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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계의 성지, 히라노 신사

어하라 | 2012.04.27 20:30 | 조회 5473

부여계의 성지, 히라노 신사

기사입력 2009-01-21 05:31
[김운회의 '새로 쓰는 한일고대사']<58> 천황가의 조상신, 성왕 ②

[프레시안 김운회 동양대 교수]

(1) 백제 성왕, 천황가의 조상신

쿄토(京都)에는 아름다운 벚꽃으로 유명한 히라노 신사(平野神社)가 있습니다. 해마다 4월이면 벚꽃의 바다로 출렁이는 이 곳은 이미 천년을 내려온 벚꽃의 명소입니다. 이 히라노 신사에서 모시고 있는 신은 바로 이마끼신 즉 이마끼노가미[今木神(いまきのかみ)]입니다.

▲ [그림 ②] 벚꽃으로 유명한 히라노 신사

쿄토(京都)의 한 관광회사의 안내자료에는 쿄토를 대표하는 신사인 히라노(平野) 신사의 주신인 이마끼노가미[今木神(いまきのかみ)]에 대하여 "백제계의 도래씨족인 야마토씨[和氏(やまとじ)]의 먼 조상인 백제의 성명왕으로 여겨진다."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5) 대개의 안내자료는 이와 비슷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마끼신은 칸무 천황의 생모(生母)인 백제계의 다카노노니이가사(高野新笠)의 조신(祖神)으로 원래 야마토국 타카이치(高市)에 있던 것을 나가오카(長岡) 천도 때 옮겼고 그 다음에 헤이안경(平安京 : 쿄토) 천도 후 다시 히라노신사에 모셨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히라노 신사측의 공식적인 반응은 전혀 다릅니다. 히라노 신사측은 이마끼신이 백제왕이었다는 것은 근거없는 소리라고 일축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일본 내에서 성왕의 행적을 알기 위해서는 히라노 신사와 이 신사를 조성한 칸무 천황(桓武천황 : 781~806)에 대해 먼저 알아야 겠군요.

칸무 천황은 일본의 고대국가의 틀을 바로 잡고 한반도의 여러 정치세력으로부터 단절하면서 "명실공히" 새로운 일본을 건설한 중심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칸무 천황의 어머니는 무령왕의 직계후손이고 아버지는 시라까베(白壁) 왕자인데 그는 663년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해 전국력을 동원하였다가 패퇴한 텐지 천황의 손자였습니다.

칸무 천황은 다소 혼란했던 부여계의 황통을 온갖 어려움 속에서 견고히 세우면서 자신이 부여계(백제계)와 깊이 연관이 된 것을 공식화하고 자랑스러워 한 분입니다(이 부분은 근본적으로 텐무 천황의 족보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텐지와 텐무 편에서 상세히 다루겠습니다). 칸무 천황의 생모는 무령왕의 후손인 다카노노니이가사(高野新笠)이고, 자신의 비빈(妃嬪)도 의자왕의 아드님인 부여선광(夫餘禅広)의 후손인 백제왕씨(百濟王氏 : 쿠다라코니키시)에서 맞아들입니다.6) 칸무 천황이후에는 부여계(백제계)의 혈족과 천황가의 혈족이 더욱 결합이 강화됩니다. 칸무 천황은 자신의 후궁에 적어도 아홉명 이상의 부여계(백제계) 여인을 두고 있었다고 합니다.7) 이러한 상황을 『속일본기』는 790년 칸무 천황이 "백제왕 등은 짐의 외척이다."라고 친히 고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칸무천황은 어머니의 조카를 재상급으로 등용하기도 하고 주변의 여관(女官)도 부여계로 채웁니다.

이 때문에 당시 열도(일본)에서는 부여계(백제계)와 한 방울이라도 피가 썩인 증거를 찾는 것이 출세의 지름길처럼 생각하기도 했다고 하는군요. 그래서 조정에서는 민간에서 엉터리 족보나 계보도들이 유행하는데에 대하여 강력하게 통제하는 법령을 반포하기도 합니다.8) 이것이 열도의 귀족 가계나 족보를 정리하는 작업으로 나아간 원인이라고도 합니다. 결국 이후에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録 : 815)』이 편찬됩니다.

부여계의 역사를 종합적으로 잘 알지 못하는 현대의 열도인(일본인)들도 칸무 천황의 부여계(백제)에 대한 지나친 사랑에 대해 매우 의아해하기도 하고 이 시기를 일본 역사의 특이한 시기라고 보기도 합니다. 그래서 열도인들은 칸무 천황의 어머님이 매우 미천한 가문 출신이기 때문에9) 이 같은 콤플렉스 때문에 더욱 모계에 대해 미화하고 어머니쪽으로 족보(『화씨보(和氏譜)』)도 새로 만들고 어머님이 모시는 신인 이마끼신(今木神)도 격상되었다고 합니다.10)

칸무 천황은 그 어머니와 의자왕의 후손들과 견고하게 결합된 부여계와 텐지 천황의 직계의 도움을 받아 극히 어려운 정치상황들을 극복한 것으로 보입니다. 칸무 천황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혼란한 정치상황 속에서 부여계를 다시 견고하게 열도에 안착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하였고 그러면서도 이미 멸망한 반도부여(백제)와 단절하여 새로운 일본을 건설하는데 국가정책의 초점을 맞춘 천황입니다. 아이러니한 말이지만 칸무 천황은 내적으로는 텐지천황의 부여계 황통을 견고히하면서도 대외적으로는 반도부여와는 전혀 다른 방향의 '새로운 일본'으로 나아가는 비전을 제시한 천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칸무 천황은 백제 즉 남부여(반도부여)와 일본을 분리시켜 부여계의 흔적을 지우려고 온갖 노력을 다한 천황입니다. 구체적으로 14세기 일본 남조의 유력한 정치 지도자였던 키타바타케 치카후사(北畠親房 : 1293~1354)는 자신의 저서인 『신황정통기(新皇正統記)』에서 "옛날 일본은 삼한(三韓)과 같은 종족이라고 전해왔다. 그런데 그와 관련된 책들이 칸무 천황 때 모두 불태워졌다."라고 합니다. 이 같은 일은 열도의 안정 즉 부여계의 안정을 보장하려는 정치적인 목적의 조치로 추정됩니다.

칸무 천황의 행적을 가장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은 교토(京都)입니다. 교토의 중심부에는 거대한 궁궐이 있는데, 바로 이 곳이 8세기부터 일본의 수도가 되었던 헤이안경(平安京)입니다. 칸무 천황은 794년 수도를 교토로 천도하고 찬란한 헤이안 시대를 열었습니다. 이후 교토는 거의 1천여년 간 일본의 수도였으며 일본의 중심이었습니다. 헤이안경은 중국의 장안성을 모방하여 건설한 계획도시라고 합니다. 그래서 칸무 천황은 교토를 상징하는 인물로 일본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칸무천황은 수도를 교토로 옮긴 뒤 궁궐 내에 조상신을 모시는 신사를 세웠는데 그것이 바로 히라노 신사(平野神社)입니다. 신사의 안내문에는 신사에서 모시는 네 분의 일본 천황가의 조상이 있습니다.


▲ [그림 ③] 히라노 신사의 신들(京都 大津市 平野神社)

이상의 네 분의 신이 히라노 신사에서 모시는 신인데 주신은 바로 이마끼신입니다. 이노우에 미쓰오(井上滿郞) 교수는 일본 황실 사당에서 제신(祭神)으로 모시고 있는 분들은 백제왕과 왕족 등 5위이며 칸무 천황이 도래인(반도부여인)들을 조정에 중용한 것은 그 스스로가 도래인의 핏줄을 타고 났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히라노 신사에서 가장 위에 있는 히라노 신사의 주신인 이마끼노가미(今木神)이란 "지금 오신 신(いまきのかみ)"이라는 의미라고 해설합니다.11) 이 표현은 쉽게 말하면 이두식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사용된 '今'은 '이제'라는 의미로 읽은 것이고[訓讀], '木'은 '끼'리는 소리를 빌린 말이라는 것[音讀]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 저는 생각이 조금 다릅니다. 간단히 말씀 드리면, 저는 금목(今木)이라는 말이 단순히 "지금 온(いまき)"이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것은 곧고 길게 뻗은 큰 나무라는 쥬신의 고유 신앙과도 관계가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결국은 하늘의 메신저인 샤먼인 단군(檀君)의 의미와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만약 "지금 왔다"는 점이 강조될 경우라면 '이마끼'(今來 : いまき)라는 말을 사용해야하지 않을까요? 굳이 나무 목(木)을 사용할 필요가 없지요. 어쨌든 앞으로 연구를 해봐야 될 부분입니다.

히라노 신사의 신들은 이마끼신(今木神 : いまきのかみ), 구도신(久度神 : くどのかみ), 후루아키신(古開神 : ふるあき), 아이도노의 히메신(比賣神比賣大神) 등의 순서로 되어있군요. 그래서 9세기 경에 편찬된 『정간의식(貞觀儀式 : 871)』에 따르면, "이마끼신으로부터 제사가 시작되어 구도신, 후루아키신 그 다음이 아이도노의 히메신(比賣神) 이다"라고 합니다. 10세기 초 일본 고대 왕실 편찬문서인 『연희식신명장(延喜式神名帳)』에 "히라노에서 모시고 있는 신은 네 분이며 이마끼신(今木神), 구도신(久度神), 후루아키신(古開神), 아이도노12)의 히메신(比賣神) 이다."라고 합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히라노 신사의 이마끼신이 중요한 이유는 성왕(성명왕)과 킨메이 천황을 연결할 수 있는 고리이기 때문입니다. 즉 만약 '성왕 = 이마끼신'이고 '이마끼신 = 킨메이 천황'이면 자동적으로 성왕 = 킨메이 천황이 됩니다. 우리는 앞에서 이미 킨메이 천황의 아드님인 비다츠 천황이 부여계(백제계)라는 사실을 여러 차례 확인하였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그 아버지도 부여계가 되는 것이죠. 구체적으로 보면, 비다츠 천황에 대해서 『신찬성씨록』은 분명히 백제인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설령 킨메이 천황이 성왕이 아니라고 해도 킨메이 천황이 부여계인데는 변함이 없습니다.

일본 황실의 가계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홍윤기 교수는 『대초자(袋草子 : 1158)』를 인용하여 백제의 성왕이 바로 킨메이 천황이라고 간주합니다. 『대초자』는 고대 일본 왕실과 귀족들이 즐겨 노래한 일본 정형시가인 '단가'를 모은 것으로 일본 시가 연구의 중요한 고전으로 평가되는 자료입니다.

후지와라노 키요스케(藤原淸輔 : 1104~1177)의 저서인 『대초자』에는 「히라노미카(平野御哥)」라는 와카(和歌)가 있는데 그 내용이 "しらかべのみこのみおやのほちこそひらののかみのひひこなりけれ"로 수록되어있습니다.13) 이것을 홍윤기 교수는 "白壁の御子の御祖の祖父こそ平野の神の曾孫なりけれ"로 다시 써고 이를 번역하여 "코우닌 천황의 아드님(칸무천황)의 할아버님이야말로 히라노신의 증손자이니라."라고 해석합니다. 즉 제 49대 코우닌(光仁) 천황(770~781)은 제50대 칸무 천황의 아버지이고 칸무 천황의 5대조가 히라노신이라는 말이 바로 골자입니다. 뿐만 아니라 1684년 필사본에서는 「히라노미카」의 해설문이 있는데 여기에는 "지금 생각하건데 시라카베(白壁)은 고닌천황(光仁天皇)이며, 그 증조부는 조메이 천황(舒明天皇)이고 그의 증조부는 킨메이 천황(欽明天皇)이다. 이것을 히라노(平野)의 명신(明神)이라고 말하는 바를 깨달아라." 라고 적고 있습니다.14) 즉 킨메이 천황이 바로 히라노 신이라는 말입니다.15)

그런데 에도시대 후기의 국학자인 대학자 한노부토모(半信友 : 1775~1846) 선생은 "이마끼신은 백제의 성명왕(성왕)"이라고 하고16) 교토대학의 대표적인 동양사학자이자 만선사학(滿鮮史學)의 대부였던 나이토 고난(內藤湖南 : 1866~1934) 교수는 이마끼 신은 외국에서 건너온 신이라고 하고, 구도신은 성명왕의 선조인 구태왕(仇台王), 후루아키신에서 후루(古)는 비류왕, 아끼(開)는 초고왕(肖古王)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17) 쿄토 동양학의 창시자인 나이토 고난 교수가 이마끼신은 도래인이고 구도신을 성명왕의 선조라고 밝힘으로써 간접적으로 이마끼신이 성명왕(성왕)이라는 점을 지적한 것으로 볼 수도 있죠. 그러니까 당대의 대가(大家)들이 '이마끼신 = 성명왕'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현대의 고대 사가인 나카가와 토노요시(中川友義) 선생은 히라노 신전에 모신 신들에 관하여 "이 사당의 제1 신전에 모시고 있는 이마끼 신은 백제의 성명왕이며, 제2신전에 모시고 있는 구도왕은 성명왕의 선조의 선조인 온조왕이다. 제3신전의 고개신(古開神)은 두 분으로 나누어서 고신(古神)은 비류왕이며, 개신(開神)은 초고왕이다. 어느 누구고 간에 모두 조선(朝鮮)의 왕이다."라고 합니다.18) 일본의 권위있는 『역사 사전』에는 히라노 신사는 "쿄토시 북구에 있는 신사, 제신(祭神)은 백제계의 이마끼·구도·후루아끼·히메의 4신. 794년(연력 13) 이마끼신을 다른 세 신과 함께 칸무 천황이 나라에서 현재의 장소로 옮겼고 후에 타이라씨의 씨족 신이 되었다. 예제(例祭)를 '히라노마쓰리'로 부른다. 중요문화재"라고 하여 이마끼신 즉 히라노의 주신이 백제계임을 분명히하고 있습니다.19)

만약 그렇다면 히라노 신사에 모셔진 신들을 활동시기별로 분류하면 구도신(久度神) - 후루아키신(古開神) - 이마끼신(今木神) - 히메신(比賣神) 등으로 되겠지요. 그런데 히라노신사에서는 이마끼신을 주신으로 제사를 지내고 있군요.

다시 봅시다. 고개신(古開神) 즉 후루아끼(ふるあき)신은 일반적으로 오우진 천황의 아들이라고 (応神天皇の子)이라고 하면서 초고왕과 비류왕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앞서 본대로 오우진 천황은 여러 사람들의 행적을 하나로 합쳐 만든 인물로 보이기 때문에 그저 부여계의 시조라는 측면을 강조한 것으로 보면 될 것입니다.

다만 이들의 지적에는 구태왕을 온조나 비류로 혼동하거나 초고왕을 실존 여부가 불투명한 제5대 백제왕으로 보는 등의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초기 부여사가 베일에 쌓여있어서 그렇습니다. 제가 『대쥬신을 찾아서』에서 이미 지적했듯이 구태는 부여왕 울구태이며 초고왕은 근초고왕으로 봐야하겠죠. 왜냐하면 여기서 모시고 있는 신들은 대부분 부여계 개국 시조에 가까운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부여의 개국시조에 해당하는 신들은 크게 동명성왕(전설적인 부여의 개조) ― 부여왕 울구태(반도부여 개국시조) ― 근초고왕(반도부여 중흥 및 열도부여 개척시조) ― 성명왕(부여중흥의 개조 : 남부여 시조, 열도부여의 정신적 지주) 등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참 재미있군요. 칸무 천황이 모시는 선조들이 모두 부여계의 개국 또는 중흥시조였다는 점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칸무 천황은 열도 내에서의 부여의 흔적을 모두 지우면서도 그 조상들을 모시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면서도 이 분들의 실체와 행적을 철저히 비밀에 부치고 있습니다. 칸무 천황의 고뇌가 느껴집니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 즉 열도쥬신의 야마토 왕가의 으뜸 조상신인 이마끼신이 성왕이라는 사실을 한국인들에게 가장 널리 알린 사람은 바로 홍윤기 교수(한국외국어대)입니다. 홍윤기 교수는 수십 년 간 일본의 황가에 대해서 연구를 해온 분입니다. 다만 홍윤기 교수의 연구가 백제를 실체로 인정하고 열도의 역사를 마치 한반도 역사의 일부분으로 간주한 부분은 열도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들 것입니다. 야마토의 역사는 백제 역사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여사의 일부로 인식할 때만이 정확히 이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야마오 유키히사(山尾幸久) 교수는 일본 야마도 왕조에서 왕의 혈통이 부계로 제대로 전승되는 시기는 이 킨메이 천황 때부터라고 보고 있습니다. 즉 이전의 천황의 경우에는 왕위 계승의 혈통원칙에 일관성이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아마 후대의 천황들이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자신의 직계 조상인 킨메이 천황을 제사의 가장 중요한 대상으로 모신 것으로 보입니다.

킨메이 천황이 활약한 6세기에 야마토(열도부여)와 백제(반도부여)의 정치관계가 가져온 최대의 결과는 야마토 국가의 형성이라고 합니다. 야마토 국가는 530년대부터 제대로 시작되었고 6세기 중반에서 후반에 걸쳐 국가적 정비사업이 벌어집니다. 구체적으로 혈통세습제 집단의 형성, 중앙 지배집단의 형성, 지방지배의 진전, 장례의식 등 각종 의례의 정비, 왕권의 신기(神祇) 제도에 관한 정비 등의 괄목할만한 변화가 이 시기에 일어납니다.20) 바로 이 중심에 킨메이 천황이 있는 것이죠. 여기서 보면, 킨메이 천황이 국가 체제를 정비하는 솜씨가 백제의 성왕의 솜씨와 매우 흡사합니다.

이제 다시 히라노 신사로 돌아갑시다. 결론은 한노부토모(半信友) 선생의 지적과 같이 일본 천황가의 대표적인 신사인 교토의 히라노 신사의 주신(主神)은 바로 백제(반도부여)의 성왕(성명왕 : 523~554)이라는 것입니다. 즉 남부여(백제 : 반도부여)의 성군 성왕이 바로 이마끼신(今木神)이며 이 분이 일본 고대황실 최고의 신위(神位)로 모셔졌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칸무천황의 선조로 나라에서 가장 큰 신으로 모시는 분이 바로 백제의 성왕이라는 것입니다.

정리해 봅시다. 처음에 킨메이 천황이 바로 이마끼신(히라노 신)이라고 지적했지요? 그런데 이 히라노 신이 바로 성명왕(성왕)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결국 킨메이 천황 = 이마끼신 = 성명왕의 관계가 성립이 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킨메이 천황과 성왕은 동일인이라는 말입니다.

수십년간 일본 황가에 대한 연구를 해온 홍윤기 교수에 따르면, 일본에서는 오오미카미(大神) 즉 나라의 큰신은 단 두 분이라고 합니다. 한 분은 전설상의 '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 즉 천조대신(天照大神)과 다른 한 분은 히라노 신사의 주신인 '이마끼오오미카미[금목대신(今木大神)]'라고 합니다.21)여기서 말하는 천조대신이란 한국의 단군에 해당하는 말인데 전설상의 인물이자 개인이 아니라 종족 전체 또는 민족을 이르는 이름으로 봐야하는 개념이죠 따라서 역사상 실존하는 인물로서는 이 큰신(오오미카미 : 大神)의 지위에 오른 분은 성명왕이 유일합니다. 다시 말해서 일본의 정신적인 지주이자 개국신은 바로 성왕이라고 할 수 있죠. 이 분은 현 일본 천황가의 조상신이자, 일본을 신불습합(神佛習合)의 불교국가로 새로이 탄생하게 했으며 각종 제도를 정비하여 부계중심의 왕위계승을 확립한 성군이라는 것입니다.

필자 주
(5) 2008 京都観光タクシー同友会観光案内資料
(6) 백제왕(百済王)씨 즉 구다라코니키시(くだらこにきし)씨는 의자왕의 아드님인 부여선광(夫餘禅広)을 시조로 하고 있다. 부여선광은 구다라코니키시 요시미츠(百済王善光)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제41대 지토천황(持統天皇)이 하사한 성이라고 한다. 구다라코니키시씨의 사람들은 일본의 귀족으로서 우대되었다. 이들의 근거지는 대체로 쿠타라왕 신사가 있던 가와치노쿠니 카타노군(河内国交野郡) 부근으로 추정된다.
(7) 칸무 천황의 친백제정책은 김현구,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창비 : 2007), 147~160쪽 참고
(8) "대동 4년(809년) 2월 고하여 알린다. 倭漢惣歴帝譜圖는 天御中主尊을 세워 시조로 하고 있어, 이로부터 魯王, 呉王, 高麗王 漢高祖 등에게 이른다(?). 그러한 귀인의 후예에 스스로의 씨족의 계보를 잇고 있다. 그런데 왜인(倭人)과 한인(漢人)의 계보가 뒤섞여 감히 천신의 자손들을 더럽히고 있다. 어리석은 백성들이 헤매어 집착 하고, 이 흐트러진 계보를 진실하다고 착각하고 있다. 제사 관리들은, 자신의 집에 소장하는 그러한 잘못되게 돌아다니고 있는 계보를 모두 제출하라. 만약 이런저런 핑계를 대어 이를 숨겨 명령을 거역해 제출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발각된 날에는 반드시 중죄에 처할 것이다." 원문은 "辛亥。勅。倭漢惣歴帝譜圖。天御中主尊標爲始祖。至如魯王。呉王。高麗王。漢高祖命□。接其後裔。倭漢雜糅。敢垢天宗。愚民迷執。輙謂實録。□諸司官人□所藏皆進。若有挾情隠匿。乖旨不進者。事覺之日。必處重科。"(『日本後紀』平城天皇 大同4年)
(9) 칸무천황의 생모는 화씨(和氏)부인인데 그 아버지는 일반적으로 왜 왕실에서 백제조신(百濟朝臣)이라는 벼슬을 지낸 화을계(和乙繼)로 백제 무령왕의 직계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789년 1월14일 다카노노니이가사(高野新笠) 황태후가 서거한 기사와 관련하여 『속일본기』에는 연력 8년 화을계가 조정벼슬 정 1위이고 그 부인인 오에조신 마이모(眞妹)도 정1위라고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화을계 또는 고야을계(高野乙繼 : たかののおとつぐ)에 대한 이 벼슬의 기록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어 열도(일본)에서는 미천한 가문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10) 예를 들면 『神道大辞典』이나 『百二十五代の天皇と皇后(秋田書店)』에서 나타난 坂元義種 교수 등의 해설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11) 井上滿郞 『平安京の風景』(文英堂 : 1994)
(12) 相殿 즉 두 명 이상의 신주를 합사하여 함께 모시는 경우를 말함.
(13) 참고로 후지와라(藤原) 가문은 1천년 이상을 내려오는 가장 전통있는 가문으로 조정의 요직을 독점해왔다. 후지와라 가문의 조상은 나가또미노까마따리(中臣鎌足)로 645년 소가(蘇我)씨를 타도하고 교도쿠 천황을 옹립하여 개신정치를 시작한 공로로 하사받은 성씨이다. 이 당시 소가씨의 외손자였던 황자가 "한인(韓人)이 이루까를 죽였다."라고 한탄하였는데 그 한인이 바로 까마따리였다. 나가또미의 조상신이 신라계였다는 이야기가 있고 까마따리가 성장한 곳이 현재의 오사카부의 동북부인 미시마(三島)는 신라인의 집단 이주지로 유명한 곳이다. 김현구, 앞의 책, 17쪽, 117쪽.
(14) "今案白壁ハ光仁天皇也其曾祖父ハ舒明天皇其曾祖父ハ欽明天皇也是平野明神云了"
(15) 홍윤기 「日本古代史 問題點의 새로운 규명 - 平野神의 文獻的 考察을 중심으로 -」『日本學』第24輯
(16) 半信友 「蕃神考」『神社私考』(1924) 또는 『半信友全集 5』(1909)
(17) 內藤湖南『近畿地方にける神社』(1930)
(18) 中川友義『渡來した神神』(1973)
(19) 홍윤기 『일본 속의 백제 구다라』(한누리미디어 : 2008) 433쪽.
(20) 山尾幸久「日本古代王權の形成と日朝關係」『古代の日朝關係』(塙書房 : 1898)
(21) 홍윤기, 앞의 논문.




김운회 동양대 교수 (inkyu@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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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이덕일 칼럼] 외교관 - 서희 어하라 5010 2012.04.29
88 미,일 중국성장 경계 알캥이 4619 2012.04.29
87 "낙랑ㆍ고조선은 요서에 있었다" ‥ 심백강 박사, `황하에서 한라까지` 알캥이 5715 2012.04.29
86 '미국제국의 종말‥한국 강대국 등극' 사진 알캥이 4877 2012.04.29
85 “세계사 빠진 한국사 교육은 반쪽” 사진 알캥이 5189 2012.04.29
84 영국, 스톤헨지는 원뿔형 건물. 사진 알캥이 6436 2012.04.29
83 미국 알래스카서 세계최고 온돌 발굴 사진 알캥이 5996 2012.04.29
82 “중국 3황5제ㆍ일본 천황계, 그 뿌리는 한민족” 알캥이 5626 2012.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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