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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일사로 본 천자의 나라, 고려

환단스토리 | 2014.03.28 15:35 | 조회 10675

태백일사로 본 천자의 나라, 고려

태백일사는 여덟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민족의 역사철학을 전하는 삼신오제본기, 우리 상고사를 정리한 환국본기, 신시본기, 삼한관경본기 그리고 우리 민족의 정신문화를 담고 있는 소도경전본훈, 주체적 시각에서 국통맥을 정리한 고구려국본기, 대진국본기, 고려국본기로 이루어져 있다. 이번 호에서는 마지막으로 고려국본기와 그 외 관련 사서의 핵심을 정리해 본다.

[1세 태조 왕건] 후삼국을 통일하다

고려국본기의 시작은 태조太祖 왕건王建에 대한 이 야기이지만 실제로는 고구려왕족의 혈통인 안승安勝의 이야기로 서두가 전개되고 있다. 안승은 고구려 28대 마지막 왕인 보장왕의 서자 또는 외손자로 알려지는 인물이다. 668년 고구려 멸망 뒤, 숨어지내던 안승은 검모잠에 의해 후고구려왕으로 추대되었고 신라에 도움을 요청하며 고구려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내분이 일어나 안승은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에 투항하게 된다. 안승은 신라 문무왕에 의해 674년 금마저(지금의 익산) 일
대에서 보덕국의 왕으로 봉해지고 680년에는 문무왕의 누이동생과 혼인하였다. 그러나 683년(신문왕 3년)에 신문왕은 보덕국을 폐하고 안승을 불러들여 소판蘇判의 벼슬을 주어 신라 귀족을 만들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이러한 조치에 불만을 품은 부하 대문大文의 무리가 금마저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신라 관군에 진압되면서 고구려 부흥운동으로 시작된 안승의 자취는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200여년이 지나 안승의 후손 중에 궁예弓裔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태어날 때 집 위로 흰 빛이 무지개처럼 하늘에 뻗치는 것을 보고 신라 일관日官이 불길한 징조로 판단하여 궁예를 죽이려 했으나 어머니가 보물을 주고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게 되었
다. 신분이 밝혀지면 죽음을 당하는 상황이었기에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세달사에서 지내던 중에 하루는 까마귀가 바리때 안에 무언가를 떨어뜨리고 날아간 일이 있었다. 그것은 점을 칠 때 쓰는 상아로 만든 점대였는데 거기에는 ‘왕王’ 자가 새겨져 있었고 궁예는 자신의 천명을 예감했다.

당시 고구려 유민들은 신라에 대한 원망이 깊게 쌓여 있었다. 특히 궁예는 남으로 순행하다 흥주사에 이르러 벽에 걸린 신라 왕의 초상화를 보고 칼로 베어버렸다는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신라에 상당한 증오심을 품고 있었다. 궁예는 신라를 삼켜버리려는 뜻을 품고 도읍을 멸하리라 부르짖으며 신라에서 귀화해 오는 사람을 모조리 죽였다. 궁예의 세력이 급성장하자 패서 즉 예성강 이북 지역의 호족들이 차례로 궁예에게 자진 투항하였는데, 896년 송악(개성)의 호족이었던, 왕건의 아버지 왕륭이 궁예에게 투항했고 이때 왕건도 궁예의 휘하에 들어가 뒤에 후고구려의 세력 확장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901년 궁예는 철원에 도읍을 정하고 후고구려를 건국하였고 904년에는 국호를 마진摩震, 911년에는 태봉泰封으로 변경하였다. 이때부터 궁예는 스스로를 미륵불이라고 칭하고 행차할 때면 금관을 머리에 쓰고 직접 경문 20권을 짓기도 했는데, 당시 석총釋聰이라는 승려가 이 경문을 보고 “모두 사설괴담邪說怪談으로 세상 사람에게 가르칠 것이 못 된다”고 한마디 하자 궁예는 석총을 철퇴로 패 죽이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궁예는 소위 ‘관심법’이라 칭하며 사람의 마음을 읽는 비상한 재주가 있다고 스스로 떠벌이며 왕후와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이고 여러 장수와 신하들을 역모죄로 몰아 죽였다.

이렇게 포악한 정치가 계속되자 918년 왕건이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 여러 장군의 추대를 받아 궁예를 축출하고 고려를 건국했다. 왕건은 궁예와 달리 유화적인 정책으로 호족들을 통합해 나갔다. 926년부터는 대진국 유민을 받아들이고 935년에는 신라 경순왕이 자발적으로 그에게 투항하였다. 935년에 견훤이 아들 신검에게 쫓겨나 투항해오자 936년 대병을 일으켜 후백제를 무너뜨리고 후삼국을 통일했다.

문득 ‘이맥 선생은 왜 고려 건국과정에 안승과 궁예의 이야기를 길게 써 놓았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것은 고려 건국의 배경에는 고구려 계통의 힘이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음을 말하고자 함이 아닐까. 고구려 멸망의 한, 유민들의 쌓인 한은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는 해소되었을 것이다. [지도]

[6세 성종] 거란의 침략을 물리치다

916년 통일국가를 세우고 946년 국호를 요로 정한 거란은 993년에 소손녕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로 쳐들어왔다. 침략의 명분은 고구려의 옛땅을 고려가 침식했으니 내놓으라는 것과 고려가 송과 교류를 끊고 거란을 섬기라는 요구를 수용하라는 것이다. 당시 고려 조정에서는 항복하자는 의견과 서경(평양) 이북의 땅을 요에 떼어주고 화친하자는 의견으로 갈렸다.

이때 나선 인물이 서희徐熙(942∼998) 장군이다. 단신으로 거란 진영에 가서 소손녕과 담판을 벌이게 된다. 서희는 옛 고구려 땅은 거란 소유라는 적장의 주장에 대해 고려가 고구려의 맥을 이었다는 점과 고려의 도읍이 평양이라는 점을 논리적으로 설득하였다. 그리고 거란이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땅을 돌려준다면 친교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는 점을 조리있게 설명하여, 결국 거란군을 철수시켰다. 적진에서 거란과의 기싸움에서 눌리지 않고 당당하게 주장을 편 강직한 인품에 소손녕이 굴복하여 연회를 베풀고 위로한 뒤에 서희를 전송한 것이다. 고려는 거란의 도움으로 압록강 동쪽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흥화진, 용주, 통주, 철주, 귀주, 곽주를 포함하는 강동 6주를 되찾게 되었다. 거란의 입장을 정확히 파악하고 세 치 혀로 싸우지 않고 승리를 거둔 서희는 이후 대한민국 최고의 외교관으로서 모범이 되고 있다.

거란은 이후에도 계속 침략해왔는데 이때 물리친 대표적 인물이 강감찬姜邯贊(948∼1031) 장군이다. 그는 진주 강씨의 시조이자 고구려 26세 영양제 때 수나라군을 격파한 고구려의 명장인 강이식 장군의 후손이다. 1018년 거란은 고려 현종이 친히 입조하지 않은 것과 강동 6주를 돌려주지 않은 것을 구실로 삼아 소배압에게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게 했다. 이때 강감찬은 상원수가 되어 곳곳에서 거란군을 물리쳤고 1019년에는 귀주에서 살아 도망간 적의 군사가 겨우 수천에 이를 정도로 거란군을 섬멸시켰다. 이것이 바로 귀주대첩이다. 이후 고려는 천리장성을 쌓고 요나라의 침입
에 대비했다. [사진]

[16세 예종] 거란과 여진을 정벌하다

고려의 16세왕 예종은 여진의 성장이 가속화되고 반대로 거란의 힘이 약화되자 그 틈을 이용하여 서쪽으로는 거란에 내주었던 압록강변의 두 성(내원, 포주)을 찾고 동쪽으로는 두만강으로 진출하려고 했다.

1107년 예종은 윤관을 상원수, 오연총을 부원수에 임명하여 17만 대군을 거느리고 동북지역의 여진을 선제공격하게 했다. 윤관은 여진과 싸워 웅주, 영주, 복주, 길주, 함주, 공험진, 의주, 통태진,평윤진 등의 9성을 쌓아 백성을 이주시킴으로서 동북지역에 9성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9성을 유지하는 일이 고려로서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여진이 9성을 회복하기 위해 거의 매일같이 싸움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여진은 동북 9성을 돌려주면 고려에 공물을 바치는 것은 물론이요 다시는 변방을 넘보지 않겠다고 제의했다. 그러자 고려 조정에서는 9성을 돌려주는 문제를 놓고 일대 논란이 벌어졌다. 9성 반환론을 처음 제기한 김인존은 9성 때문에 여진과 고려 양측이 너무 많은 피를 흘렸다고 언급하면서 고려가 비록 9성을 차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거란과의 국경 분쟁을 일으킬 조짐마저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되면 고려는 졸지에 여진과 거란을 상대로 불리한 전쟁을 치러야 하기 때문에 9성을 돌려주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이었다. 대세는 이미 반환파에 기울어져 갔다. 물론 예종은 처음부터 영토확장 의지를 갖고 있었기에 내심 반환반대파를 지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도 대세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1109년 여진에게 9성을 반환했다. 철수작업이 진행되는 가운데 여진과의 전쟁에서 몇번의 패배로 많은 군사를 잃은 윤관과 오연총에 대한 탄핵상소가 이어졌다. 예종은 간관들을 설득하여 결국 오연총은 파면하고 윤관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이렇게 고려가 내부문제를 앓고 있을 때 중국에서는 급속도로 역학구도의 변화가 일어난다. 여진은 꾸준히 성장하여 1115년 아골타가 금을 건국하였고, 여진의 팽창에 따라 압록강변에서 거란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1116년 발해 유민들이 고구려의 왕족 고영창을 내세워 대발해국을 세웠다.

얼마 후 금나라가 압록강변의 내원성과 포주성을 공략하자 예종은 추밀원에 지시하여 금나라에 사신을 보내게 하고 포주성은 고려의 옛 영토이니 돌려달라고 요구한다. 이에 금나라는 고려가 자체 힘으로 포주성을 차지해도 무방하다고 통보해온다. 금나라의 묵인을 받은 고려는 내원과 포주에 머무 르고 있던 거란의 야율령과 연락을 취한다. 야율령은 고려에 쌀을 원조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었는데, 고려는 두 성을 포기하면 쌀을 원조받을 이유가 없지 않겠느냐며 두 성을 고려에 양도할 것을 요구한다. 이에 더 이상 그곳에 머무를 수 없다고 판단한 야율령은 내원과 포주를 고려에 양도한다는 공문을 보낸다. 이렇게 하여 고려는 1117년 거란에 빼앗겼던 내원성과 포주성을 되찾게 되었다(『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록』 266~278쪽 정리).[지도]

[18세 의종~31세 공민왕] 무신정권 100년& 몽골의 속국 100년 시대

고려의 18세 의종 24년(1170년), 정중부의 난으로 시작된 무신정권 시대는 정중부, 이의민, 최충헌으로 이어지면서 왕의 세력은 무기력해진 상태가 되었다.

1225년 몽고의 침입 1225년 몽고사신이 고려에 왔다가 귀국길에 도적에게 피살당하자 몽고는 보복을 선언하고 1231년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침략했다. 무신정권은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고 몽골과의 전면전을 벌이며 항전을 계속했지만 몽골의 연이은 침략으로 수많은 고려인이 살상되고 국토가 짓밟혔다.

1270년 무신정권의 몰락 이후 24세 원종 때는 왕 중심의 친몽파親蒙派와 무신정권 중심의 반몽파反蒙派로 나뉘어 대립하다가 1270년 무신정권이 무너지면서 상황은 반전되었다. 고려에 친몽정권이 들어서고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하게 되면서 고려 조정은 원에 복속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반대한 삼별초는 진도와 제주도로 옮기며 대몽항쟁을 계속했지만 1273년 여몽연합군에 토벌되고 만다.

원의 속국시대 고려 왕실에서는 원나라에 굴복하여 원의 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이면서 원의 부마국이 되었다. 25세 충렬왕(경효왕)부터 26세 충선왕(선효왕), 27세 충숙왕(의효왕), 28세 충혜왕(헌효왕), 29세 충목왕(현효왕), 30세 충정왕(저왕)까지 6대가 몽고에 충성한다는 뜻으로 ‘충忠’ 자를 사용하여 왕호로 삼았다. 또 원나라가 일본원정을 위해 설치했던 정동행성이 내정간섭기구로 바뀌면서 고려는 원나라의 지나친 간섭을 받는 속국으로 전락한 것이다.

원나라 배척운동 그러다 31세 공민왕(경효왕)이 즉위할 무렵 상황은 변하기 시작했다. 원나라가 홍건적의 봉기로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하자, 공민왕은 원나라 배척운동을 벌여 빼앗긴 영토를 수복하여 국위를 떨치면서 원의 1백년 식민지배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공민왕은 먼저 변발, 호복 등 몽고풍속을 금지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친원파 권문세족인 기철, 권겸, 노책 등을 제거했다. 당시 기철을 비롯한 일족은 여동생이 원나라 왕후가 되자 고려왕보다 더 큰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고려국본기에는 친원파를 제거하는데 공을 세운 인물로 정지상鄭之祥에 대한 기록이 있다. 묘청의 난에 연류되어 김부식에게 피살된 정지상鄭知常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 정지상鄭之祥이 전라도 안렴사로 전주에 있을 때의 일이다.

고려인으로 원나라에 귀화하여 관리가 된 야사불화埜思不花가 고려에 와서는 가는 곳마다 방종과 횡포를 일삼았다. 그가 전주에 오자 정지상은 이들을 공손히 맞이하였으나, 거만한 야사불화는 극진한 대접과 뇌물을 요구였다. 이를 거절하자 정지상을 포박하여 옥에 가두었다. 이때 미스테리한 사건이 발생하는데 정지상이 “나라에서 기씨 일족을 처형하고 원과 국교를 단절하고 김경직을 원수로 삼아 압록강을 지키게 했다”고 호통치자 관리들이 정지상을 풀어준 것이다. 정지상의 카리스마에 눌려 거짓말이지만 통한 것이다. 정지상은 뜻이 맞는 사람들을 모아 야사불화의 무리들을 잡아가두고 야사불화가 차고 있던 금패金牌를 빼앗아 서울로 달려갔다. 가는 도중 공주에서 야사불화의 동생 서응려徐應呂를 잡아 철퇴로 쳐죽이고 이 사실을 공민왕에게 아뢰었다.

이 소식을 들은 공민왕은 화들짝 놀라고 원나라의 보복이 두려워서 도리어 정지상을 옥에 가두고 전주목사와 관리들을 체포하고, 야사불화에게 어주를 하사하고 금패를 돌려주었다. 정지상은 옥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는데 반원개혁정치를 펴던 공민왕은 원의 눈치를 보며 주춤거리다가 다시 마음을 강하게 먹고 이 사건을 마무리했다. 공민왕은 대궐에서 잔치를 베푼다는 명목으로 친원파 무리들을 불러들여 처형한 것이다.

이후 공민왕은 정동행성을 폐지하고 쌍성을 수복한다. 또한 원나라 연호의 사용을 중지했다. 이후 정지상은 석방되어 순군제공이 되었고 다시 호부시랑, 어사중승을 거쳐 판사가 되었다. 원나라를 믿고 횡포를 일삼던 무리를 물리치고 조국의 치욕을 씻고자 한 정지상의 뜻이 공민왕으로 하여금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우게 한 자극이 된 것이다.

[31세 공민왕 이후] 고려의 망국과정

『고려사』 권44 말미에는 다음과 같은 사관의 논평이 있다.

“왕이 즉위하기 이전에는 총명하고 어질고 후덕하여 백성들의 기대를 모았고, 즉위한 후에는 온갖 힘을 다해 올바른 정치를 이루었으므로 온 나라가 크게 기뻐하면서 태평성대의 도래를 기대했다. 그러나 노국공주가 죽은 후 슬픔이 지나쳐 모든 일에 뜻을 잃고 정치를 신돈에게 맡기는 바람에 공신과 현신이 참살되거나 내쫓겼으며 쓸데없는 건축공사를 일으켜 백성의 원망을 샀다.” (史臣贊曰,“ 王之未立也, 聰明仁厚, 民望咸歸焉, 及卽位, 勵精圖治, 中外大悅想望大平. 自魯國薨逝, 過哀喪志, 委政辛旽, 逐殺勛賢, 大興土木, 以斂民怨. 『-국역 고려사』, 경인문화사)

여기서 말해주듯 공민왕은 1365년 노국공주가 산고를 이기지 못하고 죽은 이후로 노국공주에 대한 집착으로 병적 증세를 보이며 개혁적인 성향을 잃고 정치를 소홀하게 했다. 1368년 주원장朱元璋이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명나라를 건국하자 고려는 신흥강국 명왕조와 북원(원왕조의 잔존세력) 사이에서 눈치를 보는 난처한 입장에 있었고 백성들은 왜구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1371년 윤3월에는 북원의 요양성 평장사 유익劉益과 왕우승王右丞은 명나라에 귀부하려 하다가 명나라가 이곳의 주민들을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킬까 우려한 나머지, 요양이 본디 고려 땅이니 고려 조정에서 귀화를 요청하면 이주를 면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해 고려에 사자를 보내 의사를 타진해왔다. 이때 고려 조정은 의론이 일치하지 않고, 국사에 어려움이 많아 대응을 못했다.

원나라 말기의 지방정권 정복활동을 계속하던 주원장이 대륙 서쪽의 명옥진明玉珍이 세운 왕국을 평정하자 고려는 정몽주를 보내 하례하게 했다. 당시 명나라는 전쟁에 필요한 말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고려는 거부를 못하고 있었다. 1374년 명나라가 제주도의 말 2천 필을 가져가야 한다면서 채빈과 임밀 등 사신을 보내왔다. 공민왕은 할 수 없이 최영을 시켜 제주도의 말 1천 필을 빼앗아왔다. 그런데 이때 공민왕이 내시의 칼에 처참하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살인범을 체포한 이인임일파는 10살 나이의 어린 우왕을 즉위시키고 정권을 장악했다. 일은 계속 꼬여 이번에는 명나라 사신 호송책임을 맡은 김의金義가 채빈을 살해하고 임밀을 붙잡고 북원으로 도망가고 말았다.

이처럼 고려 조정에서 의견이 분열되는 사이 귀화 의사를 타진했던 유익劉益 등 은 명나라에 투항하여 금주, 복주, 개평, 해성, 요양 등을 바치고 말았다. 이에 대해 이맥은 고려국본기에서 “오호라! 당시 청론淸論을 떠들던 무기력한 자들이 한갓 편안함을 좇기만 일삼아 좋은 기회를 스스로 잃어버리고 마침내 옛 강토를 회복하지 못하였으니 뜻 있는 사람의 한恨이 이 때문에 더욱 깊어지는구나”라고 통탄하고 있다.

전국 각지에서 왜구의 노략질이 계속되고 최영과 이성계는 왜구 토벌에서 공적을 세워나갔다. 1388년 2월 명나라는 철령 이북의 땅은 원나라에 속하던 땅이니 이제부터는 명나라가 차지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하자 우왕은 최영의 뜻을 받아들여 요동정벌 계획을 세웠다.

팔도도통사로 임명된 최영은 이성계에게 요동정벌을 명령했다. 그러나 친명파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하고 개경을 접수했다. 이후 이성계는 최영을 귀양보내고 우왕을 내쫓았으며 대신 아홉 살 창왕을 내세 웠으나, 창왕은 1년 만에 강화도로 쫓겨나고 만다. 이후 공양왕을 옹립하고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는 1392년 조선을 건국했다. 이로써 500년의 고려 왕조는 문을 닫게 된다. [사진]



고려 왕조를 뒤흔든 묘청의 난(17세 인종, 1135년)

고려국본기를 반복해서 읽다보면 김부식의 모함에 대해 윤언이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자해표自解表에서 한번쯤 멈추고 갖가지 생각에 잠기게 된다. 묘청이 이끄는 서경파와 김부식이 중심이 된 개경파 사이에 얽힌 복잡한 갈등관계를, 그것도 천년 전 격동의 시기에 일어났던 복잡한 사건을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기록에 의존해서 큰 맥락을 파악할 수는 있다.

윤언이尹彦頤(1090~1149)는 윤관의 넷째 아들로서 인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당시 김부식金富軾(1075~1151)과 쌍벽을 이루었던 인물이다. 사실 윤언이와 김부식의 관계는 상당히 오래 전부터 뒤틀린 관계였다.

윤언이는 아버지 윤관이 지은 대각국사 의천義天의 비문을 예종이 김부식金富軾에게 고치게 하자, 김부식이 사양하지 않고 함부로 고친 것에 대해 섭섭함을 갖고 있었다. 1133년 인종의 명을 받아 김부식이 주역 강의를 했는데 이때 윤언이는 김부식이 대답하지 못할 정도로 반론을 제기하여 이번에는 김부식이 원한을 품게 되었다.

1135년 서경에서 ‘묘청의 난’이 일어났다. 서경파를 중심으로 하는 서경 천도운동이 결국 개경파의 격렬한 반대로 실패로 돌아가자 서경파 중에서도 강경파였던 묘청이 조광, 유참 등과 함께 서경을 기반으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때 인조로부터 묘청 토벌을 명받은 김부식은 먼저 개경에 머물고 있던 서경파 인물들인 정지상鄭知常, 백수한白壽翰, 김안金安 등의 목부터 베었다. 이것은 개경파가 서경파를 제거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가 다분했다고 한다.

윤언이는 김부식의 부하가 되어 난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웠지만 이 과정에서 김부식은 윤언이가 공을 세우지 못하게 하려고 그의 부대를 작전 방향과 전혀 상관없는 곳으로 보내버리기도 했다. 이후 김부식은 묘청의 난을 함께 진압했던 윤언이에 대해‘ 정지상 등과 결탁하여 칭제건원을 언급하고 붕당을 조성하여 반역을 꾀했다’는 상소를 인종에게 올려서, 윤언이마저 좌천시켜 버렸다. 이로써 김부식은 고려의 정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광주목사로 좌천된 윤언이가 억울함을 호소하자 인종은 김부식의 상소문을 윤언이에게 보내 주었고, 이 상소문을 읽어 본 윤언이는 비로소 자신의 억울함을 표하는 상소를 올리는데, 이것이 바로 윤언이의 자해표이다. 이후 윤언이에게 사면령이 내려져서 중앙 정계로 복귀하게 되면서 김부식은 수차례 은퇴를 청원한다. 이렇게 은퇴할 때가 된 김부식이 인종의 명을 받고 만든 것이『 삼국사기』이다. 사실 윤언이는 묘청, 정지상 등이 서경 천도설을 주장하였을 때 서경 천도론에 동의하였으나, 묘청 등이 정변을 기도하자 이를 반대하였다. 그런데 김부식은 윤언이를 정지상과 내통했다고 모함한 것이다.

또한 김부식은 정지상과도 악연을 맺었다. 정지상은 서경파였기 때문에 묘청과 연결고리는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묘청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킬 때 태평스럽게 개경에 남아있었다는 것만 봐도 반란과는 연관이 적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김부식은 묘청의 난을 진압하기 전에 먼저 정지상을 죽여버렸다.

약 백년 뒤에 무신집권기의 대표적인 문인인 이규보李奎報(1168∼1241)가 지은『 백운소설白雲小說』에 의하면 김부식이 정지상을 죽이고 난 뒤 어느 날 헛간에서 쭈그리고 앉아 큰일을 보고 있었는데, 원한을 품은 정지상이 귀신이 되어 나타나 김부식의 불알을 잡아당겨 죽였다고 전해진다.


한민족의 역사를 전수해준 고성 이李씨의 맥

고려국본기에는 고성 이씨의 중시조라 할 수 있는 이존비 선생으로부터 아들인 이우李瑀, 손자인 이암李?, 증손자인 이강李岡, 현손자인 이원李原의 맥과 연관된 부분이 있다.

이존비李尊庇(1233~1287)는 고려 25세 충렬왕 때의 문관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고 왕세자가 글을 배우던 곳인 서연에서 우리나라의 자주와 부강의 정책을 논하였다. 그는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환단桓檀·조선·북부여·고구려 이래로 모두 부강하였고 자주自主를 유지하였습니다. 또 연호를 정하고 황제라 칭한 일은 우리 태조 때에 이르러서도 실행하였습니다”라고 명시하고 충렬왕 당시의 사대적 사고가 후세의 비웃음을 받을 것이니 자강을 꾀해야 한다고 거듭 아뢰었다. 그의 주장은 비록 당시에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모두가 옳다고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충렬왕이 연경(지금의 북경)에서 돌아오는 도중에 사랑하는 연녀 생각에 다시 연경으로 돌아가려 하자 이존비가 거짓으로 시를 지어 충렬왕이 연녀를 포기하고 고려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이존비는 나중에 그 일로 인해 귀양가게 되었고 태자(충선왕)와 조정 대신들의 간청으로 다시 복직되었으나 사자가 이르기 전에 숨을 거두고 만다. 충렬왕은 몹시 슬퍼하며 왕례로 장사지내도록 했다.

그는 3남 4녀를 두었는데 고려국본기에 실린 칠언율시는 이존비가 둘째아들의 스승인 원오국사에게 보낸 시이다. 이 시는 첫째 아들 이우李瑀가 원나라 조정에 숙위宿衛로 들어가 일하고, 둘째 아들 이복구李復丘는 회당 상인에게 출가한 사실을 포함하고 있다. 복구는 원오국사 양천영에게 출가하여 뒤에 각진국사가 되었다. [사진]

이우의 아들이 바로 환단고기의 세 번째 책인『 단군세기』의 저자 행촌 이암(1297~1364) 선생이다. 행촌 선생이 일찍이 천보산天寶山에서 유람을 하다가 밤에 태소암太素庵에서 묵게 되었다. 그곳에 소전素佺이라 하는 한 거사가 기이한 옛 서적[奇古之書]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이에 이명李茗, 범장范樟과 함께 신서神書를 얻었는데, 모두 환단桓檀시절부터 전해 내려온 역사의 진결[桓檀傳授之眞訣]이었다. 이 책을 바탕으로 행촌 시중侍中이 지은 저서가 3종이 있다.『 단군세기』를 지어 시원국가의 체통을 밝혔고,『 태백진훈』을 지어 환단시대부터 전수되어 온 도학道學과 심법心法을 이어받아 밝혔다.『 농상집요』는 세상을 다스리는 실무實務관련 학문을 담은 것이다.

고려국본기에는 이암의 정신을 알 수 있는 글이 여러 군데에 있다. 고려 조정에서 국호를 폐하고 고려 내정간섭을 위해 행성을 세우고자 의논할 때, 이암이 이를 저지하기 위해 올린 상소문에서는“ 조국과 민속의 존재 당위성을 강조하며 태조왕건의 건국 정신을 일깨워주고 지금이라도 자주부강의 계책을 꾀하고 간신배의 죄를 엄히 다스리자”고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또한 신교에 대해 언급한 부분에서는“ 환웅천황의 신시개천의 의미를 강조하고 아직도 우리는 신교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구도자로서의 느낌을 말하고 있고, 어명을 받아 참성단에서 천제를 올릴 때 백문보에게 말한 내용을 보면 국가발전 차원에서 신교신앙을 강조하며 천제의 근본정신이 보은임을 말하고 있다. 혼란한 시기에 정치가로서 그리고 대학자로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고뇌하며 대책을 갈구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고려가 원나라의 침략과 통치를 받으면서도 끝내 문닫지 않고 다시 일어선 정신적 힘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암의 막내아들 이강李岡(1333∼1368)은 밀직사로서, 어명을 받들고 참성단에서 천제를 올리고 나서 시를 지었다. 복잡한 세상을 떠나 고요하고 한가로운 풍경 속에서 잠시 여유를 느끼며 그는 홍건적을 물리치고 개경을 수복한 해(1362년)를 특별히 기억하자고 말하고 있다. 이강의 친구 중에 고려국본기에는 이색이 나온다. 이색은 이암을 아버지처럼 섬겼는데 이암이 이색에게 선가적 기풍을 전해주었다고 한다. 이색은 이암의 농상집요 서문에 글을 실었다. 이강의 사위는 권근으로 고려국본기에는 권근이 참성단에서 천제드릴 때의 서고문이 있다. 서고문에는 마리산은 단군왕검께서 천제를 지내시던 곳이라고 하고 사직이 반석 위에 올라설 수 있도록 삼신께 고하고 있다.

행촌이암 선생과 일십당 이맥 선생, 해학 이기 선생과 한암당 이유립 선생이 모두 고성 이씨로서 이존비 선생의 후손이니 지금 우리에게 환단고기가 전해지는 것은 고성이씨 가문의 노력과 공헌 덕분이다.


홍건적의 침입을 막아낸 국난의 해결사, 충장 정세운鄭世雲 (1361년)

고려는 연이은 전쟁과 내란에도 불구하고 500년의 역사를 지속한 나라이다. 고려의 대외관계를 보면 11세기에는 거란과, 12세기에는 여진과, 13세기에는 몽골과 전쟁을 벌였고 14세기에는 홍건적의 침략을 물리쳤다. 홍건적은 원나라 말기 하북성 일대에서 일어난 농민반란군으로 머리에 붉은 수건을 둘러서 홍두적紅頭賊, 홍건적紅巾賊이라 불렸다. 홍건적은 원의 반격에 쫓겨 1359년 12월 고려를 침범하여 압록강 연안의 백성들을 짓밟았다. 이듬해 초가 되서야 최영崔瑩 장군의 큰 힘으로 고려는 그들을 압록강 이북으로 몰아낼 수 있었다. 1361년 10월에는 홍건적이 20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2차 침략을 감행했다. 개경이 함락되고 공민왕은 안동으로 피난을 떠났다.

이런 국난의 상황에서 해결사로 등장한 이가 정세운 장군이다. 원래 정세운은 공민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부터 수행원으로 있 었고 공민왕이 귀국한 뒤에는 왕궁 수비를 담당하고 있었다. 또한 공민왕이 개혁정치를 시작할 때 걸림돌이 된 친원파의 핵심인물 기철을 죽인 인물이다. 고려국본기에는 정세운의 성품을‘ 충성스럽고 청백하다[忠淸]’고 말하고 있다. 그는 임금이 파천播遷한 이후 밤낮으로 근심하고 분하게 여겼다. 홍두적을 소탕하고 경성을 수복하는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여겼고 임금 또한 그를 믿고 총병관으로 임명했다.

그는 “빨리 애통교서哀痛敎書를 내리시어 백성의 마음을 위로하고, 사자使者를 보내 여러 도의 군사를 독려하여 적을 토벌하게 하소서”라고 임금에게 여러 번 청원했고 마침내 20만명의 군사를 모았다. 반격준비를 마치고 전선으로 출발하려 할 때 수문하시중이었던 이암이 격려의 말을 전했다.“ 강력한 외적이 갑자기 쳐들어와 황성을 지키지 못하고 임금의 수레가 파천하여 천하의 웃음거리가 된 것은 삼한三韓의 치욕이로다. 공이 앞장서서 대의를 부르짖어 무기를 들고 군사를 거느리니, 사직이 다시 편안해지고 왕업이 중흥함이 이번 한판 싸움에 달려 있도다. 우리 임금과 신하는 밤낮으로 공이 이기고 돌아오기를 바랄 뿐이로다.”

정세운이 지휘하는 고려군은 개경을 완전 포위하여 총공격을 퍼부었고 홍건적 20만명 중에 10만명이 죽고 남은 무리는 패주함으로서 전쟁은 끝이 났다. 정세운이 아니었다면 몽골의 피해를 당한 고려의 백성들은 다시 한번 약탈과 살육을 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정세운은 승전 후에 김용金鏞의 시기심으로 인해, 김용의 사주를 받은 안우安祐에 의해 죽게 된다. 김용은 다시 공민왕을 죽이려고 했으나 최영 장군에 의해 반란이 진압되 고 결국 처형되었다. 나라를 구하자마자 시기질투로 죽음을 맞이한 비운의 장군. 그나마 환단고기에 그의 역사가 기록되어 그의 한을 달래주고 있다. (고려의 대외관계, 맨앞 지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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