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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태종 이세민은 선비족 탁발씨(拓跋氏)

어하라 | 2012.04.27 15:34 | 조회 14181

당태종 이세민은 선비족 탁발씨(拓跋氏)



수문제 ·당고조 모두 한족아닌 선비족 출신

수나라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한 이유는 당시 중원의 주인은 고구려였기때문입니다.

수나라가 612년에 고구려를 침공할 때부터 668년 당나라에 멸망할 때까지 중국은 지속적으로 고구려를 침공했다. 이 끈질긴 침공 기사를 읽으면 누구라도 이런 의문이 든다. 도대체 수와 당은 고구려와 전생에 무슨 원수를 졌다고 그처럼 집요하게 고구려를 공격했는가이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많은 학자들이 여러 각도에서 제시했는데 이곳에서는 임용한 박사의 글을 많이 참조했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국가를 진시황제 이후 실질적으로 지배한 민족은 한족과 북방기마민족(흉노)이다.

한족의 왕조가 쇠퇴하면 북방기마민족이 치고 들어와 영토를 점거하고 중원의 패권을 차지했다.

진시황 이후 중원 패권 북방기마민족이 차지 그 시작이 오호십육국(1五胡十六國)이었고 이를 회복하고 중국을 통합한 나라가 수와 당이라고 설명된다. 그런데 실상을 보면 매우 놀라운 점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는 대체적으로 이 시대를 ''혼란기'' 혹은 ''암흑기''라 해서 상당히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기도 하는데, 그것은 이시기에 서진이 흉노족에게 점령당한 후 한족이 대거 강남땅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조조의 위나라를 이어받은 서진이 단명하자, 사마예가 강남땅에서 동진을 일으키고 화북지역에는 소위 오호십육국 시대라 해서 갈, 저, 흉노, 선비, 강족 등 많은 왕조가 들어서기도 하고 망하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서 저족 출신의 부견이 모든 부족을 통합하여 전진왕조를 세우고 강남의 동진과 대치한다.

중국의 역사에 있어서 한족은 외래문명에 대해 보수적인데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 이민족인 다수의 기마민족 왕조가 세워지자 자연적으로 한족도 외래 문명을 긍정적으로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의 불교수용그 중 하나로 설명된다. 후한 말에 들어온 불교가 이때에 이르러 중국 전역에 퍼지게 됐는데 이는 북방의 소위 ‘오랑캐 왕조'' 즉 기마유목민족 계열이 들어선 덕분이라고 볼 수 있다.

학자들이 중국사에서 이 시기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번한잡거'' 현상 때문이다

이것은 이민족과 한족이 같은 화북 땅에 살기 시작하면서 민족의 동화가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중국의 통치를 사실상 흉노계열이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당연할 결과로 볼 수 있다. 북조 중에서도 북위 효문제 시대에 적극적인 한화정책을 폈는데 그는 선비족이 한족의 옷을 입고 한족의 문화를 수용하고 한족과 결혼을는 것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수문제 · 당고조 모두 한족아닌 이민족 출신 그런데 중국을 통일했다는 수나라와 당나라도 족보를 따진다면 모두 흉노의 일파인 선비족이라는 점이다. 수문제는 황제가 되기 전 북주(北周)의 승상으로 북주는 지금의 내몽골 지역의 음산 산맥에 위치한 군사기지인 무천진 군벌로 대부분 한족이 아닌 선비족 출신이다.

당나라를 세운 당고조 이연도 한족 출신이 아니다. 이연도 선비족인 탁발씨(拓跋氏)의 후손으로 역시 같은 북방민족 출신인 수나라에 항복하여 북방민족 제압의 근거지였던 태원에서 군사령관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이연은 당 왕조를 세운 후 한족들의 민심을 얻기 위해 자기의 선조가 춘추시대의 노자(노자의 성은 이씨임)라고 선전했다.
그리고 그에 맞춰 노자의 『도덕경』을 발간하고 도교를 장려했다.

학자들은 이연이 통상 북방민족이 항복해 오면 중국 역대 왕조들이 이씨 성을 하사하는 관례에 따라 이씨 성을 받았다고 추정한다.

당태종의 충복으로 볼 수 있는 장손무기는 당고조 이연과 같은 탁발씨로 북위 때 전공을 많이 세워 성씨를 장손(長孫)으로 바꾼 사람이다. 할아버지는 북주의 표기대장군이고 아버지는 수나라의 우효위장군이며 그의 여동생이 태종의 처 문덕황후다.

그는 혈통이 탁발씨이므로 어렸을 때부터 이세민과 절친하게 지냈다.

태종의 또 다른 충복인 우지녕도 선비족의 귀족 출신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수나라에서 동주총관을 지냈고 아버지는 수나라에서 내사사인을 지내는 등 정통적인 북방기마민족 가문이다.

중국을 사실상 통치한 오호십육국들의 원래 시발점은 고구려처럼 북방기마민족으로 부족체제의 작은 집단이었다. 그 정도의 작은 집단도 경우에 따라서는 통일왕조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데 그것은 기동력에서 상대적으로 우월한 북방기마민족이기 때문이다.

당시 선비족은 고구려의 부용세력(附庸勢力) 선비는 고구려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고구려의 역사를 보면 고구려의 정복 활동 때 선비를 활용하는 기록이 자주 나온다. 박 경철 박사는 고구려가 선비 등 흉노에서 파생된 유목국들을 자신이 의도하는 전투에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선비가 고구려의 부용세력(附庸勢力)이었기 때문으로 설명했다.

여기에서 부용세력의 의미는 로마제국의 예를 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당시 로마의 해방노예들은 그들의 옛 주인인 자유민을 보호자(patronus)로 삼는 대신 노역 및 군역에 봉사했다. 이는 로마의 정복지역 통치방식 중의 하나로 부용민(clientes) 제도라고도 한다. 부용은 원래 소국 그 자체를 의미하면서 그것이 대국에 복속되어 있는 상황을 나타내기도 하는데 고구려와 선비의 관계가 그와 같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고구려와 흉노의 친연성에 관한 연구」, 이종호, 백산학보 제67호, 2003)을 참조하기 바란다.

인간이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자유롭기는 쉽지 않다. 사실상 중국의 역사는 수·당의 우려가 기우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오호십육국은 제외하더라도 몽골족의 원나라, 거란족의 요, 여진족의 금, 만주족의 청나라 등 모두 고구려보다도 더 열악한 부족단위에서 시작하여 천하를 제패했다.


그런데 고구려는 중국의 머리 부분에 위치한, 넓은 영토를 지닌 강국으로 수나라와 당나라를 세운 선비족을 부용세력으로 지배하던 세력이다. 더구나 요동방어선을 장벽으로 삼고 있는 제국중의 제국이다.

고구려 중국 선제공격 사실 잘 알려져 요동방어선은 중국의 고구려 침공을 막기 위한 방어적인 의미가 강하다. 그런데 선비를 부용세력으로 여기고 있는 고구려가 내부를 단속한 후 축적된 힘을 중국을 점령하여 지배하고 있는 선비족의 수나라와 당나라에게 표출할 때 고구려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는가는 미지수였다.

고구려가 중국의 공격을 막는 데만 급급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중국을 선제공격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을지문덕은 중국 수나라의 공격을 격퇴하고서는 그 여세를 몰아 중국을 공격한다면 대륙을 장악할 수 있다고 주장할 정도로 중국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비록 수나라와 당나라가 중국을 점령했지만 선비족으로서 자신들보다 큰 세력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고구려는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하는 걸림돌이었다. 그러므로 수와 당은 왕조의 안정과 생존의 차원에서 고구려가 강성하여 자신들을 직접 공격하기 전에 고구려를 쳐 없애보려 한 것이다.

수·당이 국운을 걸고 고구려와 혈투를 벌였는데 결국 수나라는 고구려 때문에 멸망했고 고구려는 당나라 때문에 멸망했다.
아쉬운 것은 고구려의 붕괴가 고구려의 전력이 약해서가 아니라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 고구려 내부의 자중지란 등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이다.

당나라 과거시험에서 고구려 정벌방법 묻기도

최근 국내 학계에서는 당나라가 고구려 침공의 여론몰이를 위해 과거시험에 정벌 방법에 관한 문제를 출제한 문헌이 최근 처음 발견되었다. 돈황 문서로 잘 알려진 『토원책부(兎園策府)』라는 필사본의 ''정동이(征東夷)''라는 항목에 고구려 원정에 대한 의견을 묻고 원정의 당위성과 정복의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 대목이 있다고 인천시립박물관의 윤용구 박사가 말했다.

『토원책부』는 당 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의 일곱 번 째 아들인 장왕(蔣王)의 지시로 두사선(杜嗣先)이 650년대에 만든 책으로 과거시험에 출제될 예상문제와 모범답안을 자문자답식으로 서술했다. 모두 30권 분량이었으나 현재는 서문과 권1만이 돈황문서로 전해지는데 자문자답 형태의 질의응답에는 고구려 원정의 필요성과 화전(和戰) 양면의 전술과 모범답안이 무엇인지 노골적으로 나타나 있다.

또 고구려 정복을 통한 천하통일의 정당성을 위해 전쟁을 반대하는 신하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정벌 여론조성을 위해 과거급제 시험에 ‘유격전, 전쟁터의 지형, 기상, 심리전 등을 논하라’는 문제도 출제돼 있다. 당나라가 고구려 공격에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를 잘 알려주는 예이다.

돈황문서란 중국 3대 석굴 유적 중 하나인 돈황 막고굴에서 발견된 고문서 일체를 일컫는 말로써 20세기 초반 이후 서구인들에 의해 대규모로 약탈돼 현재는 영국박물관이나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등에 주로 보관돼 있다. 유명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도 돈황문서의 하나로 프랑스로 반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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