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운식 서예가 “고구려 시조 모독했던 임나일본부 오판독 글자 5개 발견...추모왕 150년 누명 벗겼다” 발표 ’화제‘
장운식 서예가 “고구려 시조 모독했던 임나일본부 오판독 글자 5개 발견...추모왕 150년 누명 벗겼다” 발표 ’화제‘
학술발표회 이슈
서예가인 석정 장운식 교수가 10일 학술발표회에서 공개한 영상 화면(캡처)
광개토대왕비에 새겨진 1,800여자 중 일본이 석회를 발라 조작한 글자가 해석을 왜곡시켜왔다는 주장이 제기돼 주목을 끈다. 이 중 150여년 간 잘못된 판독으로 고구려의 시조 추모왕은 억울한 누명을 써왔다는 것인데, 그 오판독 글자를 바로잡고 명예회복에 나선 주인공이 원광대학교 서예과 1기이자 효봉(曉峰) 여태명 선생의 제자란 사실이 알려져 더욱 화제를 모으고 있다.
장운식 교수 “광개토대왕 비문 첫머리부터 이무기처럼 똬리 틀고 마수의 그림자 숨어”...신묘년조 새로운 글자 추독
장운식 교수
서예가인 석정 장운식 교수(원광대·대전대 서예과 외래교수)는 10일 오후 4시 서울 종로구 삼성동 (사)의열단 당사에서 열린 학술발표회를 통해 ’의열 정신과 서예학으로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 임나일본부설 종결 가능성‘을 밝혀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날 장 교수는 ’비문 오판독 글자 최초 공개 발표 및 새로운 해석‘이란 주제의 발제에서 “150여년 전 광개토대왕비는 안타깝게도 광개토대왕이 그토록 싫어했던 왜(일본)의 후손들에 의해 세상에 나왔다”며 “비문의 첫머리부터 이무기처럼 똬리를 틀고 마수의 그림자가 숨어있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장 교수는 이어 “오늘이 바로 광개토대왕비 명예회복의 날”이라며 ’추모왕 150년 누명을 벗기다‘란 제목의 동영상 발표에 이어 ’신묘년조 새로운 글자 추독(임나일본부설 종결의 가능성을 연다)‘는 주제의 발표를 했다. 장 교수는 먼저 “한일 역사논쟁의 핵심인 임나일본부설은 100여 년이 되어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며 “최근 일본은 한동안 조용했던 임나일본부를 교과서에 다시 실었는데 그 내용은 광개토대왕비 내용을 빌미로 일본이 삼국시대에 백제와 신라를 지배했다는 내용이 바로 그 핵심이다”고 설명했다.
이어 장 교수는 “일본이 주장하는 광개토대왕비문 중 신묘년(391)에 일어난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격파하고 그들을 신민으로 삼았다‘는 내용은 석회칠로 변조돼 학자마다 해석이 분분했다”며 “하지만 오늘 발표된 글자는 문장으로만이 아닌 원래의 탁본, 즉 석회칠 안에 숨어 있던 글자의 자형을 밝혀낸 것"이라ㄱ 밝힌 뒤 "원석 탁본에 남아 있는 글자의 이미지를 가지고 글자의 자형을 분석해 냈는데 그 신빙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특히 “서예 전문가로서 석고 안에 숨어있던 원래의 글자를 추독해 낼 수 있었다”고 강조한 장 교수는 그 내용의 원문 중 석회칠로 변조된 부분을 포함해 다음과 같은 재해석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날 장 교수가 밝힌 재해석 부분은 다음과 같다.
장운식 교수가 10일 학술대회에서 밝힌 자료 일부(갈무리)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 조공을 해왔다. 그러나 왜가 신묘년에 와서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 ]와 신라를 깨뜨리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되어 온 부분은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 조공을 해왔다. 그러나 왜가 신묘년에 침입해 와서 남쪽으로 건너가 백제와 [왜적]과 신라를 깨뜨리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재해석됐다는 것이다.
장 교수는 이 같은 해석의 근거로 “석회로 날조된 바다해(海)자의 아래에 남녘남(南)자를 반견했다”며 “이 사실대로라면 남쪽으로 내려가서 세 집단을 깨뜨리고 신민으로 삼을 수 있는 주체는 고구려가 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사라진 글자 추독한 결과 전혀 다른 상반된 의미 존재... 닮은 복수의 글자 함정 있었기 때문” 해석
장운식 교수가 10일 학술대회에서 밝힌 자료 일부(갈무리)
또한 장 교수는 “이 비문은 광개토대왕의 훈적을 새긴 비석이므로 왜가 바다를 넘어와 활약한 내용이 비문에 쓰이는 일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날 관련 영상자료를 공개한 뒤 장 교수는 “그동안 오판독 되었던 5글자를 바로잡았는데 그것은 추모왕이 임금의 자리가 즐겁지 않다는 내용으로 이 역시 시조왕의 업적을 나타내는 비문에 쓰이기에는 부적합한 내용이라는 의문에서 비롯되어 글자를 추독한 결과, 전혀 다른 상반된 의미의 글자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밝혀냈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근거로 장 교수는 아니불(不)자와 인할인(因)을 교체하는 길영(永)자와 하늘천(天)자를 발견함에 따라 추모왕의 말년은 암울한 사회와 부덕한 임금에서 번영한 나라와 위대한 임금으로 상반된 해석이 나왔다고 덧붙였다. 또한 장 교수는 “그동안 이 글자를 잘못 해독한 것은 비문 안에 같은 글자를 다르게 쓴 것과 닮은 복수의 글자 함정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강조해 주목을 끌었다.
이날 발제를 한 장 교수는 원광대 서예과 1기 출신으로 모교와 대전대에서 서예과 외래교수를 현재 맡고 있으며 대한민국 미술대전 초대 심사위원, 한국캘리그라피디자인협회 전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또한 캘리그라피 수제도장을 최초로 개발한 그는 한국 서단의 큰 예술가인 효봉(曉峰) 여태명(余泰明) 선생의 제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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