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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숙 여신연구가가 본 첨성대 “첨성대는 여신의 신전”

환단스토리 | 2016.08.07 22:41 | 조회 3178

김명숙 여신연구가가 본 첨성대 “첨성대는 여신의 신전”
여성신문 2016-06-22



난달 18일 이화여대에서 ‘페미니즘 인식론, 방법론, 그리고 방법’을 주제로 열린 한국여성학회 춘계학술대회에서 여신연구자 김명숙씨가 논문 ‘첨성대, 여신의 신전’을 발표해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김씨는 언론인 출신으로 서울대 여성학 협동과정에서 여신학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전 세계 여성학계에서 여신 연구가 비중 있게 이뤄지고 있지만 국내 여신 연구는 활성화되지 않고 있다. 이번 호 특별기고로 김씨의 글을 싣는다. 한국여성학회에서 발표된 논문 전문도 함께 싣는다.

첨성대의 형태와 관련해 현재 학계에서 가장 공감을 얻고 있는 견해는 우물설이다. 첨성대는 우물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첨성대의 정체를 밝히는 데 있어 ‘여성’은 필수적인 키워드가 될 수 밖에 없다. 한반도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 대에 지어졌고, 우물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성의 공간이자 여성 생식력(성기)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첨성대는 우물, 우물의 여신 서술성모

신라에서의 우물 역시 그러했다. 신라 건국의 두 주역, 혁거세와 알영은 우물가에서 태어났다. 나정과 알영정이다. 그리고 이 우물들은 여신과 관련돼 있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나정은 계정(雞井)이란 이칭을 가지고 있었는데, 신라에서 닭은 혁거세와 알영을 낳았다고 전하는 서술성모(선도성모)의 대표적인 상징이기 때문이다. 건국신화에 혁거세의 어머니로 동원된 것으로 보아 성모는 신화가 형성될 당시 신라의 가장 강력한 여신이었을 것이다.

서술성모의 뿌리는 수천년전 선사시대에 닿아있다. 경주 금장대 암각화, 울주 천전리 각석, 포항 칠포리 암각화 등에는 여성 성기를 그대로 묘사하거나 상징하는 문양들-(역)삼각형, 마름모-이 많다. 모두 여신의 상징들이다. 서술성모가 좌정했던 선도산(서술산)에는 수많은 구멍들이 밀집된 유명한 바위가 있다. 이 구멍들을 성혈(性穴, cup-mark), 즉 성적인 구멍이라고 하는데 역시 여성의 성기를 의미한다. 이러한 오래된 여신상징들은 선사시대 신라지역에 여신이 중심신으로 숭배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그 여신은 대자연의 생산력, 생장력, 생명력을 상징하는 위대한 여신이었다.

첨성대의 정체를 푸는 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는 성혈은 우물과 같은 상징이다. 성혈을 민간에서 알구멍이라고 하는데 우물 역시 용알이 있던 구멍이었다. 수로왕 탄생설화에서 사람들은 왕을 맞기 위해 산봉우리에서 구멍을 파는데 이는 곧 성혈이다. 신라에서는 우물, 가야에서는 성혈이 왕을 탄생시키는 같은 상징으로 등장한다.

계정의 여신이었던 서술성모는 계룡, 계림, 백마로 불리던 용신이자 산신, 천신이었고 직조와 공예의 신이자 건국 후 국가의 최고제사를 받았던 호국신이었다. 또 정치질서와 왕권의 수여자였다. 김알지 신화는 알지 세력이 자신들도 성모의 신성한 후손임을 천명하려는 것이었고, 삼국통일을 통해 제2 건국왕이 된 문무왕 역시 문희·보희 자매의 매몽설화를 통해 성모의 후손이고자 했다. 신라 초기의 국호 계림국은 서술성모가 신라의 시조로서 정체성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포항 칠포리 여성성기 암각화(맨왼쪽), 포항 칠포리 검파형 암각화(가운데), 할매부처.

▲ 천전리각석(왼쪽), 선도산 성혈바위.

선덕여왕의 성스런 조상, 서술성모

선덕여왕의 즉위는 여신문화가 쇠퇴하면서 가부장제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는 종교·정치·사회적 변동의 과정에서 징후적으로 발생했다. 우호적이지 않은 대내외적 환경에서 여왕을 옹립한 세력은 여왕에게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존호를 올렸다.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성조황고란 “성스런 조상을 둔 황제여신”이란 뜻으로 해석된다. 여왕 이전 시기 신라에서는 시조묘 제사를 주제하는 왕실여사제 제도를 통해 ‘성스런 여성’(divine feminine)의 전통이 이어졌다. 여왕은 그 전통을 이으면서도 그것을 뛰어넘어 스스로 여신임을 홍포했다. 그리고 신성한 여성계보의 근원이자 나라의 시조신인 서술성모의 적통을 잇는 후손은 여성인 자신임을 선포하면서 여성왕권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그 결과 즉위초기인 633년 궁궐 서쪽에 성조황고의 상징물로서 첨성대가 건립됐다. 황제여신(황고)이 시조여신 서술성모(성조)의 신전을 돌을 다듬어 우물형태로 쌓아올린 것이다. 당시 불교문화의 영향으로 불탑형식도 취했다. 서술성모의 여러 상징들 중에서도 우물을 택한 것은 성모가 혁거세와 알영을 탄생시킨 최초의 성조임을 천명하기에 가장 적합할 뿐 아니라 우물이 왕권의 상징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또 농사의 풍요라는 가장 중요한 국가적 과제의 측면에서도 우물은 가장 적합한 선택이었다. 용(서술성모)이 거주하는 우물은 가뭄에 비를 부르는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 출산토우.

▲ 성행위 토우.

우물과 첨성의 상관관계

그런데 신라인의 신성 인식에서 우물과 첨성은 같은 의미연관체계 내에 존재했다. 이는 바위에 별자리 모양으로 파여있는 성혈들이 말해준다. 별자리 성혈 바위들은 여성 성기 암각화처럼 경상도 지역에서 많이 발견됐다. 당시 사람들은 별자리의 변동을 보며 농사짓는 시기도 정하고, 날씨나 농사의 흉풍을 점쳤다. 별자리를 성혈로 표시하는 행위는 풍작을 기원하는 의례이기도 했다. 그런데 성혈은 우물과 같은 상징이니 우물인 첨성대에서 별을 관측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즉 첨성대는 서술성모의 신전이자 천문관측시설이기도 했던 것이다.

첨성대는 또 서술성모의 몸을 표상하는 여신상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느껴왔듯 첨성대의 곡선은 여체를 닮아있다. 첫 눈에 첨성대를 연상시키는 토우 여신상 하나가 있다. 긴 통치마를 입고 두 손을 앞에 모은 채 서 있는 이 여신상의 가운데 부분에는 커다란 구멍이 하나 뚫려 있다. 첨성대의 창구가 여성의 성기(성혈/우물)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 창구는 첨성대 근처 영묘사에 존재했던 옥문지와 그대로 조응한다. 그리고 삼국유사의 선덕여왕 설화에서 여왕이 직접 언급한 옥문, 그리고 여근의 힘과 연결된다.

그런데 신라에는 토우 여신상을 앞서는 오래된 여신상 하나가 더 있다. 검파형 암각화인데 흥미롭게도 첨성대와 유사한 형태를 갖고 있다. 암각화 학계에서는 검파형 암각화가 청동기시대 지모신을 상징하는 여신상이라고 본다.

▲ 첨성대 입구.

▲ 첨성대 내부에서 올려다 본 정상부.

첨성대 입구 안쪽은 동굴

지금까지 첨성대의 정체와 관련해 사람들을 괴롭힌 문제 중의 하나는 내부의 상태였다. 천문관측의 편의성 면에서 보면 입구의 위치 못지 않게 내부의 거칠고 불편한 환경이 문제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그렇게 만든 것일까?

기술이 조야해서가 아니라 동굴을 형상화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첨성대 내부는 가장 오래된 여신의 성소이자 신비의 공간인 동굴인 것이다. 전세계적으로 동굴은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여신의 성소였다. 우리의 경우 대표적으로 유화를 모셨던 고구려의 국동대혈(國東大穴), 수혈을 떠올릴 수 있다. 첨성대 동굴은 우물 속의 우물, 자궁 속의 자궁으로서 신성함이 증폭된 가장 신성한 공간이다.

그런데 첨성대는 홀로 불쑥 튀어나오지 않았다. 첨성대 건립 시기 신라에는 무불회통의 시대상황을 배경으로 토착신앙을 담고 있는 사찰들과 불교의 옷을 슬쩍 걸친 여신상들이 등장했다. 영묘사와 분황사, 남산의 할매부처가 그렇다. 첨성대와 같은 시기에 조성된 할매부처는 불상 형식을 취한 토착적 여신상으로서 첨성대와 많은 여신상징들을 공유하고 있다.

첨성대의 석굴에서는 하늘 뿐 아니라 용궁과의 소통도 이뤄졌을 것이다. 첨성대 동쪽 기단이 토착신앙의 성소인 용궁을 향하고 있고 우물은 용궁을 오가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서술성모의 현신인 첨성대는 하늘과 땅(산)과 바다가 서로 만나며 이어지는 우주적 신성체, 위대한 우주적 어머니(Great Cosmic Mother)를 표상하고 있다.

천관녀, 첨성대의 여사제

첨성대의 여사제는 천관녀였을 것이다. 삼국사기 기록을 참고하면 천관은 별의 신이다. 그녀의 이름이 붙은 천관사란 절은 삼국유사 원성왕 설화에도 등장한다. 그가 왕위에 오를 것을 알리는 꿈에 등장하는 우물이 천관사의 우물이다. 천관녀가 우물인 첨성대에 올라 왕과 관련된 하늘의 뜻을 읽었기 때문에 천관사 우물이 왕권과 관련되었을 것이다. 아니, 천관사 우물 자체를 첨성대의 은유로 읽을 수도 있다<아래는 김명숙씨의 ‘2016 한국여성학회’ 춘계학술대회 발표문 전문>.

▲ 토우여신상

▲ 임실군 지사면 영천마을 선돌.

첨성대, 여신의 신전 1)

Ⅰ. 첨성대와 여신상징

경주 첨성대는 그 실체를 밝히기 위해 지금까지 네 차례의 대토론회가 열렸다. 역사학과 과학사 뿐 아니라 천문학, 수학, 물리학, 건축학, 조경학 등의 분야에서 다채로운 해석들이 나왔으나 아직도 그 정체는 분명하게 규명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첨성대는 여러 측면에서 젠더 관점의 접근을 요구한다. 신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 시기에 지어졌고, 현재도 경주 한 가운데 우뚝 서 있는 현실이 무색하게 역사기록에서 소외되었다. 역사기록에서의 소외는 여성사가 보이는 전형적인 특징이다. 현존하는 첨성대에 대한 첫 기록은 건립 600여년 후 고려말에 편찬된 『삼국유사』에 실려있다. 그것도 “이 선덕왕 대에 돌을 다듬어서 첨성대를 쌓았다(是王代 鍊石築瞻星臺)”는 단 아홉글자 뿐이다. 『삼국사기』에는 아예 언급이 없다. 젠더 관점이 필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첨성대의 형태에서 느껴지는 여성성이다.

이 글은 젠더 관점을 취해 선덕여왕 당시 신라의 종교·정치·사회적 상황은 물론 가야와 고구려, 중국 등의 경우도 공시적으로 고려하고, 한반도 여신전통을 통시적으로 고찰해 종횡으로 짠 시대상의 맥락에서 첨성대의 상징과 형태, 기능 등을 탐구한다. 그리고 첨성대가 선덕여왕에게 올려진 존호 ‘성조황고’의 표상으로서 신라의 대여신 서술성모의 신상이자 신전이었으며 동시에 천문관측대이기도 했음을 주장할 것이다. 쇠퇴의 운명을 마주하고 있긴 했으나 선덕여왕 당시 신라인들에게 가장 친숙한 신앙은 토착종교였는데 이의 중심에는 여신과 여사제가 있었다. 여신의 뿌리는 수천년전 선사시대까지 닿아 있다.

신라의 여신신앙을 분석하기 위한 방법론으로는 고고학자 김부타스(Gimbutas)의 여신문화론과 여신상징 해석을 채택한다. 그녀의 이론과 상징해석이 신라의 여신전통과 첨성대의 정체를 포착하고 분석하는 데 매우 유용하기 때문이다.

고고학자이자 종교사학자인 김부타스는 선사시대의 여신문화 혹은 여신문명이라는 새로운 세계와 개념을 최초로 정립해 소개한 혁명적 학자다. 그녀는 무수한 여신 유물들과 유적지들이 발굴된 신석기시대 남동부 유럽지역을 구유럽(Old Europe, 6500-3500 BCE)이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구유럽인들이 자연을 여신으로 여겨 숭배했고 어머니를 따르는 평화롭고 평등한 공동체적 삶을 살았으며, 일종의 그림문자도 창조해 사용했다고 보았다(Gimbutas, 1989: ⅹⅴ). 유물들과 유적에 새겨지거나 그려진 기하학적 문양들과 유물의 형상들이 특정한 의미를 담고 있는 당시의 상징적 언어라고 해석한 것이다.2) 그런데 그녀가 제시한 여신상징들 중 다수가 경북지역의 암각화와 신라의 유물ㆍ유적에서 발견된다. 선사시대 여신신앙은 전지구적으로 나타나고 그 양상이 별로 다르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긴 하나, 그렇다 해도 그 유사성은 때로 놀랄 만하다.

필자는 김부타스의 여신상징 해석을 첨성대에 적용시켜 첨성대의 성격, 형태와 기능에 대해 기존의 해석들과는 매우 다른 내용을 도출했다. 그동안 첨성대를 연구한 학자들을 골치 아프게 만든, 왜 출입구가 중간에 있고 내부는 거칠고 불편하며 별을 관측하는 시설이 우물모양인지에 대한 답도 찾았다. 필자의 견해가 설득력을 얻는다면 이 논문은 김부타스 이론의 타당성을 입증하는 동아시아의 한 사례로서의 가치도 갖게 될 것이다. 첨성대의 정체를 구명하기 위한 자료로는 관련 역사기록은 물론 유물과 유적, 민속과 민담, 구비전승 설화 등을 포괄적으로 사용한다.

2. 우물인 첨성대, 우물의 여신 서술성모

첨성대의 형태에 대해 현재 학계에서 가장 공감을 얻고 있는 견해는 우물설이다.3) 그렇다면 신라에서 우물은 무엇을 의미하는 공간 혹은 상징이었을까?

이를 짐작하기는 결코 어렵지 않다. 신라 건국의 두 주역인 박혁거세와 알영 탄생설화에 우물이 등장하기 때문이다.4) 혁거세는 나정에서, 알영은 알영정에서 태어났다. 우물이 탄생의 장소인 것이다. 구유럽에서도 우물은 생명의 근원이자 응축된 생명력을 상징했다.5) 그리고 우물의 신은 거의 예외없이 여신이었다. 켈트족의 여신인 다이아나, 아일랜드의 토착여신인 브리지트는 대표적인 우물의 여신이었고, 임신하고 싶은 여성들의 신앙대상이었다(Gimbutas, 1989, 110).

신라에도 우물의 여신이 있었을까? 우선 알영을 탄생시키고 이름까지 준 알영정의 알영을 상정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혁거세가 태어난 나정도 여신의 우물이었을까?

그렇다. 『삼국유사』는 “왕이 계정(雞井)에서 태어났”다고 해 나정이 계정이란 이칭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그런데 계정, 곧 닭우물은 혁거세와 알영을 낳았다고 『삼국유사』가 스치듯 기록해 놓은 서술성모와 직결된다. 그녀의 대표적 상징이 닭이기 때문이다. 『삼국유사』는 사람들이 그녀를 일컬어 계룡, 계림, 백마라 칭한다고 했다.6) 서술성모는 통일이전 신라에서 서악(西岳)으로 불리던 서술산의 산신인데 당시 닭은 서쪽을 의미했다.7)

서술성모는 산신일 뿐 아니라 나정(계정) 우물의 여신이었다. 알영정도 그녀의 우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알영정에 출현해 알영을 낳은 계룡이 그녀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알영은 서술성모의 이칭일 수도 있다. 신라 건국신화에 시조를 낳은 신성한 어머니로 동원된 것으로 보아 서술성모는 신화가 만들어질 무렵 신라의 가장 강력한 여신이었을 것이다.

3. 선사시대 신라 여신신앙과 서술성모

고대 삼국 중 가장 여신전통이 강한 신라의 여신숭배는 아득한 선사시대로까지 올라간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는 샤먼으로 보이는 인물형상이 있는데 아랫배 부분에 작은 원이 새겨져 있어 여성으로 판단된다.8) 샤먼이 여성이라면 그녀의 신도 여신일 가능성이 높다. 같은 지역의 천전리 각석 암각화에서는 여러 여신상징들을 볼 수 있다. 천전리 각석은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찾던 신성한 장소였다. 각석 상부에는 마름모, 동심원, 소용돌이, 흐르는 물 형상 등의 기하학적 문양들이 새겨져 있다. 여성 외음부 형상도 여럿 보인다(강삼혜, 2011). 뱀이나 용을 그린 듯한 것도 있다. 모두 여신상징들이다.

특히 마름모가 다양한 형태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데, 마름모는 여성 성기에서 유래한 다산의 상징이다. 치골부위 여성 성기를 양식화한 (역)삼각형과 긴밀한 연관성을 갖는다. 가운데 점이 있는 경우 임신한 여신을 가리킨다. 외음부 형상은 생명을 출산하는 여신의 상징으로서 구석기 시대부터 암각됐다. 가장 오래된, 파르스 프로 토토(Pars Pro Toto, 전체를 대변하는 부분)로서의 여신상징이다. 그리고 동심원은 가운데 응축된 여신의 신성한 힘이 발산되는 것을 의미한다. 요약하자면 천전리 각석 상부의 문양들은 여신숭배와 여신의 생식력, 풍요에 대한 기원을 담고 있다.9)

서술성모가 좌정했던 경주 선도산(서술산이라고도 한다) 지역에도 구멍들이 파여진 바위와 고인돌 등 선사시대 유적이 다수 분포한다. 특히 선도산 능선 경사면에는 오랜 세월에 걸쳐 수많은 구멍들이 파여진 유명한 바위가 있다(김선주, 2010; 20). 구멍들이 파여있는 바위는 전국에 산재하는데 이를 성혈(性穴)바위, 즉 성적인 구멍을 가진 바위라고 부른다. 구체적으로 여성의 성기를 의미한다. 성혈파기는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신앙행위로 해석되며 주로 고인돌의 덮개돌이나 자연암반, 선돌 등이 대상이다.

민간에서는 성혈을 알구멍, 성혈바위를 알바위, 알터 등으로 불러왔다(송화섭, 2013: 87). 여성의 성기, 자궁이 알과 연관됐음을 알 수 있다. 우리말 공알과 불알도 알이 생식과 긴밀한 의미연관이 있었음을 알게 한다(김무조, 1972: 182). 서구에서도 알은 신석기 시대부터 사용된 상징으로서 여신의 자궁을 의미했다. 특히 생명의 순환 속에서 죽음 이후 이어지는 재탄생과 관련된다. 혁거세도 나정 옆에 출현한 알에서 태어났다. 여기서 알은 우물과 관련되면서 우물과 성혈을 같은 상징으로 보게 하는데,10) 용알뜨기라는 우리 민속도 그러하다. 용알뜨기란 정월대보름날이나 첫 용날(上辰日) 새벽 첫닭이 울 때, 부인들이 우물이나 샘에서 물을 긷는 행위를 말한다.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풍속이다. 그 물긷기를 용의 알을 뜬다고 한 것이니, 알이 있는 우물과 알구멍인 성혈은 결국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김부타스는 성혈(cup-mark)이 미니어쳐 우물이라고 해석했다. 우물과 성혈은 같은 상징으로서 응축된 여신의 생명력을 의미했다는 것이다. 우물과 성혈이 교환가능한 여신의 상징이라면 우물의 여신이기도 한 서술성모의 산에 성혈바위나 성혈고인돌들이 있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선도산 일대에는 여신신앙과 관련된 중요한 유적 하나가 또 있다. 금장대 암각화인데 우선 5점의 여성 성기 형상이 주목된다. 이 형상들은 근처에 있는 포항 칠포리 곤륜산 암각화 유적들에서 훨씬 많이 발견된다. 곤륜산 계곡에는 총 23점의 여성 성기들이 집중적으로 새겨진 바위도 있다. 사실적 형상도 있고 역삼각형으로 상징화된 것도 있다. 남성 성기임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금장대, 칠포리를 비롯한 영일만 일대의 암각화들에서 자주 보이는 또 다른 문양은 이른바 검파형(劍把形), 즉 칼자루형이다. 석검의 칼자루를 닮은 형태 안에 성혈들이 파여있다. 암각화 연구자들은 이를 지모신 신앙이나 여성 성기와 관련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리고 여자의 형상을 기하학적 상징으로 표현한 여신상으로 본다(송화섭, 2015). 흥미로운 것은 유독 경상도 지역에 여성 성기나 검파형같은 여신상징 암각화들이 많다는 것이다.

경주와 포항, 울산 등의 암각화 유적지들은 선사시대 그 지역의 강력했던 여신신앙을 말없이 증언해 주고 있다. 여신신앙은 자연신앙이기 때문에 여성의 몸 뿐 아니라 자연 자체를 성스럽게 여긴다. 성소를 따로 짓기보다 자연물 자체를 성소로 여기는데 신라 역시 그러했다. 선사시대부터 이어져 온 신라의 토착신앙은 산과 숲과 강, 동굴과 연못, 나무와 돌과 샘 등을 숭배하며 성스런 공간이나 대상으로 여겼다. 『삼국사기』는 자연의 성소들에서 치러진 제의들을 간략히나마 소개하고 있다. 그곳의 신들은 일부 남신도 있었겠지만 대개 여신이었다.

특히 동굴은 대표적인 여신의 성소였다. 형태적으로 여성의 음문과 자궁을 닮은 동굴은 태고적부터 인간의 거주지였고 늦어도 구석기 시대부터 성스런 공간으로 인식됐다.11) 동굴은 재생력을 가진 여신의 자궁을 상징한다. 한반도의 동굴신앙은 고구려의 수신(隧神)에서 가장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다. 동굴신이라는 뜻의 수신은 고구려의 국중대회(國中大會)였던 동맹과 관련해 역사기록에 남아있다. 그런데 수신이 주몽의 어머니 유화거나 그녀가 뿌리를 두고 있는 태고의 토착여신이라는 것은 학계의 통설이다. 웅녀도 동굴의 여신이다.

신라에서도 동굴의 신은 원래 여신이었다.12) 『삼국유사』에는 굴의 신이 된지 2천년이나 됐다는 장천굴의 신이 등장한다. 또 원광법사에게 나이가 3천 세에 가깝고 신술(神術)도 가장 뛰어나다고 과시한 삼기산신도 있다. 이 신 역시 거대한 체구에다 산신이고, 새까만 늙은 여우의 몸으로 죽는 것으로 보아 여신이다.13) 이 여신들은 암각화로 남아있는 신라 여신신앙의 유구한 역사를 문자로 확인해 준다.

서술성모도 장천굴의 신이나 삼기산신처럼 수천년의 역사를 가진 신이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어느 한 영역이나 기능에 국한되지 않고 다채로운 면모를 두루 갖춘 신이었다. 산신이자 우물신인 그녀는 숲의 신이자 용신(수신), 닭의 신에 말의 신이기도 했다. 백마는 혁거세 탄생설화에 등장하는데, 사람들이 알을 발견한 후 하늘로 올라가 버린다. 이로 미루어 서술성모는 천신의 성격도 가졌음을 상정해 볼 수 있다.14) 천신으로서의 성모는 그녀가 하늘나라 선녀에게 비단을 짜게 했다는 『삼국유사』 기록에서 다시 한번 드러난다. 성모는 비단을 짜게 했을 뿐 아니라, 붉은 빛으로 물들여 관복을 지어 남편에게 주었다. 직조의 신이자 기술·공예의 신으로서의 면모를 읽을 수 있다.

관복을 지어 남편에게 주었다는 것은 원초적 정치질서의 수립과 성모와의 관계를 시사한다. 성모는 나라를 지키는 호국신으로서 건국 이후 국가의 최고제사를 받았던 국가적 신이기도 했다. 신라의 초기 국호 계림국은 그녀가 신라를 상징하는 아이콘이었음을 말해준다.15) 닭의 신이었던 성모의 명성은 인도에까지 전해졌다. 『삼국유사』는 인도인들이 “신라에서는 닭의 신을 받들어 존경하기 때문에 그 깃털을 꽃아서 장식한다”는 말을 했다고 전한다. 요약하자면, 서술성모는 지상과 하늘을 아우르는 자연의 대여신이자 신라를 상징하는 국가적 수호신이었다.

4. ‘신성한 여성’ 전통과 여왕의 탄생

신라의 강력했던 여신신앙은 박혁거세로 대표되는 남성권력이 소규모 연맹왕국 체제를 출범시킨 후에도 지속됐다. 무엇보다 왕실여사제 제도를 통해 ‘신성한 여성’(divine feminine)의 전통을 이어나갔다. 신라사를 특징짓는 이 전통과 관련해 우선 첫 왕비인 알영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알영은 단지 혁거세의 배필이 아니라 자신의 신화를 가진 스스로 신성한 여성이었다. 신성한 우물가에서 계룡의 옆구리에서 태어났고 닭의 부리같은 입술을 달고 있었다.16) 동물과 인간이 합쳐진 형상이라는 점에서 혁거세보다 더 오래된 신화적 존재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알영이 서술성모의 상징인 계룡의 옆구리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마야부인의 옆구리에서 출생한 석가모니의 탄생담이 덧입혀진 것으로 해석되는데, 그렇다면 석가모니의 신성함이 혁거세가 아니라 알영에게 투사돼 있는 셈이다. 즉 신라인들은 새로 유입된 신성한 모자관계(마야부인-석가모니)를 원래 그들의 인식틀인 신성한 모녀관계(서술성모-알영)로 변형시켰던 것이다.17) 이러한 알영의 비중 때문에 김부식도 알영을 혁거세와 함께 이성(二聖), 두 성인이라고 칭했다. 당시 제정일치 사회에서 ‘이성’은 ‘이왕’(二王)과 등치될 수 있다. 알영은 김부타스가 말한 여왕-사제(queen-priestess)였던 것같다(Gimbutas, 1989: ⅹⅹ). 알영도 혁거세와 같이 왕이었다면 선덕여왕은 건국시기에 여왕 조상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서술성모-알영의 신성한 모녀관계는 알영-아로의 계보로 이어진다. 아로는 2대 남해왕의 누이로서 알영과 혁거세의 딸이다. 그녀는 시조묘에 대한 제사를 1년에 네 번 주제했던 최고의 여사제였다. 그리고 신라의 왕실여사제 계보는 최소한 19대 눌지왕대까지 이어졌다는 게 학계의 통설이다.

신라사의 수수께끼는 첨성대만이 아니다. 왕비묘에서는 정교하고 화려한 금관이 나오고 왕의 묘에서는 그보다 격이 떨어지는 금동관이 출토된 황남대총도 수수께끼다. 금관을 시조묘 제사때 착용했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이송란, 2002), 그렇다면 왕실여사제의 권위가 왕보다 높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신성한 여성의 전통을 증언해 주는 또 다른 유물은 토우다. 성기가 과장되게 표현된 토우들은 암각화의 여남성기들이 후대에 인물상으로 변형된 것이다. 다리를 벌리고 드러누운 채 출산자세를 취한 한 토우는 음문을 크게 강조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여성의 성기에 대한 당시의 인식이 어떠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성행위를 묘사하고 있는 토우들에서 여성은 남성보다 크게 형상화돼 있다. 여성이 주인공인 것이다.

신라사에서 여왕의 탄생은 이상 살펴본 신성한 여성 전통의 맥락에서 가능했을 것이다.

물론 그 역사적 사건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선덕여왕 즉위 직전에 반란이 있었고 당시 신라에 큰 영항력을 행사하고 있던 당나라는 이미 가부장제가 깊이 뿌리내린 상태였다.

국내의 종교ㆍ문화적 변동도 여왕에게 적대적이었다. 이미 유교가 통치이념으로 자리잡은 데다 왕권강화를 위해 왕실이 적극 받아들인 불교도 남성중심적이었다. 선덕여왕에게 가장 치명타는 여자는 전륜성왕이 될 수 없다는 여인오장설이었을 것이다. 전륜성왕이란 불교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군주로서 진흥왕이 적극 추구했던 왕권의 모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선덕여왕이 권위와 정통성을 주장하려 했다면 가장 힘이 될 정치문화적, 상징적 자원은 무엇이었을까? 당시까지도 현실적 권력 면에서는 불교보다 강했던 토착종교와 그것의 중심이던 신성한 여성의 전통이었을 것이다.

5. 선덕여왕의 성조(聖祖), 서술성모

선덕여왕은 즉위 직후 국인(國人)들로부터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존호를 받았다. 왕에게 따로 이같은 존호가 올려진 것은 신라에서 선덕여왕이 유일하다. 이 존호는 ‘성스런 조상을 둔 여황제’란 뜻으로 해석되고 있다. 그런데 ‘황고’라는 말은 단순한 여황제의 뜻을 넘어 신성을 내포하는 조어로 보인다. ‘姑’는 여신 마고(麻姑), 지리산에 있는 여산신 도고(道姑)의 이름에 들어있다. 『장자』, 『열자』, 『산해경』에서 ‘姑’는 여신을 뜻한다.18) 여왕과 국인들은 최초의 여왕 즉위를 통해 이전의 남성왕들과는 다른 여성적 신성을 선언한 것이다. 왕실여사제 전통을 이으면서도 그것을 뛰어넘어 스스로 여신임을 홍포한 것같다.

그렇다면 황제여신 선덕여왕의 성스런 조상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왜 여왕의 성스런 조상이 강조된 것일까? 여기서 신라가 부계(남계)사회라기보다 모계(여계)도 같이 존중되는 양계사회였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례로 『삼국유사』는 박제상을 김제상이라고 전하는데, 오기가 아니라 신라의 양계적 가계(double descent) 체제 때문으로 보인다. 이차돈도 성이 박씨, 석씨 둘로 해석되고 있고, 원광법사도 박씨, 설씨 두 성이 기록에 남아있다(김철준, 1968: 80-81).

선덕여왕의 성스런 조상을 모계(여계)조상으로 상정해 본다면 그 조상은 왕권과 관련된 신성한 계보의 창시자이므로 혈연적 모계보다 왕실여사제 전통이 이어온 신성한 여성의 계보를 살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여왕의 성스런 조상으로 우선 떠올릴 수 있는 인물은 알영이다. 그러나 알영은 궁극의 성스런 조상이 아니다. 그녀를 낳은 서술성모가 그녀 뒤에 거대한 신성을 드리우고 있기 때문이다.

서술성모는 정말 선덕여왕의 성스런 조상으로 추앙되었던 것일까? 이를 방증해주는 자료로 가야의 역사가 있다. 신라와 가야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 변진(변한과 진한)으로 통칭되었을 정도로 지역도 붙어있고 문화도 흡사했다. 가야에도 서술성모에 비견되는 정견모주라는 대여신이 있었다. 그런데 『동국여지승람』은 최치원이 지은 『석순응전』(釋順應傳)을 인용해 “대가야국 월광태자가 정견모주의 십세손”(大伽倻國月光太子, 乃正見之十世孫)이라고 전한다. 대가야의 마지막 왕인 월광태자의 시조가 정견모주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선덕여왕의 성조로서 서술성모의 위상은 시조묘 제사를 통해서도 유추해 볼 수 있다.

『삼국사기』는 시조묘를 혁거세묘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여러 연구자들은 시조묘에서 혁거세에 대한 제사가 있었다면, 알영도 함께 제사를 받았을 것이라고 본다. 시조묘는 왕들의 즉위의례가 치러진 장소이기도 한데, 이 의례에서 혁거세와 알영의 신성한 결혼이 중요한 테마로 재연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나희라, 2002: 23-24). 신라왕들은 가뭄 등 자연재해나 외적의 침범이 있을 때도 시조묘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이 경우에도 제사의 대상은 알영이나 서술성모가 더 적합했을 것이다. 그녀들이야말로 비를 부를 수 있는 용신이자 나라를 지키는 호국신이었으므로.

그렇다면 시조묘 제사를 여신신앙의 맥락에서 새롭게 조명할 필요가 있다. 시조묘 제사의 주제자가 여성이었다는 사실은 이러한 필요를 결정적으로 증대시킨다. 여사제는 통상적으로 여신의 영매이기 때문이다.19) 최초로 시조묘 제사를 주제했던 아로는 알영의 딸이기도 하므로 알영-아로의 신성한 모녀관계가 시조묘 제사의 중심신 자리에 알영을 위치시켰을 수도 있다. 이 경우 알영은 또 서술성모와 연결되어 성모 또한 제사를 받았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시조묘 제사는, 혁거세도 시조왕으로서 제사대상이긴 했지만, 서술성모-알영-아로로 이어지는 신성한 모계에 기반하게 되고, 성모가 시조신으로서 최고의 지위를 갖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선덕여왕이 기대려 했던 성스런 조상의 실체가 아니었을까?

시조묘에서 서술성모가 혁거세보다 중요한 제사대상으로서 함께 존숭됐을 가능성은 고구려 유화의 경우를 통해서도 그려볼 수 있다. 고구려에서 유화는 부여신(夫餘神), 주몽은 고등신(高登神)이라는 이름으로 따로 신묘에 안치되었다. 그런데 『삼국사기』가 인용한 『북사』는 고등신묘보다 부여신묘를 먼저 언급한다. 내용도 더 자세하다. 또 부여신을 시조의 어머니라고 소개하는 게 아니라 고등신을 부여신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고등신의 신성이 부여신에 의지해 있다. 혁거세 역시 신성을 서술성모에 의지하고 있으니 신라 역시 같은 상황이지 않았을까?

시조묘와 관련된 단편적 사료들도 묘의 성격을 암시하고 있다. 우선 눈길이 가는 것은 시조묘 앞에 서 있었다는 버드나무다. 버드나무는 유화의 상징일 뿐 아니라 유라시아 전역에서 숭배되던 여신의 나무다(최혜영, 2008). 더 주목할 것은 우리 조상들이 버드나무를 우물가에 즐겨 심어왔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시조묘에 우물이 있었을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는데, 그 우물은 나정이었을 것이다. 시조묘가 나정에 설치됐다면 주 제사대상은 나정의 여신 서술성모가 되지 않을 수 없다.20)

6. 왕권의 수여자, 서술성모

서술성모는 단지 선덕여왕의 성조만이 아니었다. 혁거세 이후 역사의 변전 속에서 여러 남성왕들도 그녀를 통해 신성한 왕권을 인증받으려 한 왕권의 궁극적인 수여자였다.

서술성모가 신성한 왕권의 근원이자 보증자라는 사실은 그녀가 건국신화에 왕의 신성한 어머니로 동원된 사실에서 충분히 알 수 있다.21) 그런데 김알지 신화 역시 같은 맥락에 있다. 알지신화에는 성모의 상징인 흰 닭이 등장한다. 결정적으로 『삼국유사』는 알지의 출현이 “혁거세의 옛일과 같았다”고 함으로써 알지세력이 혁거세와 자신들을 동일시하려 했음을 그대로 증언해준다. 우선 알지라는 이름부터가 혁거세에서 비롯됐고, 김알지 신화를 통해 계림과 계림국이란 명칭의 유래도 혁거세 탄생에서 알지의 탄생으로 바뀌게 된다. 김씨 왕실은 알지신화를 통해 자신들이야말로 서술성모를 어머니로 둔 신성한 왕권의 보유자임을 선언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서술성모는 선덕여왕의 김씨 왕가를 창시한 성스런 시조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주목할 이야기는 잘 알려진 문희·보희 자매의 매몽설화다. 이 설화에서 보희가 꿈에 오줌을 눈 곳은 서악(西岳), 즉 서술산이다. 그곳에서 눈 오줌이 경주에 가득찼다는 것은 그녀가 신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다. 마고할미 설화류에서 보이듯 홍수같은 오줌은 우리 여신들의 거대한 생식력을 나타내는 속성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보희는 꿈을 통해 서술성모 혹은 그녀의 여사제가 된 것이다. 그리고 꿈을 산 문희는 김춘추와 결혼해 왕비가 됨으로써 왕실여사제 전통을 잇는다. 꿈이 실현된 것이다. 이 설화는 왕비 등이 담당했던 왕실여사제들이 대리하며 모셨던 신이 서술성모임을 알려주면서 성모가 시조묘 제사에서 모셔졌을 가능성을 한층 강화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정작 본론은 그 후의 사건에 있다. 즉 문희와 김춘추의 사이에서 문무왕이 탄생한다는 사실이다. 문무왕이 누구인가? 삼국을 통일해 신라의 새 역사를 연 장본인이다. 두 번째 건국영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특별한 영웅이 서술성모 혹은 성모의 대리자인 문희를 통해 출생한 것이다. 결국 문희 자매의 매몽설화는 문무왕의 성스런 어머니가 서술성모임을 알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통일된 신라도 위대한 왕의 신성한 왕권을 선포해 줄 신화적 어머니로서 서술성모를 여전히 필요로 했던 것이다.22)

그런데 이러한 인식틀은 놀랍게도 고려건국 시기까지 이어진다.

『제왕운기』는 지리산 천왕이 승려 도선을 시켜 왕건의 할아버지에게 명당자리를 잡아주었다고 하는데, 이 천왕은 지리산 성모다. 그리고 지리산 성모는 서술성모의 후신이니 고려왕조 역시 건국의 정당성을 서술성모의 인정과 조력에서 찾으려 한 것이다. 얘기는 더 있다. 왕건의 할머니 저민의는 서해용왕의 딸인 용녀로서 우물을 통해 용궁을 드나들었다고 한다. 계룡이자 우물의 여신인 서술성모의 고려 버전이다. 그녀의 남편인 작제건의 탄생설화는 아예 문희 자매의 매몽설화를 그대로 빌려다 쓰고 있다. 또 <고려세계>에 기록된 왕건 가문의 첫 시조 호경은 평나산 여산신과 혼인했다. 결국 왕건 역시 서술성모같은 여신의 신성한 후손이고자 했던 것이다. 많이 약화된 형태이긴 하지만 이성계 역시 건국의 정당성을 지리산 성모에게 슬쩍 의탁하고 있다.

이상의 내용을 고려하면서 성조황고 존호를 다시 떠올리면 왜 선덕여왕에게 성조가 강조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여왕인 선덕이야말로 성조 서술성모의 적통을 잇는 후계자가 되기 때문이다.

7. 첨성대 건립의 종교·정치적 맥락

첨성대의 건립연도에 대해서는 633년과 647년 두 가지 기록이 전한다.

633년은 즉위 2년이 되는 통치초기이고 647년은 여왕이 사망한 해다. 여왕이 사망할 당시는 비담의 난 등으로 나라가 혼란할 때였으므로 그때 첨성대를 건립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여왕은 즉위 초기인 633년에, 성조황고라는 존호의 상징물로서 첨성대를 건립한 것같다. 황제여신(황고)이 시조여신 서술성모(성조)의 신전을 궁궐 앞 서쪽에 만든 것이다.

여왕은 즉위 후 자신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지우려 하지 않고 오히려 내세웠다. 우선 분황사(芬皇寺)라는 절 이름부터 그렇다. 즉위 3년째에 지은 이 절 이름은 “향기로운 황제의 절”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芬’자는 ‘향기’ 외에 ‘많다’, ‘기운이 왕성하다’의 뜻도 있다. 왕성한 생명력으로 풍요를 가져오는 여신의 힘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선덕여왕 4년에 지어진 영묘사에는 옥문지(玉門池)가 있었다.23) 여성의 성기가 연못이름으로 전면에 등장한 것인데, 『삼국사기』도 이 이름을 기록해 놓고 있다. 분황사와 영묘사 둘 다 절의 외양을 하고 있어도 토착신앙을 담고 있었다(강영경, 1990: 196-200).

여왕이 여성임을 내세운 것은 여성성에 대한 자부심 때문으로 보인다. 그녀는 옥문지에서 개구리들이 우는 것을 보고 백제군이 잠입한 사실을 알고 군사를 보내 격파시켰다. 그에 감탄한 신하들이 묻자 그녀는 “남근이 여근 속으로 들어오면 반드시 죽는 법”이라고 답한다. 여왕의 이 발언에는 근원적이고 존재론적인 여성파워에 대한 절대긍정, 가부장제 이전 여신문화의 여성과 남성에 대한 인식이 담겨 있다. 그녀의 배면에는 당시 신라 땅 여기저기에 존재했던 신성한 여성 성기 암각화들, 무수한 성혈들이 자리한다.

강력하고 신성한 여성성에 대한 인식은 여성계보의 존중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여왕 역시 그러했다. 그녀는 자신의 후계자로 진덕여왕을 세워 여왕의 계보를 살리려 했다. 이에 상대등 비담과 염종이 “여왕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며 반란을 일으켰으나 여왕은 끝내 진덕여왕을 즉위시킨 후 세상을 떴다. 그리고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자신이 죽은 후 도리천에 장사지내라고 했다. 그런데 불교의 도리천은 석가모니의 어머니 마야부인이 죽어 올라간 곳이다. 여왕의 어머니도 마야부인이었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 마야부인은 알영 탄생설화와 지리산 성모를 통해 서술성모와 중첩된다. 결국 여왕은 죽어서 서술성모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고 볼 수 있다. 도리천은 지거천(地居天)으로 땅에 속해있는데 서술성모도 지선(地仙)이었다. 여왕이 도리천이 있는 곳으로 지목한 낭산 남쪽은 신유림(神遊林)이라는 토착신앙의 성소였다.

물론 선덕여왕이 토착종교에만 기댄 것은 아니었다. 사찰들을 비롯해 선덕여왕 대에 건립된 많은 불교건축물들, 당시 승려들의 활발한 포교활동과 왕실과의 밀접한 관계 등은 그녀가 불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음을 알려준다. 불교는 왕권강화를 위해 왕실에서 앞장 서 받아들여 후원한 종교였기 때문이다. 또 불교는 당시 한반도 전체의 종교지형을 바꿔나가던 거대한 시대적 조류이기도 했다. 신라사회는 토착종교와 불교가 섞이면서 무불회통, 무불혼합의 다이내믹한 진통을 겪는 중이었다.

불교가 토착신앙의 성소들과 상징들을 자신들의 것으로 전유해 나갔듯이, 토착종교 세력도 불교문화를 수용하며 대응했다. 첨성대가 기본틀로 불탑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유다. 그리고 남산에 불상 형식의 여신상이 들어선 이유이기도 하다.

경주 남산에는 불곡마애여래좌상이란 공식명칭을 갖고 있는 속칭 할매부처가 있다. 3.2미터 높이의 바위에 감실을 판 뒤 부조로 새긴 여성좌상이다. 7세기 전반의 것으로 편년되므로 첨성대 건립시기와 같다. 감실과 주변에는 연못, 흐르는 물, 용왕, 여남성기, 성혈 등 토착신앙의 요소들이 자리한다. 또 감실은 곧 석굴이다. 여신의 성소인 굴 속에 좌정해 있는 것이다. 감실을 삼각형 형태로 판 것도 예사롭지 않다. 삼각형은 암각화에 나타나는 여성 성기의 상징이다. 국내에 할매부처와 같은 양식으로 조성된 다른 불상은 없다고 한다.

2005년 일본 무사시노 미술대학 박형국 교수는 <仏教芸術> 지에 발표한 논문 “古代韓国の女神信仰と現存女神像に ついて”(고대한국의 여신신앙과 현존여신상에 대하여)에서 할매부처를 낭산 마애삼존불 본존과 함께 신라의 여신상이라고 주장했다.24)

첨성대 건립을 전후한 시기 신라에는 무불회통의 시대상황을 배경으로 토착신앙을 담고 있는 사찰들과 불교의 옷을 슬쩍 걸친 여신상들이 등장하고 있었다. 첨성대는 그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건립된 것이다.

8. 우물과 첨성의 상관관계

선덕여왕이 서술성모를 표상하는 건축물을 지으면서 성모의 여러 상징들 중 우물을 택한 이유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성모가 혁거세와 알영 두 건국시조를 탄생시킨 최초의 성조임을 천명하기에 가장 적합할 뿐 아니라 우물이 왕권의 상징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우물은 또 왕의 운명이나 국운의 성쇠를 미리 알려주는 신탁의 공간이면서 호국룡이 거주하는 곳이기도 했다(권태효, 2012; 282-283).

농사의 풍요라는 가장 중요한 국가적 과제의 측면에서도 우물은 가장 적합한 상징이었다. 우물인 첨성대는 가뭄의 예방과 극복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제의시설이었다. 서술성모는 계룡으로서 비를 부르는 용신이기도 한데 우물은 용의 거주처였다. 첨성대가 우물이라는 사실은 첨성대 기단의 동쪽면이 용궁을 바라보고 있는 데서도 다시 확인할 수 있다(장활식, 2013: 126). 신라인들에게 우물은 용궁으로 통하는 출입구로 여겨졌다.

그런데 정말 신라인들은 첨성대에서 별을 관측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우물형태와도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당시 신라인들의 신성 인식에서 둘의 조합은 매우 익숙한 것이었다. 우물과 첨성은 같은 공간, 같은 의미연관체계 내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성혈바위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바위에 새겨진 작은 구멍인 성혈은 앞서 말했듯, 미니어쳐 우물로서 여신의 응축된 생명력을 상징한다. 그런데 성혈은 별자리와도 긴밀하게 관련돼 있었다. 한반도 전역에 존재하는, 별자리 모양으로 성혈들이 배치된 암석들이 이를 말해준다. 별자리 성혈들도 특히 경상도 지역에 많이 몰려있다. 포항 칠포리와 신흥리에는 북극성, 카시오페이아 별자리, 황소자리 등으로 보이는 성혈들이, 함안지역에는 북두칠성과 남두육성 별자리로 해석되는 성혈들이 바위에 파여 있다. 성혈을 만들 때 천문학적 방향성도 고려했다고 한다. 별자리 성혈을 갖고 있는 암석유적들은 한반도 뿐 아니라 유럽, 인도를 비롯해 전세계적으로 존재한다(김일권, 2011; 양홍진·복기대, 2012; 양홍진·박창범·박명구, 2010).

고대인들이 별자리 성혈을 판 것은 농사 때문이었다. 별자리의 변동을 보며 농사짓는 시기도 정하고, 날씨나 농사의 흉풍을 점쳤기 때문이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동예인들이 새벽에 별자리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그 해 농사의 흉풍을 점쳤다는 기록이 있다. 성혈이 여신의 생식력을 상징했으므로 중요한 별자리를 성혈로 표시하는 일은 풍작을 기원하는 의례이기도 했을 것이다. 때문에 다른 상징적 문양들이 별자리 성혈과 함께 자리한다.

그러므로 첨성대는 고대의 천문대였다고 할 수 있다. 성혈/우물과 별자리는 농사의 흉풍 점치기나 풍작기원이라는 맥락에서 유기적 연관관계를 맺고 있었다. 일연이 첨성대를 점성대(占星臺)라고도 표기했기 때문에, 점성적 차원의 관측에 불과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강하다. 그러나 천문학도 점성술로부터 발달한 것이다. 농사의 성공을 위해서는 역법 등 실용지식이 필요하므로 과학적 지식은 점성적 외피를 입었더라도 절실하게 추구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지식들은 신성한 지혜로 상찬되었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당시의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지식 추구는 선덕여왕 스스로가 말해주고 있다. 그녀가 예지력을 발휘한 세 가지 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합리적 추론과 탁월한 직관, 논리적 추리력을 읽을 수 있다. 그녀는 신하들에게 사물의 이치를 논리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 『삼국유사』는 그녀의 성스런 지혜(聖智)를 칭송하고 있는데, 세계적으로 지혜는 여신의 중요한 자질 중 하나다.

우물과 천문은 농사 만이 아니라 왕권이나 국가의 길흉 예시라는 측면에서도 신탁의 기능을 공유하고 있었다. 특히 천문현상은 군주의 실정에 대한 하늘의 경고로 여겨지거나 전쟁 등과 관련해 해석되었으므로(이문규, 2004: 20), 첨성대에서의 천문관측은 그만큼 더 중요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서술성모의 신전으로서 천문관측 기능을 담당했던 첨성대는 시간이 흐르면서 성모의 존재는 지워지고 기능만 전해져 첨성대란 이름으로 기록된 것같다.

9. 토우 여신상, 검파형 암각화, 성혈선돌

첨성대는 우물이지만 아래가 병처럼 퍼진 형태를 하고 있다. 왜일까? 또 왜 입구가 가운데 네모난 창구로 뚫려 있을까? 그리고 왜 우물이 땅위로 쑤욱 솟아오른 모양을 하고 있을까?

이 의문들에 대한 답은 첨성대를 서술성모의 신체를 표현한 여신상으로 보면 한꺼번에 다 풀린다. 그렇다면 가운데 창구는 신성한 성기에 해당한다.25) 그리고 이 성기는 첨성대 근처 영묘사에 존재했던 옥문지와 그대로 조응한다.

첨성대의 창구가 선덕여왕이 말한 옥문, 즉 여성의 성기임을 방증해 주는 토우 여성상 하나가 있다. 긴 통치마를 입고 두 손을 앞에 모은 채 서 있는 이 여성상의 가운데 부분에는 커다란 구멍이 하나 뚫려 있다. 성기가 크게 강조된 것으로, 보는 순간 바로 첨성대를 떠올리게 하는 형상이다. 이 여성상은 여신상일 것이다. 사실적 묘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중심에 강조된 성혈상징을 통해 신성한 여성을 표상하고 있기 때문이다.26) 이러한 토착적 여신상이 우물상징과 합쳐져 불탑형식으로 거듭난 것이 첨성대인 것이다.

그런데 신라에는 토우 여신상을 앞서는 원형적 여신상 하나가 더 있다. 앞서 간단히 언급한 검파형 암각화인데 흥미롭게도 첨성대와 유사한 형태를 갖고 있다. 검파형 암각화는 1971년 고령 양전동 ‘알터’마을에서 처음 발견됐다. 성혈신앙 지역임을 알 수 있다. 포항 칠포리 일대 10여개의 크고 작은 바위들에는 주로 이 암각화가 새겨져 있는데 유적 자체가 자연적으로 여근곡과 같은 환경구조를 갖추고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검파형 암각화 유적 11곳 중 10곳이 경상북도에 분포한다. 또 대부분의 유적 근처에는 개천이나 강이 흐른다(전호태 외, 2016; 이하우, 2011: 142). 첨성대처럼 물과 관련돼 있는 것이다.

암각화 학계에서는 검파형 암각화를 청동기시대 여신상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27) 검파형은 가운데 부분이 오목하게 들어간 장방형으로 첨성대와 비슷한 여체형 곡선을 보인다. 내부에는 성혈이 없거나 한 개인 경우도 있지만, 대개 2개 이상이 자리한다. 첨성대는 구멍이 한 개만 있으나 시기적 격차는 물론 암각화와 건축물의 차이를 고려해야 한다. 첨성대보다 더 상징적인 검파형은 많은 성혈들을 통해 여신의 강력한 생식력을 드러내고자 한 것같다.28)

주목할 것은 검파형의 맨 윗부분이 역삼각형이나 U자형으로 파여진 경우가 자주 보인다는 것이다. 다른 성혈들보다 더 강조된 여성 성기/자궁으로 해석되는데 이는 위가 우물 형태로 뚫린 첨성대와 같다. 다시 말하지만 우물은 여성 성기/자궁의 상징이다. 첨성대는 스스로가 큰 자궁이니 가운데 옥문 부분은 자궁 속의 자궁이 되는 셈이다. 그 만큼 더 신성성이 증폭될 수 밖에 없다. 결국 첨성대는 신라의 토착신앙에 뿌리를 두고 검파형 암각화와 토우 여신상의 뒤를 이은, 새로운 여신상이라고 할 수 있다. 7세기 버전의 이 여신상은 시대의 변화에 걸맞게 거대해지고 정교해졌다.

그런데 첨성대를 지을 때 왜 나무같은 다른 재료로 하지 않고 힘들게 돌을 다듬어 쌓아올렸을까? 다른 실제적인 이유도 있었겠지만 선돌을 표상하려는 의도도 있었던 것같다. 선사시대 여신신앙에서 신령스런 바위나 선돌은 그 자체로 여신의 현현이었다. 치술산 신모가 된 박제상의 부인이 죽어 망부석이 되었다는 설화를 보면 신라에서도 선돌이 여신으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다. 여신으로 숭배됐던 돌이 가부장제 사회에서 망부석으로 변했을 뿐이다(조현설, 2013: 144).

할매부처가 들어앉은 커다란 선돌형 바위도 본래는 여신의 신체로 여겨져 자연상태 그대로 숭배됐을 것이다. 불교의 영향으로 자연석 안에 여신상이 조성됐듯, 첨성대도 우물을 탑모양으로 세운 것이지만 그와 동시에 선돌의 효과도 노렸던 것같다. 첨성대는 돌탑인데 돌탑의 기원은 선돌이다.29) 첨성대를 선돌로 본다면 가운데 창구는 성혈이 된다. 네모 형태지만 그것도 우물상징으로 볼 수 있으므로 다를 것이 없다. 첨성대는 가운데 큰 성혈을 지닌 우물모양 선돌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성혈들이 파인 선돌은 지금도 전국의 이곳저곳에서 만날 수 있다.

성혈은 우물과 함께 한반도 고대 여신신앙의 핵심적 상징이었던 것같다. 이는 가야의 김수로왕 탄생설화에서도 읽을 수 있다. 이 설화에서 가야인들은 구지봉(龜旨峰)에서 “산봉우리 위에서 흙을 파면서 거북이 머리를 내놓지 않으면 잡아먹겠다는 노래를 부르라”는 목소리를 듣는다. 그들이 그대로 하자 하늘에서 금상자를 싼 붉은 보자기가 매달린 붉은 줄이 내려오고, 상자 안에 담겨있던 여섯 알들 중 하나에서 수로왕이 탄생한다.

이 설화를 여신신앙의 맥락에서 해석해 보자. 우선 사람들이 흙을 판 것은 성혈을 판 것이다. 장소가 산봉우리인 것은 하늘에 기원한다는 의미다. 그들은 성혈을 파면서, 즉 대지모의 성기를 자극하면서 하늘이 자신들의 기원에 감응해 거북이 머리를 내놓게 되기를 노래했다. 거북이 머리를 내놓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거북은 여신의 자궁을 상징한다. 거북의 둥근 등은 임신한 여성의 배를 닮았고, 거북이 머리를 내미는 장면은 만삭여인의 출산장면과 흡사하다.30) 가야인들은 노래하며 성혈을 파면서 성스런 영웅의 탄생을 기다렸고 결국 거북이 “머리를 내민”(首路) 것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붉은 줄과 붉은 보자기는 탯줄과 태아를 상징한다.

이 설화 속 거북은 수로왕의 성모인 정견모주의 상징인지도 모른다. 서술성모가 닭이나 용, 백마로 상징되었듯 정견모주는 거북으로 표상되었을 것같다. 우물이 등장하는 혁거세·알영 탄생설화와 성혈이 등장하는 수로왕 탄생설화는 신라와 가야 지역에서 우물과 성혈이 같은 상징이었음을 다시 확인해 준다. 여하간에 성혈/우물은 농사의 풍요와 다산 뿐 아니라 건국영웅의 신성한 탄생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상징이었다.

10. 첨성대 내부는 동굴, 서술성모의 거주처

지금까지 첨성대의 정체와 관련해 사람들을 괴롭힌 문제 중의 하나는 내부의 상태였다.

천문관측의 편의성 면에서 보면 입구의 위치 못지 않게 내부의 거칠고 불편한 환경이 문제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입구의 안쪽은 문지방 가까이까지 굵은 자갈이 섞인 흙으로 채워져 있다. 바닥엔 잡석들이 울퉁불퉁 깔려 있으며 내부의 석재들은 잘 다듬어지지 않은 채 이리 불쑥 저리 불쑥 돌출돼 있다. 도대체 왜 그렇게 만든 것일까?

기술이 조야해서가 아니라 동굴을 형상화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첨성대 내부는 가장 오래된 여신의 성소이자 신비의 공간인 동굴이었던 것이다. 첨성대의 좁아지는 상부는 여체를 표현하면서 동시에 동굴을 만드는 이중의 효과를 발휘한다. 특히 내부에 걸쳐진 정(井)자형 장대석(長大石)들은 공간을 더욱 좁혀주면서 동굴효과를 강화해 주고 있다.

첨성대 내부를 동굴로 보는 것은 네모난 입구가 옥문이라는 견해와도 딱 들어맞는 논리적 정합성을 갖는다. 옥문의 안쪽은 자궁인데 동굴이야말로 여신의 자궁을 의미하는 가장 강력한 상징이기 때문이다. 첨성대의 핵심적 공간은 천문관측을 위한 정상부가 아니다. 자궁 속의 자궁인 옥문의 내부다. 첨성대 입구를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으면 현묘한 미소를 띠고 감실에 들어앉아 있는 할매부처가 떠오른다. 할매부처와 첨성대는 우물/연못/성혈, 용궁/용왕당, 동굴, 바위 등의 상징들을 공유하고 있다.

그런데 첨성대 내부를 동굴로 만든 것은 서술성모의 성스런 자궁을 표상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동굴은 하늘에 대한 기도처이기도 했다. 김유신은 17세때 혼자 중악(中嶽)의 석굴에 들어가 목욕재계하고 외적의 침입을 막을 수 있는 힘을 달라고 하늘에 기도한다. 하늘에 대한 기도처가 첨성대 내부같은 석굴이었음을 알 수 있다. 더 흥미로운 것은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홀연 나타나 비법을 전해 준 존재가 산신이라는 것이다. 산신이기도 한 서술성모가 다시 연상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한국 민간신앙에서 천신과 산신은 서로 교환가능한 개념이다. 산신이 하늘에 오르면 천왕이 되고 천왕이 하산하면 산신이 된다(천혜숙, 1999: 256).

첨성대의 석굴에서는 하늘 뿐 아니라 용궁과의 소통도 이뤄졌을 것이다. 석굴은 우물의 내부공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산신에 천신일 뿐 아니라 용신이기도 한 서술성모는 하늘의 뜻을 전하고 가뭄 때 비를 불러오는 강력한 여신으로서 그곳에 거처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동굴신 수신이 수혈에 좌정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결국 서술성모는 동굴신이기도 하다.

『삼국유사』의 기록 뿐 아니라 첨성대가 담고 있는 상징분석을 통해서도 우리는 서술성모가 특정 영역이나 기능에 국한된 다수의 여신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대자연 자체인 위대한 여신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서술성모의 현신인 첨성대는 하늘과 땅(산)과 바다가 서로 만나며 이어지는 우주적 신성체, 위대한 우주적 어머니(Great Cosmic Mother)를 표상하고 있는 것이다.31)

11. 첨성대의 여사제, 천관녀

천관녀는 첨성대의 여사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천관녀는 이름부터가 범상치 않다. 그녀의 이름이 붙은 천관사란 절은 원성왕 설화에도 등장한다. 그가 왕위에 오를 것을 알리는 꿈에 등장하는 우물이 천관사의 우물이다. 천관녀가 우물인 첨성대에 올라 왕과 관련된 하늘의 뜻을 읽었기 때문에 천관사 우물이 왕권과 관련되었을 것이다. 아니, 천관사 우물 자체가 첨성대의 은유로 여겨진다. 그런데 천관이란 도대체 무슨 뜻일까?

『삼국사기』에는 천관신이라는 신이 등장한다. 김유신이 18세 때 홀로 산에 들어가 하늘에 기도했더니 천관신이 빛을 비추어 그의 보검에 영기를 내려주었다고 한다. 허(虛)수와 각(角)수 두 별자리의 빛이 환하게 내려 비췄다는 것으로 보아 천관신은 별의 신인 것같다. 그렇다면 천관녀라는 이름 자체가 그녀가 첨성대의 여사제였음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각주>

1) 주어진 지면의 제한 때문에 원래 준비한 논문 분량의 절반으로 내용을 줄여 주장의 설득력을 높여주는 여러 방증들을 비롯해 부분적인 내용들이 일부 생략되고 형식도 단순하게 되었다. 양해를 바란다.

2)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그녀의 작업을 로제타 스톤을 해독한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의 기념비적 업적에 비견했다(Gimbutas, 1989: ⅹⅲ).

3) 첨성대의 형태가 우물이라는 견해는 조경학자 조세환에 의해 처음 제기되었고(조세환, 1998), 이후 역사학자들의 공감을 받아 김기흥의 우주우물설(김기흥, 2000), 정연식의 제2 나정설(정연식, 2009) 등이 나왔다.

4) 이하 박혁거세ㆍ알영 탄생설화 관련내용은 다음 기사를 자료로 삼는다.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 『삼국사기』 제1권 신라본기 제1 시조혁거세거서간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5) 이하 여신상징들과 그 해석은 별도의 인용표시가 없는 경우 김부타스의 다음 저작을 참조한 것이다. Gimbutas, Marija(1989), The Language of the Goddess, New York: Thames & Hudson.

6) 이하 서술성모 관련내용은 별도의 인용표시가 없는 경우 박혁거세ㆍ알영 탄생설화 외 다음의 기사를 자료로 삼는다. 『삼국유사』 제5권 감통 제7 선도성모 수희불사.

7) 서술성모는 선도성모라고도 한다. 그런데 두 명칭 사이에는 분명한 뉘앙스가 있다. 서술성모가 원초적 신성을 가진 신화적 여신임에 비해 선도성모는 인간으로 태어나 신격을 획득한다. 선도성모가 훨씬 후대의 명칭으로 여겨진다. 이 논문에서는 꼭 선도성모라고 해야 할 경우를 제외하고는 서술성모로 표기한다.

8) 김현권(2015), “반구대암각화 속의 인물상-샤먼과 피리부는 사냥꾼”, 『경상일보』, 2015.4.1

9) 암각화를 연구하는 국내학자들도 마름모는 대체로 여성이나 여신과 관련시켜 해석하고, 암각화가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제의적 성격을 갖는다고 본다. 다음책을 참고하라. 문명대 외(2010), 『울산 반구대 천전리 암각화』, 한국미술사연구소

10) 혁거세는 태어날 때 자칭 알지 거서간이라고 했다. 이름이 알지인 것이다. 우물 옆에서 태어난 알지나 알영 모두 이름에 ‘알’을 담고 있는데 이는 우리말 알(卵)로 해석된다(임재해, 2007: 602).

11) 설문대할망이 오줌을 누려고 할 때 포수에게 쫓기던 사슴들이 할망의 성기를 굴로 착각하고 들어왔 다는 전설이 있다(강진옥, 1993: 11).

12) 구전에 의하면 치술신모가 죽은 후 새가 되어 은을암이라는 바위의 굴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고 한다(김화경, 2005: 79). 동굴신이 여신임을 말해준다.

13) 거구는 마고할미나 설문대할망, 개양할미 등 여신들이 갖는 특징이다. 마고할미 설화에는 그녀가 여우의 모습으로 죽는 화소가 흔히 나타난다(강진옥, 1993: 16).

14) 흔히 혁거세 탄생설화를 서로 다른 두 버전으로 이해한다. 하나는 역사기록에서 전면에 등장하는, 하늘에서 내려온 백마와 나정 옆의 알이 주소재인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서술성모가 낳았다는 것이다. 후자는 일연이 소극적으로 슬쩍 언급하는 데 그쳐 전자가 정통성을 가진 설화로 인정된다. 그와 함께 설화 속 하늘을 “당연지사인 듯” 천부(天父)로 해석해, 지모신으로 여겨지는 서술성모 탄생설화와 대비시켜 왔다. 하지만 부계를 밝히는 것으로 얘기되는 천강설화도 우물과 알같은 강력한 여신상징들이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백마도 서술성모의 상징이니 당시 신라의 하늘이 남성적 신성이었다는 확증이 없는 한 천강설화도 결국은 여신설화가 된다. 두 버전이 다를 게 없는 것이다.

이집트에서는 하늘의 신 누트가 여신이고, 수메르의 이난나와 가나안의 아스타르테는 하늘의 여왕으로 불렸다. 만주족의 창조여신 아부카허허도 천신이었고 일본의 태양신도 여신인 아마테라수다. 한반도 고대 토착신앙에서 하늘 역시 여성적 신성이었을 가능성이 상당하다.

15) 당 황제가 진덕여왕을 계림국왕으로 봉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신라가 국제적으로도 상당기간 계림국으로 불렸음을 알게 한다. 아테네가 아테나 여신의 도시이고 ‘유럽’의 어원이 여신 에우로페(Europe)라고 얘기되듯 신라는 서술성모의 나라로 여겨졌던 것같다.

16) 선사시대 여신상 중에는 새의 부리를 가졌거나 새 형상을 한 경우가 꽤 있다.

17) 조선시대 유학자 김종직의 <유두류록>에는 지리산 성모천왕(‘천왕’으로 불리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을 세속에서 마야부인으로 여긴다는 내용이 있다. 그런데 지리산 성모는 서술성모의 후신(後身)으로 여겨진다(송화섭·김형준, 2011: 68-72). 마야부인과 서술성모가 지리산 성모를 통해 중첩되고 있는 것이다. 서술성모-박혁거세 조합은 부차적이거나 후대에 이루어졌을 수 있다.

18) 강진옥(2006), “슬픈 마고할미의 전설”, 『문화와 나』, 78호, 2006 봄호.

19) 왕의 어머니나 딸, 오누이가 종종 사원의 최고여사제였던 수메르-아카드 제국에서 가장 숭배됐던 신은 이난나(아카드어로는 이슈타르)이고, 여사제들은 이난나의 대리자들이었다. 수메르-아카드의 사원들에서는 왕에게 이난나의 신성한 힘을 부여하기 위한 신성한 결혼 의례가 행해졌다(Ruether, 2005: 56).

신라의 경우도 이와 같았음은 선도성모가 비구니 지혜를 택해 현몽하고 불사를 도왔다는 『삼국유사』의 기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20) 정연식(2009)은 시조묘가 나정에 위치했다고 본다. 소지왕 대에는 시조묘 역할을 대체하며 신궁이 새로 건립되는데 김태식(2010)은 신궁의 제사대상이 서술성모였다고 본다.

21) 왕권의 수여자로서의 여신은 이난나와 이시스의 경우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특히 이시스는 왕좌를 머리장식으로 사용함으로써 왕권의 수여자임을 확실하게 주장한다.

22) 이는 가야계 피가 섞인 문희의 혈통을 서술성모와 연결시킴으로써 완전한 귀화를 노린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 경우에도 성모가 신라인 정체성의 토대임을 알 수 있다.

23)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 선덕왕지기삼사. 선덕여왕 관련 내용은 위 기사와, 『삼국사기』 제5권 신라본기 제5 선덕왕 기사를 자료로 삼는다.

24) 박형국 교수의 논문발표 사실과 관련내용은 다음 기사를 참고했다. 임석규(2013), “남산감실상과 낭산마애삼존상”, 『법보신문』, 2013.4.16. 불교문화재연구소 연구실장인 임석규도 위 기사에서 할매부처를 여신상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는 견해를 보였다.

25) 첨성대에 대해 깊이있는 연구들을 내놓은 정연식은 첨성대가 나정과 마야부인의 몸을 겹쳐서 형상화한 것이며 네모난 창구는 석가모니를 낳은 옆구리라고 보았다(정연식, 2009). 오래전 첨성대를 토착신앙의 맥락에서 고찰할 것을 주장하고 우물설을 처음 제기하는 등 탁견을 보였던 조세환은 네모난 창구가 여성의 성기일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제시한 바 있다(조세환, 1998).

26) 구멍이 상징이기 때문에 더 아래에 뚫려 있는 경우도 있고 2개 이상 뚫려 있기도 하다. 소개한 여신상도 오른쪽 아래에 구멍이 하나 더 뚫려 있다. 흔한 용례를 따르자면 위와 같은 여신상들은 신라의 비너스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은 조몬 여신상들을 조몬 비너스라고 홍보하고 있다. 성기가 크게 과장된 남성상들도 남신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27) 송화섭(2015), 이상길(2000), 이하우(2010)를 참고하라.

28) 검파형 암각화는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어 한국형 암각화로 분류된다. 그런데 검파형은 김부타스가 분류한 모래시계 상징과 흡사해 보인다. 여신의 자궁, 성기를 상징하는 삼각형 두 개가 서로 꼭지점을 맞대고 있어 모래시계를 닮은 형상이다. 이 기하학적 문양은 여기에 머리나 가슴, 팔다리가 붙으면 인간형상으로 변한다. 여신상이 되는 것이다. 검파형 암각화 중에도 머리나 팔다리가 붙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들이 보인다. 양자의 관계에 대해 앞으로 더 연구할 필요가 있다.

29) 탑제, 한국세시풍속사전, 한국민속대백과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강원도의 돌탑신앙에서는 선돌을 탑이라고도 부른다. 솟대제, 한국민속신앙사전;마을신앙 편. 네이버 지식백과

30) 출산과정 중 아이가 순조롭게 나오지 않고, 한번 나온 머리가 다시 움츠러드는 경우를 의학적으로 거북이 사인(turtle sign)이라고 한다.

31) 지면관계상 설명을 생략하지만 고구려의 수신 역시 우주적 여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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