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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마지막 영웅, 양만춘

어하라 | 2012.04.27 16:02 | 조회 10988

고구려의 마지막 영웅, 양만춘

(출처 : 烈帝의 21세기 한국역사)

고구려는 한민족 최대의 제국이었다. 고구려는 중원의 숱한 왕조들과의 투쟁을 통해 성장하였고, 번영하였던 대륙의 제국이었다. 우리에게 있어 고구려는 뭔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우리는 고구려하면 가슴 벅차 하면서, 고구려의 멸망을 아쉬워 한다.

함석헌 선생은 고구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삼국시대가 실패한 원인은 고구려가 망한데 있다. 누구나 역사를 읽는 사람은 민족의 종주권을 고구려에 허락하지 않을 수 없고, 또 일마다 고구려에 동정이 가는 것이 사실이다. 민족의 혼이 거기에 대표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일 고구려가 그렇듯 갑자기 망하지 않았더라면 만주, 조선은 반드시 하나로 통일되어 큰 나라를 이우었을 것이요, 그랬다면 신라와 백제가 좀 분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민족 전체의 운명은 잘못되지 않았을 것이다."

고구려는 민족 최대의 제국이자, 삼한의 맏형으로, 한민족을 지키는 방파제와도 같은 역할을 하였다. 고구려가 대제국을 이룩하며 번영한 요인에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겠으나, 그 중에서 가장 큰 것은 바로 뛰어난 영웅들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대무신왕 때 장군으로 동부여 정복의 일등공신인 괴유, 한나라의 침입을 물리친 명림답부와 계수(산상왕의 동생), 국난에서 고구려를 구한 유우, 밀우, 유옥구, 숙신을 정복한 안국군 달가, 북주를 물리친 전쟁영웅 온달, 임유관 대첩의 주역 강이식, 수나라의 30만 대군을 고기밥으로 만든 살수대첩의 대영웅 을지문덕과, 당태종 이세민을 처참하게 도륙하고 중원을 진동시킨 천하영웅 연개소문을 비롯해서 안시성 대첩의 주역 양만춘 등 고구려에는 숱한 애국지사와 영웅들이 많았다.

바로 이러한 영웅들이 있었기에 고구려가 천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대륙의 제국으로 번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중 필자는 바로 안시성 대첩의 영웅 양만춘에 대해 주목하고 싶다. 그는 여타 영웅들과는 달리 잘 알려지지 않는 인물이다. 을지문덕과 연개소문의 빛에 가린 고구려의 마지막 영웅이 바로 양만춘이다.

그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는다. 고구려가 망하면서 당나라 총관 이세적이 고구려 사적을 불태운 것이 그 큰 원인이라 하겠다. 하지만 단편적인 기록을 통해 우리는 그의 활약상을 알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라 하겠다.

안시성 싸움의 명장 양만춘은 사서에 그 이름조차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박지원의 <열하일기>와 송준길의 <동춘당선생별집>같은 야사에만 안시성 성주의 이름은 양만춘이었다고 하는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

<당서>에는 양만춘이 연개소문의 혁명이 일어났을 때 유일하게 반기를 든 인물이라며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안시성 성주는 재주와 용기가 있는 사람인데 막리지의 난에도 항복하지 않았다. 막리지가 그 성을 주었다"

또한 이세민이 안시성을 공격하기 전에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내가 듣건대, 안시성은 성이 험하고 군사가 정예하고, 그 성주는 재능과 용맹이 있어 막리지(莫離支)의 변란에도 성을 지키고 복종하지 않으므로, 막리지가 이를 쳤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그대로 맡기었다."

고구려의 대권을 가진 연개소문도 어쩌지 못한 안시성주! 이것이 가능할까?

하지만 이는 중국의 고의적인 역사왜곡인 춘추필법의 일환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당 태종이 안시성에서 양만춘에 의해 호되게 패배당한 것을 감추기 위해 즉, 자신의 수치를 숨기기 위해 고구려의 대권을 쥔 연개소문 마저 못 이긴 인물이라는 식으로 왜곡했다는 것이다. 필자 역시 이 의견에 동의한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서 양만춘은 연개소문과 대립했다기 보다는 오히려 그의 혁명에 동조하는 세력이었을 것으로 추측되어 진다.

참고로 연개소문은 안시성을 구원하기 위해 15만의 대군을 보냈다. 만약 양만춘이 연개소문에게 반대했다면 연개소문은 안시성 대신 신성이나 건안성 등 요지를 중심으로 방어전을 펼쳤을 것이다. 당시 안시성은 고구려가 당의 대군을 맞아 싸운 최대 방어진이었다. 그리고 양만춘이 연개소문에게 반기를 들었다면 그는 왜 연개소문을 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운 당나라 군과 싸웠을까?

만약 일개 성주가 연개소문에게 반대했다면, 어떻게 연개소문이 당나라와 전쟁을 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겠는가? 안시성주가 연개소문에게 반대했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에게 복종해 연개소문의 전략의 한 부분을 담당했음은 분명하다. 연개소문이 당군을 막아내는 전략에서 안시성의 위치를 고려할 때 안시성주는 오히려 연개소문의 심복일 것이다.

누구의 말대로 연개소문이 권력만 탐한 난신적자이고, 연개소문에 대항한 사람들이 많았다면 고구려가 어찌 당나라의 공격을 물리치고, 당나라를 공격하여 화북지역을 석권할 수 있었겠는가? 이미 국론이 분열된 고구려를 손아귀에 넣는 것은 쉬웠을텐데, 그들은 그러지 못했다. 그렇다는 건 고구려가 이미 연개소문을 중심으로 대당전역을 준비하고, 당나라의 침략을 물리치면서 한편으로는 저 서토(당, 중원)로 진격했다는 것을 뜻한다. 누구 말대로 양만춘이 연개소문에 대항했다는 건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연개소문에 대항한 지방 성주들이 많았다면 연개소문이 요동성을 구원하기 위해 보낸 구원군 4만, 안시성을 구원하기 위해 보낸 15만 대군은 어떤 군사인가?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의 성은 유기적 방어체제를 갖추어 한 성이 공격당하면 다른 성에서 군사들을 조금씩 차출하여 위기에 빠진 성을 구하곤 했다.

요동성을 구원하기 위해 출정한 4만 군사는 신성과 국내성의 군사이다. 그리고 연개소문이 삽시간에 15만의 대군을 증파할 수 있었던 건, 이들 군사들이 여러 성들에서 차출한 군사들이었기에 가능했다. 만약 연개소문에 대항한 지방세력이 많았다면 어찌 연개소문이 이토록 많은 구원군을 보낼 수 있었겠는가?



그럼에도 이러한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단재가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서 "이세민이 수십만 대군으로 네다섯달에 이르도록 한낱 안시의 외로운 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수치를 가려 숨기기 위해, 안시성은 곧 이세민이 공략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본국 고구려의 대권을 잡은 연개소문도 어찌하지 못했다는 기록을 남긴 것이다."라고 한 것이 더 진실에 가까운 것이라 하겠다.

당 태종의 50만 대군을 맞아 석 달동안 싸우며 성을 내주지 않은 양만춘...

그의 업적은 살수대첩을 이끈 을지문덕과 비교해 보았을 때 적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그의 공이 빛나면 빛났다고 할 수 있다. 수 양제의 100만 대군은 사실 실속이 없는 어중이 떠중이들의 집합체일 뿐이다. 하지만 이세민이 이끈 50만 대군은 돌궐, 토번, 고창국 등과의 전쟁에 참여한 정예병들이 대부분이다. 게다가 이세민은 수 양제의 실패를 거울삼아 고구려 공략에 많은 준비를 기울였다. 그 결과 이세민은 초반에 요동성, 백암성 등 몇 몇 성을 점령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물론 이 전과 역시 연개소문이 의도한 전략이었지만.....

군사와 백성 모두 합해 10만도 못되는 병력으로 석 달이 넘게 당나라 50만 대군의 발목을 잡은 양만춘은 실로 대단하다고 느낄 정도이다. 양만춘은 비루, 포차 등 신무기와 토산을 활용한 당나라의 피상적인 공세에 그에 맞도록 즉각 대응함으로써 안시성 대첩의 승리를 가져왔다.

특히 그는 신기에 가까운 활솜씨를 선보여, 천책상장, 천가한이라 불리운 이세민의 눈알을 쏘아 맞혀 이세민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고구려 남아의 기상을 드높인 영웅이다. 이세민의 죽음의 원인이 그가 쏘아 맞힌 화살독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는 걸 보면 그는 대영웅이라 자처한 이세민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보낸 영웅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드라마 대조영에서 이세민 역의 송용태씨

양만춘이 당나라 대군을 안시성에서 붙잡는 동안 연개소문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를 보면 이 때 연개소문은 대군을 이끌고 만리장성을 넘어 당나라 태자 이치가 있는 어양, 상곡 등지를 휩쓸었다고 한다. 전쟁에 앞서 연개소문은 안시성주 양만춘과 오골성주 추정국을 따로 불러 안시성에서 당나라군의 발목을 붙잡는 동안 자신은 만리장성을 넘어 중원 본토로 진격할 것이고, 당나라측에서 급히 퇴각하면 안시성과 오골성의 군사들이 이세민의 군대를 추격하게 하고, 자신 역시 요택의 길목을 막아 이세민을 사로잡을 것을 약속한 바 있다고 한다.

양만춘이 안시성에서 당나라 군대를 붙잡는 동안, 연개소문은 만리장성을 넘어 중원으로 진공한 것이다. 결국 고당대전에서 고구려의 승리를 안겨준 공로자는 양만춘이라 할 수 있다. 그가 끈질긴 당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안시성을 지켜냈고, 게다가 당의 주력을 요동에 붙잡았기 때문에 연개소문이 중원 본토 진공을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연개소문의 중원진공에 대해 몇 몇 사람들은 회의를 품고 있으나 필자는 가능하다고 본다. 그 증거로 바로 북경에 있는 고려성, 고려영 유적과 북경에서 황하 하구에 이르는 황량대, 적골돈이 그것이다. 고려성은 북경 인근 지역에 있는 고구려 성 유적이고, 고려영은 고구려 군사 주둔지인데 고려성과 고려영이 지금의 북경에 있었다는 건 연개소문이 만리장성을 넘어 군사작전을 감행했다는 증거라 볼 수 있다.

황량대에 대해 신채호 선생은 민간에 전승되는 이야기를 근거로 당태종이 모래를 쌓아 양식을 저장해놓은 것처럼 꾸며 놓은 것이라고 한다. 이는 고구려군의 기습을 피하기 위해 만든 위장막이다. 게다가 북경 동쪽 90미터 지점에는 적곡돈이 있는데, 본 이름은 적골돈, 해골이 쌓인 돈대라는 뜻이라 한다. 당나라군이 고구려군에 쫓겨가던 중 죽은 병사들의 시신을 장사 지내기 위해 이 곳에 크고 작은 구덩이를 팠는데 위에 흙을 덮으니 마치 돈대처럼 생겼다고 해서 적골대라 불리웠다고 한다. 황량대와 적골돈은 군사들의 숫자가 많은 것처럼 보이기 위한 속임수인데, 이들이 이런 짓까지 한 것을 보면 당시 연개소문과 양만춘이 이끈 고구려군이 중원 본토로 진격했다는 것을 뜻한다고 보여진다.

조선상고사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연개소문과 함께 만리장성을 넘어 중원을 진동시켰다고 볼 수 있다.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한 한단고기에는 연개소문과 양만춘이 장안에 입성하여 이세민의 항복을 받았다고 전한다. 그 기록이 사실이든, 아니든 고구려군이 만리장성을 넘어 중원을 유린한 것은 사실이고, 그 중심에는 바로 연개소문과 양만춘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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