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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신창용 기자 = 한국사에서 가장 논란거리 중 하나는 한(漢)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했다는 한사군(漢四郡)의 위치에 대한 것이다.
한사군의 핵심이었던 낙랑군에 대해 주류 사학계는 한반도에 있었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만주 서쪽(요동)에 자리하고 있었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은 지난달 30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침략(식민)사관 재등장의 역사적 구조'를 주제로 열린 세미나에서 '한사군의 한반도 내 위치설'은 식민사관을 해방 후에도 정설로 받아들인 결과라고 주장했다.
이 소장은 "일제는 대한제국 강점 직후 중추원 산하에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를 만들고 3·1운동 이후에는 총독부 직속으로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 식민사관을 조직적으로 만들고 전파했다"면서 "식민사관의 핵심 이론은 한국사의 시간과 공간을 축소하는 두 가지 관점으로 귀결된다"고 전제했다.
그는 "일제는 한국사 시간을 축소하기 위해서 단군 조선을 부인하고, 고조선을 한반도 북부로 가둬 놓았다"면서 "한사군이 요동에 있었음을 입증하는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허위로 몰아서 한국사를 1천500여 년의 짧은 역사로 축소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는 "일제는 한반도 북부가 한사군이라는 중국의 식민지였고 한반도 남부는 임나일본부란 일본의 식민지였다고 강변함으로써 독립의 의지를 말살시키려 했다"고 부연했다.
식민사관은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방과 함께 종결됐어야 했지만, 일제강점기 때 조선사편수회에서 복무했던 일부 한국인 학자들이 해방 후에도 역사학문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무산됐다고 이 소장은 지적했다.
그는 "이병도는 해방 후 한국 국사학계의 태두로 군림하면서 자신의 두 스승의 식민사관을 한국사의 주류 이론으로 만들었다"면서 "이나바 이와기치의 '한사군 재(在) 한반도설'을 한국 고대사의 정설로 정착시켰으며, 쓰다 소키치의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따라서 고조선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삼국 초기기록을 허위로 단정지었다"고 지적했다.
그 결과 식민사관은 한국사 정설로 자리 잡았고 이를 바로 보여주는 것이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주장이라고 이 소장은 주장했다.
그는 "해방 68년이 지났음에도 일제 식민주의 역사관은 버젓이 주류 사학으로 존재하고 있다"면서 "해방 후 청산됐어야 할 식민사학이 그대로 존속해 있다는 사실은 한국이 영토는 해방됐어도 정신은 그대로 일제에 종속된 것과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말해준다"고 강조했다.
이번 세미나는 일제강점기의 역사 왜곡 대처와 동아시아 역사분쟁 해결을 위한 '일제하 민족지도자들의 역사관과 국가건설론' 연구프로젝트 발주를 기념해 이뤄졌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가 주최하고 국회의원 이종걸 의원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진흥사업단, 우당이희영선생기념사업회, 의암 손병희선생기념사업회, 여천 홍범도선생 기념사업회, 국학연구소가 후원했다.