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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 타고 가다 우연히 발견한 대방태수의 무덤, 식민사관의 초석을 놓다

환단스토리 | 2016.08.07 22:43 | 조회 2624
열차 타고 가다 우연히 발견한 대방태수의 무덤, 식민사관의 초석을 놓다
한겨레 2016-6-28 
1911년 야쓰이가 황해도 봉산군에서 발견한 대방군 태수 장무이의 무덤. 조사 당시의 모습으로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사진이다.
1911년 야쓰이가 황해도 봉산군에서 발견한 대방군 태수 장무이의 무덤. 조사 당시의 모습으로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사진이다.
‘야쓰이 비망록’으로 본 조선 발굴비사
⑩ 황해도 봉산 대형무덤 발굴

야쓰이가 발견한 봉산 장무이 무덤과 평양 토성리 토성은 한반도 낙랑군설의 유력한 근거가 됐다
야쓰이가 장무이 무덤 조사 당시 기록한 무덤 내부와 주변 지형의 간이 실측도면들. 정인성 교수가 입수해 처음 공개한 자료들이다.
야쓰이가 장무이 무덤 조사 당시 기록한 무덤 내부와 주변 지형의 간이 실측도면들. 정인성 교수가 입수해 처음 공개한 자료들이다.
“어, 저게 뭘까요?” “저기 밭고랑 너머에 비쭉 솟아 있는 거 말이지? 아무래도 고대 무덤 같은데….”

 1911년 10월14일 평양에서 경의선 열차를 타고 황해도 유적조사에 나섰던 일본 학자 세키노 다다시와 야쓰이 세이이치는 차창 밖으로 비치는 황해도 봉산벌 들녘에서 색다른 모양새의 둔덕 하나를 우연히 보게 된다. 

 봉산역에 내린 그들은 곧장 눈여겨본 둔덕이 있는 봉산군 문정면 태봉리(오늘날 북한 지명은 구봉리)의 시골 밭으로 달려갔다. 한변이 30여m 정도에 높이가 5m를 넘는, 큰 사각형 모양의 평면을 지닌 대형 무덤이 밭이랑 사이에 자리잡고 있었다. 여러 명의 인골을 모아 장사를 지냈다는 내력이 전해내려와 주민들 사이에서는 ‘도총’(都塚)이라고 불렸던 무덤이었다. 세키노 조사단 일행에게는 이 무덤이 아무리 봐도 예사롭지 않았다. 주위를 살피던 이들은 무덤 부근에서 한대의 예서체로 한자 명문이 새겨진 벽돌을 줍게 된다. 세키노의 머릿속에 퍼뜩 짚이는 게 있었다. 얼마 전 경성의 이왕가 박물관에서 봉산에서 발견됐다는 중국 남북조시대 서진 연호가 있는 벽돌전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의 무덤이 중국에서 파견된 통치자들의 것일지도 모른다…’ 

 오늘날 낙랑군이 한반도 서북지방에 존재했다는 유력한 핵심 근거로 제시되는 대방군 태수 장무이의 무덤은 이렇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세키노·야쓰이 조사단이 1911년 9~11월 벌인 세번째 조선 고적 조사에서 얻은 가장 큰 성과라 할 수 있는 발견이었다. 

 이 장무이 벽돌무덤은 애초 발견 당시엔 무덤 주인을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10월20일 세키노는 경성으로 떠난 상태에서 야쓰이가 조선인 촉탁과 함께 일주일 일정으로 굴착 조사를 벌여 널길(연도)과 그 좌우로 딸린 방, 주검이 놓인 널방을 확인하고 대방군의 태수 장무이의 이름이 적힌 벽돌을 찾아내게 된다. 여러 이설이 있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대방군은 3세기께 요동의 실력자였던 공손강이 낙랑군의 남쪽 지역에 별도로 설치해 313년 고구려에 의해 낙랑군과 함께 소멸할 때까지 100여년을 유지한 군현행정구역이라는 게 통설이다. 무덤 벽돌에서 대방군 태수의 이름이 나왔으니, 자연스럽게 무덤의 북쪽인 대동강 일대가 낙랑군이 될 수밖에 없다는 추론이 이때 나왔다. 

야쓰이는 당시 “이 무덤의 앞쪽 전실이라고 판단되는 곳만 굴착조사해 대방태수라 적힌 벽돌을 처음 발견했다”고 기록했다. 장무이 무덤은 1912년 세키노, 야쓰이에 의해 재발굴된다. ‘중원 유주(베이징을 포함한 허베이성 북부 지역에 있었던 옛 중국의 행정구역) 어양군’으로 판독되는 장무이의 출신지와 ‘무신(戊申:동진시대인 348년설이 가장 유력하다)’이란 무덤 축조연대, 애도사 등이 적힌 6~7종류의 벽돌이 쏟아졌고, 무덤 얼개도 낙랑계와 고구려계를 잇는 과도기적 양식이란 것이 드러났다. 주변에서는 무덤과 비슷한 벽돌들이 다수 나온 중국계 당 토성도 추가로 발견돼 이곳이 대방군의 중심지일 가능성이 제기됐다. 이런 성과는 이후 낙랑, 대방군의 위치를 둘러싼 당시 일본 학계의 논의에서 한반도 서북지방설이 설득력을 얻는 결정적 근거로 작용했다. 고구려계 석실무덤과 그보다 시기가 앞서는 중국 계통(낙랑군·대방군)의 벽돌무덤(전축분)을 구분해 인지하는 전환점이 됐기 때문이다. 1910년 세키노와 도리이 류조 사이에 벌어진 평양 석암동 고분의 낙랑계, 고구려계 논쟁에 뒤이어 소장학자 이마니시 류가 석암동 을총에서 나온 칠기의 ‘王’(왕)자 명문을 토대로 낙랑군의 평양 설치설을 어렴풋이 제시했고, 장무이의 벽돌무덤이 사실상 이를 결정적으로 뒷받침한 흐름이 이어졌던 것이다. 

야쓰이가 만든 장무이 무덤 출토 벽돌전들의 탁본. 정인성 교수가 입수해 처음 공개하는 자료들이다.
야쓰이가 만든 장무이 무덤 출토 벽돌전들의 탁본. 정인성 교수가 입수해 처음 공개하는 자료들이다.
특히 세키노와 야쓰이가 1911~12년 장무이 무덤을 집중조사한 이면에는 이들이 1909년 굴착한 평양 부근 석암동 벽돌고분의 실체를 낙랑군의 것이라고 처음 주장한 도리이 류조의 반론을 검증해보겠다는 생각도 나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1911년과 12년 고적조사를 벌이면서 틈틈이 장무이 무덤을 계속 발굴하면서 기록한 당시 야쓰이의 비망록 내용에서 그들의 내심을 짐작해볼 수 있다.  

 “이 무덤 벽돌에 대방태수라는 글자가 있으므로 대방군 관련의 것, 즉 한족(漢族)의 것이 명백하다…이 때의 조사에서 모두 6가지의 문자전을 획득하였는데 그 중에서 ‘사군대방태수장무이전(使君帶方太守張撫夷塼)‘이란 명문벽돌은 대단히 중요하다.”

 “장무이묘와 당토성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한족의 것이다. 봉산군 남쪽 강에서 채집되어 당시 이왕가 박물관에 보관되었다는 ‘태강원년삼월팔일왕씨조(太康元年三月八日王氏條:태강은 3세기 중국 서진의 황제였던 무제 사마염의 세 번째 연호로 280~289년 쓰였다)’란 명문이 나온 벽돌을 참고하건데, 이들은 대방군 시기의 군치지(郡治址:행정기관이 있는 곳)와 태수의 무덤이라 판단된다.”

 낙랑군 유적이란 심증을 점차 굳혀가던 야쓰이와 동료학자 이마니시 류는 다음해인 1913년에도 잇따라 주목할 만한 발견을 하게 된다. 평양의 고분을 조사중이던 야쓰이에게 이마니시가 대동강 남쪽 토성리라는 곳의 옛 성터를 답사하자고 제안했는데, 이들이 답사한 결과 뜻밖에도 다수의 한나라식 벽돌전과 중원풍으로 정비된 도로, 건물터 등을 확인한 것이다. 1914년엔 이마니시가 낙랑군의 일부인 점제현의 통치자가 제사를 드린 내용을 새긴 점제현 신사비를 평남 용강군에서 발견한다(이 비석을 두고 재야학계에서는 지금도 일제가 중국에서 가져다놓았다는 조작설을 제기하고 있다). 일본 학계는 이런 성과들을 토대로 평양 남쪽 토성리 일대를 낙랑군의 중심 치소로 판단하고 한사군의 초기 한반도 설치설을 정설로 굳히기에 이른다.

 세키노와 야쓰이는 1916년부터 조선총독부 주도로 본격화된 조선 고적 조사사업에서 평안도·황해도 일대의 낙랑계 유적 조사에 총력을 기울이게 된다. 한반도 고대사가 조선 북방지역에 중원 왕조가 낙랑, 대방군을 설치하면서 비롯됐다는 일제 식민사관의 얼개는 이런 일련의 예비조사들을 통해 기본틀을 짜며 완성되는 과정을 밟게 되었다.

정인성 영남대 교수·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야쓰이 비망록이란?

정인성 교수가 지난해 일본에서 입수한 야쓰이의 조선 고적 조사 관련 문서 1만여점의 컬렉션이다. 1909년 첫 고적 조사 당시 답사일지와 촬영 목록, 각종 메모와 경비 영수증까지 포함돼 일제강점 초기 고적 조사의 세부를 살필 수 있는 일급 사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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