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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 후예설, 중국 인문학 고질병..'용의 신화'는 독점할 수 없다

환단스토리 | 2018.09.06 22:11 | 조회 1216

용의 후예설, 중국 인문학 고질병..'용의 신화'는 독점할 수 없다

입력 2018.09.06

[경향신문] ㆍ용의 후손 신화

내몽골 츠펑(赤峰)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중화제일룡. 이 옥 부장품은 초기 국가와 권력자의 출현을 현시하는 유물이지만 중국 학자들은 중화의 용으로 봤다.

용은 홍산문화 상징물 중 하나 중국 학자들 ‘선조 신화 만들기’ ‘중화문명탐원공정’에 끌어들여 중국 역사 용의 신화 존재 안 해 역대 전적에도 용의 기록 없어 한 고조 탄생신화에 처음 등장

예수셴(葉舒憲·1954~)이라는 중국학자가 있다. 그는 시골 대학 출신이었지만 같은 또래 중국학자로서는 드물게 신화학·문화인류학 이론들을 학습했고, 방문학자로 유럽과 미국에서 공부했으며, 서구의 신화·원형비평, 구조주의 신화학, 기호학 관련 저술을 번역했다. 1990년대에 들어 <영웅과 태양>(1991), <중국신화철학>(1992), <고당신녀(高唐神女)와 비너스>(1997)와 같은 저작들을 잇달아 내놓으며 신화학자로서 성가를 올리기 시작한다. 나도 한동안 그의 책과 논문을 즐겨 따라 읽고 인용하던 독자였다. 그런 그가 국가기관인 중국사회과학원 교수로 있으면서 2007년 <곰토템(熊圖騰)>을 출간한다.

‘2006, 나의 곰의 해’라는 서문으로 시작되는 이 책에는 ‘중화 선조 신화의 근원을 찾아서’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부제처럼 그는 곰을 통해 ‘중화 선조’의 기원을 찾으려고 한다. 왜 그랬을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그때 그는 중국 역사 확장 프로젝트인 ‘중화문명탐원공정’, ‘동북공정’을 수행하는 기관의 ‘직원’이었다. 둘째, 곰은 1906년 도리이 류조에 의해 인지되었다가 1980대에 여신의 사원과 곰 숭배의 흔적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새로 발굴되면서 주목되기 시작한 훙산(紅山)문화의 상징물이었다. 그는 곰 관련 유물 이미지를 바탕으로 학술적 상상력을 가미하여 중화문명의 기원을 다시 설명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예 교수의 곰 해석에서 주목되는 점은 곰을 곰으로만 보지 않고 용으로 보려 한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리토템인가 곰토템인가?’(2006)라는 논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현재까지 북방에 전해지는 곰 시조신화와 상고시기 초나라 군왕의 성씨가 웅(熊)이었다는 사실을 연결지어 보면 ‘옥웅룡(玉熊龍)’이라는 기호의 배후에 내포되어 있는 것은 ‘용의 후손’ 가운데 ‘곰의 후손’이라는 중요 부분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예수셴은 왜 이런 문장을 썼을까? 배후에는 탐원공정의 고민이 있다. 그간 중국문명의 기원론은 황허(黃河) 유역의 화하계(華夏系) 종족에서 시작되었다는 다원론에서 출발하여 여러 지역의 문명이 상호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발전했다는 다원론으로 전개되어 왔다. 1970, 80년대를 거치면서 창장(長江) 유역의 양저(良渚)문화, 쓰촨 지역의 삼성퇴(三星堆) 문화, 요하 유역의 훙산문화 등에서 드러난 새로운 고고학적 유물들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 기원전 3000년 이전으로 소급되는 훙산문화다. 문제는 현재 내몽골 츠펑(赤峰)시 훙산으로 대표되는 이 문화가 중원의 바깥, 오랑캐 땅에 있었다는 데 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유물이라는 객관적 증거를 부정할 수는 없다. 중국 역사 기록에서 동이(東夷)의 땅이라고 기술했던 훙산지역의 문명이 더 오래되었다고 인정하면 된다. 그러나 탐원공정과 그 첨점에 있었던 예수셴은 이를 인정할 수 없었다. 아직 녹슬지 않은 중화주의, 나아가 국가주의가 증거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 이 딜레마 속에서 예수셴이 선택한 고육지책은 이러했다. 훙산문화의 실체를 인정하되 그것을 황허유역의 문화와 연결하여 양자의 관계를 연속적으로 파악한다! 어떻게? 그를 유혹한 유물은 작은 옥기(玉器)였다.

‘중화제일룡(中華第一龍)’이라 명명된 옥기가 있다. 훙산문화 상징물 가운데 하나다. 1971년 츠펑시 산싱타라촌(三星他拉村)의 장봉상이라는 젊은 농부가 우연히 발견한 뒤 방치되었다가 뒤늦게 눈부신 조명을 받은 C자형 옥 조각품이다. 이 옥 부장품은 초기 국가와 권력자의 출현을 현시하는 유물이지만 중국학자들의 눈에는 거의 자동적으로 ‘중화의 용’으로 인지되었던 모양이다. 그 뒤 이뤄진 발굴과정에서 또 다른 옥기도 발견된다. 1986년 츠펑시 남쪽 차오양(朝陽)시의 뉴허량(牛河梁)이라는 곳에서 대규모의 제사유적과 적석총 등이 발견되었는데, 무덤 안에서 또 다른 옥기가 나왔던 것. 크고 작은 구멍 둘이 있어 실로 꿰어 장식할 수 있게 만든 옥 장신구였다.

츠펑시 남쪽 뉴허량에서 출토된 옥기. 보는 이에 따라 새나 태아의 모습으로 볼 수도 있지만 중국 학자들은 옥돼지룡이나 옥곰룡으로 불렀다.

그런데 특정 관념을 배제하고 뉴허량의 옥기를 본다면 보는 이에 따라 새의 모습을 볼 수도, 태아의 모습을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사물은 보고 싶은 대로 보이는 경우가 많다. 다수의 중국학자들에게 이 장신구는 옥으로 만들어진 용으로 보였다. 더 세밀하게 본 학자들은 돼지의 이미지를 포착하여 옥저룡(玉猪龍)으로 불렀다. 그냥 돼지면 돼지지 왜 돼지룡이 되어야 하는지 의문스럽지만 예수셴은 더 이상 이를 옥저룡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곰을 보았다. 그래서 이 옥기를 ‘옥웅룡(玉熊龍)’으로 읽는다. 그는 웅룡이라는 해석을 통해 유라시아 대륙에 널리 퍼져 있는 곰 문화가 중국문화의 뿌리이며, 이 뿌리가 중원의 용 문화와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려고 했던 것이다. 중화문명 탐원공정 또는 동북공정의 목표에 따라 옥 장신구는 옥웅룡이 아닌 다른 무엇이 될 길을 잃었다.

내가 길게 예수셴의 사연을 들춘 까닭은 그를 비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유물과 도상, 그리고 신화를 접목하여 소위 중화의 정체성을 설명하려는 이 같은 스토리텔링이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다는 사실을 환기하기 위해서였다. 예수셴이 곰과 연결하려고 했던 상상의 동물 용을 ‘중화민족’의 표상으로 만드는 과정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중국인들은 어떻게 ‘용의 후손(龍的傳人)’이 되었는가?

유물·도상·신화 인위적 접목 중화 정체성 설명에 활용해 와 “원시~중세 토템 없었다” 비판 용은 왕권 상징물 가운데 하나 특정 민족·황제와도 관계없어 문예작품의 비유에 종종 차용

신화상 화하족(한족)의 시조는 황제(黃帝)다. 그렇다면 중국인들이 용의 후손이 되려면 논리상 황제는 용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문헌 자료 어디에도 황제가 용이라고 기술되어 있지 않다. 그런 신화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후대에 이르러 용이 제왕의 권위와 신성성을 상징하는 동물로 등장하기는 한다. 한 고조 유방의 탄생신화가 그렇다. 그의 어머니 유온이 큰 연못가에서 쉬다가 신과 만나는 꿈을 꾸었다는 것. 그때 천둥 번개가 치며 깜깜해졌는데, 남편인 태공이 가서 보았더니 유온의 몸 위에 교룡(蛟龍)이 있었고 그로 인해 고조를 낳았다는 이야기다. 기실 박혁거세의 부인 알영도 계룡(鷄龍)이 옆구리로 낳았다. 신라 영웅 작제건은 서해 용왕의 딸 저민의와 결혼하여 고려 왕실의 조상이 된다. 용은 왕권의 상징물 가운데 하나지 특정 종족의 표지도 아니고 황제와도 무관하다.

그래서 왕첸룽(王乾榮)과 같은 비판적인 학자는 “중국 역대 전적을 보아도 ‘비늘 달린 동물들의 우두머리’인 용을 토템상징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없고, 24사나 야사에도 기록이 없다. (…) 중국 원시사회부터 중세까지 애******즘적 범신론은 있었지만 토템 관념은 없었다. 용은 ‘물에 사는 비늘 동물의 으뜸’일 뿐 인류와는 무관하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왜 중국인들은, 심지어 다수 중국학자들까지 입만 열면 ‘용의 후예’라는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가? 이어지는 왕첸룽의 지적에 단서가 있다. “근래 몇몇 유행가에서 ‘유구한 중화는 한 마리 용’이라거나, ‘창장과 황허는 두 마리 용’이라거나, ‘염황자손은 용의 후예’라는 말을 퍼뜨리고 있는데, 이는 문예작품의 비유와 같은 것이지 중국의 역사문화와는 무관한 것이다.” 왕첸룽이 말한 몇몇 유행가 가운데 맨 앞에 있는 것이 바로 1978년 대만정치대 학생 허우더젠(候德建)이 만든 <용적전인(龍的傳人)>이다.

허우더젠은 1978년 12월16일 아침, 친구한테서 미국이 대만과 국교를 단절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그는 분노한다. 이 분노는 아편전쟁 이후 중국이 외세로부터 받았던 고통에 대한 인식에서 솟구친 감정이었다고 그는 뒷날 회고했다. 그는 그날의 감정과 중화적 애국주의를 노래에 담았다. 이 노래는 대만에서 크게 유행했고, 그가 대륙으로 망명한 뒤에는 중국 내에서도 크게 주목을 받는다. 이 노래는 마침내 1985년 중국 최대의 명절인 춘제(春節)에 즈음하여 방영되는 <춘절연환만회(春節聯歡晩會)>의 무대에 올랐고, 이후 국민가요가 된다. 창장과 황허를 호명하면서 시작되는 가사는 용과 중국을 부르는 데서 절정에 이른다.

오랜 동방에 한 마리 용이 있으니 그 이름 바로 중국이라네.

오랜 동방에 한 무리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은 모두 용의 후예라네.

거대한 용의 발 아래서 내가 자라고 장성한 뒤에는 용의 후예가 되네.

검은 눈동자 검은 머리 누런 피부 영원토록 용의 후예라네.

지난달 인도네시아 아시안게임 카누용선 500m에서 금메달을 딴 남북 단일팀. 카누 앞뒤에 용두와 용미가 달려 있다. 배를 용두로 장식하는 것은 용이 수신이기 때문이며, 용두는 수신의 가호를 받으려는 뱃사람들의 보편적 마음의 표현이다. 연합뉴스

중국 포털 바이두에 들어가 <춘절연환만회>에서 불리는 노래를 듣노라니 이런 의문이 든다. 그날 대학생 허우더젠은 어떻게 ‘동방의 중국이 용의 후예’라는 가사를 떠올리게 되었을까? 그의 머리 안에 용의 후손이라는 이미지가 박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이는 장제스의 독재 아래서 이뤄진 대만의 민족주의적 학교 교육의 영향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사실 용을 중화민족의 상징이자 시조라고 보는 용 토템론은 1940년대 초반 원이둬(聞一多)에 의해 제안된 학설이다. 그는 ‘인수사신상(人首蛇身像)을 통해 본 용과 토템’이라는 논문에서 “용은 일종의 토템으로서 토템 속에서만 존재하고 생물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일종의 허구적 생물이다. 용은 수많은 다른 토템이 혼합되어 이뤄진 일종의 종합체이기 때문이다. (…) 용 토템은 그것이 부분적으로는 말을 닮거나 개를 닮거나 물고기·새·사슴을 닮을 수도 있지만 그 중심 부분과 기본 형태는 뱀”이라고 했다. 무수한 토템 부족들 가운데 가장 강했던 뱀 토템 부족이 나머지 약한 단위들을 겸병하고 동화시킨 결과로 만들어진 토템이 용이라는 것이다. 뒷날 레비스트로스는 토테미즘이 학자들이 만들어낸 허상이라고 비판했지만 당시 원이둬에게 이 개념은 전가의 보도였다.

논문을 쓸 당시 그는 항일전쟁기에 한시적으로 설립되었던 쿤밍(昆明)의 서남연합대학 교수였다. 그는 중국이 외세에 맞서 단결해야 한다는 시대정신의 세례 아래 있었다. 중국은 다민족국가지만 한족이 그 중심이니 한족을 중심으로 단결해야 한다. 이를 가장 적절히 표현하고 있는 상징물이 용이다. 용은 뱀을 중심으로 다양한 동물들이 조합된 신성한 존재니까! 어느 날 이 ‘아름다운 은유’를 발견한 원이둬는 아마도 무릎을 쳤을 것이다. 원이둬가 소수민족의 도시 쿤밍에서 발명한 용의 표상은 항일전쟁에 앞장섰고 중화민국의 초대 총통이었다가 1949년 대만으로 쫓겨난 장제스에게 ‘복음’이었다. 이 복음은 1970년대 말 허우더젠의 가요 속에서 꽃을 피우고 1980년대 대륙에서 만개한다. 용의 후손이라는 이야기는 원이둬 유의 학자에 의해 발명되어 근현대 중국사 속에서 개화된 근대의 신화이자 현대의 신화다. 중국을 대표하는 신화학자 예수셴은 아직 그 화원에서 꿀을 따고 있는 중이다. 중국 인문학의 고질(痼疾)이다.

용선, 굴원기원설은 고증 불가 용머리·꼬리 장식 보편적 표현 용 신화도 한 민족이 독점 못해

이번 아시안 게임에서 남북단일팀 코리아가 여자 카누용선(dragon boat) 경기에서 금메달을 땄다. 카누면 카누지 왜 용선(龍船)일까? 길쭉한 카누의 앞뒤를 용두(龍頭)와 용미(龍尾)가 장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생활체육회에서 발간한 <스포츠백과>를 보니 이 경기의 기원을 애국주의자의 표상인 초나라 굴원의 자살에 두고 있다. 투신한 굴원의 시신이 물고기에 의해 훼손되는 것을 막으려던 백성들이 배를 타고 물고기를 유인하는 음식을 던지고, 노로 물을 두드린 데서 용선 축제가 시작되었고, 그것이 스포츠로 발전했다고 한다.

정말 그럴까? 사전은 중국 쪽 자료를 베낀 것이다. 고증불가능한 굴원기원설은 전설을 바탕으로 제작된 이야기, 만들어진 전통이다. 배를 용머리로 장식하는 것은 용이 수신(水神)이기 때문이고, 용두는 수신의 가호를 받으려는 뱃사람들의 보편적 마음의 표현일 뿐이다. 아시안 게임을 한 나라가 독점할 수 없듯이 용의 신화와 상징은 한 민족, 한 개인이 독점할 수 없다.

※이 글을 쓰는 과정에서 정재서·김선자·우실하·홍윤희·이유진 등의 논문을 참조했음을 밝힌다.

『▶필자 조현설

한국 고전문학·구비문학을 전공했다. 서울대 교수(국문학)로 한국 신화를 포함한 동아시아 신화와 서사문학을 탐구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동아시아 건국신화의 역사와 논리>(2004), <우리 신화의 수수께끼>(2006), <마고할미신화 연구>(2013) 등이 있다. 논문으로 ‘해골, 삶과 죽음의 매개자’(2013), ‘천재지변, 그 정치적 욕망과 노모스’(2016) 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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