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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영 박사가 들려주는 현대사 100년과 올바른 우리 역사

알캥이 | 2012.04.25 11:39 | 조회 10705

최태영 박사가 들려주는

현대사 100년과 올바른 우리 역사



1900년에서 21C에 이르기까지 100년이란 격랑의 세월을 살아온, 더욱이 우리 '현대사'의 중요한 위치에서 활동하신 분이라서 일반 시민들에게 생생한 역사관을 제시하는 것으로도 그 의미가 큽니다. 또한 현대 한국의 문제점과 대안,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한 의견도 전 분야에 걸쳐 말씀하신 데다 너무나 탁견입니다.

지금도 최태영 박사는 조금도 떨림이 없는 카랑카랑한 목소리, 뛰어난 기억력, 지팡이조차 의지하지 않고 인천 자택에서 서울에 있는 학술원이나 서울 YMCA에까지 혼자 전철을 타고 다니시는 강건함, 특히 지금도 역사책을 보시면서 한국의 역사와 비전에 대해 연구하는 젊고 건강한 모습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루가 늦기 전에 그가 일생의 정열을 쏟아 부은 상고사와 한․일관계사 등 올바른 우리 '역사'와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 1995년 11월 30일 이후 최태영 박사께서 해주신 말씀을 바탕으로 하여 작업에 들어가 1998년 1월부터는 본격적으로 문답식으로, 구술 받아 정리작업을 진행하여 1999년 1월 31일에 마무리하였으며,

* 이 작업은 강태현이 대담과 기록을 계속하는 가운데 현경병이 진행, 그리고 이 과정에서 김동환(연세대 경영학과 4년)․장기홍(연세대 문헌정보학과 3년) 두 사람도 그 기록을 하였음.


화면 캡쳐24




Ⅰ. 역사회복 작업에 나서다


1. 국가고시에 국사(國史)를 필수과목으로 편입시키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직후 고시령(考試令)을 제정할 때 사법고시를 비롯 국가고시에 국사(國史)를 필수과목으로 편입시킨 사람이 바로 본인입니다.

서울대 평위원겸 법대학장으로 있을 때인 1948년 9월 대한 민국 '법전편찬위원'과 '상임수석고시위원'으로 임명되었는데 1949년 들어 '고시령'을 제정하면서 필수과목으로 '국사'를 포함시켰습니다. 이때 '국사' 필수의 원칙은 고등고시뿐만 아니라, 보통고시와 하급공무원 시험에 이르기까지 모두 적용하였고 특히 고급공무원(특정관) 특채에도 이 원칙을 적용하였는데 특정관 특채 시에는 고시위원한테 '역사' 구술전형을 받도록 하였습니다. 고시령을 제정하면서 분량이 많고 힘든 '상법'을 선택과목으로 돌리고 '국사'를 필수과목으로 포함시켰는데 선택과목으로 돌린 상법은 바로 내 전공과목이었습니다.

'역사'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습니다. 그래서 "역사를 모르는 국민이 있을 수 있느냐."는 일관된 지론으로 그리고 이렇게 법으로 일단 엮어만 놓으면 자연히 당시 올바른 '역사'를 하는 사학자들의 책을 가지고 공부하게 되리라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이 무렵에는 나와 가까웠고, 올바른 '역사'를 하는 정인보․안재홍․손진태․장도빈 선생 등 사학자들이 모두 계실 때이고, 일제와 어용학자들에 의해 왜곡되고 말살됐던 우리 '역사'가 '한글' 보급과 함께 서서히 부활되던 때였습니다.

그 당시 '전형'은 내가 맡았고, 초안작성과 문안정리 등 보조 업무는 신진 변호사였던 양회경(梁會卿; 1912~1998)씨가 수행하였습니다. 양회경 변호사는 그 뒤 13년 동안 대법관으로 재임하면서 면도칼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엄격한 법관으로 이름이 나있는 법조인입니다.

나는 일제침략시대말기 폭압 속에서도 밤에 이불을 쓰고 연세대 의과대학의 전신인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다니던 아들(의학박사 최원철)에게 우리 '역사'와 '한글'을 가르치던 쓰라린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2. 광복 후 단군조선을 비롯 우리 역사는


광복 후 한글 보급과 함께 서서히 부활되던 단군조선을 비롯 한국사가 다시 굴절된 것은 1963년 국사교과서 내용을 통일하면서 그리고 1974년 '국정국사교과서'부터 부정․축소되는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1963년이면, 정인보․안재홍․손진태 선생 등 올바른 '역사'를 하는 사학자들이 모두 납북된 뒤이고, 장도빈 선생마저도 몸져누워 계실 때이고, 내가 왜곡․말살된 우리 '역사'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전입니다.

1963년 5월 문교부의 위촉을 받은 국사학자와 검인정국사교과서 집필자, 국사담당교사 등 28명이 12차례의 회의를 열고, {단군은 민족의 '신화'로 취급한다! 삼국의 건국에서 삼국의 시조인 주몽․온조․박혁거세는 부족사회에서 다룬다! 삼국이 고대국가로서 발전한 때는 고구려는 제6대 태조왕(재위 ; 53~146), 백제는 제8대 고이왕(재위 ; 234~286), 신라는 제17대 내물왕(재위 ; 356~402) 때부터 또는 몇 세기부터라고 한다!} 등 이와 같은 결론을 내린 이후입니다. 이런 결론은 일제가 '취사선택'한 사료를 바탕으로, 특히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바탕으로 단군조선을 비롯 '한국사'를 왜곡․말살하면서 (일제가) 내렸던 결정을 그대로 답습한 것입니다.

5․16 군사 혁명정부가 민족사관을 강화하기 위해 검인정 국사교과서의 내용을 통일하도록 한 것인데 이와는 반대로 일제가 그랬던 것처럼, 단군조선을 비롯 삼국의 시조와 삼국의 초기 역사마저 '신화'로 왜곡하고 축출하는 결과를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말이 5천년 역사이지 2천년도 채 못되는 {머리 없는 역사}로 전락시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1910년 강점 전․후와 광복 후 '국사교과서 변천과정'은 바로 일제와 한국인 ○○○, ○○○ 박사 등 식민사학자들에 의한 단군조선 등 '한국사' 왜곡․말살실태를 체계적으로 증명하는 자료가 됩니다.

결국 정인보․안재홍․손진태 선생 등을 비롯 올바른 역사를 하는 사학자들이 6․25 때 납북된 영향입니다. 이들이 납북이 안되고 '역사' 회복에 나섰으면 내가 이 일에 나서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6․25 때 납북만 안되었다면 일제와 식민사학 자들에 의해 왜곡되고 말살된 '역사' 그대로 굳어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나와 가까웠고, 보전 교수로도 같이 있었던 손진태(孫晋泰; 1900~?)씨는 나한테 올바른 우리 '역사'에 대해 문의를 많이 했었는데 서울대 문리과대학장에 재직 중 납북됐습니다. 그는 《조선민족사개론(朝鮮民族史槪論)》과 《국사대요(國史大要)》를 저술했습니다.

장도빈(張道斌) 선생이라도 좀 더 오래 살아 계셨으면 식민사학자들이 우리 '역사'를 이렇게까지 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장도빈 선생과는 서울대 법대학장을 역임한 뒤, 단국대에도 있었는데 이 때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단국대 초대학장을 지내시기도 한 장도빈 선생은 일제와 어용학자들에 의해 왜곡되고 말살된 우리 '역사'를 복원하려고 애를 많이 쓰셨습니다. 단국대 교가는 장도빈 선생께서 작사한 것입니다. 선생은 3․1운동 당시 경성여고(현 경기여고) 학생으로 3․1운동을 주도했던 김숙자(金淑姿) 여사와의 사이에 5남1여를 뒀습니다. 장치혁(張致赫; 1932~) 고합그룹 회장이 장도빈 선생의 4남입니다. 독립운동가인 아버지 장도빈 선생을 따라 만주와 시베리아를 떠돌았던 장치혁 회장은 러시아에 대규모 농업개발사업과 가스전 사업을 펼치고 있고, 블라디보스토크 러시아 국립 극동대학에 {한국학대학}을 설립하기도 하였습니다.

장도빈 선생은 오산학교에도 재직했었는데 당시 한경직(韓景職; 1902~) 목사의 역사교사였습니다. 현재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명예회장과 한국선명회 명예이사장으로 있는 한경직 목사는 올바른 우리 '역사'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나와 한경직 목사와는 3․8선이 생기고 그가 서울에 내려오면서부터 인연을 맺었고, 특히 1954년 기독교 장로교학교인 숭실대학교 재건에 함께 참여하면서 더욱 가까워지게 됐습니다.

한국교회의 부흥에 불을 댕긴 사람이 한경직 목사라는 데는 아무도 이의를 달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한국에서 전례가 없는 많은 수의 장로교회를 성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아프리카․유럽․미주 지역에 이르는 해외선교사역을 펼쳐나간 선교의 한 상징적 인물입니다. 한경직 목사는 국가관에 있어서도 뛰어난 애국자인데 그의 애국정신은 오산학교의 민족교육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나와 장도빈 선생과는 '역사' 문제로 더욱 가까워지게 되었습니다.

예리한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일생을 항일구국운동과 역사연구에 몸바쳤던 장도빈 선생은 참으로 애국자이셨습니다. 나는 법률학자로서의 학문연구를 《서양법철학의 역사적 배경》이라는 책으로 총 정리하면서 완결시켰습니다.

이 책은 1977년에 낸 원고지 1만 4천장의 방대한 저서로, 숙명여대 제자들이 원고 교정을 보고 숙대 출판부에서 책으로 만들어 준 것입니다. 원고 교정을 보느라 학생들이 고생을 많이 했는데 이 책을 내놓으니까 출간 1주일만에 학술원에서 저작상을 주더군요. 이 원고를 끝낸 직후인 1977년부터는 장도빈 선생에 이어 왜곡되고 말살된 우리 '역사'회복 작업에 본격적으로 나섰습니다.

특히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우리민족의 건국사이면서 4331년 우리 역사 중 2300년 실사인 '단군조선(고조선)'을 신화로 교육하는 것을 더 이상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3.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해외소재한국학연구자료조사위원'으로 일본에 다녀오다


일제와 어용학자들에 의해 왜곡되고 말살된 '단군조선(고조선)'과 '한․일관계사' 연구를 위해 사료(史料)발굴 차 1985년 전후로 일본 각지를 여러 차례 답사했습니다.

86세 때인 1985년에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해외소재한국학 연구자료조사위원'으로 일본에 다녀왔는데 이 때 유승국(柳承國; 1923~) 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장(현 성균관대 명예교수)과 김홍량 선생의 아들인 김대영(金大泳)씨가 협조를 해주었습니다.

1985년 일본 규슈(九州) 가고시마(鹿兒島)현에 있는 옥산신사(玉山神社)를 방문한 이유는《세종실록》에도 나와있듯, 단군 조선 때부터 세종대왕 때까지 전하여 오던 역사노래인, 즉 민족제전을 지낼 때 부르던 노래인 세년가(世年歌)와 같은 흔적을 찾으러 간 것입니다. '단군'을 모신 이 옥산신사는 일본 유학시절부터 알게 되었습니다.

국무총리 행정조정실 제2행정 조정관으로 있던 김대영씨에게 부탁을 해 미리 예비조사를 하고, 옥산신사의 연혁에 대해 잘 아는 심수관(沈壽官․73)씨와 서신 왕래를 해 친해진 후 찾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일본 오사카(大阪) 총영사로 있던 유대형씨가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심수관씨는 초대 도공 심당길(沈當吉)씨의 14세손으로 대를 이어 도자기 제작에 전념해 오고 있는데 심수관씨는 와세다 대 정경학부를 마치고 가업을 잇고 있더군요. {이 옥산신사는 임진왜란 후인 1598년 12월 정유재란 때 일 본으로 끌려온 17성(姓)의 도공들에 의해 1673년에 건립된 것이고, 당시 한복으로 정장한 도공들과 그 가족들은 바다를 향해있는 이 옥산신사에 나가 고국에 돌아갈 수 있게 해 달라는 기원과 함께 제사를 지냈다}, {1673년에 건립된 이래 해마다 음력 8월 15일에는 묘대천(苗代川; 현 미야마(美山))에 있는 주민들이 다 함께 이 옥산신사에 나가 제례를 하였는데 제주(祭主)만은 한국의 도포를 입고, 한국음식과 함께 제기(祭器)나 악기도 한국 고유의 것을 썼다. 특히 [오늘이 오늘이라(오늘이 단군 제삿날이다) 제물(祭物)도 차렸다

{오늘이라 오늘이고나 모두 함께 노세 이리도 노세 이리도 노세 제일(祭日)이 제일(祭日)이라(오늘이 제삿날이다) 우리 어버이 단군은 잊지 않으리라 고수레 고수레 자나깨나 잊지 않으리라]라고 불리어 내려오던 축가인 신무가(神舞歌)는 한국말 그대로 하였다}고 하더군요.

1985년 심수관씨를 서울에 초청해 태평로에 있는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강연회를 개최한 적이 있습니다. 심수관씨는 1989년부터 가고시마현 한국명예총영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조선 도공들이 일본으로 끌려간지 1998년 올해로 400년인데 심수관씨는 일본에서 10월 중순부터 11월 하순까지 4백년 제에 대한 대규모 축제를 계획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400년 전 일본에 조선의 도예를 전래하고, 조선 도공의 예술혼을 이어온 심수관가(家)를 조명하는 글이 동아일보에 1998년 6월 15일자부터 연재되고 있더군요.

1985년 심수관씨를 만난 후 동년 10월 일본의 수도 동경(東京, 도쿄)에서 서북쪽으로 약 40㎞ 떨어진 사이타마현(埼玉縣) 이루마군(入間郡) 히다카정(日高町)을 방문해, 고구려 신사인 고려신사(高麗神社)에서 관리책임자인 궁사(宮司)로 있는 고려징웅(高麗澄雄, 고마스미오)씨를 만났습니다.

고구려의 왕족인 약광(若光)을 모시고 있는 고려신사의 궁사인 ? 疵좌×邨쓴? 고구려 마지막 왕인 보장왕(재위: 642~668)의 후손으로, 약광왕자의 59세손(孫)이라고 하더군요.

고려징웅씨는 {본인의 선조가 일본에 건너온 것은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평양을 한창 공격하던 서기 666년의 일이었다. 그때만 해도 한반도와 일본은 서로 왕래가 자유로웠다. 668년 나라가 망하자 왕족과 고구려인들이 일본으로 망명, 지금의 동경(東京)근교 무사시노(武藏野) 지방에 터전을 잡고 황무지를 개간해「작은 고구려」를 이루었다. 기록에 따르면 그때 이곳에 모여든 사람은 1천7백99명이었다. 이 마을의 지도자가 고려(高麗)란 성(姓)의 창시자인 약광(若光)이었고, 이분은 바로 보장왕의 막내아들이었다. 서기 716년 당시 일본정부는 이곳에 고려군(高麗郡)을 신설하고 고려약광(高麗若光)에게 왕(王)의 칭호를 주면서 군(郡)을 통괄하도록 했다. 고려군은 명치(明治)유신 때인 1897년(명치 29년)에 사이타마현(埼玉縣) 이루마군(入間郡)에 편입되어「고려군(高麗郡)」이라는 공식명칭은 없어졌지만 지금도 이 곳은 옛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대대로 이곳에 살면서 신사(神社)를 지키고 족보까지 전수해 오고 있는데 명치(明治)기에 이르기까지 고려(高麗)라는 성(姓)씨는 일본에서 본인 가족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종가에서만 고려(高麗)성씨를 쓰게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방계를 분가할 때는 고마이(駒井), 이노우에(井上) 등의 성씨를 주었다. 즉 장자(長子)만이 '고려(高麗)'라는 성을 그대로 쓰고, 나머지 형제들은 일본 성(姓)을 쓴다. 현재 고려향(高麗鄕)이라고 부르는 고려촌(高麗村) 사람들은 두 가지 전통을 꼭 지켰다. 장자에게 가문의 혈통을 이어주는 것과 다른 하나는 고려촌 내 사람들끼리만 결혼이 그것이다. 고구려 유민들은 동경만 인근 오이소(大磯�어서오시오라는 남한(南韓)의 방언에서 유래)해안으로 상륙하여 사이타마에 정착, 고려촌을 이루어 살아왔던 것이다. {자랑스러운 한민족의 후예임을 과시하기 위해 고마(高麗), 즉 '고려'라는 성을 지켜온다}는 고려징웅씨는 {처음 만들어 진 족보는 화재로 불타 없어지고 이 족보는 7백 여 년 전에 새로 만든 것이다. 족보 첫머리에는 불의의 화재로 소실된 고구려 유품목록과 이를 애석해하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라고 말하더군요. 그리고 고구려인들이 일본열도로 이동할 때 가져간 {고구려 탈}을 보여 주어서 보기도 했습니다.

고려징웅씨는 {고려신사(高麗神社)에 하루 최대 17만명이 참배할 때도 있다}고 말하더군요.

고려향(高麗鄕)의 히다카정에 자리잡고 있는 고려가(高麗家)주택은 일본 정부지정 중요문화재로, 고려씨가 대대로 살아온 곳으로서 그 소유자는 고려징웅씨입니다.

1985년 11월 1일 고려징웅(高麗澄雄, 고마 스미오)씨를 초청해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강연회를 개최한 적이 있는데 반응들이 좋았습니다. 내가 주선,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 공식 초청함으로서 이뤄진 것입니다.

내가 일본에 '역사' 문제로 방문할 때는 의사인 내 아들 최원철(崔元哲; 1928~)이 항시 동행했었습니다. 일본 관동(關東)지방의 사이타마(埼玉)에는 고려신사(高麗神社), 고려천신사(高麗川神社), 고려천역(高麗川驛), 고려교(高麗橋), 고려천(高麗川) 등이 있었습니다. 일본에서 '고려(高麗)'라는 지명이나 유적은 '고구려'를 일컫습니다. 중국 역사책에서도 고구려를 고려라 많이 씁니다.

그 외 내가 방문한 지역들인 긴키(近畿)지방의 히라가타(枚方)에는 백제사지(百濟寺趾), 백제왕신사(百濟王神社), 백제사적(百濟寺跡)이, 오사카(大阪)에는 백제역(百濟驛), 백제천(百濟川), 백제교(百濟橋), 백제대교(百濟大橋), 고려정(高麗町), 고려교(高麗橋)가, 나라(奈良)에는 백제촌(百濟村)이 있었습니다. 북륙(北陸)지방의 니가타(新潟)에는 신라 박혁거세왕을 지칭하는 신라왕비(新羅王碑)가 있었습니다.

19세기 이전까지는 일본 전역에 신라시조 박혁거세왕을 모시고 있는 신사가 무려 2700여 곳이나 되었지만, (1868년) 명치 (明治)유신 이후 700여 곳이나 합사되어 지금은 2천여 곳 밖에 남아있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중국(中國)지방에는 한신신라신사(韓神新羅神社)가 있었고, 구주(九州)지방에는 고려정(高麗町), 고려교(高麗橋), 고려통(高麗通) 등이 가고시마에, 그 외 백제마을(百濟の里), 한국악(韓國岳; 1700m), 가야의 선조들을 모신 한국우두봉신사(韓國宇豆峯神社) 등이 있었습니다.

대마도(對馬島)의 상도(上島, 가미섬)에는 고구려유적인 고려산(高麗山)과 한국연산전망대(韓國連山展望台), 가라(加羅) 등이 있고, 하도(下島, 시모섬)에는 신라신사(新羅神社), 신라성(神羅城) 등 곳곳에 한국지명과 유적지가 남아 있었습니다.

대마도는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이 일본열도로 건너갈 때 징검다리 역할을 했던 섬으로, 일본인들은 대마도를 쓰시마라 하는데 이것은 '두섬'이란 '한국말의 일본식 명칭'입니다.

이처럼 북해도(北海道)를 제외한 일본전역에는 한국관련 유적, 유물들과 신사가 있는데 특히 수많은 '신사'들은 한반도에서 건너간 인물들을 신위(神位)로 모시는 등 한반도와 깊은 연관이 있지만, 즉 일본의 신사는 처음에 우리 한민족에 의해 맨 먼저 지어졌고, 우리 선조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지어졌다는 것은 우리 자신들도 잘 모르고, '신사참배'를 생활의 일부로 하는 일본인 자신들도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아는 일본인들에 의해 심지어는 음(音)만 같고, 그 뜻은 전혀 다른 이름으로 개명(改名) 당하고 있는 신사가 갈수록 점점 늘어나고 있는 실정입니다. 쉽게 말해 일본의 신사라는 것은 한국사람 중에서 (일본)각 지방의 지도자나 유공자를 기리기 위한 것으로 우리말로 '사당'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신사 사진은 김향수 아남그룹명예회장의《일본은 한국이더라》(문학수첩)라는 책자에 잘 나와 있습니다.

김향수(金向洙; 1912~) 아남그룹 명예회장과는 그가 '역사(한․일관계사)'문제로 나를 만나자고 해서 가까워지게 됐습니다. 김향수 명예회장은 1968년 당시 최첨단 기술산업이며 전자공업의 핵심이 되는 반도체 산업체를 한국 최초로 창업, 오늘날 한국이 세계3대 반도체 생산국가로 성장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1970년에는 미국에 해외영업을 전담하는 현지 법인을 설립, 세계화 경영에 앞장섰습니다. 그리고 세계 최대 메모리칩 생산업체로 부상한 삼성전자와 현대전자의 오늘이 있기까지는 김향수 명예회장의 후원이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4.. 한국학 연구회․이병창 박사

1년 반 동안 운영됐던 {한국학 연구회} 발기인들로는 나를 비롯해 김우현(金禹鉉) 목사, 송지영(宋志英; 1916~1989) 전 한국방송공사(KBS) 이사장, 숙명여대 총장과 경남대 초대총장을 역임하신 윤태림(尹泰林) 전 숙명학원 이사장, 김재원(金載元; 1909~1990) 전 국립박물관장, 손보기(孫寶基; 1922~) 전 연세대 박물관장(현 연세대, 단국 대 석좌교수), 유승국 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장(현 성균관대 명예교수), 김주현(金周賢; 1919~) 전 숭실대 총장서리 겸 대학원장(현 숭실대 명예교수), 윤내현(尹乃鉉; 1939~) 단국대 사학과 교수(전 단국대 중앙 박물관장), 김선기(金善璂; 1907~1992) 전 문교부 차관(언어학자), 김성호(金聖昊; 1935~)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 저자, 문승연(文承娟) 이화여대 강사 그리고 박진근(朴縝根) 전 광신상고 교장선생 등이 참여하셨습니다.

김주현 숭실대 명예교수는 '영어'에 관한 한 국내에서 권위 있는 분인데 영국 셰익스피어 대학원에서 초청해 초빙교수로 연연히 세미나를 하러 갑니다. 동양에서는 일본 동경대학에 있는 한 사람과 함께 영국에서 인정하는 분입니다. 박진근 전 광신상고 교장선생은 '러시아어'로는 권위가 있는 분입니다.

그 당시 나는 '한국상고사(단군조선) 복원'에 대해 강의하고, 윤내현 교수는 '단군조선의 강역'에 대해 강의를 했습니다. {한국학 연구회}가 운영 중이던 1987년, 일본 도쿄(東京)에 있는 이병창(李秉昌․83) 박사와 재일동포들의 후원으로 추진되어, 나에게 책임을 맡아 달라고 부탁을 해, 내가 책임을 맡기로 한 서울-인천간의 수백 만평 대지 위에 대규모 {한국학 연 구원과 역사관} 등의 설립계획 등은 도중에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그 뒤 이와 같은 계획이 이병창 박사와 이병철(李秉喆; 1910 ~1987) 전 삼성그룹 회장을 중심으로 또 추진됐었습니다. 이병철 회장은 올바른 우리 '역사'에 관심이 많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병창 박사와 이병철 회장이 이 일로 자주 만나 결국 이병철 회장이 대규모 {한국학 연구원} 등을 설립해 주기로 내정했었는데 1987년 11월에 갑자기 작고하게 된 것입니다.

나와 친분이 두터운 김주현 숭실대 명예교수와 이병창 박사와는 초등학교 동창생이라고 하더군요. 이병창 박사와 이병철 회장과는 가깝게 지내긴 했으나 친척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재일동포사업가 이병창 박사는 전북 전주출신으로 이승만 대통령 비서관을 지낸 뒤, 1949년 초대 한국 주일대표부 오사카(大阪) 사무소장(현 총영사에 해당)을 지냈으며, 현재 일본 도쿄에서 교와(協和)상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병창 박사는 1962년 도쿄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1969년 이후 현재까지 일본「경제전망담화회」간사를 맡고 있는 경제인이지만, 1978년에는「한국미술사개론」을 저술하는 등 한국미술에도 조예가 깊습니다.

1999년 1월 22일 평생 모아온 한국도자기 3백1점과 중국도자 기 50점(약 450억원 상당)을 일본의 유명한 오사카시립 도요(東洋) 도자 미술관에 기증했다는 한 재일동포 사업가가 바로 이 병창 박사입니다. 그는 귀중품들을 조국이 아닌 일본미술관에 기증한 이유를 기자들이 묻자『솔직히 많이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재일동포도 일본사회에 기여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고 이곳에서 자라나는 동포 후세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고 싶어 결심했습니다』고 말했다고 하더군요.

89세 때인 1988년 4월 이병창 박사의 초청으로 일본 도쿄에 갔는데 그의 소개로 '궁하(宮下, 미야시다)문서'를 연구하는 삼륜방광(三輪邦光, 미와구니히카리)씨를 만났습니다. 삼륜방광씨를 따라가 후지산(富士山) 밑의 후지황태신궁(富士皇太神宮) 깊숙이 소장된 한자로 쓰여진, 두루마리로 된 일본황실이 백제에서 건너왔다는 내용이 들어있는 궁하문서를 소장자인 궁하(宮下, 미야시다)씨의 안내로 직접 봤습니다.

궁하문서를 연구․정리하기에 몰두했던 삼륜의희(三輪義熙; ? ~1933)씨의 아들인 삼륜방광씨의 말에 의하면 {궁하문서는 일본의 국사라고 생각해 온 약1천년 전의《기기(記紀)》(고사기․일본서기)보다 수 천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논급한 사서(史書)이다}, {이 문서에 비하면《기기》는 허구이며,《기기》를 역사서라고 일컫는 것도 잘못이다.}, {궁하문서에 수록된 우가야 왕조사의 진상을 규명하기에 몰두한 결과 1921년에 신황기(神皇記)를 발표하였었다. 그러자 일본의 유력한 신문․잡지들은 일제히 절찬하는 논평을 실었으나 일본의 권력층과 군부 등으로부터 압력을 받아 궁하(宮下, 미야시다)문서를 규명하여 선전하는 재단법인 부사문고(富士文庫)는 탄압을 받고, 활동정지 명령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이 무렵이 일제가 조선총독부에서 본격적으로 우리 '역사'를 철저히 왜곡․말살하던 시기입니다.

얼마 전엔 삼륜방광(三輪邦光, 미와구니히카리)씨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박사님이 89세에 '역사'를 연구하기 위해 이곳에 오셔서 저와 같이 후지산 밑의 후지황태신궁에 소장된 궁하문서를 보고 가셨는데 금년에 제가 벌써 85세가 되었습니다. 궁하문서를 같이 보던 기념사진이 박사님께 있을 텐데 저도 그 사진을 간직하고 싶으니 그것을 저한테 하나만 보내주십시오}라는 편지가 왔습니다.

우가야 왕조사(일본의 역사가 한국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피력하는 역사) 중, '상기(上記, 우후미) 문서'는 지금 일본 황실문고에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본왕실은 이런 사실들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현재 일본에는 '우가야 왕조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5. 이병도 박사와의 관계


이병도(李丙燾; 1896~1989) 박사와는 이병도 박사와 와세다대(早稻田大) 사학급 사회과에 같이 다니던 나와 경신학교 동창인 최정순의 소개로 일본유학시절부터 알게 되었습니다. 1947~1949년 내가 서울대 전체 경영방침을 연구, 주관하는 평위원 겸 법대학장으로 있을 때 이병도 박사가 사학과 교수로 있어서 더욱 가까워졌습니다.

1977년에 나온 내《서양법철학의 역사적 배경(西洋法哲學의 歷史的 背景)》서문(序文)을 이병도 박사가 썼습니다. 우리 두 사람은 그 만큼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이병도 박사와 자연스럽게 왜곡되고 말살된 '단군조선' 등 한국사에 대해 토론을 벌였던 것입니다.

조선일보 1986년 10월 9일자 5면에 보면, {단군(檀君)은 신화 (神話)아닌 우리 국조(國祖), 역대왕조(歷代王朝)의 단군(檀君) 제사 일제(日帝) 때 끊겼다}라는 이병도 박사의 '특별기고문'이 실렸는데 이것은 이병도 박사와 3년에 걸쳐 토론한 결과로, 이병도 박사가 2300년 실사인 '단군조선'이 '신화'로 왜곡되고 말살됐음을 대략적으로나마 말한 것입니다.

내가 이병도 박사와 토론 당시 송지영(宋志英) 전 한국방송공사(KBS) 이사장의 격려가 컸습니다. 그리고 친분이 두터웠던 ({국어대사전}을 편집하여 저술하신) 국어학자이신 이희승(李熙昇) 박사와 숙명여대 총장과 경남대 초대 총장을 역임하신 윤태림(尹泰林) 박사도 '단군조선' 회복 에 대해 적극적이었습니다.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新東亞)〉1989년 1월호에 보면, 《한국상고사 입문》 출간작업팀과 함께 한 사진과 서울 YMCA 원로모임인 계묘구락부의 김우현 목사․전택부 서울 YMCA 명예총무와 함께 한 사진, 그리고 이병도 박사와 함께 한 사진이 실렸습니다.

《한국상고사 입문》머리말 서명은 같은 필체로 {1989년 1월}라고 기재되어 있을 텐데, 둘 다 이병도 박사 서명입니다. 이병도 박사가 자진해서 같이 책을 펴냈는데 그 뒤 머리말 서명 당시, 내가 서명을 하면 이병도 박사 자기이름을 위에다 놓는다고 이병도 박사가 서명용지를 자기 앞으로 가져다가 내 이름을 위에다 놓고, 자신의 이름을 그 아래에 놓더군요. 이병도 박사가《한국상고사 입문》머리말 서명 당시 신동아 사진기자 박용윤(朴容允)씨, 윤여덕 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선임편수원, 박경희 전 학술원 사무원 그리고 이병도 박사 둘 째 아들이 참석했었습니다.

《한국상고사 입문》은 '신화'로만 치부되어온 '단군조선'은 군 주(지금의 대통령)의 뜻을 지니는 수십 명의 단군들이 2,300여 년 동안 통치했던 백두산과 중국 요동을 중심으로 한 강대한 광역국가였다. 라는 것을 밝힌 책이고, '단군'의 개국과 단군조선 시대의 실상을 규명한 책으로, 그동안 중국과 일본 그리고 사대주의, 식민사가들에 의해 왜곡․말살되어 온 우리 나라 '상고사'를 원래의 상태로 복원․정립한 역사서입니다.

《한국상고사 입문》은 1988년 미국 알라스카대학 한국문화원 재단의 위촉을 받고 펴낸, 알라스카대학 대학원의 교재인 《An Introduction to the History of Ancient Korea》를 우리말로 옮긴 것입니다. 이 책은 원래 『한국학 연구회』강좌의 교재를 모은 것입니다. 그러나 내용 전체의 중요한 줄거리는 '이병도․최태영' 우리 두 사람의 것을 토대로 했습니다.

《한국상고사 입문》이 발행되자 올바른 우리 '역사'에 관심이 많은 언론인들을 비롯 여러 방면에 계신 분들한테서 격려의 글과 전화를 받았고, 특히 군(軍)에 몸담고 있는 고급장교와 장교들로부터 『우리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의견을 많이 듣게 되었습니다.


6. 1990년대도 역사회복 작업과 함께

91세 때인 1990년 9월에는《한국상고사 입문》의 수정․증보판인《한국상고사》를 발행했습니다.

《한국상고사》는 '단군조선'과 사국시대(가야․고구려․백제․ 신라) 그리고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역사왜곡' 문제와 한반도와 일본왕실, 일본신사와의 관계에 대해 기술한 책입니다.《한국상고사》를 내면서는 독자들의 희망에 따라 김우현 목사, 송지영 전 한국방송공사(KBS) 이사장, 윤내현 단국대 교수, 김성호씨의 협력을 얻어 서울과 주요도시에서 '순회강좌'를 개최했습니다. 우리말과 우리 글에 서투른 재일동포 2세들의 교육을 위한 출판 요청을 받고《한국상고사》일본어판을 펴내기도 했습니다.

1990년 12월 5일부터 12월 7일까지 서울 스위스그랜드호텔에서 {'세계한민족연합' 발기인대회 겸 학술문화교류 세미나}를 개최하였습니다. 이 때 강영훈(姜英勳; 1922~) 전 국무총리(현 세종재단 이사장), 홍성철(洪性澈; 1926~) 전 국토통일원 장관, 이어령(李御寧; 1934~) 초대 문화부장관(현 이화여대 석학교수) 등 '정부'의 여러분이 후원해 주었습니다.

세미나는 연 3일 동안 수십 명의 기자들과 수백 명의 참석자들이 성황을 이룬 가운데 개최되었는데 '상고사복원 문제'와 '한민족연합 방안'을 2대 주제로 설정했었습니다.

북한 최고의 역사학자는 손진태(孫晋泰)씨의 소개로 내가 경신학교 한문선생으로 채용했던 박시형(朴時亨; 1910~) 김일성 종합대학 역사학부 원사입니다. 당시 세미나에 박시형을 불렀더니 안 오더군요.

1993년 1월 29일에는 1백60여명의 고려대 원로교우들이 참석 한 가운데 교우회관 대강당에서「왜곡된 민족사(民族史)의 규명」이란 주제 강연을 하였고, 동년 9월에는 장학식(張鶴植) 전 인천대 총장(현 한국사회문화연구원 회장)과 지용택(池龍澤; 1937~) 새얼문화재단 이사장, 인천 시민들, 기독교(개신교), 가톨릭(천주교) 교인들의 요청과 지원으로 단군조선을 비롯 한국사 연구 기반조성과 희귀 자료 수집을 위해 인천대 에 '한국학연구소'를 개설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리고 학부생을 대상으로 「한국사」강의를 1995년까지 하였습니다.

1993년경 국가안전기획부 인천지부에서 '역사'강의를 하기도 했습니다. 대통령을 비롯, 정부 부처에서 근무하는 사람들, 국회의원들, 육군․공군․해군사관학교 생도들, 군(軍)의 장성과 장교들, 특히 국가안전기획부․국군기무부대 등 국가정보기관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국가관과 역사의식}이 그 누구보다도 투철해야 합니다.

나는 1995년 이후 '교회'에서 '단군조선'에 대해 강연을 많이 하였습니다. 1997년 11월에는 안도명 원로목사와 최상순 목사의 부탁으로 서울 용산구 후암동 '산정현 교회'에서 일제와 어용학자들에 의해 왜곡되고 말살된 4331년 우리 역사 중 2300년 실사인 '단군조선'에 대해 강연을 하였습니다.

1998년 현재 내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 법과, 상과 제자 중 '상고사'와 '한․일관계사'에 대해 특히 관심을 보이는 이가 법과 제자인 김학묵(金學黙) 전 보사부 차관(현 한국뇌성마비 복지회 회장)입니다.〈대한매일신보〉와 함께 을사조약 무효화 선언 등 항일투쟁의 기치를 올린, 한말의 대표적인 일간신문인 <황성신문>(1898~1910) 주필이었던 김상범(金相範; 1870~1954) 선생의 장남인 그는 역사의식이 투철하고 진지한 사람입니다. 사회복지사업에 그 누구보다 열성적인 김학묵 회장은 나를 자주 찾아오곤 하는데 KBS 1TV 역사드라마「용(龍)의 눈물」의 연출자 김재형(金在衡; 1936~) PD가 그의 아들입니다.

건강에 대해 자랑할 것은 못되지만, 1998년 11월부터는 '단군 조선' 등에 대한 역사 강의를 학술원, 서울YMCA 원로모임인 계묘구락부, 후암동 산정현 교회, 한․일협회 등지에서 할 예 정입니다.



Ⅱ. 올바른 우리 역사


《한․일 관계사》


1. 일본인은 한국인 후예


1990년 ≪한국상고사≫를 낸 이후로 '역사'문제에 관해 마지막 정리가 될지도 모르겠군요. '역사(한․일 관계사)' 문제로 1985년 전후로 일본 각지를 여러 차례 답사한 적이 있는데 일본의 양심적인 학자들도 말하고 있듯이 일본 건국의 뿌리는 바로 우리 한민족입니다.

일본에는 '단군조선(고조선)' 말기의 영향을 받은 일본의 일대 변화를 가져왔던 '야요이(彌生)문화'가 있는데 이것은 바로 단군조선 말기에 한민족이 동(東)으로 대이동을 하여 일본에까지 가서 정착하는 단군조선의 역사와 부합되는 것입니다. 단군조선 말기의 영향을 받은 야요이 문화는 특히 한반도 남부지방 사람들이 일본 규슈(九州)지방으로 이주하여 형성한 유물입니다. 이들 청동기는 일본열도에 이주한 한민족이 만든 것이 분명 함은 한국과 일본열도 두 지역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이 극명하게 그 관계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일본 북규슈(北九州) 사가(佐賀)현에는 단군조선 말기의 영향 을 받은 야요이(彌生)시대 유구지가 있는데 일본은 1994년 야요이시대 유구지를 컴퓨터로 당시의 모습을 추리, 완벽하게 복원해 놓고 있다고 하더군요. 야요이 문화는 단군조선으로부터 가까운 거리에 있던 서북규 슈지방에서 시작되어 그 말기에는 훗카이도 일부를 제외한 일본열도 전지역에 확산되었는데 야요이 문화의 연대는 그 발상지인 규슈지방의 경우 서기전 3세기 무렵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동경(東京, 도쿄)대학교 사사야마(笹山晴) 교수의 저서《일본고대사 연구》에 보면, {야요이 문화는 일본에서 자생적으로 발전된 것이 아니라… 해외에서 도래한 것이 분명하다}고 했는데 그는 한국에서 도래한 것이라고 밝히지는 않았으나 '해외'라는 것은 곧 '한국'을 암시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일본학자들도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1987년 발행된 동경대 인류학 잡지의 영문판《고대일 본 이주자 수 추정》이란 하니하라(埴原和郎) 인류학자의 주장을 보면, {일본인의 골상과 얼굴, 모습 등을 토대로 당시의 도래인(한국개척자들)의 수를 컴퓨터로 계산한 결과 규슈지방은 도래인들이 거의 전부다}, {따라서 야요이 시대부터 나라(奈良)시대에 이르는 약 1천년 동안 대륙(한반도)으로부터 일본에 건너 온 사람이 약 1백 만 명이다}라는 '추정통계 보고서'를 발표하여 대량집단이 이주한 것을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나라시대는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문화 말기(시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한국과 일본과의 관계를 밝힘에 있어서, 즉 '한․일 관계사'에 서 그 기원은 일찍이 '단군조선' 말기의 민족의 대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단군조선을 절대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일본열도는 대부분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에 의해 그들의 역사와 문화가 이룩되어 왔는데 그 사람들의 대부분은 단군 조선인들을 비롯 가야․고구려․백제․신라계라는 것은 이미 밝혀져 왔고, 또 고분에서 출토되는 유물에 의해 확인되고 있습니다.

단군조선을 계승한 부여와 삼한 등에 이어, 가야인들은 고구려․백제․신라보다 앞서 대마도를 거쳐 규슈(九州)로 대거 이주, 선주(先住)세력을 흡수한 후 규슈 전역을 장악, 고대 일본 국가형성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일본이 그들의 천황 무덤이라고 주장하는 고분들을 비롯 당시 지배자들의 묘제는 3~4세기에 걸쳐 성행했던 '가야고분' 의 형태이며 5세기 중엽부터는 백제 전기의 석실분이 나타납니다.

일본 일왕 즉위식에서 전달되는 일왕가의 삼종신기(三種神器)라는 이른바 동경(銅鏡), 동검(銅劍), 곡옥(曲玉) 역시 한반도에서 건너간 것에 의심을 하는 한․일 학자는 없습니다. 그리 고 이 세 가지는 가야의 고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대마도와 북규슈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오키노시마(沖ノ島)'는 고대유물의 정창원(正倉院)으로서, 출토된 유물이 대부분 '가야계'가 틀림없으나 일본 사학자들이나 궁내청(宮內廳)은 이에 대해 함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더기로 출토된 국보급 유물들에 대해 일본 궁내청은 오키노시마에 외부인의 출입은 물론 접근조차 엄격히 통제하고 있습니다.

이 오키노시마는 가야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갈 때 중간기착지 역할을 했던 곳으로, 이처럼 일본은 고대 유적지 발굴 특히 일왕가와 연관된 유적조사는 금기로 하고 있습니다. 출토물들이 1만 여점이 넘는데 전부 비밀에 부치고 있습니다.

고구려는 서해를 거쳐 규슈의 가고시마(鹿兒島)와 도쿄인근의 오이소(大磯)해안으로 상륙, 사이타마현(埼玉縣)과 도쿄(東京)를 개척하였고, 백제는 남해와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를 거쳐 긴키(近畿)평야의 중심지인 오사카(大阪)로 상륙하여 죽내가도(竹內街道, 다케노우치가이도)를 따라 나라(奈良)지방에 정착하였고, 신라는 동해를 거쳐 니가타(新潟)의 사도(佐渡)섬을 거쳐 일 본전역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왜(倭)라는 국명은 15대 응신(應神)천황 때 생긴 것이고, 일본(日本)이라는 국명은 38대 천지(天智)천황 때 생긴 것으로, 즉 왜국은 가야인들이 세운 것이고, 일본은 백제인들이 중심이 되어 세운 것입니다.

그러나 가야(伽倻)는 그간 한국사에서 가야사가 많이 누락된 채 엮어져 왔습니다. 최근 김해지방 고분에서 가야 유물을 발굴하는 등 고고학적인 성과에 의해 그 공백이 급속히 메워져 가고는 있지만 옛 문헌으로는 단지 ≪삼국사기≫에 그 일부분과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의 짤막한 내용만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가야는 서기 42년에 김해 김씨의 시조인 김수로왕에 의해 건국되어 520년간 존속하다가 서기 562년 신라에 병합되기 전까지 가야는 고구려․백제․신라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사국 시대를 이루어 왔을 뿐만 아니라, 일찍이 철기문화를 꽃피우며, 김해만을 중심으로 해상왕국을 건설하여 일본에 진출해 일본왕실의 기원이 되는 등 동북아 문화의 젖줄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역사가 가야사를 포함하여 사국사기가 되어야 함에도 가야를 병합한 신라가 의도적으로 가야사를 누락시켜 버렸고, 그 후 ≪삼국사기≫ 등을 편찬하였던 고려마저도 가야사를 외면한 채 고구려․백제․신라 삼국 위주로 역사를 엮어왔고, 특히 일제침략시대 때 '가야사'는 일본왕실의 기원이라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철저히 왜곡․말살되었습니다.

일제침략시대 때 일제는 어용학자들을 내세워 일본 일왕가의 본관 감추기, 즉 일본의 기원인 단군조선을 비롯 {가야세력과 백제 망명정권이 일본 일왕가를 이루었다}고 하는 역사적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수많은 고문서를 불태우는 등 우리 '역사'를 철저히 왜곡․말살하였습니다.

1915년 6월 29일 일제는 치안상의 이유를 내세워 총독부 극비지령인 경무령을 발동하여 가야 김수로왕을 시조(始祖)로 하는 김해 김씨 족보 발행을 금지했고, '가야사'를 보존한 김해 김씨 문중을 약탈했습니다. 가야인들이 낙동강 유역의 비옥한 땅을 두고 규슈지방 등으로 집단 이주한 이유는 가야지방과 일본열도 특히 규슈와는 지정학적으로 매우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고, 당시 일본열도는 인구가 적은 미개척지였기 때문에 개척의욕이 강한 가야인들로서는 개척의 대상이 되었고, 문물이 발달한 가야인들은 성품이 온화하여 투쟁을 싫어해 좌․우에서 백제와 신라 의 크고 작은 협공을 수없이 받게되자 항쟁하는 것보다 차라리 신천지 개척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게 된 이유 등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1993년 4월에 고려대 교우회관과 인천(경기은행 본점 대강당) 에서《역사적 뿌리 탐구의 여정》의 저자인 일본인 사학자 다카모도 마사도시(高本政俊; 1928~)씨를 초청 {일본 속의 가야문화 ─ 일본 사람에게서 한․일 고대사를 듣는다}라는 초청강연회를 개최한 적이 있습니다.

다카모도씨의 '고본(高本)'이란 성은 고구려의 후손으로서의 고(高)자와 일본에 건너온 것을 의미하는 본(本)자를 따서 만든 성씨라고 밝히더군요.

다카모도씨는 일본 각처의 지명, 신사와 절의 이름, 인명 등 을 열거하면서 많은 한국인이 수 차례 걸쳐 집단으로 일본에 건너와서 일본민족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일본의 고대 왕조 와 깊은 인연을 가졌다고 밝혔는데 비교적 양심적인 학자들까지 한 꺼풀을 감추고 있는 일본에서 '가야인'이 일본을 건국했고, 모든 선진문화를 일본에 가져왔다고 솔직하게 주장한 다카모도씨야 말로 진정한 사학자다운 양심적인 사학자라고 높이 평가할 수 있습니다.

나는 가야계의 일본내의 지명, 신사와 절의 이름, 인명, 생활 용어 등 100여 개를 찾아내었는데 다카모도씨는 300가지 이상 수 없이 찾아내 나를 보여주더군요.

캘리포니아대학 제러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과학전문지「디스커버」지 1998년 6월호에서「일본인의 뿌리」라는 논문을 통해, 『현재 일본인은 유전학적으로나 골상학적으로나 한국 이민족들의 후예임이 분명하다』고 결론을 내렸다고 하더군요. 이는 일본인의 기원을 한국인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2. 일본열도는 우리가 잃어버린 또 하나의 역사의 보고


삼국에서 일본열도로 건너간 정복집단은 고구려․백제․신라의 한반도 세력에 따라 한반도에서 고구려가 득세하면 일본열도에서도 마찬가지로 고구려계 정복집단이, 백제가 득세하면 백제계 정복집단이, 신라가 득세하면 신라계 정복집단이 일본열도의 지배 우위를 차지하며 한반도에서와 마찬가지로 삼국세력이 각축하며 일본열도를 정복해 나갔습니다.

7세기 말엽까지 일본열도는 한국 측의 개척 이주지였으므로 일본열도의 정권과 왕통은 종주국인 한반도의 고구려․백제․신라 세력다툼의 영향이 크게 작용할 수밖에 없었고, 종주국들의 사정에 따라 일본열도의 정권과 왕통은 교체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해 백제를 멸망시키기 15년 전에 백제의 후원세력인 일본열도에 있는 배후를 먼저 쳤는데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기 전에 일본에 먼저 쳐들어와 백제를 돕지 못하게 미리 짓밟아 버렸다}는 일본 오사카(大阪) 향토사학자들의 연구도 있습니다.

일본열도는 서기전 3세기 무렵인 단군조선 말기부터 7세기후 반인 백제 멸망 이후까지 1천 여 년 동안 우수한 농경문화와 철기를 가지고 일본열도로 끊임없이 이동한 우리가 잃어버린 역사의 보고임과 동시에, 우리 선조들의 신천지 개척사이면서 정복자들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단군조선을 계승한 부여와 삼한 등에 이어, 가야와 백 제, 고구려가 멸망하고, 신라가 나라를 통일하는 흥망성쇠의 소용돌이 가운데 많은 한국인들이 일본 땅으로 피신해 간 '망명집단'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고 말(언어)은 지배자에 의해 지배되듯이 결국 일본말의 '기원과 뿌리'도 한국말입니다. 극히 소수의 원주민을 제외한 선(先)주민 자체가 한국계였으므로 각 지방의 우리 '고대어(고대방언)'가 1천 여 년에 걸쳐 쌓이고 쌓여 오늘날 일본말의 뼈대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이룩된 7․8세기의 고대 일본말은 곧 '일본식 한국 고대방언'입니다.


3. 일본 학자들은 도일(渡日) 한국인이 일본사회에 큰 영향을 준 것을 인정한다


일본 학자들은 도일 한국인이 일본사회에 큰 영향과 변동을 준 것을 인정하면서 이를 4단계로 구분합니다.

'제1단계는 단군조선 말기인 서기전 3세기부터 서기 3세기까지로 일본에 아직 정치권력이 완전히 정립되기 전에 일본 북규슈(北九州)를 중심으로 한국문화가 파급된 최초의 예로 야요이(彌生)문화의 유물, 유적에 의하여 추측되는 시대와 그 후기에 농경문화를 중심으로 하는 대륙문화가 전해져서 일본에 큰 변화가 생기게 된 시기',

'제2단계는 4, 5세기에 한국인 대집단이 일본에 건너와서 문자와 광산․제철․신농경․토목․기술 등을 전해주었고, 제3단계는 5세기 후반부터 6세기에 불교인․최신 기술자․예술가․건축가들이 일본에 건너와서 이를 전해주었고, 제4단계는 7세기 후반에 백제의 망명집단이 일본에 건너와서 일본 조정에 참여하고, 또한 고구려 망명집단이 일본에 건너와서 신라인 및 백제인과 함께 도쿄(東京) 등지의 광대한 지역을 개척해 농사를 짓고, 옷감을 만들었는데 이미 단군조선 말기에 먼저 일본에 건너온 한국인들이 기초를 세워놓고 있었다.'고 일본학자들은 그들의 학설을 통해 말하고 있습니다.

한․일 양국은 도일이나 문화교류의 정도를 넘어서 일본왕조와 일본민족의 시원(始源), 즉 발상지가 한국이라는 것이 드러나고 있는데 일본 학자들 중에는 "한국 땅이 일본민족의 핵심 발상지이고, 일본인 선조 중에는 수많은 한인계의 도일인, 즉 일본으로 건너온 사람들이 있으며 일본의 국왕가는 한국에서 일본으로 이주한 망명가, 그밖에 이주한 한인들의 후손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일본인 다니가와(谷川健一)씨는 "일본왕가의 제1대 신무(神武)부터 제14대 중애(仲哀)까지는 모두 다 가공(架空)의 인물이고, 제15대 응신(應神)이 실존 인간인 최초의 일본왕인데 응신의 혈맥은 한국 태생이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1985년 3월에 발행된 구라다(倉田康夫)씨의 "일본역사요설(日本歷史要說)"에 보면, 6세기초에 백제로부터 각 분야의 학자들이 일본에 초청되어 왔던 사실을 기재하고 나서, {6세기초 일본 천황의 주변은 지식인으로서의 귀화인에 의 해서 차지되어졌고, 대담한 추측이 허락되어진다면 천황가(家)도 귀화계의 민족이었을지도 모른다"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일본인 학자 가시마(鹿島昇)씨는 "일본황통보(皇統譜)가 한국의 가락과 백제의 두 왕통을 합하여 이룬 것이고, 제38대 천지(天智)천황은 백제의 끝 왕 부여풍(扶餘豊)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가시마씨의 논술인, 1980년《역사와 현대》에 실린〈단군고기와 야마대국〉의 내용을 보면, {금일에는 한반도를 포함해서《기기(記紀)》, 즉 고사기(古事記) 와 일본서기(日本書紀)가 일본열도의 진실한 사서(史書)라고 진심으로 믿으려는 사학자와 고고학자는 없을 것이다}, {《일본서기》에 한인(韓人)이라는 것이 백제인이고, 천지(天智)천황(626~672)이 백제인이라고 본다면 그에 의하여 창작된 사서의 원본은 백제사의 일본 번역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승리를 과장하고, 패배를 고쳐 쓰게 하고, 망명은 기입하지 않는 그 수법은 그들의 사서작성의 기본 법칙이었다}, {우가야 왕조사를 말소해서… 일본열도에서 자생한 왕조였다고 하는 허구로써 사서를 작성했다. 우가야 왕조는 단군조선으로부터 부여, 고구려로 이어지는 왕조이다}, {무엇보다도 명치유신 때의 권력자들은 일본이 일본열도 내의 '자생왕조'라는 허구에 대하여 가장 큰 위협이 되는 것이 한국의 역사서적들이었으므로 조선총독부는 이마니시(今西龍)를 중심으로 하여 긴 세월에 걸쳐서 한국의 '역사'자료들을 대규모로 약탈하여 태워 없앴으며, 대마도의 종가(宗家)에 전해 내려온 역사책들도 몰수하여 그것들을 일본 궁내성의 문고속에 감추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4. 현재 일본왕실은 백제인의 후손


백제가 서기 660년에 신라와 당나라 군사에게 멸망시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은 일본에 있던 그의 누님인 제37대 '제명(齊明, 사이메이)천황'에게 구원군을 요청했으나 도중에 제명천황이 죽자, (제명천황의 조카이면서) 일찍이 왜로 와 있던 의자왕의 아들 인 중대형(中大兄, 나카노오에)이 이끄는 구원군은 나․당 연합군에 대항하지만 서기 663년 금강(錦江)하구로 추정되는 곳 (일본 문헌에는 백촌강(白村江)전투)에서 대패했습니다. 현재 일본왕실이 이 사람들의 후손입니다.

서기 663년 최후의 거점인 주유성(州柔城 또는 周留城)이 함락되자, 일본열도에서는 {이제 주유성을 잃었구나.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백제의 이름이 오늘로 끊겼으니 선조들의 묘소에도 이제 다시 못 가게 되었구나}라는 비통의 노래가 유행했다고《일본서기》(663년 천지(天智)2년 조(條))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유성은 부여와 공주 부근을 말하는 것입니다.

일본열도는 백제의 멸망과 함께 또 한번의 소용돌이를 치는 데 백제의 유민들이 대거 일본열도로 망명해 들어오자 일본열도의 백제계는 다시 뭉치게 됩니다.

백제 재건의 꿈도 무너지자 중대형은 나․당 연합군의 침공에 대비해 일본 각지에 산성(山城)을 서둘러 쌓는데 전력투구하였습니다.

산성쌓기는 664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북규슈 후쿠오카 현(福岡縣)에 태재부(太宰府)를 건립하고, 그 주변에 백제식 토성(土城)을 쌓아 신라군이 공격해 올 경우 수공(水攻)으로 방어하기 위해 성(城)을 만들었는데 그 규모는 높이 14m, 길이 1.2km, 기저부의 폭이 80m나 되었습니다.

그리고 뒷산에는 백제의 망명세력의 지도하에 백제산성을 모방하여 축성한 성이 8km에 걸쳐, 토담과 석벽으로 산의 정상 부를 두르고 있었는데 지금도 그 유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667년에는 대마도의 하도(下島, 시모섬)에도 축조하는데 이 대마도 산성이 유명한 금전성(金田城, 가네다노키)으로 러․일전쟁 때와 제2차 세계대전 때도 대포 등을 놓고 요새로 삼았습니다.

7세기 후반에 쌓은 이 산성이 20세기 실전에 쓰일 정도로 견고하게 잘 쌓았다는 얘기가 되는데 그 당시 백제인의 높은 건축기술 수준을 짐작하게 해 줍니다.

제38대 천지(天智)천황이 된 중대형(中大兄, 나카노오에)은 668년에 왕으로 정식 즉위하고, 백제계 중심의 왕권을 강화하였습니다.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혈통인 중대형이 {천황}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면서 일본이라는 나라를 본격적으로 출범시키는데 '일본(日本)'이란 국호는 서기 670년에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제40대 천황이 된 천무(天武)는 도읍을 다시 아스카(飛鳥)로 옮겨 이른바 황족과 일반 호족의 신분을 명확히 하고 천황 중심으로 씨성제(氏姓制)를 재편성하고, 193개의 성씨(姓氏)를 하사하여 지배계층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천무천황이 죽자 그의 부인이 왕이 되는데 제41대 지통(持統) 천황은 이름 그대로 전통을 지킨다는 뜻에서 천황의 이름을 지통이라 했고, 백제계 중심의 호적을 재편성하고, 백제계의 기틀을 튼튼히 하였습니다.


5. 일본의 역사왜곡


일본열도에서 세력을 장악한 백제계는 왕권을 강화하고, 그들 중심의 역사를 새롭게 편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제43대 천황인 원명(元明)의 지시로 당대의 문장가인 백제인 안만려(安萬侶)가 712년에 ≪고사기(古事記)≫ 3권과 720년에는 일본의 정사인 ≪일본서기(日本書紀)≫ 30권을 엮어 냈습니다. ≪일본서기≫라는 이름은≪백제기≫(백제의 역사)에서 따온 것이고, ≪일본서기≫는 ≪백제기(百濟紀)≫를 토대로 쓴 것입니다.

그러나 백제의 멸망으로 한반도와의 관계가 끊어진 이상 ≪일본서기≫ 집필자들은 일본 전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가야․고구려․백제․신라의 도해(渡海)집단을 하나의 혈통으로 묶어 역사성을 부여했습니다. 즉 제1대 신무(神武)천황의 후손으로 접목하여 한 계통․한 왕조로 꾸몄습니다.

그 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후인 에도(江戶, 동경의 옛 이름)시대 (1603~1867)의 일본 국학자들은 막부의 지배를 유지, 강화하려고 일본의 고대사 등 고전을 연구, ≪일본서기≫ 등 옛 사서류에서 건국기원이나 천왕의 신화를 조작하여 {일본의 신(神)과 천황이 옛 한국을 지배했고 다스렸다}는 왜곡된 역사를 만들어 내기 시작하였습니다. 고대사 연구를 빙자해서 고대사를 이 같이 왜곡, 재해석해 일본을 신의나라(神國)로 미화하면서 '민족의지'를 단합하는데 노력한 국학자들은 덕천막부(德川幕府) 말기 급기야는 정한론(征韓論)으로 발전시켰습니다.

국학자들에 의해 한국침략과 한국 병탄, 한국지배의 사상적 근거를 받은 1868년 근대화 개혁을 단행한 명치(明治)연간에 그 들은 ≪일본서기≫를 교정이란 명분으로 많은 부분을 또다시 왜곡하였습니다. 현존하는 ≪일본서기≫는 편저자인 안만려의 이름을 삭제해 버렸듯이, 원제작자인 백제인 안만려의 이름이 빠지고 일본인 이름으로 ≪일본서기≫가 일반인들에 공개된 것은 편찬 후 1천 여 년이 훨씬 지난 '명치유신' 때입니다. ≪일본서기≫를 근세에 와서 일반에 공개하며 그들이 유리한 대로만 악용․유포하고 있는 배경에는 그들이 생각할 때 자신있게 조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일본의 고대 역사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정복자들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일본 국학자들은 이를 은폐하기 위해 역사를 날조하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일본서기≫에서 정한론의 골격을 조작해 냈습니다.

그들은 신라를 정벌한 인물로 14대 중애(仲哀)와 15대 응신(應神)천황 사이에 나오는, 즉 중애(仲哀)의 제3부인으로 나오는 {신공황후(神功皇后)}를 내세워 대한침략사관의 자료로 악용하였습니다. 제1대 실존 천황인, 가야인의 후손인 제15대 응신이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더욱이 일본(日本)이라는 국호가 생기기도 전에 한 여인(女人)이 당시 강대국이었던 신라와 고구려, 백제 등 삼국을 싸우지도 않고 정복했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들은 일본의 대화(大和, 야마토)정권이 4세기 후반 일본왕실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가야'에 조선총독부와 같은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를 설치했고, 거의 2세기 동안 가야 지방을 지배, 식민지를 경영하다가 서기 562년 신라가 가야제국을 정복하자 소멸하였다는 엉터리 {임나경영설}을 내세워 {한국을 병탄하는 것은 원래의 식민지를 되찾는 것에 불과하다}는, 즉 {실지(失地, 잃어버린 땅)의 회복과 같은 당연한 귀결}이라는 그릇된 인식을 일반 국민들에게 심어주고, 결국은 대한침략을 합리화했고, 또한 외국인들에게도 이를 선전하여 일본의 한국병탄은 '역사회복'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인상을 주려 했습니다.

일본학계는 패전 후까지도 {임나경영설}이라는 이 엉터리 연구를 물고 늘어져 정설(定說)로 만들어 내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일본의 교과서에 {임나경영설}이 사실로 기록되는 등 역사왜곡이 심한데 더욱이 외국에서는 그 일본교과서를 통해 우리 '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임나일본부]는 한반도에 있지 않았고 당시 일본열도의 길비(吉備), 지금의 강산(岡山, 오카야마)에 있었습니다.

가야는 일본열도로 진출하여 소국을 세우고 나라 이름을 자신의 조국 이름을 따라 '임나(任那, 가야)'라 했습니다. 왜(倭)가 가야 지역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하고, 한반도 동남부를 지배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임나(가야)를 한반도에 있었던 가야로 잘못 해석한 결과입니다. [임나일본부]가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는 것은 일본서기의 기록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일본서기》에는 '임나(가야)의 북쪽에는 바다가 있으며'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한반도 가야는 지금의 경상남도에 있었으므로 그 북쪽에는 바다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일본은 그들의 초대 신무(神武)천황부터 현재 천황까지 125대로 이어지는 천황가의 혈통이 단일혈통이라는 이른바 만세일계(萬世一系)를 줄곧 주장했지만, 그들은 이런 만세일계를 위해서는 가공인물의 왕을 등장시켜야 했고, 실존왕들의 나이와 재위시기를 조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만세일계에 의하면, 제1대 신무천황이 서기전 660년에 왕권을 잡았으니 1998년이 그들의 황기로는 2658년이 되는 셈인데 이는 한․일 두 나라의 역사적, 시대적 상황에 크게 배치되는 주장입니다.

일본은 이처럼 역사를 왜곡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민족기원과 누가 일본열도를 장악하고 지배했는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고, 천손족(天孫族) 운운하는 '신화'만을 일본 국민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늘에서 직접 내려온 민족처럼 가장하고 있으면서 고대 유적의 발굴, 특히 일왕가와 연관된 유적조사는 금기로 삼고 있습니다.

일본 국학자들이 제나라의 역사를 끌어올리고, 한국역사를 깍아 내리면서 그들의 역사상에 나타나는 한반도계는 {귀화인}, {도래인(渡來人)}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역사의 실체, 즉 자생왕조의 허구와 일본열도를 정복한 실체를 숨기려는 저의인 것입니다.

일본열도의 역사를 일왕가의 가계(家系)로 채워 신격화하면서 ≪일본사≫를 만들어 낸 그들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들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단군조선을 철저히 부정하고, 그들의 종주국이었던 가야․고구려․백제․신라를 오히려 그들의 식민지 또는 조공국가로 격하시키면서 이 지구상에 없던 사실(史實)을 만들어 냈습니다.

신대(神代)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왜곡된 한․일 관계가 수록되어 있는 (1888년에 완간된) ≪국사안(國史眼)≫은 일본 교과서의 저본이 되어 일본 국민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한국침략의 구실을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명치(明治)유신 때의 일본 권력자들은 일본이 일본열도 내의 '자생왕조'라는 허구에 대하여 가장 큰 위협이 되는 것이 그들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단군조선 관련 사서 등 올바른 한․일 관계 역사를 담고 있는 사서였으므로 대마도의 종가에 전하여 내려오던 사서들을 몰수, 그것들을 일본 궁내성의 문고 속에 감추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어용학자는 그들의 국보라고 자랑하는, 백제로부터 하사받은 {칠지도(七支刀)}의 명문(銘文) 중 그들에게 불리한 부분을 삭제하고, {광개토대왕비문}마저 '역사' 왜곡을 위해 첨삭하여 그들의 정사인 ≪일본서기≫의 허구를 합리화하려 했습니다.

현재 중국 길림성 태왕향 태왕촌에 있는 1880년 무렵에 발견된 {광개토대왕비}를 일제는 2년 뒤 비밀리에 비문조작과 연구에 착수하였습니다.

당시 만주를 정탐여행 중이던 일본 육군참모본부 파견간첩인 사꼬오(酒勾景信)중위가 능비를 답사하여 현지 탁공을 매수하여 탁본을 떠갔는데 이 때의 {쌍구가묵본}이 비문조작의 출발점입니다.

일본 육군참모본부는 당시 한국과 만주, 중국에 밀정을 밀파하여 갖가지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는데 ≪일본서기≫를 재해석하여 한국을 일본의 고대 식민지처럼 분식시킨 그들은 일본의 대한침략이 침략이 아닌 역사회복, 즉 잃어버린 땅의 회복이라는 억지를 사실처럼 조작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시기에 사꼬오 중위가 {광개토대왕비문}을 가지고 돌아 온 것을 역사조작의 절호의 기회로 악용한 것입니다. 일본 육군참모본부는 어용학자들이 가세한 가운데 {광개토대 왕비문}의 연구에 무려 6년이란 세월을 보냈습니다. 이 사이 사꼬오 중위를 비롯한 밀정들은 비밀리에 남만주를 여러 차례 왕래했는데 한 때 일본 육군참모본부는 {광개토대 왕비}를 폭파해 버릴 계획까지 세웠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비석을 폭파하여 없애기 보다 일부를 조작하여 첨삭함으로써 그들이 만들어 놓은 {창작일본사}를 광개토대왕비를 근거로 둔갑시키려는 더 교활한 방법을 택한 것입니다. 일제의 비문조작의 핵심은 {왜가 백제․신라․가야를 그들의 신민으로 삼았다}는 391년 신묘년 기사와 {왜가 신라성을 궤멸시켰다}는 400년 경자년 기사입니다.

광개토대왕비는 마모됐거나 판독되지 않은 글자가 1백 여 자에 이르러 아직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부분이 없지 않으나 전체적으로는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찬양하기 위해 그의 아들 장수왕이 즉위 2년인 414년에 국내성에 세운 기념비입니다.

일본은 {광개토대왕비문}을 조작해서 그들의 고대국가 성립 시기를 끌어올린 반면에 1910년 한국을 강탈한 일제는 조선 총독부에서 '역사'를 편찬하면서 2300년 실사인 단군조선을 '신화'로 철저히 왜곡․말살했을 뿐만 아니라, 삼국의 성립시기 조차 4세기 이후로 끌어내렸습니다. 삼국의 시조까지 '신화'로 왜곡했음은 물론이고요.

그들은 ≪일본서기≫의 왜곡은 물론, {광개토대왕비문}마저 첨삭하고, 왜곡하여 '역사'왜곡의 도구로 악용했는데 이처럼 일본 권력자들은 '한국사'의 말살계획을 1910년 강점이전부터 강력히 추진, 영원한 한국 탈취를 실현하려고 철저한 준비를 해 온 것입니다.

즉 일제는 (1868년) 명치유신 때 ≪일본서기≫를 재정리, 그들의 역사부터 왜곡한 다음 1910년 한국을 강점한 후 {사전 설계도}에 따라 우리 '역사'를 왜곡․말살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한․일 양국의 국민들이 모두 자기들의 역사를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던 시절, 일제의 지도자들을 비롯 군부와 국학자들은 그들이 만든 새로운 역사, 즉 조작된 {역사설계 도}에 따라 '한․일' 두 나라 국민을 허구의 역사 속으로 몰아 넣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런 사실을 현재 한국국민이나 일본국민 대부분은 잘 모르고 있는 실정입니다.


《상고사(단군조선)》


1. 일제의 '단군조선'을 비롯한 한국사 왜곡과 말살


《조선총독10인》이라는 책자에서도 잘 나와 있듯이, 현재 구 조선총독부 건물이 철거는 됐으나 일제 통치는 총독부 건물이 한 것이 아니라 조선총독 이하 일제 관리들이 장본인인 데 일제침략시대 당시 조선총독은 일왕의 대리권자로서 한국(조선)의 제반통치행정을 책임지고 있었던 장본인이자, 우리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처단 제1호'의 인물이었습니다.

조선총독은 행정․입법․사법․군사통수권까지 장악한 채 한국을 포괄적으로 통치했는데 형식상 일본총리 하에 있었으나 한국통치와 관련해서는 대부분 전권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 바로 조선총독이었습니다.

일제침략시대 말기 중국이나 일본 본토는 물론 심지어는 남양군도까지 한국인을 학병, 징병, 징용, 정신대로 강제 동원하였던 장본인이자, 특히 일제 지도층의 명령아래 4331년 우리 역사 중 2300년 실사인 '단군조선'을 비롯한 한국사 왜곡과 말살에 앞장섰던 장본인이 바로 조선총독들입니다.

'단군조선을 비롯한 한국사 왜곡과 말살 실태'에 대해서는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위원회가 편찬한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를 비롯, ≪제헌국회사≫와 일제침략시대 때 군수를 했던 문정창씨의 ≪군국일본조선강점 36년사≫ 그리고 30여 년 동안 '단군조선' 관계 사료를 수집, 정리한 나와 친분이 있는 이상시(李相時; 1932~) 변호사가〈조선일보〉1985년 10월 4일자 11면 머리기사로 폭로한『일제의 한국고사서 대량 분서』의 기사와『일제의 한국상고사 말살실태 와 단군실사』라는 (표제의) 논문집, ≪단군실사에 관한 고증 연구 우리 상고사는 다시 씌어져야 한다≫는 저서에 잘나와 있습니다. 이상시 변호사는 『검사 시절의 수사경험을 살려 한국상고사 에 관한 한-중-일 문헌을 철저하게 비교분석했다』고 말하더군요.

특히 조선일보 편집부국장으로 있는 서희건(徐熙乾; 1944~)씨가 1985년 10월 20일자부터 1986년 10월 26일자까지 총 51회에 걸쳐 '특별기획'으로 연재한 『단군조선은 이렇게 말살됐다』와 광복 41주년 '특별기획'으로 1986년 8월 15일부터 말일까지 11회 연재한『국사교과서 새로 써야한다』에 잘 나와 있습니다.

1985년 조선일보 문화부 차장으로 있던 서희건씨의 『단군조선은 이렇게 말살됐다』를 장기 연재 할 수 있도록 지면을 할애해 주고 격려를 해준 분들이 안병훈(安秉勳; 1938~) 조선일보 전무(편집인), 인보길(印輔吉; 1940~) 디지틀 조선일보 대표이사, 조병철(曺秉喆; 1935~) 전 주간조선 주간(전 조선일보 편집국장 대우), 이남규(李南圭; 1936~) 전 조선일보 편집부국장 겸 문화부장입니다.

1910년 한국을 강탈한 일제는 심지어 우리 소학교(현 초등 학교) 교과서까지 거두어 불태웠습니다. 1910년 8월 29일 한국을 강탈한 일제는 1906년에 설치했던 통감부를 '조선총독부'로 바꾸고, 1910년 10월 1일 관보(官報)를 발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선총독부 '관보'를 근거로 하면 일본 군부의 최고 권력자였고, 한국민의 민족운동을 압살했던 초대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취임하자, 1910년 11월부터 전국의 각 도․군․경찰서를 동원하여 1911년 12월말까지 1년 2개월 동안 계속된 제1차 전국 서적 색출에서 '단군조선' 관계 고사서 등 51종 20여만권의 사서를 수거․불태웠다고 광복 후 출간된 ≪제헌국회사≫와 문정창(文定昌)씨의 저서인 ≪군국일본조선 강점36년사≫는 밝히고 있습니다.

사료 수집기간은 1910년 11월부터 ≪조선사≫ 완간 직전인 1937년까지 27년간 계속되었습니다.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단군조선 등 우리의 역사를 왜곡․말살하기 위해 마련한, 1938년 6월에 발행된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朝鮮史編修會事業槪要)≫에서는 1923년부터 1937년까지 15년 동안 차입한 사료가 무려 4천 9백 50종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1910년 11월부터 1년 2개월 동안 수거된 서적이 51종에 20여 만 권이라면, 그 뒤 15년 동안 차입한 사료가 4천 9백 50종이라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우리 서적을 압수하고, 불태웠는지 알 길이 없는 것이지요.

일제는 단군조선 등 한국사 관련 사료 등을 수집시 한반도는 물론 일본, 중국 및 만주에 있는 것도 수집하였습니다. 일본의 사학자이면서 평론가인 하라타사카에루(原田榮)의 저서 ≪역사와 현대≫(1981년 4월 25일 발행)에 보면, {1923년 7월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찬위원회 구로이타(黑板) 고문이 대마도에 사료탐방을 하였을 때 한국과 관계가 있는 문서, 고기록 등이 다수 대주구 번주(藩主․영주) 종백작가(宗伯爵家)에 있는 것을 알고, 고문서류 6만 6천 469매, 고기록류 3천 576책, 고지도 34매 등을 은폐 또는 분서(焚書)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일제의 우리 고사서 인멸은 단군조선 등 한국사를 왜곡하고 말살하기 위한 전초작업이었던 것입니다. 조선총독부 취조국은 단군조선 등 한국사를 왜곡 편찬하는데 필요한 일부 서적만 남기고 모두 불태웠습니다.

현재 단군조선에 대해 논란이 되고 있는≪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같은 사서 등을 중심으로 남겨 놓았을 것입니다. 무단정치로 악명이 높던 초대총독은 취조국이 관장하던 업무를 1915년 중추원으로 이관하고, '편찬과'를 설치하여 『조선반도사』편찬을 담당시켰습니다.

새로운『조선반도사』를 만들려는 일제는 전국에서 압수․분서한 이외에 한국사 왜곡을 위해 '근거자료'로 일부 사서를 남겨놓고, 총독부 취조국에서 1915년 중추원 편찬과로 편사업무를 이전하기 앞서 이들 사료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왜곡편사계획'을 수립했음이 분명합니다.

우리민족의 대역적인 이완용과 권중현 등 부일역적들을 고문으로 앉힌 조선총독부 중추원은 1916년 1월 중추원 참의와 부참의 15명에게 편사업무를 맡기고, 일본 동경제국대학 구로이다 가쓰미(黑板勝美) 박사와 일본 경도제국대학 미우라(三浦周行) 교수, 경도제대 이마니시(今西龍) 등 3인에게 지도․감독을 의뢰하였습니다.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4~7면을 보면, 한국사료의 대량 분서와 한국사의 왜곡편찬 배경을 극명하게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새로운 사서(즉 왜곡된 역사서)를 읽히는 것이 조선인에 대한 동화(同化)의 목적을 달성하는 첩경이며, 또한 그 효과도 현저할 것이다…. 이것이 조선반도사 편찬이 필요한 이유요, 또한 편찬사업의 근본정신이다} 조선총독부가 중추원을 앞세워 전국적으로 각 도청․군청․경찰서 등 위압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벌린 제2차 '사료수색' 에서는 '역사'와 '전통문화예술' 그리고 '인물' 등 압수범위도 오히려 늘어났습니다.

헌병경찰제도로 무단통치를 강행했고, 단군조선 등 한국사를 말살시키는데 큰 공헌(?)을 했던 초대 총독 데라우치는 일본 내각 총리대신으로 전임하고, 그 뒤 3․1운동을 철저히 탄압했던 제2대 총독에 이어, 1919년 8월 12일 문화정치를 표방하고 부임한 제3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는 교활하게도 한국사람을 반일본인으로 만드는 소위 '교육시책'에서 {먼저 조선사람들의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민족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그들의 선조와 선인들의 무위(無爲), 무능과 악 행 등을 들추어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조선인 청소년들이 그 부조(父祖)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그것을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 고, 그 결과 조선인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史蹟)에 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어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니 그 때에 일본사적, 일본인물, 일본문화를 소개하면 그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일본 이 조선인을 반(半)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인 것이다}라고 1922년 총독 사이토가 '조선사편수사업'을 지휘하며 말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단군조선을 비롯 한국사를 왜곡․말살하는데 앞장을 선 제3대와 제5대 총독을 지낸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과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쿤스(E․W․Koons)가 교장으로 있고, 내가 경신학교 교무주임(지금의 부교장)으로 있을 당시인 1926년 9월 경신학교 대강당 낙성식 때 사이토 총독이 참석해 축사를 했는데 이 때부터 안면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 뒤 1934년~1937년까지 보전 논문집 편집책임을 맡게 된 이유로 인해 조선총독부를 그 누구보다도 많이 다니게 되었습니다. 일왕의 대리권자로서 이 땅에서 저지른 행악의 총책임자들인 조선총독 중 직접 대면한 사람은 제3대와 제5대 총독이었던 사이토입니다. 총독보다는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지금의 교육부장관)을 많이 대했습니다.

1920년대 일제의 정책은 수탈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우리민족을 분열시키고, '역사'를 단절시키는 수준에까지 나갔습니다. 일본은 '자생왕조'라는 허구의 합리화 이외에도, 당시 3․1운동으로 고조된 한국인의 독립의식을 희석시킬 고차원의 식민 지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더욱이 '역사' 왜곡을 자행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인의 '역사의식'을 흐리게 하여 장기적인 식민지화의 포석을 굳히는데 있어서, 무력으로 한국을 병탄한 일제는 군사적․경제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역사적․문화적 측면' 에 있어서도 일본이 한반도 지역보다 우위에 있었음을 조작, 교육하는 일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그 시책의 하나로서 1922년 12월 훈령(訓令) 제64호 '조선사편찬위원회' 규정을 제정, 공포하여 새롭게 {조선사편찬위원회}를 설치하고,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위원장으로 주요인물을 중심으로 한 15명의 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완용, 권중현 등 부일 역적들과 일본인 어용학자들이 합작하여 떠벌려 놓은 이른바 {조선사편찬사업}이 한국인 학자들의 외면으로 조선사편찬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자 조선총독부 총독인 사이토는 '조선사편찬위원회'를 확대․개편하였습니다. 그리고 명칭을 {조선사편수회}로 바꾸고, 일황(日皇)의 칙령으로 설치근거의 격을 높였습니다.

1925년 6월에는 '일황칙령' 제218호로 '조선사편수회' 관제를 제정․공포하고 조선총독부 총독이 직할하는 '독립관청'으로 승격시켰습니다.

관제(官制)를 새로 제정한 다음달인 1925년 7월 개편한 조선사편수회의 참여인물들을 보면, 일제가 얼마나 단군조선 등 한국사 왜곡편찬에 심혈을 기울였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조선사편수회 고문에 부일 역적들인 이완용, 권중현을 다시 앉히고 박영효, 이윤용, 일본인 거물들과 어용학자들을 위촉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편수회의 위원장급 회장들로는 현직 정무총감들이 맡아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일본인들을 참여 시켰습니다.

1910년 11월부터 1937년까지 무려 27년간의 사료수집 기간을 제외한 35권의《조선사》편찬기간만도 1922년 12월 '조선사편찬위원회' 설치 때부터 1938년 3월 완료되기까지 만 16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이 사업을 위해 일제가 쓴 예산만도 엄청났습니다. 일제가 본격적으로 그들의 역사보다 2천년이나 앞서있는 단군조선 등 우리의 '역사'를 왜곡․말살시키기 위해 '일황칙령'으로 설치근거의 격을 높이고, 조선총독부 총독이 직할하는 '독립관청'으로 승격시킨 {조선사편수회}에서 일본인 이마니 시(今西龍)와 한국인 ○○○, ○○○ 박사 등 이 세 사람이 '단군조선'을 '신화'로 왜곡하고 말살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장본인들입니다.

일본인 이마니시는 ≪조선사≫편찬의 주역으로 '단군조선' 등 한국사 왜곡 업무에 조선사 편찬 초기부터 16년 2개월 동안 앞장서 관여해 왔는데 이마니시는 1921년 ≪단군고(檀君考)≫라는 '단군신화설'을 만들어 그의 모교인 경도제국대학에 『조선고사의 연구(朝鮮古史の硏究)』라는 논문을 제출 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습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1916년 1월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 때는 새로 편찬할 한국사의 시대구분을 {상고․삼한(上古․三韓)}, 즉 '단군조선'을 집어넣기로 결의했으나, 7년 후인 1923년 1월 8일 '조선사편찬위원회' 제1차 위원회에서는 {상고․삼한(上古․三韓)}을 단순히 {삼국이전}이라는 한편으로 축소하여 놓고, 1925년 10월 8일 '조선사편수회' 제1차 위원회에서는 {삼국이전}과 {삼국시대}를 줄여 {신라통일이전}이란 한편으로 하였습니다.

이처럼 일제는 '단군조선' 등을 없애려고 편찬기구의 개편 때마다 상한선을 아래로만 끌어내렸습니다. 특히 일제는《조선사》가 공명정대한 학술적 사서(史書)라는 것을 강조하였는데 이것을 가시적으로 보장해 주는 편찬체제 가 바로 '편년체'였습니다.

당시 사학계에 풍미되었던 실증사학을 보장해 주는 듯이 간주되었던 것이 편년체였는데 이것의 근본목적은 <'취사선택' 하여 남긴 사서에서 이 사서들을 기준으로> 연도가 정확하지 않다는 이유로 '단군조선'을 사서에서 제외시켜 버리려는데 있었습니다.

또한 이 연장선에서 단군조선을 계승한 부여 등 열국시대를 말살시키려 했던 데도 그 일단의 목적을 두었습니다. 실제로《조선사》에 이러한 목적이 관철되었는데 ○○○, ○○ ○ 박사 등 식민사학자들이 '실증사학'을 도입함으로써 역사학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평가 이면에는 이와 같은 의도가 숨 어 있었습니다.

한민족의 기원과 관련되는 사서들을 모조리 탈취, 소각, 인멸했던 일제는 단지 고려시대 중엽과 말엽의 사서인 ≪삼국사기(三國史記)≫(1145년 편찬)와 ≪삼국유사(三國遺事)≫(1285 년 편찬) 등 '취사선택'하여 이와 같은 사서들만 남겨놓고, 그 이전의 사서들은 소각함으로써 그 의도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단군조선 등 삼국이전을 제대로 기록하지 않은 ≪삼국사기≫와 단군조선을 불교신화로 각색한 ≪삼국유사≫는 이유야 어찌됐든, 결국 이 두 사서는 일제가 단군조선을 부정 4331년 우리 역사 중 2300년 역사를 말살시키는데 활용할 수 있는 '근거'를 일제에 제시해 주는 결과를 초래한 셈입니다.

일제는 ≪조선사≫ 편찬작업을 통하여 '취사선택'하여 남긴, 즉 단군조선을 제대로 언급하지 않은 ≪삼국사기≫를 한국상 고사의 기본사료로 못박아 단군조선을 말살, '한국사'를 2천년 역사로 축소시키는 데 성공하였고, 단군조선을 불교신화로 각색한 ≪삼국유사≫의 기록은 사설(史設)로 규제해 버림으로써 단군조선을 '신화'로 왜곡 처리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단군조선을 비롯 우리 역사가 왜곡 말살된 이유'는 많은 전란을 겪으면서 사료들의 소실과 새왕조가 역사에 등장할 때마다 전(前)왕조의 업적을 강등하고 파괴시킨 자괴행위, 중국을 위하는 사대사관이 낳은 역사왜곡 등이 있지만, 특히 일제침략시대 때 우리 역사를 왜곡․말살하여 교육하는, 즉 우리민족의 말살정책사관인 '식민사관'에 의한 철저한 역사왜곡이 그 근본이유입니다.


2. 올바른 '단군조선(고조선)'의 역사


윤내현 단국대 사학과 교수의 ≪고조선 연구≫라는 책자는 우리나라와 중국의 옛 문헌이나 고고학 자료들을 토대로 연구한, 철저한 학술적 연구를 바탕으로 쓰여졌는데 이 책자에서도 잘 나와있듯이, 한 시대의 역사를 바로 알기 위해서는 그러한 역사가 이루어지도록 만든 앞선 시대의 역사에 대한 바른 인식을 필요로 합니다. 이 점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구려와 광개토대왕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인데 그 바른 인식을 위해서는 그보다 앞선 우리민족의 건국사인 단군조선에 대한 바른 인식이 필수적입니다.

지금부터는 윤내현 교수와 '단군조선'에 대해 학설을 같이 하는 부분으로, 1990년 《한국상고사》를 낸 이후로 1998년 현재 맥을 같이 하는 부분입니다. 일반적으로 고구려라고 하면 ≪삼국사기≫에 기록된 서기전 37년에 건국되어 가야․백제․신라 등과 같은 시대에 존재했던 고구려를 말합니다.

그러나 '고구려(高句麗)'라는 명칭은 이 고구려가 건국되기 훨씬 전인 서기전 12세기 이전부터 요서지역에 존재했던 단군조선의 거수국(渠帥國, 중국에서는 제후국이라 부름)이었고, 그 위치는 후대의 고구려와는 달리 중국의 수도인 북경(北京)에 서 가까운 지금의 난하 유역에 있었습니다.

이 두 고구려는 그들의 존재시기와 지리적 위치는 달랐으면서도 동일한 명칭을 사용하였는데 서기전 12세기는 단군조선 중기이고, 서기전 37년은 단군조선이 붕괴된 후입니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의 건국이 서기전 37년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중국의 옛 문헌에는 그보다 이른 시기부터 고구려 가 존재했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주(周)나라의 역사서인 ≪일주서(逸周書)≫에는 서주(西周)가 성주(成周, 지금의 낙양(洛陽))에서 개최한 성주대회에 고구려가 참석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대회에는 서주가 건국된 후 제(齊)에 봉해졌던 태공 망(望)도 참석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망은 주족(周族)이 상(商, 은(殷))나라를 칠 때에 선봉장으로서 큰 공로를 세웠던 인물입니다. 망(望)이 참석했던 것으로 보아 성주대회는 서주 초인 서기전 12~11세기경에 개최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서기전 12세기 이전부터 존재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단군조선은 부여(扶餘)․고구려(高句麗)․고죽(孤竹)․예(濊)․맥(貊)․추(追)․진번(眞番)․낙랑(樂浪)․임둔(臨屯)․현도(玄 )․숙신(肅愼)․청구(靑丘)․양이(良夷)․양주(楊州)․발( 發)․유(兪)․옥저(沃沮)․기자조선(箕子朝鮮)․진(辰)․비류( 沸流)․행인(荇人)․해두(海頭)․개마(蓋馬)․구다(句茶)․조 나(藻那)․주나(朱那)․한(韓, 삼한(三韓)) 등의 거수국(제후국)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이 가운데 부여․고구려․고죽․예․맥․추․진번․낙랑․임 둔․현도․숙신․청구․양이․양주․발․유․옥저․기자조선 등은 지금의 요서 지역에, 진․비류․행인․해두․개마․구다․조나․주나․한 등은 지금의 '요하(遼河)' 동쪽의 만주와 한반도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는 이 보다 훨씬 많은 거수국이 있었겠지만 역사에 남을 만한 사건과 관련을 갖지 못한 거수국은 기록에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단군조선의 강역은 서쪽으로는 중국 북경 근처에 있는 난하로부터 북쪽은 어르구나하(額爾古納河), 동북쪽은 지금의 흑룡강을 국경으로하여, 즉 한반도와 내몽골 자치구 동부와 재중동포들이 살고있는 동북3성(흑룡강성․길림성․요령성)을 비롯한 만주 전 지역을 차지하고, 때로는 재러동포들이 살고 있는 연해주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던 대국(서기전 16세기부터 단군조선 말까지 대체로 이러한 강역이 유지됨)이었습니다. 그 리고 '제주도'도 단군조선의 영토였습니다. 단군조선은 2300년간 실재했던 동북아 최강국가였으며, 중국 의 최초국가인 하(夏)나라보다 1백여년 앞선 나라였습니다.

한반도와 만주 전 지역을 그 통치영역으로 한 단군조선의 존속기간에 중국에서는 하(夏)․상(商, 은(殷))․서주(西周)․춘추(春秋)․전국(戰國)․진제국(秦帝國)을 거쳐 서한제국(西漢帝國)이라는 왕조와 시대의 변화가 있었고, 일본에서는 단군조선 말기(서기전 3세기 이후)의 영향을 받은 야요이(彌生)문화가 있었습니다.

단군조선은 중국 전국(戰國)시대 연(燕)나라(서기전 323~222) 와의 전쟁에서 일시침공을 받았으나 그것을 격퇴하고, 오히려 연나라의 동부의 땅을 빼앗아 침략에 대한 응징을 하였고, 서 한제국은 단군조선과의 국경을 지키지 못해 뒤로 물린 바 있 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단군조선의 강한 국력(군사력)을 알게 해 주는 것이며 이러한 국력은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경제력이 없이 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단군'은 각 지역의 거수(渠帥)들만을 통솔하고, 각 거수국(渠帥國)의 주민들은 거수들에게 위임통치하였습니다. 그리고 각 지역의 거수들은 '단군'에게 일정한 의무를 이행하 면서 단군을 그들의 공주(共主)로 받들었습니다. 해모수는 우리말의 해머슴아가 한자화된 것으로 '단군'에 대 한 다른 칭호였습니다. 단군조선인들은 '단군'을 최고 지도자로하여 '하느님'을 믿는 동일한 종교를 가지고 있었고, 동일한 언어와 풍습을 가지고, 동일한 정치체제와 경제상황속에서 생활하였습니다.

단군조선의 서부변경인, 지금의 중국 북경 가까이에 있는 난 하( 河) 동부유역에는 일찍이 서기전 12세기경에 기자 일족 이 서주(西周)로부터 망명하여 자리를 잡고 기자조선(箕子朝鮮)이라는 단군조선의 거수국(제후국)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서기전 195년에 위만(衛滿)이 중국 서한(西漢)으로부 터 기자조선으로 망명하여 기자의 40여대 후손인 준(準)으로 부터 정권을 빼앗아 위만조선(衛滿朝鮮)을 건국하였습니다. 그리고 서한의 외신(外臣)이 되어 지금의 대릉하(大凌河)유역 까지 영토를 확장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지금의 요서지역에 있던 단군조선의 거수국들은 그들의 영토를 잃게 되었고, 이런 와중에 요서지역에 있었던 거수국들의 지배층과 주민 일부는 동쪽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곳에 정착지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 요서지역에서는 또 한번의 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한사군(漢四郡)의 설치였는데 중국의 서한(西漢) 무제 는 서기전 108년에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지금의 요서지역을 서한의 행정구역으로 편입시켜 그곳에 {낙랑(樂浪)․임둔․진번․현도(玄 )} 등 4개의 군(郡)을 설치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단군조선의 서부영토였던 지금의 요서지역이 서한의 영토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아직까지 그 지역에 살고 있던 일부 단군조선인 들은 이동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이렇게 두 번에 걸쳐 동쪽으로 이동한 사람들은 지금의 요하(遼河) 동쪽의 만주와 연해주, 한반도에 자리를 잡고 정치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는데 그 뒤 단군조선이 통치능력을 잃게 되자 그들은 독립국이 되었습니다. 동부여․고구려(지금의 요동과 평안북도 지역)․읍루(연해주 지역)․동옥저(함경도 지역)․최씨낙랑(평안남도 지역)․동예(강원도 지역)․대방(황해도 지역)․한(삼한; - 지금의 경기도․충청남북도․전라남북도․경상남북도) 등이 그런 나라들입니다. 이렇게 해서 열국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부여(扶餘)는 원래 중국 북경 근처에 있는 지금의 난하 북부유역에 있었습니다. 난하 동부유역에 위만조선이 건국되자, 다소 북쪽으로 이동하여 '북부여'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서한(西漢)에 의해 위만조선이 멸망되고, 그 지역이 서한의 영토가 되자, 동으로 이동해 지금의 중국 길림성 북부 에 도읍하고 내몽골 자치구 동부와 흑룡강성 전부를 영토로하여 이를 부여 또는 '동부여'라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동부여)를 북부여로 인식하는데 그것은 단군조선 거수국였던 북부여가 난하 상류 유역에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일어난 잘못입니다.

이 시기에 지금의 요하 서쪽과 동쪽의 만주와 한반도에는 동일한 명칭이 병존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서한은 지금의 요서지역에 군현을 설치하면서 대부분 단군조 선에서 사용했던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였습니다. 낙랑군, 임둔군, 진번군, 현도군, 고구려현, 옥저 등과 후에 낙 랑군에서 분리된 대방군 등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 이 지역에서 동쪽으로 이동한 단군조선 인들이 세운 최씨낙랑, 고구려, 동옥저, 대방 등의 나라가 요 하(遼河) 동쪽의 만주와 한반도에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이를 혼동하여 만주와 한반도에 있었던 이러한 국명들을 중국의 군현 명칭으로 해석해 중국의 군현이 만주와 한반도까지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컨데 요서지역에는 고구려현이 있었고, 요동지역에는 고구려국이 존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원래 거주했던 곳과 새로 나라를 세운 곳에서 동일한 명칭을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 즉 서기전 37년에 요동에 세워진 고구려국이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고구려입니다. 이 나라는 추모왕(鄒牟王), 즉 주몽과 그 집단에 의해서 건국되었는데 이들은 고구려라는 국명을 사용한 것은 추모왕(주몽)을 포함한 건국 주도세력이 단군조선의 거수국이었던 옛 고구려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단군조선은 후기에 단군의 후손을 각 지역의 거수(渠帥)로 봉하여 혈연조직을 강화한 바 있는데 단군조선의 거수국이었던 고구려도 그 때 거수가 단군의 후손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므로 추모왕은 단군조선의 거수국인 고구려 거수의 후손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서기전 37년에 추모왕에 의해서 지금의 요동에 세운 고구려는 난하 동부유역에 자리하고 있었던 단군조선의 거수 국 가운데 하나인 옛 고구려(高句麗)를 계승한 나라인 것 입니다.

고구려는 지금의 요동에서 재건된 후 주변에 있는 단군조선의 거수국이었던 비류․행인․해두․개마․구다․조나․주나 등의 나라를 병합하였습니다. 그리고 고구려는 건국 후 오래지 않아 지금의 요서 지역에 진출하여 그 후 계속해서 중국 북경근처의 난하 유역에서 중국 과 전쟁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줄기차게 지금의 요서 서부로 진출하던 고구려는 미 천왕 때인 서기 313년부터 315년 사이에는 난하 동쪽에 있었던 한사군을 난하 서쪽으로 축출하고, 지금의 요서 지역을 완전히 차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의 '요서지역'은 원래 단군조선의 영토였고, 단군조선의 거수국이었던 고구려도 원래는 이 지역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의 요서 진출은 단군조선의 고토 수복이었으며, 동시에 자신들의 고토 수복이었던 것입니다.

고구려가 지금의 요서지역에 진출하던 시기에 백제는 바다를 건너 지금의 중국 북경과 천진(天津) 지역에 진출하여 그 세력을 남쪽으로 확장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고구려와 백제의 활동은 단순히 영토를 확장하기 위한 전쟁만은 아니었고, 단군조선의 고토 수복과 중국의 단군 조선 침공에 대한 응징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고구려의 소망은 광개토대왕에 이르러 그 위광이 중국 북부는 물론 몽고의 동부와 연해주까지 미침으로써 일단 성취되었습니다.

1995년 SBS에서 광복 50주년 기념으로 다큐멘터리 6부작으로 최인호(崔仁浩; 1945~)씨의 '고구려, 그 중에서도 광개토 대왕의 영광에 관한 역사물'인 {왕도(王都)의 비밀}을 제작․방영했는데〈제4부 정복의 길〉에서 표현했듯이, 광개토대왕의 영토확장은 단군조선의 영토 수복에 그 목표가 있었습니다. {왕도의 비밀}을 흥미있게 보았는데 잘 만들었더군요. 광개토대왕의 요서 진출은 단군조선과 그 거수국인 옛 고구려의 단순한 영토 수복에만 목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단군 조선에서 추구했던 천하질서를 실현하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요동'이라는 말은 중국인들이 그들의 영토를 기준으로 하여 가장 동쪽 끝에 위치한 지역을 의미하였습니다. 오늘날의 극동(極東)이라는 말과 같은 뜻을 지닌 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중국의 동쪽 국경이 이동하면 요동의 위치도 변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재중동포가 살고있는 요령성 요양시 지역을 흐르는 요하(遼河)는 오랫동안 만리장성 부근 난하를 가르켰는데 후대에 이름이 바뀐 것입니다. 오늘날의 요동(遼東)은 요하(遼河 또는 요수(遼水))의 동쪽을 지칭하는데 고대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중국의 여러 문헌에는 지금의 '난하( 河)'가 요하(요수)로 기록되어 있고, ≪사기≫에는 난하 동부유역에 있는 갈석산(碣石山) 지역이 요동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로 보아 고대의 '요하'는 중국 북경 근처에 있는 지금의 '난하'였고, 고대의 '요동'은 '난하 유역'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그곳은 단군조선과 중국의 국경으로서 고대에 중국 영토 가운데서 가장 동쪽 끝에 해당하는 지역이었습니다.

당시의 서한의 요동군은 지금의 난하 하류유역에, 즉 요서 서부에 자리하고 있었으므로 당시에 고구려가 진출한 요동군은 지금의 요동이 아니라, 중국 북경 근처였던 것입니다. 현재 통용되는 한국사 개설서에는 가장 강성했던 시기의 고 구려 영토가 북경 근처가 아닌, 요령성 요양시 지역을 흐르는 지금의 요하(遼河)까지였다고 서술되어 있는데 그것은 고대의 '요동'을 지금의 지명과 동일한 곳으로 잘못 인식한 결과가 빚어낸 오류인 것입니다. 그리고 현행 국사 교과서는 단군조선의 역사는 물론 단군조선의 영토도 축소되어 있더군요.

단군조선의 후계세력인 동부여․고구려․한 등에는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어 추는 춤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춤들은 단군조선의 춤을 계승한 것들입니다. 1997년 우리의 전통명절인 설날과 정월대보름을 맞아 전국서 정통농악과 강강술래 등 민속놀이를 비롯 세시풍속들이 펼쳐 져 국민들에게 큰 호응을 받았는데 오늘날의 '풍물(농악)'이나 '강강술래'는 바로 단군조선시대의 춤을 계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음력설'은 우리민족이 역사이래 줄곧 지켰던 순수한 '우리 설날'입니다.

단군조선은 한국사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국가이자, 우리민족 도 이 시기에 형성되었습니다. 그런데 왜곡․말살로 인해 우리는 이러한 한국사의 실질적인 출발점이며, 한민족 '사회와 문화'의 원형을 지니고 있는 단군조선에 대한 연구가 그간 충분하게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한국사' 전체를 인식하는데 있어서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우리가 잘 아는 고구려․백제․신라․가야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는 않았을 거 아닙니까? 한민족 문화의 원형은 우리민족의 건국사인 단군조선에 있으므로 그것을 바르게 알지 못하면 한민족의 정체(正體)를 바르게 인식할 수 없습니다. 즉 단군조선에 대한 이해 없이는 우리민족 본래의 모습을 알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떠한 변화를 거쳐 오늘의 모습에 이르렀는지도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이와같이 단군조선에 대해서는 현재 윤내현 교수와 대부분 맥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단군조선'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으면 윤내현 단국대 교수한테 문의하고, '한국사 왜곡과 말살실태'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으면 『일본인들의 역사왜곡과 그에 동조한 국내학자들을 비판한 논문』을 쓰고, 정년퇴직한 이후로도 집요하게 한․일관계사를 추적해온 최재석(崔在錫; 1926~) 고려대 명예교수와 서희건 조선일보 편집부국장에게 문의하면 될 것입니다.

조선일보사에서 발행한〈월간조선〉1998년도 1월호 뒷부분에 보면 40페이지에 걸쳐 '단군조선' 등 우리의 '역사' 범위가 일 본, 만주는 물론이고 중국의 상당부분까지 미치고 있었음을, 그리고 황해와 동해, 남중국해를 주름잡던 선조들의 기상을 보여주고 있더군요.


3. 단군조선을 단군조선과 기자조선, 위만조선 등 3조선으로 분리하는 사람이 있는데


'단군조선'을 단군조선과 기자조선, 위만조선 등 3조선으로 분리 {단군조선은 서기전 2333년에서 서기전 1122년까지이고, 기자(箕子)조선은 서기전 1122년에서 서기전 194년까지, 위만(衛滿)조선은 서기전 194년부터 한무제에 의해 한사군(漢四郡)이 설치되는 서기전 108년까지 존속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역사인식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단군조선은 2300여년간 지속된 '강대한 광역국가'였고, 기자조선은 단군조선의 수많은 거수국(제후국) 중에 하나로서, 단군조선의 서부 변경인 중국 북경에서 가까운 난하 동부 유역에 서기전 12세기경(서기전 1122년경)에 기자일족이 서주(西周)로부터 망명하여 자리를 잡고 단군조선의 거수국이 된 것이 '기자조선'이고, 위만조선은 서기전 195년에 위만이 중국 서한(西漢)으로부터 단군조선의 거수국인 기자조선으로 망명하여 기자의 40여대 후손인 준(準)으로부터 정권을 빼앗아 나라를 세우고 단군조선의 거수국이 아닌, 서한의 외신(外臣)이 된 것이 '위만조선' 입니다.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이 단군조선을 계승했다, 즉 단군조선 ― 기자조선 ― 위만조선으로 계승되었다}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역사인식입니다.

그리고 '단군'은 군주(君主)를 뜻하는 말로서 오늘날의 대통령이라는 칭호와 비슷한, 단군조선을 통치했던 최고 통치자에 대한 칭호로서 단군조선 시대에는 수 십 명의 단군이 있었습니다. 단군조선의 뒤를 이어 위만조선이 건국되고 그 뒤를 이어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서술된, 즉 『서기전 194년에 위만이 단군조선의 왕이 되고, 서기전 108년에 단군조선이 멸망하고 중국의 지배를 받았다』는 현행 국사체계는 사실과 전혀 다른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낙랑․임둔․진번․현도의 4개군 (郡))은 한반도에 있지 않았고, 당시 단군조선의 서부 변경이었던 중국 북경에서 가까운 난하( 河) 동부유역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우리 역사의 주류일 수 가 없고, 단군조선의 변방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취급되어야 합니다.

우리 역사의 주류는 2,300년 실사인 단군조선으로부터 단군조선을 계승한 동부여․고구려․읍루(이전의 숙신)․동옥저․최씨낙랑․동예․대방․한(韓, 삼한) 등의 열국시대로 이어지는 것으로 체계화되어야 합니다. 이들은 원래 단군조선의 거수국이었는데 단군조선이 붕괴되자 독립국이 된 것으로 이 가운데 고구려가 북방을 통합하고, 남방의 한(韓, 삼한)은 백제․신라․가야로 분열되어 사국시 대가 되었던 것입니다.


4. 우리 한민족은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반도와 만주의 토착인들에 의해 건국되었다


근래의 고고학 발굴과 그 연구 결과에 의하면 단군조선 지역의 신석기시대 개시는 다른 지역보다 늦지 않았으며, 청동기문화 개시 연대는 황하(黃河)유역이나 시베리아 지역 보다 앞선 것으로 나타납니다. 지난날에는 단군조선 영토였던 한반도와 만주지역은 중국의 황하유역이나, 시베리아 지역보다 문화의 발전이 늦을 것으로 믿어왔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확인된 {청동기문화} 연대 가운데 가장 이 른 것을 보면, 한반도에서는 전남 영암군 장천리의 청동기시대 유적(주거지)과 경기도 양평군 양수리의 청동기시대 유적에서 서기전 2500년경으로, 만주(요녕성)에서는 '하가점하층문 화(夏家店下層文化)'에서 서기전 2410년경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러나 중국 황하유역의 '이리두문화(二里頭文化)'에서는 서기전 2200년경으로, 시베리아에서 가장 앞선 청동기문화인 '미누신스크 문화'는 서기전 1700년경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는 단군조선 영토였던 한반도와 만주의 청동기문화 개시연 대가 중국의 황하유역이나 시베리아 지역보다 앞선다는 것입 니다.

근래의 고고학 자료들을 통해 볼 때 일부 사람들이 말하는 {한민족은 외부로부터의 이주민에 의해서 형성되었다}거나, {그 주체가 예․맥족(濊․貊族)이었을 것이다}는 등의 주장은 성립될 수 없는 것입니다.우리 한민족은 외부로부터 이주민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반도와 만주의 토착인들에 의해 건국되었습니다. 그리고 예․맥이라는 것은 단군조선의 수많은 거수국(제후국) 중에 하나입니다.

일제는 단군조선을 말살하기 위하여 한반도에는 청동기 유물조차 없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일제는 우리문화의 기원을 {시베리아 → 연해주 → 한반도}로 이어지는 {전파설}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임효재(任孝宰) 서울대 고고학교수(한국고고학회 회 장)가 발굴한 8천년(서기전 6천년경)된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 오산리 유적(주거지 유적) 등을 보면 우리 선조들은 '백두산'을 중심으로 고유문화를 형성한 후, 전파문화를 흡수했음이 분명합니다(흑요석제 석기는 백두산이 원산지임). 오산리 유적은 지금까지 알려진 시베리아 신석기 유적보다 2 천년이상이나 앞서는데 현재까지도 일제의 잔재로 남아있는 '한민족의 기원'은 물론, '문화전파설'은 하루 빨리 수정돼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단군조선 시대에 해당하는 이른 시기의 청동기 유적이 발견되지 않음으로 해서 청동기문화의 전개연대를 서 기전 1000년경으로 못박아 단군조선 중기나 말기에 이르러 비로소 청동기 시대에 접어들었다거나, 특히 단군조선을 단군조선과 기자조선, 위만조선 등 3조선으로 분리 이를 바탕으로 아예 단군조선을 인정하지 않는 경향까지 있었습니다.

그리고 철기문화의 보급연대를 단군조선 후기인 서기전 300 년경으로 잡는 사람이 있는데 윤내현 교수의《고조선 연구》에서도 잘 나와있듯이, 최근 발굴된 자료들에 의하면 철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서기전 800년경부터였고, 서기전 300년경부터는 강철을 사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단군조선인들이 청동과 철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세계 역사상에서도 매우 이를 뿐만 아니라, 그 기술수준도 매우 높았습니다. 단군조선은 전기와 중기의 청동기시대로부터 후기는 초기 철기시대에 해당됩니다.

그러므로 단군조선의 영토였던 한반도와 만주에서 발견된 그리고 앞으로 발견될 이 기간의 청동기와 초기 철기의 유적과 유물은 모두 단군조선의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고대 최고의 희귀 장신구인 '유리'가 단군조선 시대인 서기전 5세기 무렵에 우리 나라에서 제작․사용됐음이 밝혀져 학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더군요.

동아일보 1997년 4월 12일자 29면에서도 잘 나와있듯이, 한국 과학기술연구원(KIST)의 최주(崔 炷) 박사팀은 1995년 충남 보령시 미산면 평라리 유적지에서 발견된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유리구슬에 대해 성분분석을 한 결과, 이 구슬이 서기 전 5세기쯤 한반도에서 나는 납을 혼합해 제작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혔습니다.

그간 학계에서는 우리나라의 유리문화가 초기 철기문화와 함께 서기전 2세기 무렵 중국에서 유입됐다고 밝혔었는데, 이 유리구슬은 바륨(Ba)이 섞여 있는 중국계통의 유리와는 달리 바륨이 들어있지 않는 등 독창적인 방법으로 제작된 것 이어서 이 땅에 일찍이 유리문화가 뿌리 내렸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성분분석 결과 유리구슬에 산화납(pbo)이 1.7% 함유되어 있음이 증명됐는데 산화납은 낮은 온도에서 유리를 만들 수 있게 하면서 유리의 내구성을 높여주는 첨가물질로, 따라서 산화납의 존재는 유리제조 기술이 매우 앞서 있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서기전 5세기경의 유리구슬에서도 산화납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최주 박사가 {금강유역에 발달한 청동기문화는 중국에 비해 상당히 앞서 있음을 입증한 것}이라고 말했듯이, 이번 실험결과로 유리 제조기술은 중국에서 전래된 것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독창적으로 개발되었다는 {새로운 역사}를 밝혀낸 것입니다.

중앙일보 1998년 4월 1일자 1면과 3면에 보면, 국내에 한 점도 없던 단군조선의 미송리형 토기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는 기사가 실렸더군요. 이런 식이라면 단군조선에 대한 아직도 많은 유물과 사료들이 국내․외에 산재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5. 단군조선이 국민들에게 불신 받고 있는 이유는


현재까지도 단군조선과 단군조선을 건국한 {국조 단군}이 국민들에게 불신받고 있는 이유는 '신화'로 왜곡한 일제와 어용학자들의 공(?)이 크지만, 이에 못지 않게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미흡한 역사교육과 {국조 단군}을 종교화․신격화한 단체들도 일말의 책임이 있다고 봅니다.

1980년대 중반 {단군성전} 건립에 일부 기독교(개신교)인들이 반발을 한 바 있는데 이것은 일부 기독교인들만의 책임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현재 기독교인들이 단군조선을 건국한 {국조 단군}을 역사적 주체로서가 아닌, 종교화․신격화 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특히 나는 4331년 우리 '역사'중 2300년 실사인 단군조선을 건국한 {국조 단군}을 종교화․신격화․사상화 하는 것에 대해 강력히 반대합니다. {국조 단군}은 역사적 주체로서 우리 한민족의 공통된 시조이지 어느 단체나 개인에 의해 종교화․신격화․사상화 되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국조 단군}을 종교화․신격화해서는 안되는 이유는 우리가 잘 아는 광개토대왕,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 가깝게는 내 할아버지를 종교화․신격화해서는 안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1999년에는 [세계'고인돌'축제]를 한국에서 개최할 계획이라고 들었습니다. 전세계에 고인돌이 5만 5,000여 개가 보고돼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고인돌도 많이 파괴됐지만 아직도 전세계 고인돌의 45%에 가까운 2만 5,000여 개가 남아 있습니다.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시아 일원의 고인돌이 바로 '단군조선' 유적들입니다. 유인학(柳寅鶴; 1939~) 한국고인돌협회 회 장(한양대 법대 교수)이 추진하고 있는 고창과 화순의 고인돌 지구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신청 노력은 관광 측면에서 볼 때도 유익한 일입니다. 프랑스는 브리타뉴 카르냑의 고인돌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연간 500만 명 가량의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습니다.


6. 북의 '단군릉'


북의 '단군릉'은 고구려시대의 무덤인데 단군릉으로 잘못 전해왔으며 연대측정에도 착오가 일어났을 것으로 보입니다. 단군릉 발굴에 대한 북한측의 견해는 학문적이라기보다는 그들의 정통성 확보를 위한 정치적인 면을 더 보이고 있습니다.

북한이 단군조선이 붕괴된 후 단군조선을 계승한 나라들이 한반도로 내려와 정착하면서 옛 지명을 그대로 사용한 것을 간과한 채,《삼국사기》에서 {평양(平壤)은 본래 선인(仙人) 왕검(王儉)의 댁(宅)이다}라고 해서 정통성을 주장하는 것은 말도 안됩니다.

그리고《삼국유사》〈고조선〉조에서 단군조선의 도읍 가운 데 아사달이나 평양성이 지금의 평양에 있었던 것처럼 기록되어 있는데 아사달이나 평양이라는 지명은 한 곳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평양성, 아사달은 요령성 심양 동남 본계시(本溪市) 지역과 중국 북경에서 가까운 난하 하류 유역에도 있었습니다.

'한민족'의 발상지이자, 생명의 젖줄이기도 한 백두산(白頭山) 정상에 있는 천지(天池)의 물은 세 갈래로 흘러 재중동포들이 살고 있는 중국 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는 송화강(松花江)을 이루고, 북한 땅으로 흐르는 물줄기는 두만강과 압록강을 이루는데 단군조선을 건국한 {국조 단군}의 묘가 있다면, 백두산 부근이나 특히 송화강 주변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그래서 나는 1928년경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 교수로 있으면서 '역사' 연구차 송화강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아사달}은 {국조 단군}이 나라를 처음 열었을 때의 첫 도읍지 명칭으로 {아침의 나라}, {출발의 땅}, {최초의 땅}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단군조선의 첫 도읍지 {아사달}은 '백두산' 부근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나는 봅니다.


7. 중국의 일부 지역에서는 한국의 옛 이름이 지금도 그대로


강대했던 단군조선, 단군조선의 서부 강역이었던 중국 북경 부근의 난하유역까지를 수복하고 중국을 향해 위용을 과시했던 고구려의 역사가 있었고, 바다를 건너 중국 북경과 천진 지역으로부터 남쪽의 절강성에 이르는 지역을 차지하고 영향력을 행사했던 백제의 역사가 엄연히 존재했었는데 한국은 중국으로부터 일방적으로 문명을 전해 받은 것으로 교육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중국의 각종 문헌에는 한국 관련 기록들이 많은데 일부 지역에서는 한국의 옛 이름이 지금도 그대로 쓰이고 있습니다. 고려하(高麗河), 고려포(高麗鋪), 고려영(高麗營) 등 고구려와 관련이 있는 지명이 북경 인근에만 30여 개에 이르고, 중국 남부 광서성에는 백제향(百濟鄕)이란 이름이 보이기도 하고, 무인도이긴 하지만 중국 동남해안에는 신라도(新羅島)라는 지명이 현지인들 사이에서 쓰이기도 합니다.

1996년 9월 15일 KBS 1TV {일요스페셜}에서는 신라중심의 역사기술로 소홀히 다뤄져온 백제의 역사를 재조명하는 다큐멘터리가 방영됐는데 「속 무령왕릉, 잊혀진 땅 ─ 백제22담 로의 비밀」이란 이 다큐멘터리는 백제 특유의 지방 통치체제인 '담로'를 화제로 삼아 6세기 당시 활발한 해상활동을 벌였던 백제의 구역을 추적한 것이더군요. 담로(擔魯)란 백제의 지방 행정 구역의 하나로서, 왕자나 왕족을 보내어 다스리게 한 행정 구역을 말합니다.

백제는 22담로를 두었으나 시대와 지역의 대소에 따라 수효의 변천이 있었습니다. 과연 '담로'는 어떤 모습의 통치체제였고, 어디에 존재했는지 또, 해외에까지 뻗어 있었던 것인가! ─ 이런 의문들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제작진은 중국과 일본, 동남아시아 일대를 섭렵하며 8개월 동안 백제의 흔적을 추적했는데 가장 큰 성과는 중국에서 백제의 지명을 찾아낸 것 일 것입니다.

북경에서 3천km나 떨어진 베트남 인접지역 광서장족(廣西壯族, 광시좡족)자치구에서 '백제향(百濟鄕)'이란 이름을 찾아냈고, 이곳이 바로 중국의 사서인 《송서(宋書)》에 등장했던 백 제의 옛 영토 '진평군'이란 것을 알아내더군요. 백제향의 중심마을 이름이 백제허(百濟墟�백제 옛터)란 것 도 눈길을 끄는데 이곳에는 전남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맷돌과 외다리 방아 등이 발견돼 백제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중국 북경(北京, 베이징)과 천진(天津, 톈진), 석가장(石家莊, 스자좡)지역에까지 백제의 흔적이 퍼져있음을 확인했고, 더 나아가 중국사서에 기록된 백제 태수들의 임지 가 중국 동해안을 따라 선을 잇듯 분포한다는 것도 밝혀, 중 국 속의 백제 지배지가 북경과 천진 지역으로부터 지금의 절강성(浙江省, 저장성)지역까지 남하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더군요.

특히 제작진이 발견한 흑치상지의 묘지명(남경 박물관 소장) 에서 흑치상지가 흑치 지역에 봉해지면서 원래 백제의 왕성(王姓)인 부여씨를 버리고 흑치씨를 사용했다는 기록을 찾아냈는데 결국 흑치 지역이 동남아시아를 뜻하기 때문에 백제의 통치지역은 동남아시아 일대까지 이어졌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SBS에서 방영된 {왕도의 비밀}과 함께 이 프로도 흥미있게 보았는데 잘 만들었더군요. 백제는 서기 246년(고이왕 13년)에 진충(眞忠) 장군을 파견하여 지금의 북경지역을 공략하고「백제군」을 설치한 후, 남쪽으로 영역을 확장하여 지금의 하북성, 산동성(山東省, 산둥 성), 강소성(江蘇省, 장쑤성), 절강성 지역의 동부해안을 차지하였습니다. 백제의 중국 동부해안 지배는 시기에 따라 그 영역에 차이는 있었지만 서기 588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백제의 남방경영은 지금의 제주도 경영부터 시작되는데 오키나와를 중간 기항지로 필리핀 군도로 뻗어나갔습니다. 즉 백제는 제주도를 기항지로 하여 이전부터 진출해 있던 북 규슈(北九州, 기타큐슈)를 잇는 상설 항로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그치지 않고 지금의 오키나와를 중간 기항지로 삼고 대만(타이완)해협을 지나 필리핀 군도까지 항로를 연장시켰습니다.

필리핀 군도(群島)는 흑치국(黑齒國)으로 일컬었던 곳인데 이 곳이 백제와 연관이 있음은 중국 낙양의 북망산에서 출토된 백제장군 흑치상지(黑齒常之)의 묘지석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의하면, 그 가문은 왕족에서 나왔지만 흑치(黑齒)에 분 봉(分封)된 관계로 그 지명을 따서 씨(氏)를 삼았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볼 때, 왕족을 지방의 거점에 파견하여 통치하는 담로제의 일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8. 1998년은 발해 건국 1300년이 되는 해


한반도 면적의 3배에 달하는 대제국을 건설한 발해(698~926)의 개국 시조 대조영(大祚榮; ?~719)은 고구려 멸망 30년만에 거란․돌궐족의 대두와 당제국의 혼란․약화라는 국제정세의 타이밍을 포착하여 동북아의 새로운 강대국을 세웠습니다. '발해'는 사방 5천리의 대제국이었으며, 고구려의 계승국임을 자임(自任)하고, 독자적인 연호(年號)를 사용하였습니다.

남쪽의 통일신라와 {남․북국관계}로 대립․교섭하면서 동북 아 일류의 문화국으로 영화를 누렸던 2백 30여년간 존속한 선진 발해는 뛰어난 조선술과 항해술을 보유하기도 했고, 1천 300km 떨어진 일본의 보호자 역할을 하였습니다. 발해는 육상전투에서 능숙했던 대륙국이면서도 해양대국이었는데 일본과 47회의 교류를 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발해인의 일본진출 루트는 동해를 통해 이루어졌는데 예로부터 동해는 발해의 내해(內海)였습니다.

중앙일보사에서 발행한〈월간중앙 WIN〉1998년 1월호에 보 면, {1천 3백년만에 베일 벗는 대규모 발해고분}이란 기사가 실렸더군요. 서기 698년 고구려 장수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함께 고구려의 지배하에 있던(옛날 부여가 있던) 지역인 백두산 동북 송화강 유역인 만주 길림성 돈화시 동모산(東牟山) 일대에 발해를 건국하였습니다.

고구려의 후예로서, 평양~원산 이북 지역부터 중국 동북부의 대부분과 러시아 연해주를 지배한 동북아의 대강국 발해는 우리 역사의 중요한 부분이면서도 단군조선과 함께 잊혀지고, 빼앗긴 민족사의 한 장입니다. 발해 북쪽의 강역은 고구려 북쪽의 강역보다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만주 동부에 중심을 두고, 북쪽으로는 아무르강까지, 남쪽으로는 한반도 북부를 호령하던 대강국이었습니다.

발해의 152년간 수도였던 상경용천부의 동경성(현 흑룡강성 영안시 발해진)은 둘레가 16㎞에 달하고, 궁전터만 37개가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발해는 고구려인 대집단을 기반으로 형성된,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인데 동북아에서 '한국사'의 위치를 자리매김 하려면 단군조선과 고구려, 발해사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발해를 건국하는데 말갈족도 참여하였는데 말갈족은 단군조선의 속국였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찬란한 5천년 역사를 가진 민족입니다. 그런데 각 성씨(姓氏) 족보에 보면, 성씨의 기원이 중국이라 고 한 성씨들이 있는데 이것은 사대주의 때문입니다. 중국이 강해지니까 우리민족의 건국사인 단군조선을 비롯한 우리 '역사'를 말살하고는 중국을 상국(上國)이라고 여겼으니 까요.


9. 역사회복 문제에 대해 강조하고 싶은 말


상고사와 한․일관계사 등 우리 '역사'를 우선 올바로 정립하지 못한 상황아래서 '한․일 역사 공동연구'라는 것은 위험한 일이며 일본에 끌려다닐 소지가 있습니다. 중국하고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한․중․일 3국이 '역사'를 공동으로 연구하게 되면 우 리만 고립하게 된다는 것을 직시해야 합니다.

이홍구(李洪九; 1934~) 전 국무총리(현 주미대사)가 1989년경 통일원장관으로 있을 때 방문한 적이 있는데 이 얘기를 하니까 금방 알아듣더군요. 그러나 우리 '역사'를 올바로 정립한 후에는 '역사'를 공동으로 연구하자고 우리가 적극 나설 필요성도 있습니다.

현재 한국사(사학과) 교수들은 상고사(단군조선 시대)~현대사까지 폭넓게 연구해 학위를 받는 것이 아니라, 어느 일부분만 연구해 학위를 받는데, 이젠 우리교수(전국 대학교수 중에서 국사담당 교수는 모두 280여명)들도 폭넓게 연구해야 하고, 우리 {국사 교과서}도 올바르게 다시 써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문화'는 흔히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고는 하나 중국과는 크게 구별되는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동양문화권에 속하면서도 독창적 경지를 개척한 것이 우리 문화입니다. 그러나 왜곡된 '역사' 교육을 받은 우리 국민이나, 특히 전 세계인들은 이를 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젠 올바로 알려 나아가야 합니다.

광복이 된지 53년이 지나도록 우리 '역사'를 바로잡지 못한 것은 중국이나 일본에 책임을 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일 제의 '한국사' 왜곡에 참여했던 인사들과 함께 이들에게 부화 뇌동하여 스스로 우리 '역사'를 왜곡하고, 우리 '문화'를 비하한 바로 우리 자신들의 책임입니다.

'사료'부족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제가 '취사선택'하여 남겨 놓은 사료만을 들먹이면서 '사료'가 부족하다는 주장만 되풀이하는 사람이 있는것 같습니다. 그러나 과거 일본이 가져간 수많은 자료 등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자료들을 모으려는 노력도 미흡했고, 외국 각국의 교과서에서 우리 '역사'가 심각하게 왜곡 서술돼 있거나 잘못 기술되어 있는데도 이런 왜곡실태가 개선되지 않고 그대로 방치된 실정입니다.

일본 황실문고에는 일제 때 약탈해간 '단군조선'관련 사서 등 고문서가 많을 것입니다. 나는 이 문제에 관한 한 '확신'합니다. 이젠 일본 황실문고에 소장되어 있는 우리 민족사 관련 수탈자료를 반환해오기 위한 작업에 들어가야 합니다. 외교부와 KBS, 연합통신이 합동으로 황실문고 도서목록 확 인 작업에 들어가야 하고, 앞으로도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정부는 우선 교착상태에 빠져있는「외규장각 고문서」반환 협상에 적극 나서야 할 것입니다. 1866년 10월 병인양요 때 약탈당한 고문서 3백40여권 중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에 2 백96권이 보존돼 있다고 하더군요.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이제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올바로 정립시킨 후 이를 세계에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각국의 교과서는 물론 우리의 '역사'에 대해 잘못된 부분이 어느 한 곳이 라도 있다면 우리의 참 '역사'가 적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국경이 없어질 듯 자본과 상품의 공세가 지속되는 국제화․세계화의 구호 속에서도 강대국들은 부쩍 자국 중심의 '역사' 교육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일본과 독일이 그렇고 심지어 미국에서도 '역사' 교육 문제가 사회의 관심 속에 논의되고 있다 고 합니다.

21세기에 한국이 일본을 추월하려면 먼저 국민의식 수준부터 높여야 하는데 특히 '역사의식'은 중요합니다. 우리의 올바른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중심'을 잡지 못 한다면 국가적으로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동북3성을 비롯한 만주와 연해주 등 한 대륙에서 터를 열고, 한대륙과 한반도를 발판으로 그리고 일본열도에서 천하를 누비며 사자후를 토하던 우리 선조의 모습이 담긴 상고시대와 한․일관계사 등 올바른 우리 '역사'를 바로 보게되면, 우리의 과거가 그리 답답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동안 왜곡된 '역사' 교육으로 인해 우리 자신을 너무도 잘못 보아왔고, 정치․경제․사회의 불안정으로 우리 '국가'를 불신하고, '우리'보다는 외국을 선호하며 살아 온 이유로 우리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젠 우리 언론매체가 앞장서서 올바른 우리 '역사'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그동안 상고사를 비롯 우리 '역사'를 바라보는 내 개인적인 관점 등에 대해 많은 말을 한 것 같습니다. 물론 많은 비판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첫째,『기존 사학계와 배치되는 부분이 있다』라는 말이 나올 수 있겠고,『일방적이다』라는 비판도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모두 달갑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솔직히 나이도 많고, 최근에 나온 학설까지 알 수도 다 흡수 할 수도 없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였으면 고맙겠습니다.


10. 우리 '역사' 회복작업에 관심을 가지고 지지를 보내시는 분들․한국학 재단(법인)


현재 상고사(단군조선)과 한�일관계사 등 우리 '역사' 회복작업에 관심을 가지고 후원과 지지를 하시는 분들로는 강영훈 전 국무총리(현 세종재단 이사장), 구 상(具 常; 1919~) 시인(현 중앙대 예술대학원 객원교수), 김기준 한국번역문화교수협회 회장, 김대영 전 건설부 차관(현 해외건설협회장),

김주현 전 숭실대 총장서리 겸 대학원장(현 숭실대 명예교수), 박영석(朴永錫; 1932~) 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현 건국대 사학과 교수), 박진근 전 광신상고 교장, 배운학(裵雲鶴; 1907~) 고려대 명예교수(영어), 서영훈(徐英勳; 1923~) 전 KBS 사장(현 신사회공동선운동연합 상임대표), 손보기 전 연세대 박물관장(현 연세대, 단국대 석좌교수), 안도명 산정현교회 원로목사(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독노회)설립 및 총회장, 뉴욕신학대학 학장), 안병욱(安秉煜; 1920~) 숭실대 명예교수, 오경린(吳慶麟; 1914~) 전 기독교지도자협의회 대표회장, 유달영(柳達永; 1911~) 서울대 명예교수(한국무궁화연구회장), 유승국 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장(현 성균관대 명예교수), 윤내현 단국대 사학과 교수(전 단국대 중앙박물관장), 윤주영(尹冑榮; 1928~) 전 문화공보부 장관(전 조선일보 이사․고문), 이현희(李炫熙; 1937~) 성신여대 사학과 교수(사시․행시․외시위원), 장태환(張泰煥; 1919~) 고려대 명예교수(현 한국번역문화교수협회 부회장), 전대련(全大連; 1932~) 서울YMCA(기독교청년회) 명예회장, 전택부 서울YMCA 명예총무, 정석규(鄭石圭; 1924~) 한․일협회장,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 차주환(車柱環; 1920~) 전 학술원 부회장(현 서울대 명예교수), 최상순 산정현교회 목사, 최재석 고려대 명예교수. 홍성철 전 국토통일원 장관, 서울YMCA 원로모임인 '계묘구락부'의 원로분들,

특히 이현재(李賢宰; 1929~) 학술원 회장(호암재단 이사장)을 비롯 학술원 법학분과 10여 분, 학술원 각 분야의 회원 중에는 '단군조선'을 비롯 우리 '역사'가 일제와 어용학자들에 의해 왜곡되고 말살된 것을 잘 알고 있는데 이 문제를 알기 쉽게 '회고록'을 남겨놓으라는 말을 하더군요.

감사원장과 국무총리를 지낸 이한기(李漢基; 1917~1995) 전 서울대 법대학장도 올바른 우리 역사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1977년 학술원에 내가 데리고 들어갔는데 이한기씨는 '독도' 문제에 대해 걱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언론인 중에 '단군조선' 등 올바른 우리 역사에 대해 관심이 많은 이규행(李揆行; 1935~) 전 중앙일보 고문과 안병훈 조선일보 전무(편집인), 서희건 조선일보 편집부국장 겸 사사(社史)편찬실장 등을 좋아하는데 앞으로 이런 언론인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1997년 12월 12일 역사학자․정치학자 등 50여명이 창립한「단군학회」초대회장에 선출된 김정배(金貞培; 1940~) 고려대 총장도 '단군조선'에 대해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 단군학회는 엄격한 사료비판을 토대로 하되, 학문적 문호를 개방함으로써 단군과 우리민족의 건국사인 단군조선 연구의 전환점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요즘「건국 50주년」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건국」이란 「나라를 (처음으로) 세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건국 50주년」이라는 표현이 맞는다면 지금부터 50년 이전의 우리 나라 역사는 부정하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나같이 1948년 8월생 이전의 사람들은 어느 나라 사람이 되는 것인지…? 「건국 50주년」이라는 용어대신「대한민국 정부수립 50주년」이 맞는 표현입니다.

내가 가장 하고 싶은 말은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생존해 나아가려면 정치․경제․사회의 안정과 함께 무엇보다 각국에 지한(知韓)․친한 인맥을 형성해 나아가야 하는데, 특히 우리 국민에게 {국가관과 역사의식}을 심어주려면 {한국학 재단(법인)}과 그 부설기관으로 {한국학 연구소}를 설립해 일제와 어용학자들에 의해 왜곡되고 말살된 우리 '역사'를 올바로 정립한 후, 올바른 '역사'를 국민과 해외동포 그리고 전세계에 대대적으로 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참 모습을 전세계에 알리고 그들의 관심을 사 지한파 (知韓派), 친한파를 만들 수 있는 올바로 정립된 우리 '역사' 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우리는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21세 기에는 전세계에 {한국학 붐}을 일으켜 전세계인의 시선을 우리 '한국'에 집중시켜야 하며, 무엇보다 각국에 지한․친한 인맥을 형성해 우리의 운신의 폭을 넓혀야 합니다.

정치․경제․사회의 안정과 함께 올바른 우리 '역사'의 대대 적인 보급과 홍보는 '한국'의 이미지 향상을 통한 {경제와 관 광분야}에 까지 엄청난 파급효과를 발생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사 바로잡기}는 국가전략차원에서, 그러나 정부나 정부 기관에서 하는 일은 활동에 제약조건이 붙게되는 특수사정도 있으므로 자유롭게, 순발력 있게 대응하고, 활동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진 '민간조직'이 적극 나서야 합니다.

1990년대 들어 특히 재미동포 학생들은 물론 미국 대학생들 의 한국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높아졌고, 대학마다 {한국학} 관련 강좌가 매년 늘어나는 추세이며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주제로 한 세미나가 빈번하게 열린다고 하더군요.

{한국학}을 널리 알리는 데는 한국인 2세대 학자들이 적격인 데 우선 우리 '역사'를 올바로 정립한 후, 외국에 있는 한국인 2세대 학자에 대한 올바른 우리 '역사' 교육과 적절한 지원을 통해 이들이 {한국학}을 세계에 알리는 데 앞장서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경제가 안정이 되면, 우리의 기금으로 {한국학}에 관한 대학 과목을 개설하여 전세계 대학생들이 {한국역사}를 올바르게 알 수 있게 해야 하며, {한국사} 서적을 간행하고, 한국사에 대한 비디오를 널리 보급하여 전 세계인들이 진정한 '한국'의 모습을 알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아울러 경제가 안정이 되면, 최근 서울대에 개설된 '한국어 지도자 과정'처럼 각 분야 인재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한국 학 재단(법인)} 부설의 {미니(小) 야간 한국학 대학원}을 설립해 전 세계인에게 올바른 '한국학'을 가르칠 인재를 양성해, 이들을 전세계에 내보내 '한국'을 전 세계인에게 올바로 알려 야 합니다. 그리고 해외에서 '한국학'을 연구하는 해외동포 2, 3세들을 불 러다가 올바른 우리민족의 '역사'교육을 하여야 합니다. 이는 실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나는『한국학 재단(법인)』같은 단체가 설립된다면 소장하고 있는 서적을 기증할 생각입니다.

88서울올림픽을 기해서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는 역사상 초유의 한국문화의 집성판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전27권을 간행하여 문화올림픽의 테이프를 끊었으며, 이 때 민간에서는 내가 유일하게《한국상고사 입문》을 '영문'으로 번역 간행하였습니다. 다시 한번 언급하지만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정부와 민간에서는 해외에서 한국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갖도록 또 무엇인가를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Ⅲ. 한국사회와 국민에게 바라는 말


《제주 문제》


1. '제주'개발 문제는 국가전략 차원에서


요즘 신문에 보면 '제주'에 대한 기사가 많이 실리더군요. 세계적으로 뛰어난 천혜의 자연 관광자원을 갖고 있는 우리 제주는 이제 보는 관광에서 {휴양 및 체류형 관광지}로 관광 산업에 대한 투자와 개발을 해야 합니다.

지정학적으로 동북아의 중심지에 위치해 있고, 중국․일본․ 러시아 등 약 20억 인구의 배후시장과 동북아 지역에 투자한 다국적 기업들의 휴양지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은 우리 제주 는 21세기 세계 최고의 '국제관광휴양지'를 목표로, 아시아․ 태평양 지역 최고의 쇼핑장소와 괌․사이판을 능가하는 해양 스포츠와 레저장소로, 목장중심의 휴양장소 등으로 개발해야 합니다.

하와이에서 제주에 온 관광객들도 "이렇게 아름다운 섬에서 쇼핑이라도 하고 싶은데 그저 둘러보다가 돌아가니 심심한 관광이 됐다"며 아쉬워한다고 하듯이 {면세지역}을 지정하고,『국제 쇼핑타운』을 조성하는 등 쇼핑의 천국으로 만들어 하와이․홍콩 등을 능가하는 곳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세계문화거리』와 외국자본을 유치해서라도『디즈니 랜드』등 관광위락 시설을 조성하고, 해안절경이 멋진 서귀포 시 '중문관광단지'는 종합레포츠를 즐길 수 있는 해양휴양지 와 레저단지로 조성하면 좋을 것입니다.

아울러 앞으로 우리 제주는 '환경'을 파괴하면서까지 골프장 수를 대규모로 늘리기보다는 서귀포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주변에 5천년 한국 '역사'를 보여줄 수 있는 {역사관}과 {한국문화 5천 년관}, {한국전통예술상설공연장}을 건립하고, 외국인들이 제주와 서울, 전국8도(함경도․평안도․황해도․ 강원도․경기도․충청도․전라도․경상도)의 전통가옥을 볼 수 있고, 한국의 다양한 전통음식과 전통민속주를 맛볼 수 있고, 전통토산품(기능보유자의 작품) 등을 구입할 수 있는 대 규모 {한국전통민속촌}을 조성하고, 한국적인 내음이 물씬 풍기는 연못과 정자, 소나무 등 고유의 나무, 자생화초, 우리 고유의 꽃, 토종물고기, 폭포, 전통찻집 등이 어우러진 대규모 {한국전통정원}을 조성해 한국을 대표하는 관광지로,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 전초기지로 만들어야 합니다.

아울러 백두산, 한국(백두산)호랑이, 한라산, 독도 등 한반도 강산(江山)과 태권도 시범 등의 상영, 88서울올림픽, 경제성장 등을 종합적으로 보여주고, 앞으로 한국의 발전방향을 보여줄 수 있는, 그리고 우리 '효(孝)문화'와 '경로(노인공경)문화', 한국인의 예절과 우리 가족제도 등을 알리는 {한국관} 건립도 검토해 봐야 합니다. 물론 {한국관} 주변에는 태극기가 나부끼게 하고, 무궁화, 소나무 등을 심어야 합니다. 특히 제주에 찾아온 우리 해외동포들에게는 {한국관} 주변에서 '무궁화' 묘목을 보급해야 합니다. 외국인을 위한 『태권도 기념관』건립도 검토해 보면 좋을 것입니다.

관광산업은 '국가홍보'와 '외화수입' 등 유․무형의 가치가 무한한데 우리 '제주'가 세계 최고의 관광거점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가장 한국적인 독특한 볼거리를 개발하는 것이 우선 과제입니다.

특히 서귀포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주변에 {역사관}과 한민 족 얼이 깃 든 {한국문화 5천 년관}을 최첨단 시설로 건립해 국민은 물론, 해외동포와 외국관광객들에게 한국을 올바르게 알릴 수 있는 장을 마련하면 좋을 것입니다. 국민과 해외동포 그리고 외국관광객들은 한국의 5천년 '역사와 문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많은데 이들에게 올바른 우리 '역사와 문화'를 종합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은 절실합니다.

아울러 그 주변에 우리 '전통예술'을 알고 싶어하는 외국인들 을 위해 한국전통음악(국악), 풍물(농악)과 강강술래, 탈춤 등 한국전통예술을 항시(연중)접할 수 있는 {한국전통예술상설공 연장}(한국전통예술센터) 등을 건립하면 좋을 것입니다.

'국제회의' 개최는 정치․외교․경제․사회․문화 측면의 큰 파급효과 외에 관광측면에서 볼 때도 국제회의를 상시 유치함으로써 관광비수기를 없앨 수 있고, 관광객 대량 유치와 수준 높은 관광객 유치효과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외화획득액을 비교하면 국제회의 참가자들은 일반관광객보다 3배정도 돈을 더 쓴다고 하던데 서귀포 {제주국제컨벤션센 터} 완공에 따른 대대적인 해외홍보는 반드시 뒤따라야 합니다.

특히 이 {컨벤션센터}에서 아시아․태평양지역은 물론, 유럽 ․미주지역의 관광청․관광업자(여행사)를 대상으로 하는 '관 광 및 국제회의 산업관련 박람회'를 매년 개최하는 것도 훌륭 한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1997년에 9,273건의 국제회의가 열렸다고 하더군요. 제주는 우선 {컨벤션센터} 건립에 만전을 기하고, {컨벤션센 터} 완공에 발맞춰 엄청난 경제적 외화획득 효과를 가져오는 '국제회의' 유치에 적극 나서야 합니다. {컨벤션센터}를 비단 회의장뿐만 아니라 우리 것을 알리는, 즉 '한복패션쇼'와 '김치축제' 등 문화행사․이벤트장으로 다 양하게 활용해 보는 방안도 적극 모색해봐야 합니다.

제주는 한․소(러) 정상회담을 시작으로 한․중, 한․미, 한․ 일 정상회담 등 수많은 국빈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룬 경험이 있고, 세계적으로 뛰어난 천혜의 자연경관을 갖춘 국제관광지 로서 국내․외인의 사랑을 받고 있는데, 앞으로 우리 제주는 동북아 국제회의 산업의 중심지가 될, 더 나아가 21세기 국제회의 산업의 중심지로 발돋음하기 위한 서귀포 {제주국제컨벤션센터} 건설과 함께 대규모 '국제회의' 의 상시 유치를 통해 국제회의 참석자들이 경제활동과 함께 관광을 즐기고, 특히 '한국'에 대해 올바르게 배워 갈 수 있도록 준비해 나아가야 합니다.

관광산업은 숙박업․요식업․운수산업․스포츠산업․문화산업 등이 어우러진 '종합예술 같은 산업'인데 앞으로 우리 '제주' 는 자연경관․스포츠․문화이벤트 등이 결합된 관광문화상품 을 개발하고, 특히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곳으로 개발해 외 국 관광객 유치에 총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제주는 국제적 관광지인만큼 『제주국제컨벤션센터』건립과 2002년 월드컵은 외국기업의 스폰서를 유치해서라도 잘 치뤄야 한다고 봅니다.

한국에 와봐야 볼거리-먹거리가 별로 없고, 교통체증이 심하고, 물가 비싸고, 서비스 엉망이고, 호텔요금도 세계 7위이고 등등 외국 관광객들의 불평이 나온지 오래됐는데 2002년 월드컵 경기 서귀포시 유치를 통해 우리 '제주'를 앞으로 다가올 21세기 한국관광을 이끌어 나갈 주역으로 부상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세계적인 종합휴양지와 함께 특히 '평화의 섬'이라는 이미지를 국제사회에 심어주어야 합니다.

제주의 관광산업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제주를 세계적인 종합 휴양지로 만들기 위해서는 서비스 향상과 함께, 무엇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점은 제주공항 확장과 시설확충, 세계 주요도 시들과의 직항로 개설 등이 급선무인 것 같습니다.

특히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제주관광을 위한 숙박시설, 교 통, 쇼핑, 관광지도, 레저 등 제주관광에 관한 모든 정보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제주관광안내 종합정보시스템}을 구축 해 연중무휴 정보를 제공하는 등 {관광제주}를 전세계에 대 대적으로 알려야 합니다. 물론 수준 높은 전문 관광 가이드도 필요하겠지요. 앞으로 제주는 물가를 내리고, 이젠 제주도민 모두가 한국을 대표하는 관광종사자란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제주는 농림어업에 대한 지원과 함께, 농․수․축산물 을 경쟁력있게 키우고, 제주의 감귤산업과 관광산업 모두 에 너지 소비성 산업으로 값싼 에너지원 개발에 대한 수요가 큰 만큼 풍력, 파력, 태양에너지 자원을 이용한 에너지 기술산업 을 적극 유치해야 합니다. 이처럼 제주는 잘만 활용하면 앞으로 한국 경제를 이끌어갈 수 있는 '보물섬'입니다.

정부는 2000년부터 시작될 4차 국토종합개발계획에 제주를 동북아의 핵심 거점지역으로 발전시키는, 즉 제주를 금융․비즈니스․정보, 물류․무역․관광 휴양지 기능을 갖춘 복합형 '국제자유도시'로 바꿔 가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봅니다. 서귀포는 「국제 물류거점」으로 육성하면 좋을 것입니다. 제주는 앞으로 2002년, 2010년 등 중․장기적인 계획 아래 국가전략 차원에서 개발되어야 할 것입니다.

따뜻한 기후, 음식, 숙박, 서울과의 거리 등이 타(他)전지훈련 장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서귀포'를 한국 축구와 야구 중흥의 메카로 만들면 좋을 것입니다. 해외전지훈련비로 쓰는 엄청난 외화를 줄이고 훈련효과도 거둘 수 있는, 특히 겨울동안 축구와 야구팬들을 끌어 모을 수 있는 서귀포 전지훈련 실시는 한국 축구와 야구를 도약시키는 한 계기가 될 것입니다. 늦가을에서 초봄까지는 제주도 관광 비수기인데 축구단과 야 구단의 겨울훈련장 마련을 통한 지역 경기의 활성화, 관광 확 대는 제주도로 봐도 바람직한 일입니다.

이젠 프로축구와 프로야구의 시범경기도 제주 한곳에서 치르도록 하고, 더 나아가 '서귀포'지역을 동북아 축구와 야구 메카로 만들고, 축구인들과 야구인들을 위한「축구인 마을」,「야구인 마을」건설 등을 통해 더 많은 관광객을 유치해야 함은 물론『관광제주』를 전세계에 알려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전세계적으로 '환경'에 대한 중요성이 확산되어 가는 만큼 제주에서 각국 정부와 국제기구 대표, 국내외 전문가 등 이 참가하는 '국제환경회의'를 매년 개최해 '제주=환경'이란 인식을 전세계에 심으면 좋을 것입니다.


2. 제주 환경은 지켜져야


제주도내 중산간 축산업의 기반인 '초지'가 {골프장} 조성 등 각종개발의 영향으로 크게 잠식 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골프장 면적은 1개소당 평균 35만평에 이르러 골프장 30개소 가 들어서면 골프장 총 면적은 1천 만 평을 넘어 서게 돼 임야 와 초지 잠식은 불가피합니다. 현재 전체 초지의 15%이상이 사라졌다고 하는데 앞으로 {환 경파괴}에 대한 그 대가는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주의 천혜의 자연경관이 한라산 일대의 골프장, 스키장, 눈썰매장 등 대규모 개발계획으로 위협받고 있다고 하더군요.

솔직한 심정은 '한라산'의 환경과 생태계를 파괴하는 이와 같은 대규모 개발계획은 중단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환경오염을 방지하는 시설확충은 필수인데 특히 각 지역에 광역 하수종말처리장을 설치 제주 바다를 보호해야 하며, '지하수' 보전에도 힘써야 할 것입니다. 우리 제주는 도(道) 전역을 생태계 연결지대로 보호, 궁극적으로 환경관광지로, 즉 자연생태 보전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하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개발사업자들 스스로가 자연환경에 대한 중요성 을 깨달아 환경 친화적인 사업을 추진토록 유도해야 합니다. 특히 이미 토사 유실, 식생 파괴 등이 진행되는 제주도 전체 면적의 8.1%를 차지하는 한라산 국립공원과 산림지역에 대한 복원을 위해 이젠 제주도청을 비롯 제주도민 전체가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최근 제주도가 등반객에 의한 한라산 훼손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케이블카 설치를 추진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케이블카(로프웨이) 설치와 부대시설 건설이 한라산을 광범위하게 훼손시킬 수 있다고 봅니다. 케이블카를 설치하려면 철탑을 세우는 등 대규모 공사를 해 야하기 때문에 자연훼손과 한라산의 경관이 망쳐질텐데 특히 케이블카 설치는 각종 편의시설을 동반하는 만큼 한라산이 위락지구로 변해버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제주도가 수익을 위해 한라산 환경파괴에 앞장서고 있다는 말을 안 들어야 할 것입니다. 제주에 가본 사람이라면 제주 자연미의 상징인 {오름(봉우리를 뜻하는 제주방언)}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오름의 왕국' (제주)동부 중산간 지역의 오름 군락지를 관통하는 {송전탑} 건설 계획이 추진되고 있다고 합니다.

서부 중산간 지역의 경관을 절단내 버린 것도 모자라서 동부 중산간 지역의 오름 군락지를 관통하는 {송전탑} 건설 계획이 추진되고 있다고 하는데 이유야 어찌됐건 관광자원을 아니, 환경은 한번 파괴되면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 을 염두해 두었으면 좋겠습니다.



3. 일본인들이 제주도 '왕벚꽃'을 수입, 개량한 것이 지금의 벚꽃


3월 중순경 '제주'에서부터 개화하기 시작한 '벚꽃'은 4월의 문턱을 넘어서기 바쁘게 남해안과 전국에서 일시에 피어나는데 이처럼 벚꽃은 우리 강토에 깊이 뿌리 내리고, 우리의 봄을 어느 꽃보다 절절하게 알려주는 우리(토종) 꽃입니다.

그런데 어쩌다 일본인 학자에 의해 학계에 보고 됐고, 그들의 국민꽃으로 추앙된 게 화근이 되어 정작 제 땅에서는 우리 꽃으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일본 국화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일보 1996년 4월 30일자 47면에 보면, 일본을 상징하는 벚나무의 원조 왕벚나무가 '한라산'에서 여러 그루 발견되어 왕벚나무의 제주도 자생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제시되고 있는데 이는 일본 상징인 '벚꽃'의 원산지가 '제주'라는 말입니다.

중앙일보 1997년 3월 24일자 17면에서도 잘 나와 있듯이, 환경부는 왜색(倭色)시비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일반 벚꽃 대신 제주도에 자생하는 왕벚꽃을 가로수 등으로 널리 보급하기 위한 생태조사 및 육종(育種) 연구를 추진키로 했다고 하더군요.

우선 전문가들로 조사팀을 구성, 왕벚꽃의 개화기인 3월 중순부터 5월까지 제주도 지역에서 생태조사를 벌인다는 계획이 고, 이를 바탕으로 분포도를 작성하는 한편, 왕벚꽃의 사계절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관}을 제주도 자생지 부근에 마련하는 방안도 검토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동아일보 1997년 3월 31일자 7면에서도 잘 나와 있듯 이, 군항제로 유명한 경남 진해를 비롯, 전국 곳곳에 가로수로 심어진 일본산 벚나무를 제주 '한라산'에서 나는 토종 왕 벚나무로 바꿔 심는 계획이 적극 추진되고 있다고 합니다.

산림청은 일본산 벚나무를 토종 왕벚나무로 대체하기 위한 6 년간의 연구 끝에 왕벚나무의 대량 증식법을 개발하는데 성공했다고 밝혔습니다. 산림청에 따르면 왕벚나무는 제주 한라산에 자생하는 토종으로 일본산보다 꽃망울이 크고 색깔도 흰색에서 분홍색까지 다양하며 향기가 진하다고 하고, 일본산에 비해 추위에 강하 고, 꽃이 피어 있는 기간이 길다고 합니다.

산림청은 왕벚나무의 고유특성이 유지될 수 있도록 조직배양 을 통해 우선 2백 90그루의 묘목을 생산, 1996년 한라산과 서 귀포지역에 시범적으로 심었으며, 아직 가로수가 조성되지 않은 전국 각지에 왕벚나무를 보급하기 위해 묘목을 대량생산 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2002년 그리고 21세기를 향하여》


1. 2002년 월드컵


정몽준(鄭夢準; 1951~) 대한축구협회장의 활약이 돋보인 월드컵 유치는 우리 국민에게 많은 희망과 가능성을 제시해 준 쾌거였습니다. 21세기를 여는 2002년 월드컵 유치 때 온 국민과 함께 종파를 떠나 전 종교계가 유치에 합심한 것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결승전은 비록 일본에 내줬지만, {사상 최고의 개막식}을 위해 착실히 준비해야 합니다. 특히 일본의 결승전 직전 열릴 폐막식과 큰 대조를 보일 가능성이 높아 개막식이 호평받지 못한다면, 2002년 월드컵은 일본의 잔치로 전락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과제는 개막식을 어떻게 치르느냐 하는 것인데 각국 원수 등 세계의 귀빈이 참석하고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개막식을 통해 우리의 '전통문화예술', 즉 순수 '한국문화'를 소개하는 절호의 기회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2002년 월드컵에서는 우리문화가 중국․일본보다 독특한 점을 세계에 널리 알려야 합니다. 이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찬란한 '전통문화예술'을 월드컵 개막식 공연 을 계기로 더욱 승화시켜 한 차원 높게 발전시킨 후, 21세기에 는 이를 지구촌 구석구석에 알려 나아가야 합니다. 특히 88서울올림픽 개․폐막 식전(式典) 제작 자문위원으로서 개․폐막 식전 행사의 시나리오를 썼던 이어령 초대 문화부장관(현 이화여대 석학교수)께서 이런 생각을 가지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2002년 월드컵을 일본과 공동 개최하게 되면 '문화경쟁'이 더욱더 뜨거워질 것은 기정사실인데 올바른 '역사' 홍보와 함께, 일본문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세계인에게 덜 알려진 우리 '전통문화예술'의 독창성과 한국의 이미지를 88서울올림픽에 이어 다시 한번 전세계에 널리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만들어야 합니다.

한국문화의 우수한 예술성을 세계에 과시하고, 우리민족의 문화와 정신을 알리는 전령사로서 김성옥 KBS 사업주간을 공연단장으로 구성된 우리 전통예술 해외공연단이 1996년 12월 3일부터 12월 12일까지 9박 10일간의 일정으로 유럽의 중심지인 독일의 베를린과 프랑스 파리에서 공연을 가져 큰 호평을 받았듯이. 특히 88서울올림픽을 통해 우리가 세계인에 보여준 문화예술 축전은 우리가 이토록 향기 높고, 전통 깊은 고고한 문화와 전통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세계인에게 보여준 좋은 계기였습니다. 이처럼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처럼} 우리 한민족의 '전통문화예술'이야 말로 세계를 끌어안을 수 있는 그런 깊이와 넓이를 지녔습니다.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앞으로 우리 기업과 해외선교사역을 펼쳐 나가는 우리 교회는 '국가이미지' 제고와 함께 각 기업 과 교회의 세계선교를 위해서라도 '한글' 교육을 비롯 우리 '역사'와 '전통문화예술' 알리기에 앞장서야 합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2002년 월드컵대회를 역사상 가장 모범적이며 성공적인 대회로 치뤄 우리의 저력을 전세계에 보여주고 재도약의 발판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2. 해외동포 문제


이젠 전세계 한인 상권을 하나로 묶어야 합니다. 이는 21세기 무국경․무한경쟁시대를 살아가야 할 한국경제엔 필수 생존카드의 하나입니다. 미국경제를 주무르는 유대자본, 아시아 경제지도를 바꾸는 거미줄 화교자본, 전세계 곳곳에 사람과 자본을 심어놓은 일본의 현지화․세계화 전략 등이 있지만, 우리도 이들 못지 않은 '코리안 글로벌 네트워크'를 짤 수 있는 소중한 해외자산이 있는데 이는 전세계 1백 50여 개국에 퍼져있는 5백 50여만 명의 해외동포가 바로 그들입니다. 해외동포들의 경제력을 모국경제에 활용할 수 있는 종합적인 지원정책, 즉 해외교포상권-국내민간기업-정부가 3인 일각으로 연결되는 {21세기 세계화 연계전략}은 어느 때 보다 시급한 것 같습니다.

해외동포는 세계화에 매우 긴요한 선진경험과 정보를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화 전략을 펼치는 국내 기업인들에게는 현지화의 직접적인 원군이기도 한데 정부도 해외동포의 중요성을 인식해 {재외동포재단}을 발족시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직업별, 지역별로 해외동포 주요인사에 대한 데이터베이스 구축은 재외동포재단이 해야 할 가장 시급한 일인데 이 같은 {한민족 네트워크}는 모든 사업의 토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민족개념이 옅은 2․3세들이 자신들의 뿌리를 인식하고, 현지에서 모범적인 시민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게 재단설립 취지}인데, 사할린 등 해외동포에 대한 의료 봉사활동과 함께, 해외동포들에게 '한글' 교육과 올바로 정립 된 '역사' 교육 그리고 '전통문화예술'에 대한 보급은 중요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앞으로 한민족 모두가 참여하고, 유대관계와 역량을 결집시킬 수 있는 {세계 한민족 축전}과 {한민족 전통문화예술제}와 같은 다양하고, 지속적인 문화교류를 통해 우리 한민족의 정체성 확립과 함께, 해외동포와의 상호교류를 통한 우리 '전통문화예술'을 전수, 보급하여 우리문화가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는 현지 거점확보와 발판을 마련해야 합니다.

당초 해외동포(교포)정책을 총괄할 외청으로 '교민청' 설립이 거론됐으나 {작은 정부론}과 {외교 문제} 등에 밀려 유야무야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해외동포 문제를 방치하는 것은 우리 정부나 동포들 모두에 게 큰 손해인데 해외동포정책을 총괄할 '교민청' 설립에 대해 다시 한번 검토해 보았으면 합니다.

이젠 해외(동포)인력들이 모국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길을 터야 합니다. 요즘처럼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선 해외동포 두뇌들과 재원을 모국 발전에 적극 활용하는 동포정책이 더 절실한 것 같습니다. 해외동포가 해외에서 쌓은 기반을 바탕으로 모국에 투자를 한 대표적인 인물이 신격호(辛格浩; 1922~) 롯데그룹 회장입니다. 그는 재일동포로서 남다른 근면과 성실, 아이디어로 한․일 양국에서 50여개의 기업을 거느리고 있는데 1998년 올해 신격호 회장이 희수(77세)를 맞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나는 77세 때부터 올바른 우리 '역사'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신격호 회장도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앞으로 더욱 건강하고 '국익'을 위해서도 열심히 뛰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한․일을 오가며 두 개의 롯데를 무리 없이 꾸려 가는 신 회장은 철저히 한국 국적을 지키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신격호 회장에 대한 이미지가 아주 좋습니다.

미국과 일본에서 활약하고 있는 박세리․박찬호 선수와 선동열․이종범․이상훈․조성민 선수는 재미․재일동포와 우리 국민을 위해서도 좀 더 힘을 내야 할 것입니다.

현재 나이 많은 한국인 중에 나처럼 축구와 야구, 농구를 좋아하는 이도 드물 것입니다.


3. 대북 정책


정부는 남북 경제협력 활성화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며, 앞으로 남북관계를 화해와 협력으로 유도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 무엇보다 대북정책은 일관성이 있어야 하며 적극적이고 전략적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북한의 군사도발에 대해서는 강경하게 대응해야 할 것입니다.

대북정보력 향상과 함께 북한의 미사일 위협에 대처해 미사일 사정거리를 늘리는 문제는 시급한 일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 상황에 맞는 중거리 미사일을 개발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가 한반 도 전체를 커버하려면 최소한 500㎞는 되어야 합니다. 철통같은 '안보'문제에 관한 한 우리 국회의원들은 하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정주영(鄭周永; 1915~) 현대 명예회장이 1998년 6월 16일 소 5백 마리를 트럭에 싣고 판문점을 통과해 북한을 방문하는 장관을 TV를 통해 봤습니다. 금강산 공동개발과 남북통일이 마지막 남은 소원이라는 정주영 명예회장의 말이 개인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민족적 차원에서 이루어 졌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금강산 지리에 밝아 보전(현 고려대) 교수를 그만두면 금강산 관광가이드를 하려고 했던 적도 있습니다. 정부와 현대는 금강산 사업에 대한 북측의 태도가 투명하지 않을 경우 짚고 넘어갈 건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 금강산과 백두산 관광개발 등은 환경친화적인 개발사업을 벌여야 합니다.

나는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88서울올림픽 과 2002년 월드컵 한․일공동개최가 확정되던 순간이었습니다. 정 명예회장은 88서울올림픽을 유치하는데 민간추진위원장으로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국 경제의 기적을 얘기할 때면 정 명예회장을 빼놓을 수 없는데 나는 그 무엇보다도 그의 긍정적인 사고에 의한 진취 적인 기상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아무쪼록 정주영 명예회장은 더욱 건강해야 하며 앞으로도 많은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정부는 한반도 장래에 관한 중장기적 전략을 마련해 이를 우방국인 미국에 논리적으로 주지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21세기 통일은 불가피한 일이므로 북한을 다루는 데서 주변국들의 의도를 제대로 알고 절대 주도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많은 전문가들이 남․북한 통일에 가장 중요한 역할 을 할 수 있는 나라로 미국과 중국을 꼽고 있는데 앞으로 통 일에 대한 환경이 조성되면, 정부는 미국과 중국이 한반도 통 일에 긍정적인 시각을 갖도록 해야 하며, 한반도 통일이 결코 미국과 중국의 국익에 배치되지 않는다는 점을 인식시키는 데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리고 대미, 대일협력은 물론 {통일한국시대}를 대비하는 한 국에게는 외교-안보차원의 대중, 대러협력이 꼭 필요합니다.

다시 한번 언급하지만 통일에 대한 환경이 조성되면, 미․일 을 비롯, 중국과 러시아는 한반도가 통일이 되면 더 큰 경제적-안보적 이익을 거둘 수 있고, 유럽과 기타 국가들도 한반도가 통일이 되어야만 경제적-안보적으로 이익임을 올바르게 '인식'하도록 해야 합니다. 한반도의 긴장상황은 세계평화에 큰 위협요소임을. 무엇보다 북한지역 경제의 현대화는 아․태지역 전체의 번영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인식'시켜야 합니다.

통일한국이 되면, 우리는 미국을 비롯해 일본․중국․러시아 등 주변 4개국을 우방으로 삼아 우호적인 협력체제를 구축하고, 상호협력이 대결이나 침략보다 각국에 더 유익한 것임을 각인시키는 한편, 우리의 입지를 확대하고 역할을 강화해 나아가야 합니다. 특히 동북아의 중심축인 한․중․일 3국은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가까우면서 한편으로는 불행한 과거 때문에 가장 먼 나라처럼 느껴지기도 했는데 21세기 환태평양시대를 맞아 전세계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한․중․일 3국의 상호협력과 교류는 그 어느 때보다 주목받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도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경제블록} 사이에 치열한 경쟁이 벌어질 21세기에 한․중․ 일 3국의 협력은 꼭 필요한 데 한(통일한국)․중․일 3국은 다가올 환태평양시대의 주역으로 대립과 갈등관계에서 상호 이해와 협력아래 환경문제에 공동대처 등 '공존과 연대'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국가전략을 세우는 정부의 싱크탱크 조직에서는 안보 강화 문제와 함께 정치체제․경제체제․군사외교․법률제도․교육․문화예술․사회복지․환경․정보(과학)분야․국토개발 계획 등 전반에 걸쳐 {통일한국}에 대한 준비를 착실히 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남북축구대표팀의 교환경기를 서울과 평양에서 개최하면 좋을 것입니다. 단절된 남북축구교류의 재개를 위해선 분위기 조성이 필요한 데 현실적으로 가장 좋은 것은 대표팀간의 교환경기인 것 같습니다. 교환경기 이외에도 남북스포츠교류 재개를 위한 다양한 방안 을 협의해 남북한간 화해의 물꼬를 터야 할 것입니다.


4. 시베리아와 연해주 개발을


{자원빈국} 한국과 통일한국에 있어서 21세기 '시베리아'의 의미는 남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러시아의 극동지역에 잇달아 펼쳐지는 시베리아는 지리적으로도 우리와 멀지 않은 지역인데다가 세계최대규모의 석유 및 천연가스가 매장돼 있고, 이 밖의 광물 자원, 원목 등이 무진장한 곳이란 점에서 우리로서는 외면할 수 없는 지역입니다. 그 면적은 동북부에 위치한 사하 공화국(구; 야쿠트共․ 3백 10만㎢)을 극동지역으로 간주해 시베리아로부터 제외했을 경우에만도 6백 58만㎢로 한반도의 30배에 달하는 광대한 지역을 아우릅니다. 소련붕괴 후 이 지역의 개방이 급속도로 이뤄지면서 세계각 국은 앞 다투어 시베리아에서의 교역과 투자진출을 서두르고 있는데 우리는 앞으로 중국의 동북3성(흑룡강성․길림성․요령성)과 러시아 연해주를 아우르는 동북지역과 함께, 시베리아에도 눈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는 체르노빌 원전사고로 백혈병을 앓고 있는 러시아 어린이들을 계속해서 치료해주는 등 앞으로 정부차원만이 아닌, 민간단체들과도 상호 협력을 긴밀히 해 한․러 양국관계를 더욱 발전시켜 나아가야 합니다. 현재 러시아의 경제가 어렵다 하더라도 앞으로 우리 정부와 기업은 항공우주산업분야 등에 대한 기술 도입 등 러시아와 의 관계를 장기적인 '국가전략' 차원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1997년 현대그룹은 러시아 연해주 자치구의 수도 블라디보스토크에 향후 동(東)시베리아지역 가스유전 및 산림개발을 포함한 북방개발의 전초기지 및 현대그룹의 러시아 본사 역할을 맡게 될 {호텔현대 블라디보스토크 비즈니스센터}를 건립했는데 이는 정주영 명예회장과 현대그룹 측의 북방개발 의지를 잘 나타내주는 것 같습니다. 현대그룹뿐만 아니라, 삼성, LG, 고합 등 우리 기업들이 연해 주로 진출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주영 명예회장이 추진하고자 하는 시베리아 및 극동지역의 경제성 있는 분야, 특히 원유 및 지하자원 개발에는 차후라도 남북이 공동개발 하면 좋을 것입니다.

러시아 연방정부가 '연해주'에 투자하려는 한국에 대해 긍정 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한국 기업이 연해주에 진출해 생산과 고용을 창출해주길 기대하고 있다고 합니다. 총면적이 165.9㎢로 한국의 6.6배 가량 되는 연해주에는 지하 자원이 풍부해 국내 산업에도 중요 역할을 할 수 있고, 더욱 이 연해주에서 식량을 재배해 앞으로 닥쳐올 '식량위기'에 대비하면 좋을 것입니다.

국내 식량 자급율이 30%에도 미치지 못하는 상황에서 연해주는 장래 식량위기에 대비할 수 있는 식량기지로서 의의가 있습니다. 러시아가 땅을, 북한이 인력을 제공하고 한국의 투자 가 이뤄진다면 연해주에서 3국에 의한 농업개발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연해주는 휴전선이 무너졌을 경우 북한 주민의 대량 월남을 조절해줄 수 있는 완충지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 다.

'몽골'은 한반도의 7배나 되는 광대한 국토에 지하자원이 풍 부한 10대 자원 부국(富國)입니다. 앞으로 한국과 몽골 양국은 상호보완적 협력관계를 구축해 나간다면 장기적으로 좋을 것입니다.


5. 해양경영도 중요


우리 해군력은 강화돼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 해군은 '독도'를 비롯, 반(半) 영해인 2백 해리 경제수역을 지켜야 하며, 우리 나라 국제교역의 95% 이상이 바다를 통해 이뤄지는 만큼 수출입-원유 도입선이 지나는 뱃길을 안전하게 방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해양부나 관련학계 등에 따르면, 우리의 해양법 연구나 이를 전담하는 관계부처의 해양전문가 확보가 중-일 등 우리와 대립관계에 있는 나라들의 수준에 크게 못 미치고 있다고 하는데 한-중-일 간의 소리 없는 해양전쟁에 대응하기 위한 해양법 전공자나 어업문제 전문가, 해양경제 전문가 등 해양전문인력의 확보는 시급합니다.

1994년 삼성(회장 이건희)이 제주 마라도에서 서남방 152km 지점에 있는 '파랑도'(이어도라고도 불림)에 해양과학기지를 건설한다고 발표하였습니다. 1995년에는 1997년까지 해양과학기지를 완공하여 국가에 기부 체납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해양수산부는 1997년 5월에 한국해양연구소와 삼성 의 공동작업으로 2000년 7월까지 이 공사를 완결 짓겠다고 최종 발표하였습니다. 섬으로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암초 위에 해양과학기지를 짓기는 유례가 없는 일입니다. 이제 우리 국토의 최남단은 마라도가 아니라, 수산자원과 해저 광물자원이 풍부하고 해상교통과 항로상 요충지기도 한 파랑도입니다. 삼성이 조국의 영토를 확장한 것입니다. 「해양은 미래의 국토」라고 할 수 있는데 해양과학기술을 확보해 남태평양, 서태평양 등지로 진출해야 합니다. 그래서 해양 영토개척과 해저자원확보에 적극 나서야 합니다.

우리 나라의 지질 형태로 보아, 특히 '독도'근해와 '동해'는 분명히 천연가스나 석유가 묻혀 있다고 들었습니다. 동해에서 대규모 천연가스전이 개발되면 국가경제에 크게 도 움이 될 터인데 국내 석유자원 개발은 어떻게 진행돼 나가는 지 모르겠군요. 21세기 해양강국을 실현하는 분위기 조성을 위해, 통일신라시대 동북아 해상 무역권을 제패해 한민족의 진취적 기상을 드높인 해상왕 장보고(張保皐; ?~846) 대사(大使)를 본격적으로 재조명하는 사업은 필요하다고 봅니다.

장보고는 당시 전남 완도군의 청해진을 중심으로 신라․당 (唐)․일본을 잇는 황해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동남아는 물론, 멀리는 아라비아에 까지 교역을 넓혔습니다. 당시의 항해술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동양학을 연구하는 외국인학자들은 장보고의 이같은 활약상을「세계정복에 버금가는 위대한 업적」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6. 국가전략전문가를 양성하고, 과학기술투자에 역점을


변화에 맞춰 국가 대응전략을 수립할 수 있는 '국가전략전문가'를 양성하는 일은 시급합니다. 우리의 이런 현실을 제대로 보고, 우리가 해야 할 일과 현실 성 있는 대안을 제시해 줄 국가전략전문가들의 역할은 아주 중요합니다. 앞으로 우리도 국가전략전문가들로 구성된, 즉 각 분야의 두 뇌들로 구성된 정부 '싱크탱크' 조직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 조직에서 2002년과 2010년, 2020년 등 한국의 중․ 장기전략을 세워 국가의 비전을 제시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신문에 보면, {독자편지} 란이 있던데 이와 같이 국민의 여론을 받아들이는 {국민여론수렴기관}을 만들어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여 활용하면 좋을 것입니다. 특히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대외정책과 대북정책}에 대 해 24시간 모여 앉아 검토하고, 대책을 세우는 곳이 정부내에 꼭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의 세계경제전쟁은 '과학기술력'의 전쟁입니다. 국가가 어려울수록 과학기술투자에 역점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정부는 적극적인 '외국자본 직접투자유치'와 신속하고 강력한 '금융개혁', '기업구조조정'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과학 기술투자'임을 직시해야 할 것입니다. 21세기를 준비하는 '한국'에 있어서 이는 실로 중요하고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앞으로 국가전략전문가 양성과 함께 과학기술․인력 확보를 최우선 국가전략으로 삼아야 하며 이들이 '국가'를 위해 일한 다는 긍지를 갖도록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입 니다.


7. 한국 바로 알리기 운동을


외국에 알려진 한국의 모습은 너무 일그러져 있습니다. 정치․경제․사회의 안정과 올바른 '역사'보급과 함께, {한국은 1945년 독립한 신생국가다}, {독도는 한국에 의해 30년 이상 강탈당하고 있는 일본 영토다}, {동해는 일본해다}, {태권도는 일(日) 가라데의 모방이다}, {제주도는 일본 영토다} 등 한국에 관해 잘못 소개된 사항들, 곧 역사와 문화․지리․관광정보, 한국의 경제규모나 기술력 등 한국에 관한 정보 중 잘못 소개돼 있는 것을 바로 잡는 한국 바로 알리기 운동을 지속적으로 벌여 국가이미지 제고에 힘써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제품을 만들어도 '국가이미지'가 나쁘면 기업과 제품이 돋보이기 어려운데 이젠 국가와 기업, 상품이미지는 별개가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직시해야 합니다. 경제발전 등 국가경쟁력을 위해서도 '홍보전략'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는 체계적인 '국가홍보전략'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젠 경제회복에 최선을 다하면서 '국가이미지' 개선작업에도 총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나는 이런 문제를 전담하는 '기구'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8. 한글을 전세계에


'한글'에 대한 관심이 국외에서 높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중국 북경에는 한국어 고등학교가 설립됐으며 1990년대 이후 한국어과를 설치한 대학만도 25개교가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미국에는 39개 대학이, 독일에는 11개 대학이, 호주에는 28개 고등학교와 9개 대학이, 프랑스에는 8개 대학이, 러시아에도 8개 대학이 한국어과를 설치했다고 합니다. 1996년 6월 현재 한국어과, 한국학연구센터 등을 개설하고 있는 대학은 48개국 2백 72개 대학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88서울올림픽 이후 한국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우리의 경제성장에 따라 급증한 숫자입니다.

그런데 한국어의 해외보급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교재와 교사 및 교육시설의 부족이라고 합니다. 교재는 학습자의 모어(母語)에 따라 달리 만들어져야 하고, 교사는 본격적인 교사 양성기관이 없기 때문에 자격을 갖춘 사람이 없다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그래서 각국에서 유능한 교사를 애타게 찾지만 이를 해결할 길이 없는데 하루속히 '한국어 지도자 과정'이 많이 설치돼야 합니다. (최근 서울대에 개설됨) '한국어 붐'은 사업뿐만 아니라 관광산업으로까지 수요가 확대될 수 있는데 경제협력이나 문화교류를 위해서도 {한국어 알리기} 전략은 중요합니다.

1997년 일본 게이오 대학에서 치러진 {한국어 능력 검정시험}에는 일본 전국에서 2천여명이 응시했고, 개교 1백 19년을 맞은 일본의 최고명문 히비야(日比谷) 고등학교에서 1997년 4월부터 제2외국어로 한글강좌를 개설했다고 하더군요. 매주 월요일 2시간씩 강좌를 열어 학기말 성적에도 반영시킬 예 정인데 1993년 말 현재 일본 전역에서 한글강좌를 개설한 고등학교는 75개교, 지금은 다소 늘어나 약 1백개 교에서 한글을 가르치고 있다고 합니다.

한글은 한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규슈(九州)지방에 많이 보급된 편이며, 도쿄(東京)에선 지금까지 도쿄 도립고교 등 불과 3개교에서만 한글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히비야 고등학교에 서 한글 강좌를 개설함으로써 도쿄 등 간토(關東)지방의 고등 학교에도 '한국어 붐'이 일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미국판 대학입학수학능력시험인 S. A. T.Ⅱ 한국어진흥재단 (전신 한국어채택위원회, 이사장 정채환)은 8개 외국어 과목으로만 실시되던 S. A. T.Ⅱ 외국어 시험과목에 (제2외국어 선택과목으로) '한국어'가 채택되도록 결정적 기여를 하였더군 요. 이에 따라 동포 2․3세들의 한국의 뿌리교육과 정체성 확립은 물론 나아가 한민족으로서의 자부심 고취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한국계 학생들의 미국대학 진학에 있어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할 수 있는 실질적 기반을 마련하였더군요.

미국에서 한글보급운동을 펼치고 있는 {S. A. T.Ⅱ 한국어진 흥재단} 정채환 이사장은 한 일간지에 {S. A. T.에 한국어가 정식 채택되면서 로스앤젤레스 교포 등 교민들의 자긍심이 대단히 높아졌고, 우리말 배우기에 소홀했던 교포 2세들이 주말 한글학교 등에 열심히 다니는 등 한글 배우기에 여념이 없다}고 말하고, {미국 고교에 한글 교과가 채택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선투자로 미정부의 지원을 유도해야 한다}며 {고교마다 교사채용과 시설-교재확보 등 비용으로 2만 달러를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는데 경제가 안정이 되면, 우리 정부와 국민은 광범위한 지원으로 '한국어'를 세계에 우뚝 서게 해야 합니다.

경향신문 1997년 3월 19일자 14면에 보면 {삼바의 나라} 브라질 사람들에게 우리 가곡인 {보리밭}, {그리운 금강산} 등 한복을 입히고, 한국말로 한국노래를 부르게 하는 최공필(58) 씨에 대한 기사가 실렸더군요.


9. 태권도를 전세계에


1971년 국기원 건립이후 국내 3백 70만 명의 유단자와 해외 150여 개국 5천만의 동호인을 지닌 국기(國技) 태권도는 가라데 종주국인 일본에서도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이후 인기가 치솟으며 대중스포츠로 자리잡고 있다고 합니다.

국민일보 1997년 5월 21일자 29면에 보면, 맨주먹 하나로 24 년간 한국의 얼을 심고 60만 태권도 가족을 배출, 현지 정부로부터 국빈 대우를 받으며 우렁찬 우리말 태권도 구호를 중남미 전역에 울려 퍼지게 만든, 멕시코를 비롯한 중남미 지역에서 255개의 태권도장을 운영하고 있는 자랑스런 한국인 김선명(金善明, 45)씨에 대한 기사가 실렸더군요.

러시아 시베리아에도 우리 태권도 붐이 일고 있다고 하더군요. 알타이주 도장(道場) 10여 곳 1,500명이 수련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중앙일보 1997년 8월 8일자 10면에 보면, {지금 태권도는 이집트 경찰대학 4천 5백명 학생의 필수 과목이 됐으며 전국에 흩어진 1천여 태권도 도장을 통해 15만 명의 이집트인이 직접 태권도를 접했다}는 기사와 함께, 이집트 국가대표팀 을 지도하고 있는 정기영(丁璂濚�53)사범에 대한 기사가 실렸더군요.

1997년 2월 27일 밤 KBS 제 1TV에서 제5회 해외동포상 수 상 {자랑스런 한국인}이 방영됐는데, 〈특별상부문〉의 이행웅 씨는 지난 1962년 도미, 미국태권도협회(ATA)를 창설해 지금까지 미국을 위시해 유럽, 남미연방 등 전세계적으로 총 19 지부 15만 명의 회원을 확장, 국기인 태권도를 보급해 왔더군요. 이행웅 미국태권도 협회장은 세계태권도대회를 매년 아칸소주에서 개최, 이 대회가 미국의 관광명물로 자리잡도록 해 경제활성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고, 대회기간 중 주정부로부터 '세계태권도의 날'로 지정 받는 등 아칸소주 상무성, 시 청 및 각도시의 시장으로부터 수 차례에 걸쳐 표창을 받는 등 한국의 얼을 심어왔더군요.

이태은(李泰恩�57) 캐나다 태권도협회장은 현재 63개 도장에 2만 여명의 수련생을 두고 있다고 합니다. 또 사회봉사활동도 활발히 전개, 오타와시로부터 매년 5월 31일을 '이태은의 날'로 지정 받기도 했는데 이 날은 오타와시 전 지역에 태극기가 게양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현재 터키의 태권도장은 3천여 곳이며, 태권도 인구는 유단자만 3만 여명이라고 합니다. 쿠바, 대만, 베트남, 이란, 덴마크, 스페인, 독일, 호주 등도 최근 들어 붐이라고 할만큼 태권도 바람이 일고 있다고 합니다. 호주는 태권도 인구만 30만~40만 명을 헤아릴 정도라고 하더군요.

태권도가 이처럼 한국문화의 상징으로 자리잡는데 제일의 수 훈을 세운 사람들이 바로 150여개국에 주재하고 있는 2,000여 한국인 태권도 사범들입니다.

앞으로 우리는 '한글'과 우리 '역사', '전통문화예술'의 보급과 함께 '태권도' 수출을 통하여 지구촌 구석구석에 우리의 정신과 예절, 우리의 언어와 문화를 전파하는데 적극 노력해야 합니다.

전세계 구석구석에서 우리말로 외치는 구령과 함성이 울려 퍼지도록 국내사범의 해외파견 등 한국의 국기 {태권도} 수출에 정부가 적극 나서야 합니다. 국가적인 외환위기에 부딪혔을 때, 해외 태권도 사범들을 통한 외화 송금운동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0. 교육개혁에 대해


되풀이되는 이야기겠지만, 이젠 과외가 필요 없는 '입시제도'와 함께 '학교 교육'을 개선하고 강화해 우리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숨통을 터 주어야 합니다. 아울러 열악한 시설과 환경에서 내실 있는 교육을 바라는 것은 무리인데 경제가 안정이 되면, 정부는 교육의 질을 높여 내실 있는 공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초․중․고교의 학교 환경과 시설개선에 과감한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중․고등학교 학교급식을 실시하는 것이 중․고등학생들과 학부모들을 위해 초등학교에서 실시하는 것보다 절실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초․중․고교 학생들에게 국가경쟁력 차원에서 컴퓨터교육과 영어 등 국제공용어에 대한 교육을 하되, 우리 '역사와 문화'교육 그리고 '국어'교육은 더욱 강화해야 합니다. 경기 구갈초등학교(교장 황준용(黃俊容), 60)는 요즘 세태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예절을 '제1의 교육목표'로 설정, 인성(人性)교육에 치중하고 있다고 하던데(1․2학년은 주로 가정예 절, 3․4학년은 학교 등 단체예절, 5․6학년은 이웃 등 사회예 절에 치중), 이런 학교교육은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경제가 안정이 되면, 학생들과 지역주민들에게 정보와 문화의 산실역할을 하고, 문화교실을 통해 자기계발을 할 수 있는 '공공도서관' 확충은 시급하다고 봅니다. 전국 각지에 있는 도서관을 정비해야 함은 물론이고요.

대학의 세계화는 외국대학으로만 내닫는 일방적 접근이 아닙니다. 진정한 상호교류가 이뤄지도록 외국인 유학생을 유치하는 등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추진돼야 하는데 무엇보다도 우리 '대학의 질'을 높여야 합니다.

그리고 대학졸업자들은 해마다 수십 만 명씩 사회로 쏟아져 나오는데 반해 일자리는 턱없이 부족한데 이젠 '학부정원조정' 과 '학과재조정' 등에 대해서 검토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대학원' 정원은 늘려 사회 각 분야의 21세기인력을 육성해야 합니다.

현재 '고개숙인' 초․중․고교 교사들을 질책하기보다는 따뜻한 격려의 말을 해줄 시점인 것 같습니다.


11. 환경문제에 대해


서울-인천-경기 등 수도권 2천만 시민의 식수원인 팔당호(湖) 등 상수원(보호지역) 주변에 가봤더니 참 한심하더군요. 수도권 식수원을 이대로 방치시켜 결국은 {물도 수입해 먹게 하자}는 발상인지….

이젠 팔당호의 수질을 총괄하는 '특별관리기구'를 신설해 식수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야 합니다. '물'문제를 이런 식으로 하다가는 식수대란(大亂)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정부와 지방 자치단체는 지금부터라도 전국의 주요 상수원보호구역에 대 해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특히 3급수로 전락할 위기에 있는 수도권 2천만 시민의 식수 원인 '팔당호'수질 문제에 대해 앞으로 청와대와 감사원이 직접 나서서 (범정부 차원에서)수도권 식수원을 보호해야 합니다. 그러나 수도권 수도요금을 올려서라도 상수원 주민의 생존권을 보장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역대 (과거)정권 아래서도 어느 정도 국토를 훼손하는 무질서한 개발사업이 있었으나 민선 지방자치단체가 실시된 이후 이러한 국토 훼손이 더욱 두드러지고 있는 실정인 것 같습니다. 국토의 균형된 계획개발은 중앙정부의 기능인데 앞으로는 국토개발에 관한 한 중앙정부의 통제력을 강화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자연경관과 생태계가 점점 파괴되어 가는 한라산 등 국립공원을 살리기 위해서는 획기적인 국립 공원관리정책의 전환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아울러 국토의 65%를 차지하고 있는 '산림(푸른숲 가꾸기)' 정책에 대해서도 장기적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물론 경제성과 목재로 활용할 수 있는 '경제림'을 선정해서 조림을 해 나아가야 합니다.

안보와 경제문제 못지 않게 {환경문제}도 중요한데 특히 우리 '언론매체'에서는 환경문제에 대해 365일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12. 거리에 태극기와 무궁화, 소나무를


앞으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연중 거리에 '태극기'를 게양해 국민들이 태극기와 더욱 친근하게 해야 합니다. 아울러 거리에 게양된 태극기를 잘 관리해야 함은 물론이고요.

그리고 국민과 외국인들에게 우리 꽃 '무궁화'를 보여줄 만한 마땅한 곳이 없는데 이젠 무궁화에 대한 수목연구와 재배관 리 대책 등을 다각도로 세워야 하며, 무궁화 광장을 전국 각 곳에 조성하고 관리를 잘 해야 합니다.

서울시 종로구는 1997년 5월 1일 혜화동 성균관대 입구~대학로까지 150m 구간의 보도 양쪽에 한국적인 정서를 느끼게 해주는 '소나무' 45그루를 심어 소나무 거리를 조성했는데 경제가 안정이 되면, 이런 운동은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13. 국가정보원에게


전세계 정보기관들이 경제전쟁의 첨병 역할을 자임하고 나서듯 이제 우리 국가정보원(구; 안기부)도 전세계에서 경제활동을 벌이고, 수집된 정보를 분석․판단하고 대안을 마련해 우리 기업의 국제경쟁력 제고를 선도하고 지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 국가정보원은 미국의 정보기관이나 일본의 정보기관처럼 기업, 경제단체, 연구소 등과 유기적인 협조체 제를 구축해서 통상, 외교 등 국제문제전문가들을 양성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 국가정보원은 투철한 {국가관과 역사의식}을 가지 고, {국가와 민족}과 운명을 함께 하는 그런 조직으로서, 온 국민의 신뢰와 사랑을 받는 그런 최고의 멋진 조직으로서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일본 [내각 정보조사실]을 능가하는 세계최고의 정보기관으로 거듭 태어나야 합니다.

우리 국가정보원은 일본 정보기관인 [내각 정보조사실]처럼 백발이 성성한 요원이 정보전문가로 실무에서 노련함을 발휘 할 수 있을 때 국가정보원 직원들의 사기는 물론, 국가정보원 자체의 역량도 커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유능한 인재들도 많이 유치할 수 있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앞으로 우리 국가정보원은 국내․외 우리 산업체들(대기업․ 중소기업․벤처기업․해외산업현장)의 {산업기밀} 보호에도 만전을 기해야 합니다.

국가정보원은 신채호(申采浩) 선생의 '의열단'과 김 구(金 九) 선생의 '한인애국단'을 국가정보원의 뿌리로 규정하고 집무실 앞에 신채호 선생과 김구 선생의 존영을 내걸었다고 하는데 이는 잘 한 일입니다. 의열단은 일제의 밀정을 공격하고, 친일파를 습격해 독립자금을 마련하는 등의 활동으로 위세를 떨친 독립운동 조직입니다.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국내의 비밀조직을 연결하는「연 통제」란 정보수집 및 보안 체제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김구 선생의 한인애국단은 윤봉길, 이봉창, 나석주 열사 등 을 배출한 조직입니다. 그들은 일제의 감시와 체포를 피해가며 정보망을 구축, 일제 의 간담을 서늘케 한 의거를 실행에 옮긴 인물들입니다. 우리 국가정보원은 '국가안보' 문제를 비롯 앞으로 할 일이 많습니다. 나는 국가정보원에 거는 기대가 큽니다.


14. 우리 군(軍)에게


우리 군(軍)은 강한 군이 되기 위해서는 국민과 함께 하는 국민의 군이 되어야 함을 직시하고, 앞으로 우리 정부와 국민은 군의 사기를 높여주는데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군이 강하지 않고는 국가의 안위와 우리에게 통 일의 호기가 와도 평화통일을 이룰 수 없듯이 이젠 더욱 강 한 군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통일과정에서 우리가 주도권을 잡을 수 있으려면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 뛰어난 외교력 등은 필수입니다.

국가를 위해 희생한 분들을 진정으로 존경하고 예우하는 건전한 보훈문화의 정착은 절실합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몸바친 그 유족과 아직도, 고통과 좌절 에 시달리고 있는 많은 국가유공자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국가를 위해 희생한 사람은 적에게 포로가 되었든, 상이자나 환자가 되었든 간에 국가는 이들을 끝까지 책임져 주어야 합니다. 국가가 이 같은 의무를 다할 때 국민에게 비로소 충성의무가 생기게 될 것입니다. 아울러 국가유공자를 존경하고, 그 유족을 예우하는 일은 정 부와 국민의 당연한 도리이자 책무입니다. 정부는 국가의 명령을 수행한 대가로 비극적 삶을 살게된 「고엽제 피해자들」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나는 군사문제에 대해 문외한입니다. 그러나 해병대의 원상회복은 이루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1997년부터 관심을 가지고 지켜 보았는데 현재 해병대가 안고 있는 문제의 핵심은 해병대의 지휘 및 관리를 위한 실질적인 권한이 해병대에 있지 않아 해병대 사령관의 지휘권 누수현상과 사기저하, 해병대의 피해의식이 심각한 수준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해병대의 원상회복이 군(軍) 전투력과도 직결되는 일이라면 마땅히 원상회복 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 해병대는 미(美) 해병대처럼 독자적으로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하며 더욱 강해져야 합니다.

현재 우리 군은 군인사, 조직, 무기체계 등 전면적인 점검이 시급한 것 같습니다. 또 한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예비역 장성과 대령 등 예비역 고급장교 같은 고급 두뇌를 우리 나라처럼 방치하는 나라는 드문 것 같습니다. 미국이나 유럽 등 선진국을 교훈 삼아 예비역들에 대한 처우를 개선해야 하며 이들이 우리 군(軍)에 공헌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 봐야 할 것입니다.


15. 한국 교회와 종교계에게


기독교(개신교) 역사는 우리의 현대사와는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제침략시대 때 기독교 측은 신앙과 민족운동을 직결시키고, 그 뒤에도 우리 사회와 문화발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앞장을 서 왔습니다. 앞으로 21세기 {한국 교회}는 한국사회를 앞장서서 이끌어 갈 수 있는 좀 더 새로운 문화와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가 치관'을 창출해야 합니다. 그리고 현대사회는 그 어느 때 보다 '교회'의 대사회봉사를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급격한 남북관계 변화와 어려운 경제 등 민족의 위기 상황을 감안해 78주년을 맞은 1997년 3․1절 기념식을 6대 종교계가 공동으로 갖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교계가 3․1절 공동기념식을 개최한 것 은 지난 1919년 {기미독립선언문} 공동발표 후 처음입니다. 이 두 가지를 내가 다 지켜본 셈이군요. 서울 중구 장충동2가 국립극장 입구 유관순(柳寬順; 1904~ 1920) 열사 동상 위쪽 부지에 3�1독립운동기념탑을 건립한 다고 들었습니다. 이는 잘하는 일입니다. 1919년 3․1운동 때 우리 민족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1999년 내년이 벌써 3․1운동 80주년이 되는군요.

그리고 각 종교의 최고위급 지도자들로 구성된 {한국종교지도자협의회}가 1997년 3월 18일 공식 출범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 {한국종교지도자협의회}는 종교간 화합과 유대를 강화하고, 민족사회에 올바른 가치관을 제시하고 실천하는 등 국가의 정신적, 도덕적 토대를 구축하는 데 앞장서야 합니다. 종교의 영향력이 어느 나라보다도 크고, 여러 종교가 공존하고 있는 우리 나라에서 종교간의 대화와 협력은 종교의 공존 뿐 아니라 국가와 사회의 안정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현대사의 굴곡마다 큰 발자취를 남긴 천주교 김수환(金壽煥; 1922~) 추기경과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개신교 강원룡(姜元龍; 1917~) 크리스챤 아카데미 이사장(목사)가 불교방송(BBS)의 팔만대장경 캠페인 방송에 1주일씩 출현, 화제가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기독교 지도자가 불교방송의 캠페인에 출연한 것은 이례적인 일로 종교간 화합을 상징하는 사례로 평가되는데 이는 바람직한 일입니다. 진정한 종교인은 다른 신앙과 절대 다투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는 길은 달라도 종교는 '한곳'에서 만납니다.

감원과 해고 등으로 직장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의 노숙자로 떠돌고 있는데 우리 종교계는 문을 활짝 열고 이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점심을 굶는 초․중․고생들에게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 정부와 종교계는 힘을 합쳐 일회성이 아닌, 꾸준히 '사회복지수준'을 높여 사회안전망을 강화해 극한 계층의 어려움을 덜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좀 더 따뜻한 사회로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16. 우리 법원과 검찰, 경찰에게


앞으로 우리 '법원'은 판사수를 늘려서라도 기한 없는 민사소송에 소요되는 시일을 줄여야 하고, 형사재판의 양형 편차도 상당부분 해소시키는 등 대국민 법률서비스를 강화해야 합니다. 아울러 법원은 개인적으로 변호사를 선임할 경제적 여유가 없는 형사 피고인이나 변호인의 도움이 필요한 구속 피고인 은 누구든지 '국선변호인'을 선임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법원은 형사소송법이 『피고인 청구를 국선변호인 선임의 전제조건』으로 하고 있으므로, 앞으로 피고인 청구가 없어도 재판부 직권으로 국선변호인을 선임해주는 쪽으로 형사소송법 을 개정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특히 대검찰청은 수사단계의 체포-구속 피의자에까지 국선변호 대상을 확대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검찰은 학원(학교)폭력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국민의 신뢰를 받는 검찰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앞으로 검찰의 독립성을 위해 총장 임기제는 지켜져야 합니다. 내가 아는 사람들이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우리 '검찰'은 그 어떤 조직보다 '정의감'이 강한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안타까운 일이 많은 것 같습니다. 앞으로 우리 검찰은 더욱 잘 해야 합니다.

제도개혁의 일환으로 10년 이상 경력을 가진 법학교수에게 변호사 자격을 부여하는 방안을 적극 추진해야 하며, 변호사 자격을 얻은 법학교수를 대상으로 일정 심사를 거쳐 판․검사로 임용하는 방안도 적극 검토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 경찰은 박봉과 불규칙한 근무(과로)에 고생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 경찰도 힘을 내고 더욱 잘 해 야 할 것입니다.


17. 우리 언론매체에게


앞으로 용기 있는 언론인이 많아야 '국가'를 바른 길로 이끌 수 있습니다. 특히 현장에서 발로 뛰는 기자들은 좀 더 힘을 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젠 KBS․MBC․SBS 등 방송 3사는 국민들의 가치관을 흔들어 놓는 프로를 자제하고, 모든 프로에 건강한 철학을 일관성 있게 반영해 밝고 건강한 사회를 조성하는데 앞장서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대중음악과 가곡, 국악과 클래식음악이 어우러지는, 다채로운 연주와 공연으로 가족 시간대 대표적 음악프로 로 자리 잡은 KBS 『열린 음악회』같은 프로는 바람직하다 고 봅니다.

앞으로 우리 언론매체는 국민의 '중심'을 잡아주고, 우리 민족 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특히 국가기간 공영방송인 우리 KBS는 국민정신을 계도해 나아가는 공익성 실현에 앞장서야 하고, 국가목표의 하나인 민족문화의 향상 발전과 고급문화를 확대 보급하는데 앞장서 야 하며, 국민의 건전한 생활문화를 형성해 나아가는데 앞장서야 합니다.

박권상(朴權相; 1929~) KBS 사장은 할 일이 많습니다. 남성우(49) 책임PD를 비롯 서재석․허 진․권오주․이완희․최영민․김형석․우종택 PD 등 KBS「역사스페셜」팀은 새로운 관점에서, 역사적 진실을 찾겠다는 자세로 국민들에게 좀 더 풍성한 볼거리를 전달해야 할 것입니다.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워주는 역할도 공영방송이 해야 할 일 입니다.


18. 우리 대학생들에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대학생들은 건강한 시대정신과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국가관'을 가져야 하며, {세계를 경영} 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나는 특히 한국의 잠재력과 폭발적인 에너지의 원천인 우리 대학생들에 대한 기대가 큰데 이제 우리 대학생들이 좀 더 폭넓게 보고,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 그런 개개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정부청사에 게양된 커다란 태극기를 보거나 올림픽 등 국제경기에서 우승한 우리 선수들을 배경으로 울려 퍼지는 애 국가를 들으면, 그리고 자주 보는 TV에서 애국가와 함께 동해 일출, 백두산, 무궁화 등이 나오는 배경화면을 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뭉클하던데 우리 대학생들은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대학생들도 한국인이라 생각하는데. 이제 우리 대학생들은 {올바른 우리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갖고, 예전과는 다른 새로운 모습의 학생운동을 펴나갔으면 좋겠습니다.

대학생 여러분! 앞으로 어떤 일을 하던지 간에 {국가관과 역사의식}을 갖춘 사람들이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아무리 어려운 때라도 '희망'을 갖고, 미래에 대한 투자를 게을리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19. 정부와 국민에게


내 개인적인(자화자찬식) 이야기와 '역사'회복 문제 그리고 신문․방송 등을 바탕으로 많은 말을 한 것 같습니다. 각 부분의 '내용'에 대해 많은 비판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신(新) 국채보상운동이라 할 수 있는 {나라사랑 금 모으기 운동}과 함께, 1998년 1월 18일 생방송으로 진행된 대통령 당선자의 {국민과의 TV대화}는 인상적이었습니다. 앞으로 대통령이 국정현안을 국민에게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는 일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봅니다. 부탁하고 싶은 것은 앞으로는 {구체적 주제}를 정해 보다 심도 있는 대화가 되도록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정부는 우선 실업대책과 물가안정에 최선을 다하고, 경제를 이끌어 가는 기업인들에게도 '희망'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차후 식량위기(안보)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농․어촌 문제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제15대 대통령과 그를 보좌하는 진용은 그 어떤 시대의 인물보다도 할 일이 많을 뿐더러, 중요한 위치에 서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새 정부가 출범한지 1주년 째에 접어드는데 정부는 좀 더 광범위하고 제도적인 개혁추진 작업에 적극 나서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어차피 해야할 일이라면 경제를 비롯 전 분야에 걸쳐 빠르고 강력한 국정 대개혁에 들어가야 하며, 앞으로 우리의 '중심'과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이고 개방된 나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정치․경제․사회가 안정되면 '세계주의'의 기치아래 전세계로 힘차게 뻗어 나아가야 합니다. 대통령을 보좌하는 사람들은 대통령이 효과적인 정책을 시행 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루 빨리 이 난국을 헤쳐 나아가야 합니다.

1999년 올해 내 나이 100세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인천에서 서울 서초구 반포동에 있는 '학술원' 이나, 종로구 종로2가에 있는 서울YMCA 원로모임에 나갈 때면 늘 전철을 이용할 정도로, 그리고 매일 신문을 보고 한 국학(역사) 관련 서적 같은 경우는 하루 평균 8시간씩 읽을 정도로 건강합니다. 근 100년을 살아온 노학자가 부탁하고 싶은 것은 세계의 틀과 흐름을 읽으면서 우리의 '중심'을 잡고, 전국민이 '단결'하여 2002년까지 앞으로 3년간만 노력한다면 21세기에는 {강한 한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다고 봅니다. 다시 한번 당부합니다. 이제 우리는 힘을 모으고, 그 무엇보 다 자신감과 당당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실업대책과 물가안정에 최선을 다 하면서 올바른 '역사'교육을 통한 {국가관과 역사의식} 그리 고 자긍심을 불어넣어 국민의 '중심'을 잡아주는 작업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앞으로 우리 언론매체는 이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여 야 할 것입니다. 방송사는 앞으로 1995년 SBS에서 광복 50주년 기념으로 다큐멘터리 6부작으로 방영한 '고구려, 그 중에서도 광개토대왕 의 영광에 관한 역사물'인『왕도(王都)의 비밀』과 1996년 9월 15일 KBS 1TV『일요스폐셜』에서 백제의 역사를 재조명한 다큐멘터리「속 무령왕릉, 잊혀진 땅-백제 22담로(擔魯)의 비밀」과 같은 『역사다큐멘터리』를 계속해 제작, 학생들과 국민들에게 힘찬 기상을 불어넣어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 올바른 '역사'를 바탕으로 한『역사다큐멘터리』방송 은 '역사'를 통해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키우는, 더 나아가 국민통합과 사회일체감을 조성하고, 21세기 통일한국 시대를 대 비하는 데 있어서도 일조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1999년 올해는 항일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친 백범(白凡) 김구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50년이 되는 해가 됩니다. 경제분야 등에 대한 구조조정이 끝나면 김구 선생의 '애국 혼'이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인『백범 기념관』건립은 꼭 실현되어야 합니다. 백범 기념관은 국민의 이름으로 지어져야 하며, 장소는 김구 선생과 깊은 관련이 있는 곳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김구 선생 등 독립투사들이 안장돼 있는 '효창원'은 국립묘지 수준으로 성역화 되어야 합니다.

1948년 4월 남북협상 때 김구 선생과 함께 평양을 방문했던 김우전(金祐銓; 1922~) 전 광복회 부회장과 이만열(李萬烈; 1938~) 숙명여대 한국사학과 교수, 김삼웅(金三雄; 1943~) 대한매일 주필은 이와 같은 일들에 대해 그 누구보다 적극적 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김 구 선생이 서거한지 반세기가 지났는데도 그의 전집이 발간되지 않은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나는 특히 민족상․통일상․언론상․문화상 등을 갖춘 '백범 학술상' 제정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 이수성(李壽成)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전 국무총리), 정주영(鄭周永) 현대 명예회장은 남달리 김구 선생을 존경해온 인물로 알고 있습니다. 이수성 수석부의장은 1998년 6월 18일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 회 새 회장으로 선출되었더군요. 올해에 있을 백범 서거 50주년 행사는 정부차원에서 추진되어야 하며, 이젠 김구 선생을 정당하게 평가해 드려야 합니다.

1998년 10월 7일~10일, 이번 김대중 대통령의 일본 국빈 방문은 한일(韓日)관계의 20세기를 정리하고, 21세기 새로운 협 력의 틀을 짜는 '역사적 방문'이 되었기를 기대합니다. 우리가 열린 마음으로 대하는 만큼 앞으로 일본은 그에 상응 하는, 말보다 실천하는 자세를 보여야 할 것입니다. 나는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역사' 문제에 관한 한 일본인 의 잘못된 역사인식이 시정되도록 민간차원에서 활발한 교류 가 이뤄져야 한다고 봅니다.

끝으로 내가 가장 하고 싶은 말은 경제분야 등에 대한 구조 조정이 끝나면 일제에 의해 왜곡되고 말살된 '역사회복' 작업 에 나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생존해 나아가려 면 정치․경제․사회의 안정과 함께 무엇보다 각국에 지한 (知韓)․친한 인맥을 형성해 나아가야 하는데, 특히 우리 국민에게 {국가관과 역사의식}을 심어주려면 {한국학 재단(법 인)}과 그 부설기관으로 {한국학 연구소}를 설립해 일제와 어용학자들에 의해 왜곡되고 말살된 우리 '역사'를 올바로 정립한 후, 올바른 '역사'를 국민과 해외동포 그리고 전세계에 대대적으로 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참 모습을 전세계에 알리고 그들의 관심을 사 지한파(知韓派)․친한파를 만들 수 있는 올바로 정립된 우리 '역사' 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우리는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21세 기에는 전세계에 {한국학 붐}을 일으켜 전세계인의 시선을 우리 '한국'에 집중시켜야 하며, 무엇보다 각국에 지한․친한 인맥을 형성해 우리의 운신의 폭을 넓혀야 합니다.

정치․경제․사회의 안정과 함께 올바른 우리 '역사'의 대대 적인 보급과 홍보는 '한국'의 이미지 향상을 통한 {경제와 관광분야}에 까지 엄청난 파급효과를 발생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사 바로잡기}는 국가전략차원에서, 그러나 정부나 정부 기관에서 하는 일은 활동에 제약조건이 붙게되는 특수사정도 있으므로 자유롭게, 순발력 있게 대응하고, 활동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진 '민간조직'이 적극 나서야 합니다.

또 한가지 하고싶은 말은 '국사'교육이 현재와 같이 지속되면 전국민을 '역사문맹자'로 만들 수 있다고 봅니다. 중-고-대학에서 국사교육을 강화하고 대학수학능력시험 등에 국사를 독립과목으로 포함시켜야 합니다.

2002년부터 제7차 교육과정 개편에 따라 중․고교의 경우 국사가 사회과에 통합되거나 선택과목으로 바뀌는 것을 전면 재검토해 국사를 필수과목으로 환원해야 합니다.

또 대학에서의 국사 교양필수 환원, 대학수능시험 국사 독립 과목화, 사법고시과목 국사 필수 환원, 각종 기업체 입사시험 에 국사 포함 등은 꼭 필요하다고 봅니다.

국무총리 자문기구인 한민족연구발전위원회(위원장 이영덕․ 李榮德전총리)는 1999년 1월 25일 이같은 내용의 정책보고서 를 김종필(金鍾泌) 국무총리에 보고했다고 하더군요.


Ⅳ. 최태영(崔泰永) 박사 약력


현재 대한민국 학술원 최고령 회원, 서울YMCA 원로모임인 계묘구락부 회장, {올바른 역사}를 하는 우리나라 최고령 역사가, 서울대 법대동창회 고문

주민등록번호: 000328-1042715(1999년 올해 100세) 1900년 음력 3월 28일생

고향: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 동부리 1051(구; 황해도 장련군 장련읍 동부리 1051)

본적: 서울시 성북구 안암동5가 129-1

주소: 인천시 중구 율목동 240-2 10통 2반(10/2)

광진학교(1905~1910), 종산학교(1911~1913)

경신학교(현 경신중․고교)(1913.9~1917)

일본 동경 명치대(明治大) 법학부 영법과 1기 입학생(1918~1924)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 법과 교수(1925~1945) 겸

경신학교 영어교사․교무주임(지금의 부교장)(1924~1939), 대표설립자(1938.2~1945) 겸 제9대 교장(1939.11~1946)

부산대 인문과대학장(1946)

서울대 평위원 겸 법대학장(1947~1949)

중앙대 법문학부장�초대 법정대학장(1948~1957)

경희대 법과대학장, 초대 대학원장(1954~1955)

청주대 대학원장(1958~1962), 학장 겸 대학원장서리(1966~1969)

숙명여대 재단감사�역사강의(1963~1977)

{법전편찬위원회}위원(1948. 9)

{한국상사법학회}초대회장�회장(1959~1972)

{한국법학교수회}초대회장(1966), 명예회장(1968)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해외소재한국학연구자료조사위원(1985)

인천대 한국학연구소 소장(1993)

법률학 저서)

《법학개론》,《민법총칙》,《현행어음․수표법》, 《서양법철학의 역사적배경》(1977)

―전국대학 교수들의 투표에 의한 역대 최고의 명저로 꼽힘, 학술원 저작상 {한국법철학연구}와 {한국전통법사상} 등 다수의 논


역사 저서) {An Introduction to the History of Ancient Korea}(1988)

《한국상고사 입문》(이병도 박사와 공저 , 1 9 8 9 )

《한국상고사》(1990)


※ 고향과 가족관계


고향주소는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 동부리 1051번지인데 그 당시는 황해도 장련군 장련읍 동부리(黃海道 長連郡 長連邑 東部里) 1051번지였습니다. 일제에 강점된 후인 1914년에 장련군이 은율군에 통합된 것입니다.

내 고향 장련은 기독교를 통해서 일찌감치 개화의 물결을 탄 포구도시로 단군유적의 보고인 구월산 정상이 바라보이는 곳이었습니다. 황해도 서북단 해안에 위치한 이곳은 구월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로 한천(한내)을 이루어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이 풍성하고, 쌀�밀�콩�목화�과일 등 황해도 일대의 농산물이 집산하던 곳으로 근대화의 상징인 진남포 뱃길을 통해서 일찍부터 신문명을 받아들여 비교적 개화가 빠른 6백 호 남짓한 윤택한 고을이었습니다.

앞산에는 손을 벌려도 몇 아름이나 되는 느티나무들이, 개천에는 맑은 물에 은어가 많았습니다. 앞산 위에 팔각정이 있었고, 집에서 5리(2Km 정도)만 나가면 농어․도미․게․갈치․왕새우 등 해산물이 풍부한 바다가 있었습니다. 어린시절 동무들과 함께 팔각정과 바닷가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습니다.

할아버지 함자는 최계준(崔啓俊)이고, 할머니 함자는 이도준(李道俊)이십니다.

증조부는 할아버지를 늦게 두셨습니다. 할아버지는 독자로서 15세에 18세된 할머니와 혼인하셨습니다. 그 당시에는 신부가 대략 3살 위였습니다. 증조부는 재산이 있었으나 세상공부를 하라고 하면서 혼인한 지 얼마 안된 할아버지를 내보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증조부는 돌아가셨습니다.

할아버지는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과거준비를 하였으나 과거 제도가 없어지는 바람에 시험을 보지 않으셨습니다. 한편으로 신의주, 개성, 평양, 서울, 인천, 부산 등지에서 장사를 해 돈을 모아 고향에 돌아오셨습니다. 고향에 돌아오신 할아버지는 동네 일을 봐주시다가 평안남도 남부에 위치한 진남포가 개항할 때 건너가 사람, 물건, 소 등 을 실어 나르는 '기선회사'를 경영하셨습니다. 진남포는 1897년 10월 1일 개항과 더불어 평양을 중심으로 한 관서(평안도)지방의 항구도시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곳입니다. 진남포~장련간, 진남포~안악간 2개 노선의 운항권을 가지고 계셨던 할아버지는 1905년경 기선회사를 팔아 우리 동네에서부터 바닷가인 피앗골과 오리포에 걸쳐 산을 구입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우리 동네에서 바닷가까지 우리 땅으로 만 다녔습니다. 산에는 논과 밭이 있었고, 밤나무가 1,000그루 있었습니다. 그 리고 사과, 복숭아, 감, 포도 등 과실수가 많았습니다. 진남포에는 연료가 부족해 할아버지는 산에서 나무를 베어 팔았습니다. 산에서 굴리면 곧바로 바다로 떨어져 배에 싣기 만 하면 되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기선회사를 경영하시면서 연료가 부족한 진남포 사정을 잘 알아 당시 값이 싼 산을 많이 구입했던 것입니다. 장련서 진남포까지는 발동기로 움직이는 작은 배인 똑딱선으로 1시간 거리였습니다.

내가 11살 때인 1910년 진남포~평양간 철도가 부설되어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기차 구경을 간 일이 있습니다. 원래 군항(軍港)이었던 진남포는 중국과의 오랜 교역항으로 상가에는 중국인 상점이 즐비했으며, 거리마다 상투를 틀고 자전거를 탄 사람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이 당시 우리 양말이나 구두 제품이 일본보다 훨씬 앞서 있었습니다.

진남포 상가에는 '상해(上海)양말'이란 상호가 붙은 국산양말 이 인기였고, 국산 구두 한 켤레에 몇 십원을 홋가했습니다. 할아버지는 동네사람 중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농사지어 가을에 본전만 가져오시오』하면서 돈을 내어주시곤 하셨고, '교회'와 '학교'를 세우는데 큰 후원을 하셨습니다.

나는 처음에 할아버지한테서 우리 '역사'와 산술(지금의 산수) 을 배웠습니다. 맏이인 나는 할아버지 밑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자신이 일찍 죽더라도 공부만은 끝까지 계속하라고 늘 당부하셨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1912년경에 돌아가셨고, 할머니는 97세까지 사시다가 광복 후 장련에서 돌아가셨습니다.

할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밥짓고, 바느질하고, 농사를 지으실 정도로 정정하셨습니다.

아버지 함자는 최상륜(崔商崙; 1882~1973)이고, 어머니 함자 는 김영순(金永順; 1879~1961)이십니다.

아버지는 3대 독자이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평양에 있던 숭실학교에 다니신 후 연세대 의대 전신인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셨습니다. 그런데 의과 1년 하시다가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어 고향에 돌아오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해 보내시다가 일제에 의해 평양 감옥에서 1년 반 동안 옥살이를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92세로 타계할 때까지 교회장로로 활동하시다가 내가 현재 살고 있는 인천 이 집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기운이 장사이셨습니다.

후에 광진학교 교장을 지낸 손영곤 선생이 밤이면 『부인야 학교』를 운영했는데 광진학교에 다니기 전, 우리 어머니 등에 업혀서 어머니가 야학교에 다니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구구법(구구단)도 외우고, 『가, 갸, 거, 겨, ~』도 배우고 하셨는데 지금까지 이런 것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처음부터 기독교 교인이셨는데 할아버지께서는 『종교는 개인 자유다』하시면서 종교에 대해 가족들한테 간섭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는 처음에는 가톨릭(천주교) 교인이셨습니다. 그런데 1905년경 아버지를 따라 할머니, 외할머니, 어머니께서도 기독교로 개종하였습니다.

나는 어려서 유아세례를 가톨릭에서 받았기 때문에 『요셉』이라는 세례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려서는 성당에도 가고, 예배당에도 갔습니다. 그래서 신부님하고도 친했고, 목사님들과도 아주 친했습니다. 그 뒤 광진학교가 기독교 학교라 기독교로 바꾸게 됐습니다.

할아버지를 위시해 종교에 대한 편견이 없다보니, 신부들도 우리집에 와서 늘 식사를 하고, 쿤스(E. W. Koons)를 위시해 목사들도 우리 집에 많이들 왔습니다.

6남 3녀 중 내가 장자입니다. 최태영(崔泰永)이라는 이름은 할아버지께서 크게 되고, 오래 살라는 뜻으로 지어주신 것입니다. 집사람은 김겸량(金謙亮; 1901~1975)인데 55년을 해로하다 1975년에 사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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