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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桓檀古記』 이야기 <6> (군사저널)

환단스토리 | 2015.01.16 17:07 | 조회 3689
9천년 한민족사의 위대한 증언―안경전의 『환단고기桓檀古記』 이야기 <6>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의 고조선관. 그 입구에는 <최초 국가 고조선>이란 설명문이 붙었다. 한국인의 역사 인식수준을 보여주는 한 증좌다. 중국과 일본은, 대륙을 호령하던 환국桓國과 배달국倍達國 시대 한민족 5천 년 역사를 송두리째 지웠다. 그리고 한국의 강단사학자들은 그렇게 왜곡된 역사를 떠받들고 퍼뜨려 왔다.

“환국 3301년, 배달 1565년, 단군조선 2096년…
한민족은 7천 년 역사를 잃어버렸습니다.”

- 일본·중국은 없는 역사도 꾸며내는데 한국인은 멀쩡하고 당당한 내 역사마저 부정하고 있으니…


●대담 박정하

안경전 종도사에게서 여섯 번째 『환단고기』이야기를 듣기 위해 대전의 증산도甑山道 교육문화회관을 찾은 지난 1월 중순, 마침 전국 고등학교의 ‘교학사 교과서 거부’사태가 큰 이슈로 떠오르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기자는 안 종도사와 마주 앉으면서 그것을 말머리 화제로 꺼냈다.

“당장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관계없을 것 같은 ‘역사’라는 주제도 얼마든지 중요한 사회적 논쟁거리가 될 수 있구나, 그런 사실을 새삼 실감하게 됐습니다”라고 기자가 말하자 안 종도사는 “지금 교과서 문제는 이미 명백하게 드러나 있는 근대사의 사실史實들을 과연 어떻게 보고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 그런 문제이니까 어느 쪽으로든 의견이 모아지고 결론도 나올 것”이라고 답했다. 그러면서“우리 국민들이 한 마음으로 보다 중대하게, 시급하게 달려들어야 하는 역사 쪽 주제는 사실 온통 왜곡되고 잃어버린 한민족의 본래 역사부터 되찾아 바로 세우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그동안 안 종도사는 『환단고기』의 기록을 바탕으로 우리 역사는 (나아가 인류 역사도) 저 중앙아시아 대륙의 환국에서 시작됐으며 그것이 배달국으로 그리고 다시 단군조선으로 계승되었음을 강조해 왔다. 이제 기자에게 “환국은 역대 일곱 분의 환인들이 기원전 7197년부터 기원전 3897년까지 3,301년간 다스렸고, 배달국은 역대 열여덟 분의 환웅들이 기원전 3897년부터 기원전 2333년까지 1,565년간 다스렸다”는 그의 이야기는 아주 익숙해졌다.

그러나 한국에서 초―중―고 교육과정을 거친 대다수 국민에게, 안 종도사가 이처럼 힘주어 말하는 환국과 배달국이란 이름은 아주 낯설 터다. 우리 국사 교과서는 그저 단군조선(교과서에서는 고조선)을 ‘찔끔’소개하는 것으로 한민족사의 시작을 설명한다. 환국, 배달국에 대해서는 그 역사는커녕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는다.
안 종도사는 “단군조선 건국 연대인 기원전 2333년부터 지금까지 따져서 흔히 우리 역사가 반만 년 역사다, 그렇게들 말하는데 그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라 지적하고 “환국에서 시작해 단국檀國과 단군조선을 거쳐 대한민국까지 9천 년 한민족사라고 해야 맞다”고 서두에 또 한 번 강조하면서 이날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단국’은 무엇인가?

- 방금 환국과 단국檀國이라고 하셨는데, 단국이란 명칭이 아주 낯섭니다.
단국이 곧 배달국입니다. 배달이란 말은 밝은땅, 광명한 땅이란 뜻이거든요. 앞서 ‘환단’의 뜻을 말하면서 환은 하늘의 광명, 단은 땅의 광명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배달이다 하면 곧 단과 그 뜻이 같고, 배달국은 단국이라 할 수 있습니다.


-『환단고기』 외에 기존 우리 사서들 가운데 환국 그리고 ‘단국’이라 표현된 사례가 있습니까?
먼저 고려 때 일연 스님(1206-1289)이 지은 『삼국유사』를 들 수 있습니다.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가 중국 사마천의 『사기』를 모방한 기전체紀傳體 형식의 정사正史라면 『삼국유사』는 야사野史에 가깝다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야사에 가깝다고 해서 이 책의 저자가 자기 입맛에 따라 없는 사실을 만들어 내거나 있는 사실을 왜곡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민간에 전해오던 여러 사서나 비문 등의 기록을 그대로 옮겨 적었습니다. 또 민간의 설화와 전설도 많이 채록했기 때문에 사료史料 가치는 『삼국사기』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삼국유사』는 아홉 편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제1편은 「왕력편王曆篇」으로 삼국의 연대표입니다. 제2편은 「기이편紀異篇」으로 상고시대 여러 나라, 그리고 삼국과 가야의 역사에 대한 기록이고, 3편 「흥법편興法篇」에서 9편 「효선편孝善篇」까지는 불교 역사에 관한 기록입니다.


왕력편은 연대표이므로 실제 본문은 기이편부터 시작되는데 그 첫 부분이 바로 단군조선에 관한 기록입니다. 바로 여기에 『고기古記』라는 책이 등장합니다. 일연 스님은 환국과 단국을 거쳐 단군조선까지, 『고기』에 실렸던 기록이라며 그 내용을 옮겨 적었습니다.

그 부분을 번역하면 “『고기』에 이르기를, 옛적에 환국이 있었다. 서자부 환웅이 천하에 자주 뜻이 있어 인간 세상을 탐내어 구했다. 아버지(환인)가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 태백을 내려다보니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하였다. 이에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어 보내고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이 무리 3천 명을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 밑에 내려왔다. 이곳을 신시神市라 하였다. 이 분이 환웅천왕이다.”라는 내용입니다.

우리 사서들 가운데 직접 단국이란 표현으로 배달을 기록한 예가 아직은 발견된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고려시대 사서인 이승휴의 『제왕운기帝王韻紀』에 환웅을 ‘단웅천왕檀雄天王’이라 했습니다. 또 신라의 고승 안함로가 지은 『삼성기』에도 환웅이세운 나라 이름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환웅이 신시에 도읍을 정하여 나라 이름을 배달倍達이라하였다.”는 대목입니다. 배달은 곧 단檀, 그러니까 ‘광명의 땅’을 뜻하는 ‘달’을 한자로 옮긴 것입니다. 이런 여러 측면에서 볼 때 환웅이 세운 나라, 배달을 단국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고기』라는 책 이름도 저는 처음 듣습니다.
『고기』라는 책이 언제 지어지고 누가 쓴 책인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책 이름을 언급하거나 그 내용을 인용한 사례들로 미루어 고려 말까지 세간에는 널리 알려졌던 책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를 직접 언급한 일연 스님 뿐 아니라 김부식도 이 책을 알고 있었습니다. 비록 그가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는 이를 전혀 인용하지 않았지만….

공민왕 때 재상을 지낸 행촌 이암도 그의 『단군세기』 서두를 『고기』 가운데 일부 인용하는 것으로시작합니다. 『환단고기』 가운데 원동중의 「삼성기」에도 『고기』의 기록이 인용되어 있는데 “파내류산 아래 환인 씨의 나라가 있으니 천해의 동쪽 땅을 또한 파내류국이라 한다. 그 땅의 넓이는 남북으로 5만 리요, 동서로 2만여 리이니 통틀어 환국이라 했다.”는 대목이 그것입니다.
이처럼 간접적인 정황들을 통해 『고기』에는 우리시원역사에 대한 소중한 내용들이 담겨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다만 그 책이 지금까지 전해 오지 않는 게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계연수 선생이 1911년 우리 사서들을 묶어 내면서 『환단고기』라 이름 붙인 것도 그 『고기』라는 책을 염두에 둔 것이었습니다.


-『고기』가 우리 시원역사의 내용을 담고 있고 또 김부식이 그 책을 알고 있었다면, 그가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어째서 그 책의 내용을 인용하거나 혹은 참고하지 않았을까요?
김부식이 삼국사 편찬을 마치고 임금에게 그것을 진상하면서 「진삼국사표進三國史表」라는 글을 붙여 올렸습니다. 이 글은 그 문장이 훌륭하다 해서 나중에 15세기, 조선 성종 때 간행된 문선집文選集인 『동문선東文選』에도 실렸습니다(제44권).

여기서 김부식은 『삼국사기』 편찬의 이유들을 들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로 『고기』의 내용이 만족스럽지 못하다,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고기』는 문자가 거칠고 졸렬하며 사적事跡의 빠진 부분이 많아 임금의 착함과 악함, 신하의 충직함과 간사함, 국가의 편안함과 위태함, 인민의 다스려짐과 어지러워짐을 모두 드러내어 후대의 권계勸戒로삼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나는 『고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김부식의 주관적인 평가입니다. 특히 ‘문자가 거칠고 졸렬하다(文字蕪拙)는 표현은 김부식이 이 책에 대해 반감까지 갖고 있음을 짐작케 합니다. 우리 상고사를 기록한 『고기』의 내용이 유학자의 사대주의 사관으로 볼 때 받아들이기 힘들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고기』의 내용은 알고 있었어도 『삼국사기』 편찬 때 참고하지 않은 것이죠.

- 지금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를 놓고 좌우 이념논쟁이 뜨거운데, 오래 전 『고기』라는 책에 대한 지식인들의 평가도 적잖이 달랐나 봅니다.
그렇지요. 사대주의 사관을 갖고 있었던 김부식은 『고기』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반면 우리 건국과 관련한 설화나 전설까지도 소중히 여기고 그것을 수집하는 데 정성을 들였던 일연 스님은 김부식과 생각이 전연 달랐습니다. 『삼국유사』의 「기이편」 서문에 그런 그의 생각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제왕이 일어날 때는 부명符命과 도록圖籙을 받게되므로 반드시 남보다 다른 점이 있었다. 그래야만 능히 큰 변화를 타서 제왕의 지위를 얻고 큰일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황하에서 하도河圖가, 낙수에서 낙서洛書가 나오고 성인이 일어났던 것이다… 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비스러운 데서 탄생했다는 것이 무엇이 괴이하랴. 이것이 (『삼국유사』의) 책머리에 기이편이 실린 까닭이며…”여기서 하도는 태호복희씨가 황하에서 얻은 그림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복희가 팔괘八卦를 만들었습니다. 낙서는 하나라를 세운 우禹 임금이 낙수에서 얻은 글로, 역시 이를 바탕으로 천하를 다스리는 규범인 홍범구주洪範九疇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제왕이 일어나 나라를 세울 때 하늘이 내리는 신비한 일들은 당연하다, 그것이 일연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신비한 일들에 대한 기록도 존중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고기』의 기록에 대해 김부식과 일연은 상반된 태도를 가졌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시원역사의 기록들이 한 사서에는 실린 반면 다른 사서에서는 배제됐던 것입니다. 사실史實을 취사선택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과거를 재구성하는 역사가의 사관史觀이 얼마나 중요한가, 절감하게 됩니다.
『고기』의 내용은 일연 스님보다 더 자주적自主的역사관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행촌 이암과 원동중에게는 더더욱 귀한 기록이었을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행촌 이암은 고려 때 재상을 역임했고 단군조선의 역사를 담은 『단군세기』를 편찬했습니다. 원동중은 한민족의 상고사, 환단桓檀 시대를 다룬 『삼성기』를 쓴 인물입니다. 이들의 글에 『고기』가 인용되고 있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을 겁니다.

- 오늘은 뜻밖에도 새로운 이야기, 『고기』에 대해 알게 됐습니다. 일연이 그 책을 인용해 ‘옛적에 환국이 있었다’했는데, 그러면 『환단고기』에는 이 환국에 대해 어떻게 기술돼 있습니까?
『환단고기』 가운데 신라 고승 안함로의 『삼성기』 상권은 ‘우리 환족이 세운 나라가 가장 오래 되었다(吾桓建國最古)’로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이 환국은 7대 환인 씨에 걸쳐 통치되었다고 기록됐습니다. 고려 때 인물로 추정되는 원동중도 『삼성기』 하권에서 ‘옛적에 환국이 있었다(昔有桓國)’고 쓰고 있습니다. 나아가 ‘환국의 통치자인 환인은 하늘을 대행해 널리 교화를 베풀어 싸움과 굶주림과 추위가 사라지게 되었고 백성들은 풍요롭고 인구가 많았다’고 그 시대의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원동중은 안함로와 달리 초대初代 안파견 환인을 비롯해 7대 환인들의 이름을 들고 있습니다. 또 앞서 말한 『고기』를 인용해 ‘환국의 위치가 파내류산 아래이고 그 강역이 남북 5만 리, 동서 2만여 리에 걸쳐 있으며 비리국, 수밀이국 등 12국으로 구성돼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선 중종 때 찬수관을 역임한 일십당 이맥이 편찬한 『태백일사』에도 환국에 관한 기록이 나옵니다. 「환국본기」라 해서 환국에 관한 옛 기록들을 모아놓은 것입니다. 이맥 자신이 쓴 게 아니라 『조대기朝代記』와 『삼성밀기三聖密記』라는 두 책의 환국에 대한 기록을 옮겨 놓은 것입니다. 대다수 우리 사서들처럼 이 두 권의 사서 역시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태백일사』에는 또 구약성서 「창세기」에 비견할 수 있는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라는 글이 실려 있습니다. 여기에도 환국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환국의 통치자인 환인을 백성들이 추대하였다, 환인을 안파견이라고도 불렀다’면서 안파견의 뜻이 ‘하늘을 받들어 아버지의 도道를 확립시킨다’고 풀이했습니다. 나아가 「환국본기」는 『전傳』이라는 책의 내용을 인용하면서 ‘삼신의 후예를 환국이라 부른다’ 했습니다. 이는 환국의 백성이 하늘이 내린 민족 곧 천손족天孫族을 자처하는 사람들이었음을 분명히 드러낸 것입니다.


- 환국이 실제로 있었다… 『환단고기』의 기록들을 뒷받침하는, 다른 기록이나 정황 증거 같은 것들도 있습니까?
『환단고기』외에는 『삼국유사』의 ‘고조선(단군조선)기’가 인류 최초의 나라인 환국에 대한 유일한 역사기록입니다. 안타깝게도 그마저도 마치 신화인 것처럼 윤색됐지만… 적어도 그 기록을 통해 환국-배달-단군조선으로 이어지는 국통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국사 왜곡에 대해 전에 자세히 이야기했는데, 일본인 식민사학자가 『삼국유사』의 ‘석유환국昔有桓國’에서 ‘국國’자를 ‘인因’자로 변조해 환국의 존재를 지워버렸습니다. 이후 그것이 현재의 강단사학까지 지배하고 있고요. 그러나 앞서 예를 든 것처럼 적어도 고려 때까지 우리에게는 환국의 실체,환국의 존재에 대해 기록하고 전하는 사서들이 여럿 존재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환국에 대한 기록이 담긴 『조대기』나 『삼성밀기』만 해도 조선의 사서수거령(유교와 입장이 다른 우리 사서들을 수거, 폐기한 일) 때 분명히 언급된, 엄연히 실재했던 책들입니다.
‘환국을 입증’하는 또 하나의 증거는, 환국을 이루던 12개 나라 이름들 가운데 상당수가 후세의 사서에도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가령 중국 사서인 『진서晉書』의 「사이전四夷傳」에는 비리국, 양운국, 구막한국, 일군국 등 환국에 속했던 나라 이름들이 기록돼 있습니다.1지금은 우리가 중동中東이라 부르는 저 수메르인들의 역사기록이나 유물을 통해서도 환국이 실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수메르인은 스스로 ‘우리가 안샨(천산天山)을 넘어 왔다’고 말합니다. 환국에서 건너 왔다는 이야기죠. 또 실제로 수메르 역사의 숱한 기록과 유물들은 환국과의 놀라운 연관성을 보여줍니다.

『장자』에도 보면 상고(시대)의 혁서 제왕을 거론합니다. 그러면서 그 때 백성들은 편안하고 배불리먹고 배를 두드려 가며 근심 걱정 없는 평화로운 생활을 누렸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혁서 제왕은, 환국의 제2세 혁서 환인천제와 이름이 같습니다. 또 당시 태평성대의 삶 또한 환국의 백성들이 누렸던 생활과 부합됩니다. 과연 이런 것들이 그저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까요?

-수메르인이 환국에서 건너 왔다는 대목이 선뜻 와닿지 않습니다. 수메르라면 흔히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다, 그렇게들 알고 있는데요.

서양 문명이 발원했다는 수메르 문명은 물론 지리로 보면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의 지역(※이를 그리스어로 ‘메소포타미아’라 한다)에서 탄생한 것입니다. 하지만 거꾸로, 지리가 아닌 사람을 중심으로 보면,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바로 수메르인의 문명을 계승한 것입니다.

기원전 2350년경 셈족族에 속하는 아카드인들이 북쪽에서 내려와 수메르를 정복했습니다. 그때 아카드인들의 왕이 사르곤입니다. 바로 이 아카드인들이 수메르를 정복하고 이미 앞서 있던 수메르 문명을 그대로 계승합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이후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수메르-아카드 문명이라고도 합니다. 함무라비 법전으로 잘 알려진 바빌로니아 문명도 수메르―아카드 문명을 계승한 것입니다. 실제 함무라비 법전도 아카드어로 기록됐고 그 법전의 내용 또한 수메르 법전의 그것과 대동소이합니다.

이처럼 수메르의 원래 도시국가들, 또 아카드 제국과 바빌론 제국에 의해 계승된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점차 그리스로 전파되어 결국 서양 문명의 원류인 그리스 문명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리스 문명이 애초에 자생적으로 생겨나고 발전한 것이 아니란 사실은 수많은 역사가들이 말합니다. 그리스 문자만 해도 페니키아인에게서 받아들였고 천문학,수학도 메소포타미아 문명으로부터 배워서 발전시켰습니다. 이런 까닭에 역사학에서 수메르 문명이서양 문명의 원천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고요.

- 그런 수메르 문명의 어떤 측면 혹은 어떤 점들이 환국과 관계된다는 것입니까?
수메르 문명이 대단히 일찍 발달한 것이지만 그 또한 아주 갑작스럽게, 앞선 문명이 전혀 없이 독자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닙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무엇보다 먼저 수메르인들은 우리가 안샨을 넘어왔다, 우리는 머리 뒷부분이 평평한 검은 머리의 인종이다, 스스로 자신들에 대해 말합니다.
수메르인의 점토판을 해독해 그들의 생김새, 사회제도, 풍습, 언어 등을 연구한 크레이머 박사는 “수메르인들이 동방에서 왔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한韓사상을 연구해온 우리나라의 김상일 교수는 최남선의 불함문화론을 바탕으로 “고대 수메르인과 한민족은 불함문화라는 공통 문화권에 살다 갈라져 나갔다”고 주장합니다. ‘불함문화권이란, 중앙아시아에서 몽골에 이르기까지 산악 이름 중 상당수가 공통적으로 박〔밝·白〕 자를 쓰는 것에 착안해 최남선 선생이 동북아 문화권에 붙인 이름입니다. 이 불함문화권이 바로 환국을 가리킵니다. 학자들은 수메르인이 높은 산에서 신에게 예배하는 민족이라는 점과 그 언어가 우랄알타이어 계통이란 사실을 들어 그들이 중앙아시아에서 이주했다고 추정합니다.

또 수메르인들은 우주를 안키Anki(천지)라 불렀습니다. 우주는 둥근 하늘인‘안’ 그리고 평평한 ‘키’로 이루어졌다고 믿은 것입니다. 이는 동양의 천원지방天圓地方(하늘은 원만하고 땅은 방정하다) 사상과 다르지 않습니다.

수메르인들의 언어 역시 우리 한국어처럼 주어나 목적어 같은 체언體言에 조사(토씨)가 붙는 교착어膠着語입니다. 지구상에서 교착어는 한국어와 한국어의 영향을 받은 일본어 그리고 알타이어뿐입니다. 게다가 수메르의 경우 우리말과 어순語順까지 거의 같습니다. 아빠, 엄마 등 아예 단어 자체가 같은 게 100여 가지나 됩니다.

이밖에도 동북아의 60갑자甲子처럼 60진법을 사용한다거나, 결혼 전 신부가 될 집에 함을 지고 가고 씨름을 즐기는 등 의식주 문화나 생활 풍습에서도 적잖은 동질성이 나타납니다. 특히 주목할 것은 동방 한민족의 독특한 머리형인 상투의 흔적이 발견된다는 점입니다. 1923년 우르Ur 지역의 한 묘지에서 왕의 유골을 발굴했는데, 황금투구를 쓰고있었던 그 왕은 머리카락을 뒤에서 묶어 상투를 틀고 있었습니다.

수메르인들이 스스로 (동방에서) 천산을 넘어 왔다고 할 때, 또 수메르를 연구한 학자들이 수메르 문명은 동방에서발원했다고 할 때그 ‘동방’은 어디를, 누구를 지칭하겠습니까. 일찍이 환국의 서남쪽에 자리 잡았던 환족 사람들이 이란의 산악지대를 거쳐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남하해 수메르 문명을 개척했다…, 결국 수메르인과 수메르 문명의 원래 고향은 환국이라 볼 수밖에 없습니다.

- 그러면 배달국倍達國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앞서이 역시 환국에서 나왔다, 하셨는데 어떤 과정을통해 국통國統이 계승됐습니까?
무엇보다 배달을 세운 환웅이 환국의 마지막 환인으로부터 환국의 정통 계승자로 지명됐습니다. 3,300여 년간 지속된 한 시대(환국)가 저물고 또 하나의 거대한 새 시대(배달)가 시작된 것입니다.

6천년 전 기후변화 및 인구 증가와 물자 부족으로 백성들의 삶이 어려워지자 환국 가운데 서자부庶子部 부족의 환웅이 새로운 터전을 개척해야겠다, 갈망했습니다. 이에 삼위산과 백두산을 두루 살펴 본 환국의 마지막 통치자 지위리智爲利 환인께서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한 곳’이라면서 백두산을 새 삶의 터전으로 정했습니다. 그리고는 환웅을 동방 개척의 선봉장으로 세우셨습니다. 백두산을 향해 떠나는 그에게 환인은 국통 계승의 상징으로 천부天符와 인印을 내려주시고 문명개척단 3천 명을 붙여 주었습니다.(『삼성기 하』, 『태백일사』).
부족을 이끌어 백두산에 도착한 환웅은 도읍을 신시神市에 정하고 백두산 신단수에서 삼신상제三神上帝님께 천제를 올려 나라 세움을 고했습니다. 이렇게 거발환居發桓 환웅이 세운 동북아 한민족의 나라, 배달 시대가 시작됐습니다.

환국의 마지막 환인께서 환웅을 환국의 정통 계승자로 지목하였는데, 그 증표가 바로 천부와 인입니다. 천부는 태고의 문서로, 환인은 이것을 환웅에게 ‘세상을 다스리는 권한의 표증’으로 내려주셨습니다. 인은 ‘환국의 종통宗統을 전한다’는 것을인증하는 도장으로 왕의 옥새와 같은 것입니다.

환국의 마지막 환인 천제로부터 천부와 인을 내려받은 거발환 환웅은 이들 증표와 함께 장차 국가를 다스려 나갈 ‘통치이념’도 전수받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홍익인간弘益人間 곧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라’는 이념이었습니다.

- 앞서 환국에 대해 질문했던 것처럼, 『환단고기』 이외에 배달국의 존재를 보여주고 알게 하는 그 밖의 기록이나 사료, 유물 같은 것이 있을까요?
많지요. 오늘은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 두 가지만 이야기한다면 하나는 치우천왕의 행적, 그리고 다른 하나는 「천부경」입니다. 먼저, 치우에 대해서는 중국의 25사史 가운데 첫 번째 사서인 사마천의 『사기』 첫 부분 「오제본기五帝本紀」에 비교적 자세히 서술되어 있습니다. 사마천은 「오제본기」에서 헌원과 치우 사이에 벌어진 탁록대전을 “치우가 난을 일으키며 황제의 명을 듣지 않자 이에 황제는 제후들로 군대를 징집하여 탁록의 들에서 싸워 드디어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고 서술했습니다. 이 기록의 핵심은 ‘금살치우禽殺蚩尤(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는 네 글자입니다. 헌원을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면서 치우에 대해 왜곡된 기록을 한 것입니다.

그 후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진서晉書』 『송서宋書』 『양서梁書』 『진서陳書』 『북제서北齊書』 『주서周書』 『수서隋書』 『구당서舊唐書』『신당서新唐書』 『송서宋史』 『명사明史』 『청사고淸史稿』 등의 정사와 『장자莊子』 『한비자韓非子』 『여씨춘추呂氏春秋』 『관자管子』 『포박자抱朴子』 『일주서逸周書』 『태평어람太平御覽』 등 제자백가서에도 치우에 대한 기록이 보입니다. 우리 사서로는 『환단고기』 외에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高麗史』 『규원사화揆園史話』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동사강목東史綱目』 등이 치우에 대해 쓰고 있습니다.


-그러면 치우 천왕과 황제 헌원이 모두 배달시대 인물이었다는 말씀인가요?
치우 천왕과 황제 헌원은 약 4천7백 년 전 동시대에 공존한 인물입니다. 배달국의 임금 치우 천왕은 재위 초기 인접한 신농국이 제8대 유망楡罔에 이르러 쇠퇴하자 서방으로 출정해 지금의 산동성, 강소성, 안휘성을 배달의 영내로 흡수했습니다. 그런데 이 틈을 타서 서토 지역의 일개 제후였던 헌원이 치우 천왕을 밀어내고 동북아의 천자가 되겠다, 일어났습니다. 이에 급히 말머리를 돌린 치우천왕은, 탁록 벌판에서 헌원의 군대와 맞서 10년 동안 73회에 걸친 접전을 치러 마침내 헌원을 굴복시켰습니다.

-치우는 금속무기를 쓴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렇다면 배달족이 동아시아에서 금속무기를 처음 썼다,그렇게 볼 수 있나요?
『환단고기』 가운데 「삼성기」 하에는 “다시 몇 세를 내려와 14세 자오지 환웅(치우천왕)이 계셨는데, 이 분은 신이한 용맹이 매우 뛰어났다. 구리와 철로 투구를 만들어 쓰고(=동두철액銅頭鐵額) 능히 안개를 일으키며 구치九治를 제작해 광석을 캐내고철을 주조해 무기를 만드시니 천하가 크게 두려워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동두철액은 곧이곧대로 해석하면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를 가졌다’는 것이지만 구리와 철로 투구를 만든 것으로 봐야 합니다. 이를 통해 치우의 시대가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로 이어지는, 금속무기를 사용하던 시대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마천 『사기』의 해설서인 『사기정의』에도 보면 ‘치우 군대가 금속투구를 머리에 쓰고 큰 쇠뇌(=太弩)와 같은 병장기를 갖추고 출전하여 그 위엄을 천하에 떨쳤다’고 했습니다. 또 『관자』에서도 “갈로산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물에는 철이 섞여 있다. 치우가 이를 받아 제련하여 칼, 갑옷, 창 등을 만들었다.(葛盧之山發而出水, 金從之, 送尤受而制之以爲劍鎧矛戟)”고 상세히 서술했습니다. 중국 사서들이 이처럼 치우의 무기를 세밀히 묘사한 것을 뒤집어 보면, 헌원의 군대는 그만한 무기를 가지지 못했던 것을 은연 중 고백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치우천황은 동북아에서 가장 먼저 청동 무기를 썼으며 금속 문명의 선진 주자였습니다.


-배달국 시대를 드러내주는 「천부경」이란 무엇입니까?
한민족과 인류의 시원 모체종교를 신교神敎라합니다. 신교는 삼신상제님과 그 가르침을 받드는 우리 고유 종교이자 생활문화입니다. 이 신교의 3대 경전이 있는데 「천부경天符經」과 「삼일신고三一神誥」와 「참전계경參佺戒經」이 그것입니다.
「천부경」은 한민족의 우주론이라 할 수 있고, 「삼일신고」는 신교의 세계관과 신관, 상제관, 인간관, 수행관의 정수를 담은 글입니다. 「참전계경」은사람이 하늘과 하나 되어 완전한 인간으로 살기 위해 연마해야 할 생활 실천의 계율을 기록한 것입니다. 『환단고기』의 『태백일사』에 「천부경」 전문全文과 그 유래가 쓰여 있습니다. 물론 『환단고기』에는 「삼일신고」의 유래와 그 전문 그리고 「참전계경」의유래도 실려 있습니다.

이 가운데 특히 「천부경」은 인류사 최초의 경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천부경」에서 ‘천부’는 ‘하늘의 섭리를 나타낸 부호’라는 뜻입니다. 말 그대로 「천부경」은 하늘의 이치와 법칙을 인간 세상에 드러내고 하늘의 꿈을 전하는 경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천부경」은 경학經學(경학 연구)의 역사상 네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인류 시원국가인 환국에서 선언되었기 때문에 인류 최초의 경전입니다. 둘째,하늘의 신권神權을 드러내는 권위의 상징체계로 상제님께서 하늘의 이치와 섭리를 인류에게 선포한 계시록입니다. 셋째, 우주 변화의 신비를 수數로써선언하고 수로써 깨닫게 하는, 무궁한 상징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넷째, 인류 역사상 수많은 우주론들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우주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천부경」은 81글자로 된 짧은 글입니다. 하지만 「천부경」은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로 시작해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로 끝나는 그 81글자에 태고시대, 아니 오늘까지도 절대적인 우주론의 핵심 진리를 담고있습니다. 「태백일사」에는 “「삼일신고」의 5가지 근본 사상도 「천부경」에 뿌리를 두고 있고, 그 궁극적인 정신도 「천부경」의 중일中一 정신의 이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실로 「천부경」은 신의 가르침을 받아 적은 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아가 「태백일사」는 고려 때 목은 이색과 복애 범세동(「북부여기」의 저자인 복애거사)이 「천부경 주해」를 남겼다고도 전합니다. 이로 미루어 고려시대만 해도 「천부경」이 학계에서 지식인들 사이에 소통되거나 연구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오늘날에도 뜻있는 학자들이 「천부경」의 가치를알고 그 해석과 연구에 진력하고 있으니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처럼 귀중한 「천부경」이 배달국 시대에 생겨났다는 것인가요?
사실 『환단고기』에 따르면 「천부경」은 배달국 이전 환국시대부터 구전돼 왔습니다. 그러다 거발한 환웅께서 하늘의 뜻을 받들어 배달국을 세운 뒤 신지神誌 혁덕赫德에게 명해서 구전되던 것을 당시 상형문자인 녹도문鹿圖文으로 기록하게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천부경」원본입니다.

그 후 고조선 때 와서 신지(※앞의 배달국 때 신지와는 다른 이)가 돌에 전서篆書로 「천부경」을 새겨 태백산에 세웠습니다. 이를 전고비篆古碑라 합니다. 다시 후에 신라의 석학 최치원 선생이 전고비를 보고 이를 한문으로 해석해서 첩帖으로 만들에 세상에 전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어렵게 전해진 「천부경」은 유학을 숭상한 조선에 와서 등한시되거나 부정되어 대중화되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최치원의 한문 「천부경」이 나중에 행촌 이암을 거쳐 이맥의 「태백일사」에 기록되고 이것이 『환단고기』에 수록되면서 대중에 전해지게 됩니다. 이 한문 「천부경」은 누가 새겼는지는 모르지만 묘향산 석벽石壁에도 새겨졌는데 나중에 계연수 선생이 이를 발견하고는 탁본했다고 합니다.
환국시대 이래 계연수 선생까지 수천 년 세월입니다. 그것이 『환단고기』를 거쳐 마침내 오늘까지 전해진 것은 참으로 신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천부경」이 우리에게 알려지고 그 가치가 전해진 것은 『환단고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배달국에서 단군조선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또 어떻습니까?

『환단고기』는 인류 최초 국가가 환국이라고 선언합니다. 환국은 한민족과 인류의 뿌리인 환족桓族이세운 나라입니다. 환국은 제7세 환인천제까지 계승됐고 총 3,301년 동안 존속했습니다. 이 환국의 아홉 족속이 세계에 퍼져 동서 시원문명을 만들어냈습니다. 그 중 한 무리가 백두산을 중심으로 나라를 세웠고 그것이 바로 한민족의 뿌리, 배달국입니다.

배달국은 초대 거발한 환웅 이래 18세까지 이어지며 존속했습니다. 초대 환웅이 배달을 개국한지 1,500여 년 세월이 흐른 뒤 역사의 막을 내리고 새로운 왕조가 나타나게 됩니다. 배달의 마지막 환웅인 거불단 환웅이 세상을 떠나고 단군왕검이 38세 나이로 하늘의 아들, 천자天子로 추대돼 제위에 오릅니다. 바로 이때가 앞서 배달국 때 신시에 도읍을 정한 후 1565년 지난, 기원전 2333년입니다. 단군기원 원년이지요. 아시다시피 우리가 지금 우리 고유의 연도를 나타낼 때 사용하는 단기檀紀는 이해를 시발始發로 합니다. 그러니까 2014년 올해는 단기 4347년입니다.

고조선을 개국한 단군왕검은 그가 14세 때부터 24년간 웅씨족 나라의 비왕裨王2으로 있었지만, 사실 그때부터 이미 제왕 수업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배달국 말기에 동북아 정세가 혼란에 빠지자 그 주변의 부족들을 통일해 나라를 세웁니다. 조선입니다. 우리 교과서는 이를 고조선이라 하는데 이는 나중에 나온 이씨 조선과 구분하기 위한 것이고 원래 국명은 조선입니다. 단군왕검 역시 조선의 개국시조로서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리고 송화강 유역의 아사달(※아침 태양이 빛을 비추는 탁 트인 넓은 땅이란 의미)에 도읍을 정하였습니다. 이 아사달은 현재 하얼빈 지역으로 추정됩니다. 이 단군조선은 제47세 단군까지, 2,096년 동안 나라가 지속됐습니다. 환국에서 단군조선까지 6,962년입니다. 세상 어떤 나라, 어떤 민족이 이런 역사를 갖고 있습니까. 그처럼 광대한 자기 역사를 잃어버리고도 넋 놓고 있는 민족은 또 누가 있겠습니까.

-혹시 배달국의 존재를 증명하는 유물이나 유적 같은, ‘물적 증거’도 있습니까?
신석기시대에 해당하는 배달국의 존재를 증명하는 고고학 자료로는 지금은 중국 땅인 저 만리장성 이북 요하지역에서 지난 100여 년 전부터 발굴된 홍산문화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중국 땅인 저 만리장성 이북 요하지역에서 홍산문화 유물이 다수 발견, 발굴되고 있습니다. 이 홍산문화에 대해서는 지난 달 상세히 이야기 한 바 있습니다. 중국은 동북공정등을 통해서 이 홍산문화를 중화문명의 시발점으로 만들어 북방 고대민족의 상고사와 고대사를 중국사로 편입하려 합니다. 하지만 그런 중국의 의도와 달리 홍산문화는 오히려 한민족의 뿌리역사, 뿌리문화를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적봉赤峰시의 한 조그마한 마을인 우하량 제2지점에서 3층으로 이루어진 5,500년 전의 원형圓形제단과 방형方形 돌무지무덤이 발굴됐습니다. 제단과 무덤 모두 돌을 쌓아올려 만든 것으로 단군조선을 세운 주류세력인 동이족의 독특한 문화, 생활양식입니다. 이 우하량의 적석총 유적에서는 석관묘石棺墓도 발견됐습니다. 동이족은 시신을 매장할 때 돌을 가지고 축조했는데 이것이 석묘石墓입니다. 석묘 가운데 대표적인 무덤 형식의 하나가 석관묘입니다.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석관묘의 구조와 축조 방식이 동일한 무덤이 홍산문화 시기 우하량 유적지에서 발견된다는 것은 어떤 의
미이겠습니까. 이런저런 문헌으로 보아도 홍산문화와 같은 석묘 계통 묘장법墓葬法을 쓰는 나라는바로 단군조선입니다.

또 1984년 우하량 제2지점의 북쪽 산 중턱에서 거대한 신전 터가 발굴되고 이곳에서 실제 사람 크기의 황토질 점토로 만든, 가부좌 자세의 여신상이 출토됐습니다. 이 신전 터에서는 곰의 아래턱 뼈, 곰의 대퇴부, 그리고 곰 발톱 모양의 진흙 토기 등도 발굴됐습니다. 이는 홍산문화를 이끌었던 주인공의 정체를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들입니다. 일찍이 동방에서 곰을 토템으로 삼던 웅녀족이 환웅족에 의해 문명화됐다는 사실을 전하는 『삼성기』의 기록과도 일치합니다. 이와 함께 가면과 옥 장식 등에 곰의 형상이 투영된 유물도 대거 발견돼서 곰 토템을 지닌 웅족의 존재를 보여주는데, 이 또한 웅족과 결합했던 배달국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증거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제 오늘도, 마무리 말씀을 하실 때가 됐습니다.
서울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보면, 고조선실 앞의 설명문에 ‘최초 국가 고조선’이라고 써 놓았습니다. 이게 우리 정부, 우리 국민의 한민족 상고사에 대한 인식의 현주소입니다. 환국은 물론 배달의 역사는 그 흔적조차도 없습니다.
우리 중고교 역사 교과서는 어떻습니까. 대부분 고조선 건국을 사실로 기록하고 있으나 아직도 일부 출판사에서는 단군조선에 대해 “서기전 2333년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했다고 한다”라고 남 말 하듯 기술돼 있습니다. 더욱이 일상에서는 그마저도 곰과 호랑이니, 마늘과 쑥이니 하면서 유치한 신화로 치부되기 일쑤입니다. 교과서에는 고조선 이후에 대해서도, 밑도 끝도 없이 기자조선이니 위만조선이 한사군이니 하면서 중국과 일본이 왜곡한 역사가 그대로 쓰여 있습니다. 그렇게 갈팡질팡 하다 불쑥 고구려와 삼국시대로 역사 서술이 이어집니다. 참담합니다.

환국―배달―단군조선의 7천 년 역사는 기원전239년 북부여로 이어지고 나중에 고주몽이 이를 다시 고구려라는 이름으로 바꿉니다. 우리 역사의 국통맥은 이렇게 분명합니다. 중국과 일본은 없는 역사도 만들어서 자국의 얼굴을 세우고 정통성을 내세우려 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있는 역사마저 잃어버리고는 뿌리 없는 민족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역사를 잃고 뿌리가 잘리고 영혼마저 사라진 한민족이 동북아 역사전쟁의 중심 무대에서 어떤 미래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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