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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가이자 국학자인 정인보 선생의 생애와 업적

신상구 | 2018.03.03 00:41 | 조회 1215

                           <제99회 3.1절 기념 특별기고> 독립운동가이자 국학자인 정인보 선생의 생애와 업적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문학평론가, 칼럼니스트) 신상구 
  
                                                                 1. 3.1독립만세운동의 역사적 의의  
    2018년 3월 1일은 3.1독립만세운동 제99주년이 되는 아주 뜻 깊은 날이다. 1910년 8월 29일 한‧일 합병이 되자 일제는 조선의 국권을 피탈하고 정치‧경제‧사회‧문화의 각 분야에서 억압과 수탈을 자행하는 무단통치를 실시했다. 수많은 항일 운동가들과 시민들을 학살한 것도 모자라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 기본적인 자유와 권리도 누릴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자 2천만 동포는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조국의 광복과 민족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하나가 되어 전국 방방곡곡에서 분연히 일어나 총궐기 했다. 3·1독립운동은 일제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엄청난 인적·물적 피해를 남기고 실패로 끝났지만, 상해 임시정부 수립의 계기가 되었고, 세계 만방에 한민족의 독립 의지와 저력을 보여주었으며, 주변 식민지 국가의 독립운동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해마다 3.1절 기념행사에서는 정인보 작사 ‧ 박태현 작곡의 3·1절 노래가 제창된다. 그래서 그런지 해마다 3.1절이 돌아오면 특히 위당 정인보 선생이 생각난다.
                                                                  2. 위당 정인보 선생의 생애와 업적
   정인보(鄭寅普) 선생은 1893년 5월 6일 서울 종현(鍾峴, 현 명동성당 부근)에서 호조참판을 지낸 아버지 정은조(鄭誾朝)와 어머니 달성 서씨(達城徐氏)의 독자로 태어났다. 본관은 동래(東萊), 유명(幼名)은 정경시(鄭景施), 자는 경업(經業), 호는 담원(薝園)·미소산인(薇蘇山人), 아호는 위당(爲堂)이다.
   조선 명종대의 대제학 정유길(鄭惟吉)과 철종대의 영상 정원용(鄭元容)의 후손이다.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웠고, 13세 때부터 이건방(李建芳)을 사사하였다. 정인보의 문명은 이미 10대 때부터 널리 알려졌다. 그리고 재기가 넘쳐서 많은 사람으로부터 총애를 받으며 자랐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국가의 주권이 손상받고 이에 대한 국권회복투쟁이 활발히 전개되며 세상이 시끄러워지던 한말, 관계의 뜻을 버리고 부모와 더불어 진천(鎭川)·목천(木川) 등지에 은거하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1910년 17세 때 평생의 스승으로 모신 난곡 이건방(蘭谷 李建芳)으로부터 한국화와 양명학을 배워 학문과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받았다. 난곡 이건방은 지행합일(知行合一) 정신을 중시하는 조선 양명학의 본류인 강화학파의 학자이다.  
   1910년 9월 28일 일제가 무력으로 한반도를 강점하여 조선조가 종언을 고하자 1911년과 1912년 두 차례 망국의 한을 품고 압록강을 건넌 선생은, 중국 동북성 회인현(懷仁縣) 흥도촌(興道村)과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이곳에서 독립기지를 건설하고 있던 이회영(李會榮) 형제를 만나게 되고,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부평의 전답을 팔아 신흥강습소 등 이회영 형제의 독립군양성소를 위한 군자금으로 지원하였다.
   선생은 1913년 중국 상해로 활동무대를 옮기어 일제와의 투쟁을 다짐하는 박은식(朴殷植), 신규식(申圭植), 신채호(申采浩), 김규식(金奎植) 등 많은 청년애국지사들과 가깝게 지냈다. 이들과 비밀결사인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여 조국광복운동에 정열을 바치는 한편, 굶주림과 외로움을 견디면서 동서양의 많은 서적을 탐독하며 연구에 몰두하였다.
   선생은 부인 성씨(成氏)가 동년 9월에 첫딸을 출산한 후 엿새 만에 산고로 타계했다는 비보를 듣고 급히 귀국하였다. 그리고 이 때부터 검은색 한복과 모자, 검은색 안경과 고무신 차림으로 다니게 되었다. 이것은 부인을 애도하는 뜻뿐만 아니라, 나라 잃은 슬픔을 조복으로 나타내어 독립에 대한 염원이 변치 않았음을 보이고자 한 것이었다.
   선생은 1922년 4월부터 연희전문학교의 초빙을 받아 조선문학론과 한문을 강의하기 시작했다. 한편 동아일보와 시대일보의 논설위원으로서 날카로운 필봉을 휘두르며 민족사관 정립에 심혈을 기울였다. 선생은 일본인들의 왜곡된 학설에 철저히 반론을 제기함은 물론 우리 고대사의 심층연구를 위해 안재홍(安在鴻), 신채호(申采浩), 문일평(文一平), 손진태(孫晋泰) 등과도 힘을 합쳤다.
   선생은 1926년 융희 황제인 순종이 서거하자 유릉지문(裕陵誌文) 찬술의 일을 맡아보았다. 1927년에는 불교전문학교와 이화여자전문학교에 출강하 국학 및 동양사를 가르치며 학생들에게 민족의 얼을 환기시켰다. 6·10만세 운동이 벌어지자 지원했고, ‘이충무공유적보존회’를 창립하는가 하면, 현충사를 중건했다.
   1931년에는 민족문화의 유산인 고전을 민족사회에 알리고자 다수의 고전을 소개하는 「조선고전해제」를 동아일보에 연재하였다. 이후 같은 신문에 ‘단군 개천’, ‘5천년간의 조선의 얼’을 연재했으며 실학연구를 위한 학문행사도 주도했다. 
    한편, 이 무렵부터 조선 양명학에 관심을 가지고 일련의 양명학자들의 학문을 추적하였고, 1933년 66회에 걸쳐 동아일보에「양명학연론(陽明學演論)」을 연재해 많은 호응을 얻었다.
   양명학이나 실학에 대한 학문적 관심으로 볼 때, 단순한 한학자가 아니라 성리학과 더불어 유학의 또 다른 유파(流派)나 성리학 내에 자생적으로 일어선 새로운 실(實)의 유학풍을 밝혀, 조선 유학의 폭넓은 이해를 시도해 보고자 하는 진취적 학풍을 가진 학문활동으로 이해된다.

   위당 정인보 선생은 동아일보에 1934년 9월 10일부터 9월 15일까지 6회에 걸쳐 <유일한 정법가 정다산 선생 서론>을 기고해 다산 정약용의 학문을 당대에 처음으로 불러냈고, 충무공 이순신 장군 유적 보존 사업에도 앞장서서 민족문화 보존에도 많이 기여했다.  

   1935년에는 조선 후기 실학 집대성자인 정약용(丁若鏞) 사후 100주년을 맞아 조선 후기의 실학을 소개하기 위한 학문행사를 주도, 실학연구를 주도하였다. 실제로 안재홍(安在鴻) 등과 함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를 교열·간행하는 등 조선학운동을 주도하였고, 조선 후기 실학연구의 초석을 마련하였다. 실학이라는 역사적 용어는 이때부터 사용되었다.
   1936년에는 연희전문학교 교수가 되어 한문학·국사학·국문학 등 국학 전반에 걸친 강좌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뒤 국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자 1943년 가솔을 이끌고 전라북도 익산군 황화면 중기리 산중에 은거하였다
   1937년에는『경훈훈민정음서』,『훈민정음운해해제』등을 저술하여 국학보급과 국어 보존에 기여했다. 그 해 7월 일제는 중국을 침략하고, 내선일체(內鮮一體)정책에 따라 우리말 사용을 금지하고 일어교육을 강요했다. 연희전문학교가 선생이 강의하던 조선문학과목을 폐지하지 선생은 1938년 연희전문을 사임했다.
   1940년 10월에는 중앙중학교의 노국환(盧國煥), 조성훈(趙成勳), 황종갑(黃鍾甲), 이기을(李氣乙), 유영하(柳永夏) 등이 중심이 되어 소위 ‘5인 독서회’가 조직되었다. ‘5인 독서회’에서는 선생을 비롯하여 김성수(金性洙), 송진우(宋鎭禹) 등으로부터 역사연구를 명분으로 국제정세와 조국독립에 관한 강의를 듣는 등 독서회 운동을 진행하였는데, 활동이 한창 진행되던 당시 황종갑의 편지가 일제의 검열에 발각되었다. 이로 인해 선생도 적지 않은 고초를 당했다.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기에 이르자 선생은 견딜 수 없는 모욕감 속에서 “얼은 암흑 속에 사라지는가. 이제 어디에서 우리의 얼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참으로 가증하다”고 말하며 더 이상 교편을 잡을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병을 핑계로 휴직을 하였는데,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국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거세졌다. 그래서 1943년 가족을 이끌고 전북 익산군 황화산(皇華山)으로 들어가 산중 생활을 했다.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광복을 맞게 되자 선생은 서울로 귀경하였다. 선생은 해방 직후 남조선 민주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하였으나 곧 탈퇴했고, 조선문필가협회 회장을 조선 문학 발전에 가여했다. 선생은 일제로 인해 단절된 우리 얼을 선양하는 일이 무엇보다 급선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일제하의 식민정책을 깨끗이 씻어 버리고 연면하게 이어온 국학을 부흥, 발전시키기 위해서 국학대학을 설립하고 초대 학장을 역임했다.
   국학발전에 몸 바치고 있던 중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감찰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선생은 여러 인사의 천거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간곡한 요청으로 새 정부의 감찰위원장에 취임, 관기 확립 및 부정부패 일소에 나섰다. 그러나 이듬해 4월 장관 임영신이 관련된 독직사건의 처리를 두고 이승만 대통령과 마찰을 빚자 사직하고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다.  
   다시 국학대학장에 돌아온 선생은 더욱 우리 얼을 밝혀내는 데 정진했으며, 국학대학장을 그만 둔 뒤 서울 회현동에서 역사연구와 집필생활에 몰두하다 6·25전쟁을 맞았다.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선생은 1950년 7월 북한으로 납치돼 한동안 생사가 알려지지 않고 있다가 그 해 11월 사망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위당 정인보 선생은 한문학자이자 문인으로 실심을 강조한 양명학 연구의 대가였으며 한민족이 주체가 되는 역사체계 수립에 노력한 역사학자였다. 저서에『조선고전해설』(1931),『양명학연론(陽明學硏論)』(1933),『오천년간 조선의 얼』(1935),『훈민정음 해』(1938),『조선사연구(朝鮮史硏究)』(서울신문사,1946),『담원국학산고(薝園國學散藁)』(1955),『담원문록(薝園文錄)』(1967) 등이 있고, 1983년에『담원 정인보 전집』이 발간되었다. 그리고 <3.1절 노래>, <광복절 노래>, <제헌절가>, <개천절가>의 4대 국경절 노랫말이 그의 손으로 지어졌고, <국학대학가>를 비롯하여 <고려대학교가>, <동국대학교가>, <덕성여자중학교가>, <성신여자중학교가>, <국립도서관제>, <대한부인회가>, <학도특별훈련소가>, <공무원의 노래> 등을 작사하였다. 특히 위당 정인보 선생은 매화를 좋아해서 <매화 7장>을 남겼다.
   “기미년 삼월 일일 정오 /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 독립만세/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이날은 우리의 의(義)요, 생명(生命)이요, 교훈(敎訓)이다/한강 물 다시 흐르고 백두산이 높았다/선열 하 이 나라를 보소서 / 동포야 이날을 길이 빛내자.”
   이 가사는 정인보 작사‧박태현 작곡의 3·1절 노래로 3.1독립만세운동의 실상을 아주 사실적으로 잘 표현해 깊은 감동을 자아낸다.
   정부에서는 위당 정인보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가족으로는 장녀 정양완, 차녀 정정완이 있다. 장녀 정양완은 다산 학문 연구의 권위자이다.
                                                             3. 위당 정인보 선생의 인품과 학문
  위당 정인보 선생은 독립운동가ㆍ역사학자ㆍ언론인ㆍ시조작가ㆍ교수ㆍ산문작가ㆍ교육자ㆍ우리나라 최후의 양명학자 등으로 활동하면서 큰 업적을 남겼다. 위대한 업적과 더불어 인품이나 학문의 깊이에 있어서 뭇사람의 존경을 받은 분이다.
  위당은 타고난 성품이 올곧고 매서워서 허위와 가식을 싫어하였다. 민족사학정신을 이어받은 단재 신채호가 여순감옥에서 옥사한 소식을 듣고 추도하는 글을 짓고, 육당 최남선이 만주괴뢰국의 건국대학 교수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집 대문 앞에 냉수를 떠놓고 곡(哭) 하였다.
  처음으로 ‘국학(國學)’ 이란 용어를 쓰기 시작하여 이땅에 ‘국학’ 의 뿌리를 내리고, 품격이 높은 국한문 혼용의 각종 산문을 쓰고, 고아한 한국어로 수많은 시조를 지었으며, 도저한 사필 그리고 한문학, 국문학, 국사학 등 폭넓은 학문과 연구는 당대에 따를 자가 많지 않았다. 문ㆍ사ㆍ철 일체를 섭렵하는 학자이고, 특히 국학의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해방을 맞아 서울로 온 위당은 임시정부 요인들의 환국을 앞두고 <봉영사>와 <순국선열 추념사>, <광복열사의 영령 앞에>등을 지어 순국선열과 생존 독립지사들의 노고를 기렸다. 하나 같이 겨레의 ‘얼’ 이 깃든 명문이다.
  위당 정인보 선생은 일제가 조선을 영구 지배할 목적으로 조선사를 왜곡하는 <조선반도사>를 편찬할 때, 이에 맞서 <5천년간 조선의 얼>을 집필하여 우리 역사 바로 세우기에 앞장선 민족사학자이다.  
  위당 정인보 선생은 58세의 짧은 생으로 마감하기에는 너무 아깝고 아쉬운 지도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당에 관한 연구와 대접은 너무 초라한 편이다.
  1983년 연세대학출판부가 유고 등을 모아 <담원 정인보전집> 6권을 묶어내고, 2005년 태학사에서 위당의 따님 정양완 씨의 번역과 주석으로 <담원문록> 상ㆍ중ㆍ하 3권이 발행된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4. 문재인 대통령의 제99회 3.1절 기념식사
   제99회 3.1절을 맞아 전국적으로 기념행사가 다채롭게 개최되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3월 1일 서울 서대문구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열린 제99회 3.1절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통해 “3.1운동의 가장 큰 성과는 독립선언서에 따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이었다”며 “3.1운동으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헌법은 대한민국이 민주공화제이며 나라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고 명백하게 새겨 넣었다. 그것이 지금 대한민국 헌법 제1조가 되었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이어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우리에게 헌법 제1조뿐아니라 대한민국이란 국호와 태극기와 애국가라는 국가 상징을 물려주었다”며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였다고 우리 헌법이 천명하고 있는 이유다”고 말했다.
  한편 문재인 대통령은 우리 조국 대한민국을 공정하고 정의로운 나라, 세계 평화를 주도하는 문화강국, 세계에서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나라로 발전시켜 나가자고 힘주어 말했다.
   이에 우리 한국 국민들은 3.1독립운동 99주년을 맞이하여 위당 정인보 선생을 보다 심층적으로 조사연구하여 그분의 진면목을 밝히고 그분의 위대한 항일독립정신과 국학 진흥 업적을 창조적으로 계승 발전시켜 우리 조국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참고문헌>
    1. 김삼웅,『위당 정인보 평전』, 채륜, 2016.9.10.

    2. “정인보(鄭寅普) - 민족의 얼을 바로 세우다”, 네이버캐스트, 2018.2.27.

    3. “정인보(鄭寅普)”, 네이버 두산백과, 2018.2.27.

    4. 조종엽, “논설위원 정인보, ‘조선의 얼’ 일깨우다”, 동아일보, 2018.1.22일자.

    5. 한장희, “문재인 대통령 제99회 3.1절 기념사”, 브릿즈경제, 2018.3.1일자.  
                                                                        <필자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 아호 대산(大山) 또는 청천(靑川), 본관 영산신씨(靈山辛氏) 덕재공파(德齋公派)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 종로구 재동지점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아우내 단오축제』,『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1997) 등 4권.  
  .주요 논문 :“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 “태안승언리상여 소고”,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천안지역 상여제조업체의 현황과 과제”, “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 등 93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시부문 신인작품상, <문학사랑> · <한비문학> 문학평론 부문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 동양일보 동양포럼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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