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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도 한국인도 아닌 채 살아가는 연변 조선족 자치주 사람들

신상구 | 2014.09.12 03:12 | 조회 4182
중국인도 한국인도 아닌 채 살아가는 연변 조선족 자치주 사람들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신상구(辛相龜)
1. 1909년 청일간의 간도협약에 의해 억울하게 빼앗긴 간도
간도(間島)는 백두산 북쪽의 만주 지역 일대로, 서간도(압록강,송화강의 상류지방인 백두산 일대)와 동간도(북간도-훈춘,왕청,연길,활룡현 등 포함 지역)로 구분된다.
주로 간도라 하면 우리가 흔히 '연변'이라고 부르는 중국 길림성 동쪽의 연변조선족자치주에 해당하는 지역인 북간도(동간도)를 가리킨다.
간도는 원래 읍루와 옥저의 땅이었다가 고구려가 이 지방으로 뻗어나면서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고, 고구려가 망한 뒤에는 발해의 영토가 되었다.
그 후 고려시대로부터 조선 전기에 걸쳐 여진족이 각지에 흩어져 살았다. 그러나 여진족은 농경보다 유목·수렵에 종사하였기 때문에 이 비옥한 지역이 오랫동안 개척되지 못하였고, 조선 후기 한국인 유민(流民)이 들어가 미개지를 개척하기 시작하였다.
만주지역에 청나라가 세워진 후에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우리나라와 청나라간 국경선 문제가 계속되고 있었는데, 숙종 38년인 1712년에는 우리나라와 청나라를 가르는 '백두산 정계비'가 세워지기도 하였다. 이 정계비에는 "서쪽으로는 압록강, 동쪽으로는 토문강으로 하여 이 분수령에 비를 세운다( 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嶺上 勒石爲記)"고 기록돼 있다. 그런데 여기서 `토문강'이 어디를 지칭하는 지를 두고 훗날 논란거리가 되었고, 이 정계비는 소실돼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청나라는 간도지역을 오랫동안 봉금지역으로 선포하고 입주를 엄금하였다. 정계비가 건립된 뒤에도 간도 귀속 문제가 논의된 바 없이 지내 왔으나, 19세기 중엽에 들어 청나라의 봉금과 조선의 월경 금지가 소홀해지고 함경도민들의 두만강 월경 농사가 시작되면서 문제가 야기되었다. 특히, 1869년과 1870년 함경도에 큰 흉년이 들면서 많은 사람들이 간도로 옮겨갔다. 이에 청나라는 1881년부터 봉금을 해제하고 청국인의 간도 이주와 개간, 농경을 장려하는 정책을 폈으며, 1883년에는 간도에서의 조선인 철수를 요구했다. 이에 청나라와 조선 사이에 외교 분쟁이 첨예화 되었는데, 조선은 백두산 정계비에 의거하여 '토문강'이 송화강 상류에 있는 지류인 토문강(해란강)을 가리키므로 간도는 조선 영토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청나라는 두만강이 '토문강'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1885년부터 1888년까지 청나라와 조선간 교섭이 진행되었으나 결렬되었다.
대한제국이 성립된 이후에도 우리나라는 간도에 대한 영유권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일제가 국권을 빼앗아 간 뒤인 1909년 9월 일제는 청나라로부터 남만주철도 부설권(선양-다롄)을 보장받은 대가로 백두산 정계비에 대한 청나라측 해석을 그대로 인정, '간도협약'을 체결했다. 간도협약은 제 1조에 "청·일 양국정부는 두만강을 한·청 경계로 상호 성명하고 정계비로부터 석을수를 경계선으로 한다" 고 규정했다. 이때부터 50년대 말까지 한-중 국경선은 두만강 상류인 석을수로 확정되고 말았다. 정계비에 기록된 `토문강'은 두만강이 아니라 송화강의 상류이며 따라서 간도가 우리 땅이라는 우리측 주장은 철저히 무시됐다.
한편 일제시대에는 일제에 항거하는 많은 한국인들이 이 지역으로 이주하여 간도는 청산리대첩과 봉오동전투 등 항일무장투쟁의 거점이 되었다.
오늘날 간도에 해당하는 지역에는 중국의 소수민족정책에 따라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설치되어 있다. 현재 연변조선족자치주에는 11개 민족이 거주하고 있다. 이 가운데 조선족이 전체의 41%인 백만여 명에 달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한족·만주족·회족 순으로 분포하고 있다. 주요 도시로는 행정수도인 연길을 비롯해 북한과 접경한 도문, 러시아와 국경을 두고 있는 훈춘·안도·둔화·화룡·용정 등 6개 시와 왕청·안도 등 2개 현이 있다.
2. 가깝고도 먼 조선족의 나라 옌볜
간도로 불렸던 현 중국 지린성 옌볜조선족자치주 용정(룽징)시. 1800년대 후반 가난했던 조선 농민들은 농토를 찾아 남의 나라 땅으로 건너가 터를 잡았다. 한일병합 이후 일제 식민 지배를 벗어나길 염원하던 지식인들도 이곳에서 독립을 위한 기반을 닦았다. 우리 민족이 실향민으로 떠돌던 시절 발자취가 깃든 땅 옌볜은, 이제 가깝고도 먼 조선족의 나라다.
‘간도’라는 명칭은 조선 말기 농민들이 만든 말이다. 두만강 안에 있는 모래톱 개간지를 ‘간토’라고 불렀다가 나중에 사잇섬이라는 뜻의 간도라고 부르게 됐다. 조선 말기 국정이 혼란하고 백성 생활을 돌보는 관리가 없던 때, 농민들은 제 살길을 찾아 국경을 넘었다. 만주족의 나라인 청이 중국을 지배하기 전 그들이 터잡고 살던 만주 지역 지린·랴오닝·헤이룽장성 동북3성 일대는 농토가 넓고 기름졌다. 이곳은 만주족들이 베이징 황실로 옮겨가며 출입이 금지됐지만, 조선 농민들은 국경 수비대를 피해 새벽에 몰래 두만강을 건너 가 여기에 농사를 지었다. 그러다가 청나라 군대에 들키면 청나라 땅이 아니라, 두만강 안에 있는 간도에 갔다 왔다고 둘러대 빠져나오곤 했다고 한다.
사실 매일 두만강을 건너다니며 농사를 짓는다는 게 그리 힘든 일은 아니었을 것 같다. 풍진 그이들 인생이 만만했을 거라는 게 아니라 물리적 거리가 그렇다. 현재 중국과 북한이 국경을 접하고 있는 옌볜자치주 내 투먼(도문)시에 가면 쪽배를 타고 두만강 상류부를 한 바퀴 둘러볼 수 있는데, 북한 땅은 말 그대로 손에 잡힐 듯 가깝다. 강물도 얕아 다 자라지 못한 아이라도 순식간에 건너갈 수 있다. 그렇지만 건널 수 없는 땅이다.
쇠약해지던 청 왕조는 이런 조선인들이나 동북3성을 넘보는 러시아를 견제할 능력이 없어지자, 지린성 일대를 이민족들에게 내주기로 했다. 1885년 조선족 전문 개간지역으로 지린성 옌볜이 확정됐고 이때 오늘날 조선족 이민문학의 본산인 옌지 문화권이 만들어졌다. 간도는 옌지 일대를 부르는 말이 됐다. 1904년에는 중국과 조선 관리들이 간도 땅을 조선인들이 경작하고 세를 받기로 규약을 체결했다. 사실상 조선인 이주가 묵인되고 한반도에서 일제 수탈이 거세지면서 간도로 이주한 조선인들은 점점 늘어 1920년 이곳 조선족 인구는 46만여명에 달했다.
1907년, 조선인과 중국인이 평화롭게 살던 용정에 일본 헌병대가 들이닥쳐 ‘조선통감부 간도파출소’ 간판을 내걸었다. 일본은 간도 조선인 보호를 구실삼아, 용정에 간도 일본 총영사관을 설치해 독립투쟁을 압살하고 동북3성 침략 야욕을 드러냈다. 조선인에게 자유로운 삶을 보장하던 중국은 이후 조선족을 박해하면서 청국인으로 귀화하지 않으면 일본 앞잡이로 치부하며 학대하는 방식으로 정책을 바꿨다. 간도 지역 지배권을 둘러싼 중국과 일본의 싸움 속에서 조선족은 수난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독립에 대한 욕구와 투쟁도 거셌고 “혁명을 하려면 간도로 가라”는 유행어까지 있었다고 한다.
항일 독립운동과 혁명 정신은 당시 조선어 문학에 고스란히 담겼다. 중국 조선족 애국 시인 윤동주는 투명한 시어만큼 여린 마음을 지녔으면서도 단 한 줄의 친일 문장도 남기지 않았다. 가요도 간도에서는 일제 침략에 맞서 민족을 구하고 독립하기 위해 나설 것을 호소하는 창가류의 독립군가요, 공산주의 색채를 띤 혁명가요 등이 주로 만들어졌다. 이런 항일가요에는 모호한 표현이나 까다로운 문구 없이, 소박하고 평범한 언어가 쓰였다.
옌볜자치주의 주도 옌지 공항에 내려 시내에 들어서면 한국의 어떤 대도시에서도 볼 수 없는 널찍한 도로와 거대한 건물이 대륙다운 장관을 이루고 있다. 우리가 내심 불편하게 여기는 조선족들의 말소리가 모국어인 이 도시는 익숙할 법하면 좀체 낯설다. 서로 동포라고 부르면서도 살갑지 못한 한국인과 조선족 사이처럼, 옌볜에 온 한국인만이 가질 법한 종류의 긴장감이 있다.
조선족은 중국 내 55개 소수민족 중 하나로, 소수민족 중 드물게 고유의 언어인 조선어를 지키고 있다. 중국어와 조선어를 공용어로 쓰기에 상점 간판은 물론 모든 언어 표기는 조선어 다음 한자어가 놓이는 식이다. 중국의 소수민족 유화 정책이 이를 허용한다. 조선족의 교과서도 조선어로 돼 있다. 그러나 조선어로 쓰인 역사와 문학, 지리 그 내용은 모두 중국의 것이다. 조선족들은 월드컵 때 중국이 아니라 한국을 응원하고, 독도 문제가 나오면 한국인처럼 흥분하며 일본을 비난한다. 하지만 역시 그렇지 않은 조선족도 많다.
조선인의 간도 이주 역사가 150여년이 되어가는 동안 조선어는 지켜왔지만, 그 명맥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옌볜에서 한국 혹은 중국의 다른 대도시로 이주하는 조선족이 늘고 있다. 특히 중국 대도시로 나가는 조선족 청년층은 조선어를 쓸 일이 줄어드는 데다, 한국에서 이주해 온 민족이라는 의식도 희박하다.
옌볜을 떠나 중국 다른 대도시에서 여행 가이드를 하고 있는 한 조선족 청년은 “우리가 소수민족으로서 중국에서 스스로를 지키며 살아왔다는 자부심은 크지만, 그게 한국과 연관되지는 않는다”며 “한국에 대한 이미지도 좋지 않다. 여행하러 온 한국인들을 만나봐도 좋은 사람이 드물고, 한국에 돈 벌겠다고 갔던 사람들 이야기 들어봐도 그렇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조선족 중장년층은 실향민 의식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했다. 증조부모와 그 부모들은 조선 땅에 고향을 두고 간도로 건너왔고, 그 자신들은 고향 옌볜을 떠나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
3. 민족교육을 강화하고 ‘간도찾기범민족운동’을 전개해야
연변 조선족자치주의 젊은이들은 중국인도 한국인도 아닌 채 살아가고 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 중에 있다고 한다.
그런데 연변 조선족자치주의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대도시로 이주하거나 한국으로 떠나는 바람에 시골의 경우 폐교가 많이 되어 민족교육을 제대로 실시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조선족 중장년층이 타계하기 전에 국가 정책적 차원에서 연변 조선족자치주의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민족교육을 강화해서 그들이 한국인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계속 살아가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연변 조선족자치주의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한국에 오면 외국인처럼 홀대하지 말고 따뜻하게 잘 대해 주어 그들이 같은 민족으로서 동포애를 느끼도록 해주어야 한다. 특히 악덕 기업인들이 돈을 버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연변 조선족 노동자들에게 저임금을 주거나, 임금을 체불하거나, 학대하는 사례가 발생하지 않도록 노동부가 근 현장을 철저히 관리하고 감독해야 한다. 또한 한국 정부가 중국 정부와 외교를 하여 연변 조선족자치주 조선족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경제와 문화 교류를 확대하여 그들이 한국의 전통문화를 잘 보존하며 편안하게 잘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그런가 하면 한국정부와 시민단체들이 1909년 청일간의 간도협약에 의해 억울하게 빼앗긴 간도를 한국의 영토로 회복할 수 있도록 ‘간도찾기범민족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해야 한다. 다행히도 포항공대 박영선(朴宣怜-중국 근현대사) 교수에 의하면 백두산정계비에 조선과 청의 경계선으로 언급된 토문(土門)강이 그간 중국이 주장해 온 대로 두만강이 아니라 쑹화(松花)강 지류임을 중국 정부가 인정한 1964년 공식 외교 문서에서 확인됐고 밝혔다. 그리하여 300년 가까이 지속되어 온 간도분쟁을 이제는 풀 수 있게 되었고, 과거 간도로 불리던 만주지역은 물론 연해주 일부에 대해 한국의 영토로 귀속권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해 토문강이 두만강과 별도로 실재하는 강이라면 한반도와 중국의 국경 설정에 대해 ‘동쪽으로 토문을 경계로 한다’는 1712년(숙종 38년) 백두산 정계비의 문구는 그 의미를 다시 따져봐야 한다. 현재 연변 조선족자치주에 해당하는 토문강 동쪽 동간도(東間島) 지역의 영유권은 한반도 쪽에 있다는 우리의 전통적 주장이 재확인되기 때문이다. 1909년 일제가 조선을 대신해서 청나라와 체결해 간도 땅을 넘겨준 ‘간도협약’이 국제법상 무효라는 주장도 근거를 확보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시민단체, 국회의원, 변호사 등이 최근 국내외에서 ‘간도 찾기운동’을 전개하고 있어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참고문헌>
1. 이광표, “토문강은 두만강이 아니다”, 동아일보, 2005.8.26일자.
2. 이보배, “국회의원 50인 간도협약 100년 맞아 ‘간도 찾기운동’ 나서 - 선진당 이명수 의원, 시민단체, 정부 차원의 간도협약 무효 선언 공동 촉구”, 폴리뉴스, 2009.9.4일자.
3. 김운영, “간도를 찾읍시다”, 뉴시스, 2011.9.26일자.
4. 신지민, “간도 반환 청구소송 펴낸 강정민 변호사 - 간도는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땅”, 법률신문, 2014.9.1일자.
5. “간도(間島)”, 네이버 지식백과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2014.9.11.
6. 김여란, “윤동주가 나고 자란 중국 옌볜을 찾다”, 경향신문, 2014.9.11일자. 22면.
<필자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아우내 단오축제』 등 4권
.주요 논문 : “천안시 토지이용계획 고찰”, “천안 연극의 역사적 고찰”, “천안시 문화예술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 “민속학자 남강 김태곤 선생의 생애와 업적”, “태안지역 무속문화의 현장조사 연구”, “태안승언리상여 소고”,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등 57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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