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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비 비문에 대한 일본의 조작 왜곡

어하라 | 2012.04.27 15:57 | 조회 9786

광개토대왕비 비문에 대한 일본의 조작 왜곡

광개토대왕비에 얽혀 있는 문제의 내용은

"1884년 일본군대위 사코 가게노부[酒勾景信]가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을 가지고 귀국한 뒤,

광개토대왕비의 가장 오래된 탁본, 쌍구가묵본

일본육군참모본부가 비밀리에 해독작업을 진행하여" 라는 글에 나와있습니다. 일본은 중국, 한국을 정복하기 위해, 미리 군인등을 보내서, 지형 등을 탐사하게 하는데,그들은 당시는 한국의 영토가 아닌, 만주 지방에 커다란 석비를 발견합니다.
청나라의 영토였지만, 만주족은 자신들의 기원인 중국 동북지방에 대해 신성시해서,아무나 못들어가게, 이 지방은 오래 동안 황무지같이 남아있었습니다.그러다가, 해금이 되고, 만주지방을 탐사하던 일본에 의해 이 커다란 석비가 발견됩니다. 한국은 이당시는 영토가 아니고 해서 이 비석의 존재에 대해 거의 잊고 있었지요.
이 지금은 광개토왕비라 불리는 비석에 글자가 새겨진 것을 알게 된 일본은 비문 해석을 시도하고, 이 비문의 내용에 일본에게 상당히 불리한 내용이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19세기 후반은 일본이 제국주의로 무장하고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꿈꾸며 팽창하던 시기로, 자신들이 동아시아에 완전히 진출해 정복하게 될 경우를 대비해서 한국과 중국 의 침략에 대해, 역사적인 정당성을 찾으려고 애쓰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고대남조선경영론' 등을 내세우며 예전에 다스리던 곳을 우리가 다시 접수한다는 식의 이론을 만들어내려고 합니다.
또한 자신들의 역사를 보다 화려하게 꾸미기 위해 애쓰던 때였기 때문에,광개토 비문을 발견한 일본은, 이 비문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용하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그래서 일본참모부는 일본군대위 사코 가게노부를 보내 탁본을 하는 과정에서 고의로 비석의 글자들을 훼손하게 됩니다.
이 광개토왕비를 발견했을 때, 좀더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했는데, 석비에 이끼 등이 심하게 끼어서, 이것들을 없애야 읽을 수 있었던 탓에 이 과정에서 석비가 훼손됩니다. 위의 글에서 석회도부란 말이 있는데, 이 비석을 깨끗하게 하고 보수한다는 명목으로 비석에 함부로 석회를 바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일본군인을 통해 아마도, 석비 글자의 일부를 일부러 훼손하여, 글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일본이 옛날에 한국을 지배하였다는 문구로 해석되게 만듭니다.
이렇게 역사적인 기념물에 적힌 문구 마저 바꾸어서 자신들에게 이롭게 만드는 히스테리칼한 행동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일본이 팽창하여 군사력으로 동아시아를 제패하려던 욕망이 지나쳐서 만들어낸 결과였습니다.
그래서 일본이 일부러 글자를 고쳤다는 주장이 많아 나중에 와서, 1972년 사에키 유세이[佐伯有淸]도 참모본부가 비밀리에 이 문제에 개입한 전말을 폭로하기도 하였다." 는 말은 일본인인 사에키가, 광개토 대왕비 발견 당시 일본군과 일본 참모본부에 의해 저질러진, 비문 훼손의 사건과 이를 통해 광개토대왕비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하여, 일본제국주의의 야망을 뒷받침하려는 도구로 사용하였다는 것을, 참모본부가 비밀리에 이 문제에 개입하였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국과 일본의 고대사는 역사적인 사료가 부족하여, 당시에 쓰여진 역사서는 거의 없고 , 한국의 경우 삼국사기, 삼국유사, 일본은 일본서기 등밖에 없습니다. 이 책들은 고대 이후에 쓰여진 것으로 고대의 역사에 대해 정확하게 알기에 충분한 자료가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대신 고대에 세워진 비석의 비문을 이용해서 역사를 공부하는 금석학이 발달한 것입니다. 광개토왕비는 이렇게 자료가 부족한 고대의 역사에 대해 고구려의 역사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엄청나게 중요한 자료로 일본이 발견 당시,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기로 하고 고의로 훼손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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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비문 변조 일본 참모부가 밀파한 군사 스파이 사꼬오 가케노부 중위에 의해 광개토대왕비의 주요 글자가 변조되고 지워지게 되었다.
사꼬오 중위는 1884년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을 가지고 귀국한 뒤, 일본육군참모본부가 비밀리에 해독작업을 진행하여 1889년 {회여록(會餘錄)} 5집에 요코이 다다나오(橫井忠直)의 [고구려고비고(高句麗古碑考)] 등을 통해 임나일본부설을 공식화하였다. 이에 대해 정인보는 해석상의 모순을 지적하였고, 1972년 재일(在日) 사학자 이진희(李進熙)는, 일제가 사꼬오가 위조한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비문을 파괴하고 3차의 석회도부(石灰塗付) 작업을 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문제의 비문 중 왜(倭) 이하 도(渡)·해(海)·파(破) 등 4자가 위조된 것임을 밝혀냈다. 또한 1972년 사에키 유세이(佐伯有淸)도 참모본부가 비밀리에 이 문제에 개입한 전말을 폭로하기도 하였다. 이어 1981년 이 비문을 연구해 온 이형구(李亨求)는 비문 자형(字型)의 짜임새(結構), 좌우행과의 비교에서 나오는 자체(字體)의 불균형 등을 들어, '倭'는 '後'를, ' 來渡海破 '는 '不貢因破'를 일본인이 위작(僞作)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럴 경우 그 신묘년 기사는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국으로 조공을 바쳐 왔는데, 그뒤 신묘년(331)부터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백제·왜구·신라를 파해 신민으로 삼았다'는 것으로 되어, 이 주장이 공인을 받으면, 일본 사학계의 '고대남조선경영론'은 그 근거를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아울러 광개토대왕비문의 내용은 열제(烈帝)의 업적을 기록한 것이지 왜의 그것을 기록한 것이 아니다. 왜는 고구려를 위협하던 세력들의 부수적 존재에 불과한 것이다. 또한 비문에 나오는 많은 간지(干支)에는 '신묘년'과 같이 년(年)자가 붙어 있는 예가 없을 뿐 아니라, 신묘년 기사와 앞뒤 문장의 내용이 연결되지 않고 모순되고 있어 변조가 가해졌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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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릉비 신묘년조 해석

한국사 데이터 베이스에 올려져있는 광개토대왕릉비 1면 신묘년조 기록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 來渡□破百殘□□新羅 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軍, 討伐殘國.

金泰植교수 책에 실린 광개토대왕릉비 신묘년조 부분

한국사DB에서는 □부분을 판독 불가로 처리했고, 저자는 임의로 판독하여 올림. 뿐만 아니라 데이터베이스에는 끊어읽기가 래도(來渡)로 되어있으나 저자는 신묘년래(辛卯年來)로 끊어읽었음. 래도 다음에 口는 해(海)로 읽었으며, 왕궁솔口군(王躬率□軍)에서도 口를 수(水)로 읽었음을 유의해주길 바람.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百殘□□新羅 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伐殘國.

첫째로, "백잔(백제)과 신라는 옛날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서 조공을 해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또는 신묘년 이래로) 바다를 건너와 백잔□□신라를 쳐서 신민으로 삼았다. 그래서 영락 6년 병신에 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잔국(백제)를 토벌하였다"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이는 일본 학계의 통설이며, 중국의 왕건군 씨도 이 해석을 지지하였다. 다만 근래에는 해석을 이렇게 하면서도, 고구려의 속민 또는 왜의 신민이라는 표현은 고구려의 과장일 것으로 보고 있다. 문장 판독상의 문제가 없다면 이 해석이 가장 순조롭다고 보이나, 왜가 고구려의 신민이었던 백제와 신라를 쳐서 신민으로 삼았는데 고구려가 백제만을 친다는 점은 논리상 어색하다.

둘째로, 중간의 핵심 문장에서 '渡海破' 앞에 고구려라는 주어가 생략되어 있고 그 뒤에 다시 주어가 백제로 바뀐다고 보아, "왜가 신묘년에 오자,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왜를) 격파하였다. 그런데 백제가 (왜와 연결하여) 신라를 침략하여 그의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한 견해가 있다. 이는 정인보 선생이 창안한 견해로서, 북한의 박시형 등이 이를 따르고 있다. 이렇게 해석하면 고구려 중심의 시각으로 볼 때 논리상의 문제는 없으나, 짧은 문장에서 주어가 너무 자주 바뀌어 문맥이 자연스럽지 않다.

셋째로, 고구려라는 주어가 끝까지 연결된다고 보아, "왜가 신묘년에 왔다.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백제□□신라(또는 가라)를 격파하여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한 견해가 있다. 이는 북한의 김석형이 창안했고, 일본의 사에키(佐伯有淸), 남한의 김영하 교수 등이 지지하였다. 이 해석은 얼핏 보아 문맥과 뜻이 순조로우나, 문장 앞 부분의 "왜가 신묘년에 왔다"는 사실과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모순이 있다. 영락 6년 병신에 고구려가 백제를 친다는 뒷 문장과도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넷째로, 문장 서두의 왜를 목적어로 보고 '以辛卯年來'를 '신묘년 이래'로 보아, "왜를 (고구려가) 신묘년 이래로 바다를 건너가 격파하였다. 그런데 백제가 (왜를 불러들여) 신라를 침공하여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한 견해가 있다. 이는 정두희 교수의 견해이다. 이 해석은 뜻이나 논리상의 연결이 탁월하나, '渡海破'의 주어를 고구려로 보고 그 목적어가 서두에 도치되었다고 보는 것은 문장의 이치상 약간 작위적이다.

다섯째로, '來渡海破'의 네 자가 일본군 참모본부에 의해 조작된 글자이므로, 기존의 해석은 모두 타당치 않으며, 글자의 판독이 원상으로 복구되기 전에는 이를 해석할 수 없다는 견해가 있다. 이는 이진희 씨가 주장한 것으로서, 한일간에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海'자는 1982년의 중국 저우(周雲台) 탁본에서도 선명하게 나타나나, 다른 글자와 칸이 맞지 않고 글자 규격이 다르며 지나치게 왼쪽으로 치우쳐 삼 수변(氵)이 비면의 세로 선 밖으로 삐져나와 있다. 다케다(武田辛男) 교수와 노태돈 교수 등은 이 글자를 알 수 없는(未詳) 것으로 처리했다. 서영수 교수는 이 글자를 '王'으로 보아, 여기부터 주어가 광개토왕으로 바뀌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여섯째로, 문맥에 따라 주관적으로 몇 자를 달리 고쳐서 보고 또 빈칸을 채워서 해석한 견해들이 있다. 그 한 예로 천관우 선생은 비문을 "

而倭以辛卯年來渡海 (故)百殘(將侵)新羅 以爲臣民."으로 추독하여, "왜가 신묘년 이래로 바다를 건너 (백제로) 온 고로, (왜와 연계한) 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여 (신라를) 신민으로 삼으려고 했다."라고 해석했다. 이형구 교수는 비문을 "而(後)以辛卯年(不貢) (因)破百殘(倭寇)新羅 以爲臣民"으로 추독하여 "그후 (백잔과 신라가) 신묘년부터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백잔·왜구·신라를 격파하여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해석하였다. 다만 글자 몇 자가 조작되었다고 보고 달리 고쳐서 읽은 위의 견해들은, 일본군 참모본부에 의한 고의적인 글자 조작은 없었다는 왕건군 씨의 연구 이후로 그 입지가 크게 약화되었다.

이런 다양한 견해들은 모두 일리가 있으며, 또한 각자의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 정확한 판독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이 구절의 해석은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金泰植,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 2 · 가야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나』, 푸른역사, 2002, pp 140~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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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명 작가는 <몽유도원> 의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일전에 나는 일본의 역사부도를 보고 한동안 격심한 충격에 빠졌다. 4~5세기에 일본이 백제,신라, 가야를 약 200년간 지배했다는 주장이 지도에 버젓이 나와 있었던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부도의 발행일이었다. 1994년.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도 일본에서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는 얘기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아직까지도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단초는 과거 고구려의 수도인 국내성에 있는 광개토대왕비로부터 비롯된다. 우리나라를 침략 합병할 즈음에, 일본 정부는 과거 한반도가 일본의 땅이었으니 이제 가서 찾아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일본은 국민의 죄의식을 마비시키고 국민을 침략의 현장으로 이끌어내기 위한 음모를 꾸미는 데 광개토대왕비를 이용했던 것이다. 임나일본부론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전후에 마땅히 폐기되었어야 할 이 논리가 지금도 버젓이 일본에서 가르쳐진다는 데 있다. 이상하게도 일본의 학자들은 군부에서 조작한 허위 이론을 벗어나지 못한 채 국민을 오도하공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허위 이론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가!

그들의 영혼은 역사의 저 심층에 가라앉은 채 떠돌고 있다. 이제는 들리지 않는 그들의 함성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다. 그들의 한을 풀어줘야 할 때가 된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역사를 바로 알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대다수 선량한 국민들에게도 조각나고 숨겨져버린 역사의 진실을 알려야 한다. 우리는 임나일본부라는 허상을 없애고 한일 간의 역사를 올바로 정립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우리나라 지식인들의 입장이다. 많은 우리의 지식인들은 일본이 자신들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광개토대왕비에 석회를 발라 글자를 조작했다는 정도로 대응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이 근거가 희박한 주장으로 일본의 역사 왜곡에 항의하는 것은 벽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도대체 왜 우리는 일본이 석회를 발라 비를 조작했다고 믿고 있을까. 일본의 터무니없는 주장의 실체를 드러내야 하는데 마땅한 방법이 없자 질곡에 빠진 학자들이 마지막 탈출구로 그 같은 주장을 펼치지 않았나 싶다. 우리는 모두 역사의 덫에 걸려버린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제 모두 힘을 합쳐 그 덫에서 빠져나와야 될 때가 되었다.

-김진명 <몽유도원> 서문 中-

광개토대왕 비문이 조작되었는지 여부에 매달리기보다는 이 왜(倭)의 실체에 대해서 연구하는 것이 비문 조작이라는, 어떻게 보면 지엽적일 수 있는 문제를 뛰어넘어 한국고대사, 나아가서 한일(韓日) 고대사의 가장 큰 비밀을 밝히는 핵심적인 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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