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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천왕에게 올리던 제사 '둑제((纛祭)' (4부)

환단스토리 | 2014.08.27 16:26 | 조회 6092
치우천왕에게 올리던 제사 '둑제((纛祭)' (4부)
독제란 군사지휘용의 대기인 독기(纛旗)에 올리는 제사
박선식 한국인문과학예술교육원 대표 기사입력 2012/12/24 [11:03]
다음으로 살필 내용은 북애자가 남긴 『규원사화』인데, 그 ‘단군기’에 팔성당의 설치내용이 보이기 때문이다. 『고려사』의 기술내용에 따르면 팔성당은 지극히 불교적 색채가 강한 건축물이었다. 그러나 『규원사화』의 ‘단군기’를 보면, 그 존위들 가운데 상고 우리의 선조들이 존재하고 있어 주목된다.

구체적으로 보면, 그 첫 번째가 호국백두악 태백선인(護國白頭嶽 太白仙人)인데 환웅천왕이고, 두 번째가 용위악육통존자(龍圍嶽六通尊者)이며, 세 번째가 월성악천선(月城嶽天仙)이고, 네 번째가 구려평양선인(駒麗平壤仙人)이며, 다섯 번째가 구려목멱선인(句麗木覓仙人)이고, 여섯 번째가 송악진주(松嶽震主)인 치우씨지신(蚩尤氏之神), 일곱 번째가 증성악신인(甑城嶽神人)인데 곧 고시씨지신(高矢氏之神)이며, 여덟 번째가 두악천녀(頭嶽天女)인데 곧 신시씨지후(神市氏之后)이며 환검신인지모(桓儉神人之母)라고 밝혔다.

팔성당은 금나라와의 전쟁을 주도하고 자주적 연호를 쓰고자 개경파와 대립했던 승려 묘청세력에 의해 추진되었다. 그 같은 관점으로 보아, 팔성당 에 배설된 존위들은 불교적 신앙심의 바탕 위에 굳건했던 역대 한인 선조들의 존귀함을 융합하고자 했던 문화적 이벤트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성당의 건조과정을 통해 치우 등 상고영웅들이 거론되고 구체적으로 숭앙의 상징적 존재로 추진된 점은 크게 주목할 점이며, 평가할 만한 가치를 지닌다.

고려조에 이르러 자칫 멀어져가던 상고시기의 선현과 영웅에 관한 강한 추억을 불러, 거국적인 자존감과 國格의 지대함을 되살리는 계기를 맞이하게 한 사건이란 가치를 느끼게 한다. 따라서 팔성당의 조영은 단순한 건축사업의 차원을 넘어 우리 韓人사회에서 이룩된 상고 철학과 역사성 그리고 강렬한 자존의식이 뭉뚱그려 상징화되는 문화적 대사건이라해도 지나치지 않을 터이다. 더욱이 두악천녀와 같은 여성 위인의 숭배가 함께 이루어진 점은 묘청 일파가 추진하던 자주적 정책노선에 고려 여인들의 묵시적 동의와 그에 따른 부응을 이끌어내려 한 측면도 있었을 개연성도 느껴진다.

고려시기에 치우에 대한 존숭과 그 분위기의 존재 여부는 이암의 역사 서술태도를 통해 어느 정도 추정해볼 수 있다. 고려후기의 문신인 이암은 『태백진훈(太白眞訓)』 등의 저술을 통해 치우가 한인 역사에 있어 중요한 선현에 해당함을 역설하였다. 그 같은 견해는 묘청의 팔성당 건축사업과 일면 맥을 같이 하는 측면이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유가적 입장의 이승휴는 『제왕운기』의 상권에서 황제를 거론하되 치우는 거론치 않았다. 이승휴는 황제를 주석하길, “성은 공손이고 토덕이다. 탁록에 도읍을 정하고 옮겨 살며 일정한 곳이 없었다. 이름은 헌원이며, 호는 유웅이었다. 원년은 정해이다. 소전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부보이다. 창힐을 시켜 문자를 만들게 하고 천부를 받아 장수와 대오·정절(旌節)을 만들었다. 창·갑옷·활·살을 만들어 치우를 멸했다. 뒤에 성을 고쳐 희로하고 왕위에 1백년 동안 있었다.”고 밝혔다. 이암과 이승휴의 기록을 통해 고려후기 문인사회에서 다양한 세계관의 혼재양상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제왕운기』‘상권’ ‘黃帝’ 내용 부분(‘受天符’라는 내용을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 내용은 황제 헌원 세력이 韓人사회의 상고시기 문화적 전통을 학습해 갔을 개연성을 강하게 느끼게 한다.) © 편집부

다음으로 살필 점은 고려조의 대청관(大淸觀) 설치에 따른 마제의 봉행이다.
마제는 군신에게 지내던 제사를 일컫는다. 그런데 정작 제사의 대상으로 모시던 신격은 치우는 물론 그와 대립했던 황제 헌원이 같은 신격으로 모셔진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려조에 이루어진 마제는 대청관에서 이루어졌는데, 그 곳에서의 마제가 과연 민족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행사인지는 의심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대청관에서 이루어진 마제의 신격인 치우는 단순히 대외정벌전투에 출정하는 장수가 올리는 일종의 의전행사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조에 마제를 통한 치우에 대한 제사가 있었음은 확인할 수 있다.

대청관에서 이루어진 마제에 따른 치우 제사와는 별도로 앞서 거론했던 두두리 신앙이 도리어 민중적 차원의 군신이나 야장신의 숭배로 주목할 필요를 느낀다. 조선조의 북애자가 간파한 것처럼 자오지환웅 곧 치우에 대한 기억은 민중 차원에서 희미해져 조선조에는 ‘목수’와 같은 장인 또는 장수의 의미를 지니는 ‘지위(智爲)’로 변화되어 갔음을 주목한다면, 조선보다 앞선 시기에 존재했던 두두리 신앙은 신라 이래로 전승된 민간차원의 영웅이미지였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무신란의 주역으로 부상한 이의민의 경우 두두리 신앙에 깊이 빠져 있었고, 두두리를 모시는 별도의 공간(堂)을 마련하고 그에 관한 제사를 지냈던 점이 예사롭지 않다. 그러므로 고려조에 존재한 두두리 신앙과 그 제사 유습은 상고 영웅인 치우나 그 추종세력인 숲 도깨비 망량에 대한 막연한 민속적 추앙행위였다고도 볼 수 있다. 고려 이후로 전개된 조선조에 이르러 치우에 대한 존숭과 그 제사행위는 역시 마제 봉행을 통해 공식적으로 이루어졌다.

조선조 마제는 본래는 군대의 행군 도중 야영지에서 지내는 제사였는데, 점차 공식화되어 마제단이 동교와 북교에 있게 되었으며, 강무 행사 1일 전에 무신 3품관의 주관으로 제사가 베풀어졌다. 흥미 있는 점은 유사(有司)가 곰자리(熊席)를 받들고 들어와서 치우 신위를 남향하여 설치하고, 갑주와 궁시를 자리 옆에 놓고, 삭(矟,창)을 자리 뒤에 세웠다는 내용이다. 그러한 기록내용은 19세기 말에 출간된 것으로 여겨지는『동전고(東典考)』의 “마제단은 동북교외에 있었는데 치우신을 제향했다. 강무하기 하루 전에 신위에 제 지냈다. 웅석을 깔고 앞에 활과 화살을 두고 뒤에 깃발을 세우며 남문밖에 두 개의 큰 깃대를 세웠다. 지금은 혁파했다.”는 내용도 이와 유사하다.

그런데 고려 후기의 이암은 『태백진훈』에서 치우가 “사냥을 하거나 정벌하는 전쟁에서 신을 위하는 큰 활로써 힘입었는데, 이로 천하를 떨게 하여 으뜸이 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거론된 마제에 관한 내용에서 확인되는 ‘궁시’를 두고 이암이 밝힌 치우의 ‘신을 위하는 큰 활(爲神大弓)’을 연상할 수 있다.

그런데 조선조 세종 연간에 마제의 신격으로 숭배되던 치우와 황제 헌원의 공동 제사행위를 구분토록 한 점이 눈길을 끈다. 곧 1424년 2월 7일, 예조가 세종에게 올린 강무장 마제에 관한 계문에 “전에 강무할 때에 마제를 지냄에 있어 황제 헌원씨를 제사하였으나, 옛날 법제인 『두씨통전(杜氏通典)』을 상고하여 보니 주제(周制)에 정벌하는 현지에서 마제를 지낸다는 註에 말하기를, ‘만일 정벌하는 지방에 이르러 제사지낼 때는 황제와 치우로 하고, 또 田狩[수렵]하는 때는 다만 치우만 제사한다.’ 하였으니, 청하건대 지금부터는 강무장의 마제를 주나라 제도에 따라 다만 치우에만 제사하소서.”라고 한 내용이 그것이다.

이 기록을 보면 당시 예조가 올린 계문의 의도가 치우를 존숭해서라기보다는 주나라의 제도에 따라 수렵시의 강무행사에는 오로지 치우만을 제사해야 한다는 원론적 입장을 밝힌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과연 조선조의 마제 행사가 민족적 행사였는지 강한 의구심이 일어난다. 그런데 강무장 마제에 대한 의론이 분명치 못했던지 1424년 9월 22일에 다시 마제 의주에 관한 계문이 정리된 점을 알 수 있다.

더불어 『신증동국여지승람』‘경도’편에는 “마제단(禡祭壇)은 동북교(東北郊)에 있는데, 치우신을 향사한다. 무예를 훈련하기 하루 전에 제사를 드리는데 폐한 지 오래다. 정종 병진년(1796)(정사년이라고도 한다.)에 또다시 설치하고 제사를 드렸다.”는 내용이 보인다. 따라서 해당 기록을 통해 조선조의 마제의 봉행이 일관적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 세종실록의 소개문 : ○ 독(纛) - <운회(韻會)>에 "모우(旄牛)의 꼬리로 이를 만들고, 왼쪽 비마(騑馬) 의 머리에 싣는다.”고 한다. 《광운(廣韻)》에“크기가 말[斗]만 하다.”고 한다. 《이의실록(貳儀實錄)》에 “검은 비단으로써 이를 만드는데, 치우(蚩尤)의 머리와 비슷하며, 군대가 출발할 적에 둑에 제사지낸다.”고 한다.


한편 치우에 대한 제사와 연관된 사례 가운데 반드시 거론할 사항이 바로 독제(纛祭)이다. 독제란 군사지휘용의 대기인 독기(纛旗)에 올리는 제사인데, 독제의 대상인 독기 자체를 ‘둑신’이라고도 지칭한 점이 특이하다. 독기에 대한 설명으로 “검은 비단으로써 이를 만드는데, 치우의 머리와 비슷하며, 군대가 출발할 적에 둑에 제사지낸다.”는 ‘이의실록’의 내용이다. ‘이의실록’의 또 다른 내용으로 조선 정조 때 간행된 『무예도보통지』에는 황제 헌원이 치우와 싸울 때 쓰던 창을 거론하고도 있다.

그런데 ‘이의실록’의 기록자가 전하는 ‘독기의 모습이 치우의 머리 부분과 비슷한 점’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점이 문제다. 경우에 따라서는 치우의 모습을 닮았으니 당연히 치우를 존숭하는 상징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달리 보면 마치 적장의 머리를 효수하던 예전 전장의 풍속을 떠올리게도 한다.

다시 말하면, 독기가 어쩌면 황제 헌원의 입장에서 마치 대립적 수장이던 치우를 무찌르고 그 무위를 과시하고자 만든 깃발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따라서 둑기의 존재와 그 숭앙행사인 독제가 치우를 존숭하던 의례로 보는 것은 좀 더 숙고할 필요가 있다 할 것이다. 어쩌면 도리어 독기에 존숭의례는 치우조차 무너뜨린 황제 헌원의 권위에 가탁한 강력한 군령통제의 의미가 숨겨진 것이 아닌지 고민해 볼 필요를 느낀다.

한편 독제를 베풀던 관행은 고려시기에도 여러 사례를 확인하게 된다. 이를테면 1281년 3월 29일에 충렬왕이 일본 원정에 나서며 궁궐 남문에서 독 깃발에 제사지낸 사례가 그러하다. 뿐더러 고려왕조에 있어 독기는 음악행사인 헌가(軒架)에도 활용된 점을 확인하게 된다. 독기가 음악행사에 활용된 측면은 음악을 통한 질서와 체계를 은연중에 과시함으로써 국정운영의 기강 확립이란 측면을 암묵적으로 드러낸 측면은 없지 않나 싶다.

그런데 독제를 지내던 풍속이 정작 중국이나 우리 한인 사회에만 국한되지 않았던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돌궐이나 유구의 땅에서조차 독기에 제의를 베풀었다는 사실을 통해 과연 독기를 통한 독제 행사를 두고서, 특정 민족의 풍속으로 한정할 수 있는지 다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세종실록의 소개문○ 기(旗)《통전(通典)》에 이르기를, “황제(黃帝)가 군대를 정돈할 적에 5기를 설치했다.”고 하며, 《황제내전(黃帝內傳)》 ©편집부

우리 역사에서 독기를 존숭한 사례는 고려시대로까지 소급된다. 각종 군사행사에서 흔히 독기를 드러냈고, 출전 장수는 당연히 독기에 예의를 취하였다. 그러한 전통은 조선조에까지 이어졌는데 세종 때 완성된 독제의주(纛祭儀注)는 독제의 전반적 운영과정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하게 해준다.

한편 독제는 무장들의 근무처에서 별도로 시행되기도 했는데, 한 예로 임진왜란 시기의 이순신의 경우도 경칩과 상강일 또는 다른 날에 독제를 베풀었다는 『난중일기』의 기록이 증명해준다. 더불어 독제가 실행된 지역에 관한 정보도 확인할 수 있기도 하다. 한편으로 『악학궤범』을 보면, 독제를 베풀 때에 소용되던 절차와 그 행사도구가 명시되어 있기도 하다. 대체적으로 보면 초헌례와 아헌례 그리고 종헌례에 따른 의례무용이 펼쳐졌고, 그에 따라 방패를 지니며 간척무(干戚舞)와 궁시를 통한 궁시무(弓矢舞), 그리고 창검을 지니며 펼처지는 창검무(槍劍舞) 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조의 헌가(軒架)의 전통에서 알 수 있었듯이 조선조에 있어서도 음악행사 속에 독기를 등장시켜 위의(威儀)와 질서를 표현하며, 순서를 달리하며 간척과 궁시, 그리고 창검으로 무용의 연희형태를 다분히 엄중한 군진(軍陣)의 형태로 착각하게 하여 관람자들에게 국가통치상의 수직적 위차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한 것은 아닌가 싶다.

한편 일제강점기의 이능화는 “대개 중국의 강남 일대는 옛날 여묘(黎苗)의 유족들이 많아, 풍속은 무격을 숭상하고 귀신 섬기기를 좋아했다. 또 구려의 임금인 치우씨는 탁록에 도읍하고, 옛날 九夷의 땅과 연접해 있었다. 그러므로 조선(근대 조선을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됨-필자 주)의 무속은 치우의 유풍이 전해진 것이 아닌가 한다.”고 자신의 소작인 『조선무속고(朝鮮巫俗考)』에서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이능화의 해당 의견에 부합하는 근거는 현재 발견되지 않아 주의가 필요한 실정이다.

다만 조선말기인 19세기말에 난곡(蘭谷)의 한 인사가 전한 『무당내력(巫黨來歷)』에 단군의 장자인 부루(扶婁)를 존숭하는 기도행위가 ‘부로단지 업주가리(扶婁壇地業主嘉利)’라는 제물 성격을 지닌 일종의 신물을 통해 이루어진 점을 알 게 된다. 치우가 부루보다 약 300여년 앞선 인물인 점을 생각하면, 치우에 관한 거론이 없음이 아쉽기만 하다. 그러나 치우의 후예들이 오늘날 중국의 산동성 일원과 남중국지역에 퍼진 점을 생각하면 한반도 내 치우 전승의 희소함은 도리어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근대 이후 우리 땅에서 치우에 대한 풍속과 설화는 그리 쉽게 얻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한 원인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는 좀 더 깊은 고찰이 뒤따라야겠으나, 민간에서는 두두리 신앙 이래로 유사한 성조(成造) 신앙 등이 야장영웅에 대한 자리를 대신한 것도 그 한 원인이 아닌지 조심스럽게 검토해볼 일이다. 다만 모 일간지의 취재기사를 통해 경주 지방에서 치우에 관한 전설이 존재함을 확인한 점은 소중한 소득이라 할 수 있다.


곧 마지막 (5부)가 이어집니다.

출처: http://www.greatcorea.kr/sub_read.html?uid=177&section=sc1&section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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