과 함께 따로 시천교(侍天敎)를 만들었다.

4. 충청도 동학농민혁명의 주요 유적지

동학의 제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 선생은 동학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의 뜻을 이어받아 포교하여 1880년대 초반에 충청도 전 지역으로 동학의 교세가 뻗어나갔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1890년대 전라도로 교세가 확장되면서 1894년에 동학농민혁명이 시작되었다.

제1차 동학농민군 봉기 때는 최시형 교주가 자숙하라고 해서 충청지역은 활동이 적었지만 청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충청도 교인들이 들고 일어났다. 충청도의 동학농민혁명은 6월 말부터 본격화됐고 7, 8월에 이르면 충청도 전부가 동학 세상이었다. 이어 9월 이후 2차 봉기 때는 전국이 반일전선에 참여하게 되는데 어느 지역보다 충청도의 희생이 컸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 역사학계가 전라도와 전봉준 및 남도의 3대 접주를 중심으로 동학을 조사연구하는 바람에 충청지역의 동학농민혁명이 동학을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데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잘 알려지지 않았다.

다행히도 최근에 명지전문대학교 채길순 교수, 충북대 사학과 신영우 교수, 충북학연구소 김양식 소장, 공주대 역사교육과 지수걸 교수, 이병규 박사 등에 의해 충청도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조사연구가 이루어져 이제는 충청도 동학농민혁명의 성과도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다.

1894년 1년간 전개되었던 동학농민혁명은 1892년에서 1893년까지 동학교단의 조직적인 교조신원운동과 1894년 1월 고부 농민봉기를 도화선으로 3월 전라도 무장에서 전면적으로 시작됐다.
동학농민혁명의 전개 과정은 크게 여섯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1892년에서 1893년까지 동학교단과 일반 민중들이 전개한 교조신원운동단계, 둘째는 1893년 11월의 사발통문 모의에서 비롯된 1894년 1월 고부농민 봉기, 셋째는 1894년 3월 21일 전라도 무장에서 일어난 제1차 동학농민혁명, 넷째는 5월 7일 전주화약을 계기로 이뤄진 집강소 통치기, 다섯째는 6월 21일 일본군의 경복궁 불법침입 사건을 계기로 봉기한 제2차 동학농민혁명, 마지막 여섯째는 10월 말에서 11월 초에 걸쳐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농민군이 패배한 후 이뤄진 농민군 진압 및 학살이 그것이다.
이 여섯 단계 중 충청지역은 첫 번째 단계와 마지막 여섯 번째 단계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대체로 북접 계통의 영향 아래 있던 충청지역은 공주 우금치 전투로 대표되는 제2차 동학농민운동의 주요 전장이었다. 물론 그 전에 교조신원운동 단계인 1893년 3월 보은 장내리의 집회 때 아산, 홍주, 예산, 당진, 서산, 태안 등지에서 동학농민군들의 술렁임이 있어서 수령들이 서울로 피해가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고 한다.
명지전문대학교 채길순 교수는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은 영남·영동 지방에 이어 소백산맥에 의지해 단양, 괴산 지역을 시작으로 동학 포교를 시작했다"며 "이후 동학은 충북 전 지역으로 빠르게 전파돼 나갔고 동시에 서울 경기와 충청 내포 지역으로 뻗어나가게 됐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후 1894년 제2차 동학농민혁명 시기 당시 9월에 최시형을 중심으로 북접의 무력봉기 선언이 있은 다음부터 충청지역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한다. 충청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주요 전장은 동학농민혁명 최대의 격전지였던 우금치를 중심으로 한 공주 일대였지만, 공주 서북쪽으로 예산, 덕산, 유구를 비롯해 서산, 태안, 해미 등 내포지방에서도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줄기차게 전개됐으며, 남쪽으로 전라도 동학농민군의 영향을 강하게 받던 서천, 한산 지역에서도 이미 1차 동학농민혁명 시기부터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시작됐다.
9월 중순 삼례에서 일어난 호남의 동학농민군이 북상해 여산, 은진을 거쳐 강경에 도착한 것은 10월 초순이었으며, 10월 9일에는 손병희가 이끄는 북접의 주력부대와 합류했다. 한편 북접계통의 다른 한 부대는 청산에 집결하였다가 공주를 향해 남하, 10월 23일에는 공주 동북쪽에 있는 대교(장기면)까지 진출해 논산을 거쳐 북상하는 호남의 동학농민군과 호응하였다.
동학농민군의 공주성 공격은 10월 23일 이인전투에서 시작돼 24일 대교전투, 25일 효포, 능치전두, 그리고 최후의 항전인 11월 9일의 우금치 전투로 이어졌다. 동학농민혁명의 성패가 달린 공주 공방전에서 동학농민군은 우세한 화력으로 맞서는 관군과 일본군의 저지를 뚫지 못하고 끝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2차 기병으로 모아진 거대한 동학농민군의 힘이 공주성을 에워싸고 폭발하였으나, 수없이 많은 동학농민군을 공주전선에 묻어버린 채 호남지방으로 퇴각하고 말았다. 그 후 남쪽으로 퇴각한 동학농민군들이 다시 힘을 모아 원평과 태인 등지에서 반격전을 폈으나 전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충남 남부와 내포지역의 동학농민군 역시 공주를 향한 진출을 끈질기게 시도했으나 11월부터 본격화된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에 밀려 점차 사그라졌다.
천안 목천의 김용휘, 김성지, 김화성 등 이른바 '삼로(三老)'로 불리던 세 동학지도자들이 1894년 10월 8일부터 3일간 세성산전투에서 관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예산지역은 박희인 ․ 박인호 ․ 홍종식 등이 이끈 동학농민군이 예산, 홍성 등지에서 치열한 항쟁을 벌였다. 태안과 서산은 문장노 ․ 안현묵 등이, 충주와 청풍은 성두환이, 청주는 임규호 ․ 권병덕 ․ 서장옥이, 괴산은 홍재길(洪在吉) ․ 이헌표(李憲表) ․ 이원익(李源益)이 활약을 펼쳤다. 하지만 충청지역은 전라도 중심의 동학농민혁명 연구 분위기에 밀려 아직 상세하게 해명되지 못한 지역이 대부분이어서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동학과 관련된 충청지역 대표 유적지는 공주 '우금치'를 들 수 있다. 하지만 동학농민혁명을 비롯해 동학의 전파과정에 있어 충청지역에는 특별히 주목해야 할 몇몇 유적지들이 존재하고 있다.
공주 송장배미는 충남 공주시 금학동에 위치해 있다. 동학농민운동 당시 농민군은 우금치를 공격하는 한편 봉황산의 하고개를 넘어 감영의 배후를 치고자 했다. 그러나 하고개는 천혜의 요새로 계곡을 가득 메운 농민군의 시체만 남긴 채 후퇴해야 했다. 농민군의 시체를 한 곳에 모아 매장했다고 하는데, 그곳이 바로 송장배미라는 논이다.
천안 세성산 전투지는 천안시 성남면 상동리이다. 세성산 전투는 동학농민운동 당시 공주전투의 전초전이었다. 천안, 전의,목천 등에서 기포한 동학교단 측 농민군은 그곳의 농민군지도자 김복용을 중심으로 천혜의 요새인 세성산을 근거지로 해 남하해 오는 관군과 일본군을 격퇴한 후 공주로 진격해 오는 농민군과 합세해 서울로 진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1894년 10월 21일 장위영과 이두황이 이끌고 온 관군과 이를 지원한 일본군의 공격에 300여 명의 전사자를 낸 채 패배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농민군이 패배함으로써 공주일대에 집결한 농민군의 사기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보은 취회는 동학 역사에서 주요한 의미를 지닌다. 교조신원을 위한 광화문복합상소 직후 동학교단은 1893년 3월 11일 대도소가 있는 보은군 외속리면 장내리에서 교조신원과 함께 척왜양창의 기치 아래 다시 집회를 가졌다. 전라, 경상, 충청, 경기, 강원 등지에서 모인 수 만명의 동학교도가 집회에 참석했다. 이들은 산 아래 평지에 성을 쌓고 대오를 정비하며 '척왜양창의' 라고 쓴 깃발을 내거는 등 조직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조정에서는 1893년 3월 25일 충청감사 조병식을 파직하고 집회군중을 해산시킬 선무사로 어윤중을 보내는 한편, 충청병사 홍재희에게 군사 300을 이끌고 보은으로 가게 하였다. 이 같은 압박 속에서 동학교도는 어윤중의 해산 회유과 군대의 압력에 굴복하고 스스로 해산하고 말았다.

태안 백화산 남쪽 기슭에는 갑오동학혁명군추모탑이 우뚝 솟아 있다. 이 기념탑은 포덕(布德) 119년인 1978년 10월 2일 서산,당진,예산,홍성,아산 지역 동학혁명기념탑건립위원회에서 건립했다. 태안지역 동학혁명군은 이원면 포지리(梨園面浦地里)와 이원면 방갈리(遠北面防葛里)에서 혁명기(革命旗)를 높이 들고 총궐기(總蹶起)하여 1894년 10월 1일 태안 관아를 점거하고 구금되어 있던 동학 두목 30명을 구출하고 태안군수 심백희(申百熙)와 별유사 김경제(金慶濟)를 즉석에서 처단했다. 10월 15일 태안·서산·해미·지역에서 재기포(再起包)하여 그 세력을 규합하니 무려 수 만명이 운집하였다. 10월 22일 태안을 출발해서 서산에 이르러 그곳에서 동학군과 합세하고, 10월 23일은 해미 귀밀리에서 유진(留陣)했다. 다음날 오후 5시경에 대군(大軍)이 해미승전곡(海美勝戰谷)을 행진하고 있을 때, 이미 자복하여 대기중에 있던 관군500명·일본군400명 유회군 수천명이 나타나 삽시간에 일대 접전이 벌어졌으나, 동학군의 용전(勇戰)으로 마침내 연합군의 전세를 꺾고 승리를 거두었다. 10월 25일에는 당진(唐津)의 면천읍에서 유진(留陣)하고 10월 26일에는 예산군 신례원에서 유진하는데, 이곳에서 충남 지역 각포에서 운집한 동학군 수 십만명이 들끓었다. 신례원 전투에서 승리한 동학군은 이곳을 떠나 10월 27일 예산군 역촌 뒷들 역촌후평(驛村後坪) 에 유진 기도한 다음, 곧 홍주(洪州)로 행했다. 홍주성 내외서 양군이 대치(對峙)하고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는 동안 동학군 수 십 명이 살상(殺傷)되고 이에 따라 사기가 저하되어 더 이상 대응키 어려워 10월 29일 전략상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학군이 덕산(德山)의 다락뫼 앞을 지날 때 갑자기 이곳을 지키던 유회군 몇 명이 수하(誰何)를 하며 총을 발사하자, 뒤에 따라오던 동학군이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도주하니 그 거대한 대열이 순식간에 흩어지고 말았다. 이때부터 동학인은 물론 그 가족까지도 혹독한 보복을 당하게 되었다. 방갈리서 기포할 때 서부대장을 맡았던 박정백은 홍성에서 총살되고, 접사(接司) 문구석, 서산접주 조석승(曺錫昇) 태안대장 김엽춘 등이 모두 총살되었으며, 또 북부대장 이치영 등 수 백명의 동학인들은 12월 중순경 근흥면 수룡리에서 총살되었다. 그런가 하면 이원면 포지리에서도 같은 시기에 80여명의 동학인들을 동아줄로 묶어다 총살시키는가 하면 심지어 일가족 5형제 모두 처형시킨 일도 있었다고 한다. 특히 북부대장 이치영을 처형할 때 사용했던 작두가 현재 독립기념관에 보관되어 전시 중에 있다.

5.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의
1894년 1월 고부농민봉기에서 시작돼 1895년 1월에 이르기까지 조선 전역에서 전개된 동학농민혁명은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회적 사건이 아니었다.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장기적으로 이어진 동학농민혁명은 조선 후기 빈번했던 민란의 연장선 위에서 종래의 민란을 집약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사상적·조직적 배경에는 조선 후기 이래 '밑으로부터' 표출되고 있던 민중들의 변혁의지를 수용해 체계화한 동학이라는 새로운 사상과 동학의 '포접(包接)' 조직이 자리하고 있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동학 농민군들이 전라도 군현에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고 지방의 행정을 자치적으로 운영하여 지방자치제도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피지배 계층의 사상적 견해를 반영하고 있던 동학사상과 전국적 조직이던 동학교단을 매개로 광범위한 농민 대중이 참여했고 개화파가 주도했던 갑신정변이나 독립협회운동, 재야유생이 주도했던 위정척사운동이나 의병 항쟁 등은 위로부터의 개혁이었으나, 동학농민운동은 피지배 계층을 중심으로 아래로부터 진행된 민중항쟁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종래 군·현 단위에서 산발적으로 이루어졌던 항쟁을 전국 차원의 항쟁으로, 일시적 투쟁에서 장기 지속적인 항쟁으로 발전해 나갔으며, 조선 후기 빈발 했던 농민봉기 단계에서 나타났던 민중의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의지를 발전적으로 계승해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대규모 농민 대중에 의한 혁명이었다. 또 일본의 침략 야욕과, 부패·무능한 조선왕조 봉건 지배층의 외세 의존 및 보수 유생의 체제 수호의 벽에 좌절하였으나, 1894년 이후 전개된 의병항쟁, 3·1 독립운동과 항일 무장 투쟁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회개혁 운동과 자주적 국권 수호운동으로서 한국의 근대화와 민족민중운동의 근간이 됐다.

6. 동학 사상

순조 말엽에서 철종 말년까지, 이씨 조선의 봉건적 사회구조가 무너지고 서양문물이 밀려들어오는 시기에 민중들에 의해 발전된 반봉건(反封建), 반제국(反帝國)의 경향을 갖는 동학의 사상은 시천주(侍天主), 인내천(人乃天), 후천개벽(後天開闢), 보국안민(輔國安民)사상이 근간을 이룬다.

동학 사상의 요체는 “지극한 기운이 오늘에 이르러 크게 내리도록 빕니다. 천주를 모셔 조화가 정해지는 것을 영세토록 잊지 않으면 온갖 일을 알게 됩니다(至氣今至 願爲大降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라는 21자의 한자(漢字)로 표현된다. 동학은 우주 만물이 모두 ‘지극한 기운[至氣]’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기일원론(氣一元論)에 기초해 있다. 하늘(天)ㆍ땅(地)ㆍ사람(人)ㆍ정신(神)ㆍ마음(心)은 모두 지기(至氣)의 표현일 뿐이므로, 하늘과 사람은 애당초 둘이 아니라 하나이다. 지기는 모든 것에 내재되어 있으므로, 사람도 누구나 지기를 몸과 마음에 모시고 있다. 이것이 바로 ‘시천주(侍天主)’ 사상이다. 이처럼 천주(天主)는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 있다. 천주를 몸과 마음에 모시고 있는 사람은 신분이나 빈부(貧富), 적서(嫡庶), 남녀(男女) 등의 구분에 관계없이 모두 평등하고, 수행을 하면 누구나 군자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시천주’ 사상은 2대 교주인 최시형에 이르러 “사람이 하늘이니, 사람 섬기기를 하늘과 같이 하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 사상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3대 교주인 손병희에 이르러서는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으로 체계화되었다.

이처럼 동학은 ‘지기(至氣)’를 중심으로 한 일원론적인 우주관에 근거하여 하늘과 사람, 사람과 사람이 일체화될 수 있으며 평등하다고 본다. 따라서 “내 마음이 곧 네 마음(吾心卽汝心)”이며, “천심이 곧 인심(天心卽人心)”이다. 특히 동학의 천인합일(天人合一)은 하늘이 아니라 인간을 중심으로 하고 있어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며,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며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평등사상을 담고 있다.

그리고 지기의 조화를 깨닫고 마음에 잘 보존하려면 마음을 잃지 않고 기를 바르게 하는 ‘수심정기(守心正氣)’의 수양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성(誠)ㆍ경(敬)ㆍ신(信)의 실천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특히 최시형은 하늘을 모시는 ‘시천주’에서 나아가 하늘을 기르는 ‘양천주(養天主)’를 주장하며 수양을 강조했다. 그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을 경(敬) 개념과 결부시켜 경천(敬天)ㆍ경인(敬人)ㆍ경물(敬物)로 나누어 구체화하였으며, 하늘과 사람만이 아니라 사물에 대해서도 경건하고 겸손한 삶의 태도를 지녀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하늘을 속이지 말라는 무기천(毋欺天), 하늘 앞에 겸손해야 한다는 무만천(毋慢天) 등 ‘십무천(十毋天)’을 양천주를 위한 수양의 방법으로 제시하였다.

또한 동학은 다른 종교와는 달리 내세가 아니라 현세를 중시하는 사상적 특징을 지닌다. 동학의 후천개벽(後天開闢) 사상은 인류의 역사를 크게 선천(先天)과 후천(後天)으로 구분하며, 5만년에 걸친 선천의 시대가 지나고 후천의 시대가 개벽하였다며 변화에 대한 민중의 갈망을 고취하였다. 그리고 혼란에 가득 찬 선천의 종말기를 자기의 사사로운 마음만을 위하는 ‘각자위심(各自爲心)’의 시대로 보았는데, 서학과 서양 세력이 이기주의에 기초한 각자위심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며 동학에 의해 모두가 다른 마음을 이겨내고 한 몸이 되는 ‘동귀일체(同歸一體)’의 새 시대가 올 것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동학이 지향한 세계는 극락이나 천당과 같은 내세가 아니라, 현세에 실현되는 동귀일체의 공동체이다. 동학에 입도하여 조화의 이치를 깨닫는 것도 “그 날부터 군자가 되어 무위이화(無爲而化)될 것이니 지상 신선 네가 아니냐”(포덕문)는 말에서 나타나듯이 ‘천상’이 아니라 ‘지상’을 지향한 일임을 강조한다.

동학은 이와 같이 각자위심에서 비롯된 사회적 혼란에서 인간을 구제하겠다는 실천적인 문제의식에서 출발하고 있으며, 인간 사회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한다는 혁명성을 담고 있다. 동학은 이러한 사상적 특징을 기반으로 나라를 보호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보국안민(輔國安民)’과 널리 백성을 구제한다는 ‘광제창생(廣濟蒼生)’, 온 세상에 덕을 베푼다는 ‘포덕천하(布德天下)’를 내세우고 당시의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또한 이러한 현세지향적인 교리는 동학이 19세기의 급격한 사회 경제적 변화 속에서 삼남(三南) 지방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성리학에 대항하는 민중의 저항 이데올로기로서의 구실을 맡게 된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7. 동학농민혁명 120주년 행사

2014년에 동학농민혁명(1894년) 120주년을 맞아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전국동학농민혁명유족회, 천도교 등 세 단체가 지난 2014년 5월 서울 종로구 천도교 수운회관에서 양해각서( MOU)를 체결, ‘사람, 다시 하늘이 되다’라는 주제의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을 공동으로 추진할 것을 결의했다. 그리고 이들 단체는 2014년 9월 11일 오전 한국프레스센터에서 ‘동학농민혁명 제120주년 기념대회 추진위원회’(추진위) 출범식을 열었다.

추진위는 우선 다음달 11일 오전 10시 30분 서울시청 대강당에서 120주년 기념식을 열어 시대 과제 해결을 지향하는 동학정신과 실천 과제들을 선정 발표키로 했다. 이에 앞서 10일 오후 5시부터 분당 새마을운동연수원에서 전국 각지의 동학농민군 후손과 천도교 교인, 지역별 동학농민운동가, 시민 등 500명이 모여 전야제를 치른다. 11일 오전 10시부터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역사, 평화, 미래’를 주제로 한 동학농민혁명문화축제를 진행한다. 이 자리는 일반 시민과 청년 학생들이 그동안 동학의 가치를 발굴 선양하는 데 힘써 온 세대들과 소통하면서 동학의 미래상을 만들어가는 축제 한마당으로 펼쳐진다.

이와 관련해 동학농민혁명을 세계화하기 위해 국제학술대회와 남북 공동행사도 준비한다. 우선 2014년 10월 28일과 29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국제학술대회에는 한·중·일 3국을 비롯해 구미 각국의 동학 연구자들이 모여 동학농민혁명의 미래화를 위한 주제들을 놓고 발표와 토론을 벌일 예정이다. 천도교 주관으로 북한에서 개최를 추진 중인 남북공동행사도 주목받는 행사. 남북 천도교는 지난 7월 개성에서 만나 오는 17∼20일 평양과 해주에서 학술세미나를 열고 동학혁명 전적지를 함께 순례하기로 협의했지만 지난 6일 북한 조선천도교중앙위원회와 천도교청우당 측이 “공동행사는 어렵다”며 오는 10월 3일 자체 행사를 진행하겠다고 통보해 왔다. 이에 따라 천도교는 조속한 시일 내에 개성에서 실무자 회의를 열자고 제의했으나 아직 답신이 없는 상태다. 북한에서는 조선천도교중앙위원회와 천도교청우당이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이념적 계승을 위한 활동을 지속적으로 벌여왔다. 천도교는 지난해부터 올해 120주년을 계기로 남북의 동학 후손들과 학자, 관련 단체 활동가들의 만남과 연대 교류를 본격적으로 벌이기 위해 준비해 왔다.

천도교는 특히 120주년 행사를 1회성의 기념행사가 아닌 지속 사업으로 연결시켜 나갈 계획이다. 오는 11월까지 일반 시민과 역사관련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국내외 동학관련 유적지를 방문하는 ‘동학기행’을 진행하는 한편 ‘동학시민강좌’를 서울·부산·대전·대구·남해에서 차례로 열기로 했다.

8. 나가는 말

동학의 반봉건 반외세의 이념과 인내천(人乃天) 사상은 구한말 의병운동, 기미년인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4.19학생의거, 광주민주화운동에 많은 영향을 미쳐 한국의 민주화와 자주독립국가 건설에 크케 이바지 했다. 그리고 동학사상은 민족종교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일제 시대와 군사독재 시대를 거치면서 동학혁명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여 유족들이 탄압을 받았고, 심지어는 역사 교과서에서조차 동학혁명을 '동학란(東學亂)'으로 배우는 바람에 일반 국민들의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인식이 별로 좋지 않았었다

그래서 그런지 2014년에 동학농민혁명 120주기를 맞이하였는데, 천도교는 교세가 약화되어 5대 종교에도 끼지 못하고 있다.

다행히도 2004년 2월 9일 대한민국 국회가 한민족의 바른 정기를 되살려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함으로써 동학농민혁명 당시 순국한 선열들의 명예도 110년만에 완전히 회복될 수 있게 되었다.

천도교 박남수 교령은 “자주·평등·상생의 동학혁명 정신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박제품이 아니라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정신의 뿌리가 바로 동학혁명”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는 “2014년 합동 기념행사를 계기로 동학이 120주년을 맞는 데 그치지 않고 이 시대에 맞게 거듭나는 시작으로 삼겠다”고 밝혔다.

아무튼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을 계기로 하여 한국이 사회의 부정과 부패를 일소하고 모든 국민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정의로운 복지사회를 구현하여 한국이 선진국으로 도약하기를 바란다.

<참고문헌>

1. 태안군지편찬위원회,『태안군지』, 2013.

2. 강신욱, “동학혁명 때 괴산서 민가 500여 호 불탔다”, 뉴시스, 2014.8.25일자.

3. “동학”, 네이버 두산백과, 2014.9.12.

4. 임아영, “동학혁명 120주년....사람 사는 세상 그 외침 다시 듣는다”, 경향신문, 2014.9.12일자. 23면.

5. 김성호, “120주년 동학정신, 세계화, 대중화로 통한다-새달 동학농민혁명 기념대회”, 서울신문, 2014.9.12일자. 22면.

6. 최신웅, “탄압 시달린 신자들 안식처럼 안식처된 비밀 포교지 장내리”, ; 김양식, “청일전쟁 이후 충청운동 본격화”, 대전일보, 2014.9.25일자. 11면.

<필자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아우내 단오축제』 등 4권

.주요 논문 : “천안시 토지이용계획 고찰”, “천안 연극의 역사적 고찰”, “천안시 문화예술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 “민속학자 남강 김태곤 선생의 생애와 업적”, “태안지역 무속문화의 현장조사 연구”, “태안승언리상여 소고”,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등 57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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